2010년 오지 오스본
오지 오스본(영어: Ozzy Osbourne 본명:존 마이클 오스본, 1948년 12월 3일 -)은
헤비 메탈 밴드 블랙 사바스의 리드 싱어이다.
잉글랜드 버밍엄의 애스턴 출신.
오스본은 잉글랜드의 버밍엄시의 지역인 애쉬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그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오스본은 학습 장애로인하여 고통을 받았으며 (난독증이라고 주장함)
이로 인하여 학교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 후 오지 오스본은
이전 학교친구인 토니 아이오미와 밴드를 결성하기로 하고
리드 싱어를 위한 오디션을 본다.
이 기간은 사이키델릭 록이 매우 인기 있었다.
전형적 밴드와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아이오미와 그의 동료들은 묵직한 블루스에서 영감을 얻고
침울한 가사로 꾸며진 유형의 음악을 연주하기로 결정한다. .
이 당시의 고려된 밴드명은 Polka Tulk와 Earth 등이 있다.
어느 날 리허설 중,
밴드는 한 극장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 곳에서는 공포영화가 상영되고 있었고,
베이시스트인 기저 버틀러가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겁을 주어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 사람들이 보려고 기다리고 있던 영화는
마리오 바바가 감독한 '검은 안식일'이었다.
오스본에게 빌린 초자연 비술 서적을 읽은 후,
버틀러는 침대의 끝에 어두운 형체가 있는 꿈을 꾸었다.
그 후, 버틀러는 밴드의 초기 노래 중 하나인 "Black Sabbath"의 가사를
어두운 분위기에 맞게 작성하였다.
이는 그 후 밴드의 커리어에서 밴드의 주요 스타일로 자리잡게 되는 노래의 프로토타입이었다.
블랙 사바스
Black Sabbath: Ozzy (right) with Tony Iommi in 1973
미국 레코드 레이블인 워너브라더스 레코드 에서의 작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블랙 사바스는 달콤하며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토미 아이오미의 기타 리프와 기저 버틀러의 가사와
그 위에 오지 오스본의 음침한 보컬로
그들의 이름의 시조가 된 데뷔 앨범과 파라노이드와 같은 초기의 음반들은
대량으로 판매가 되었으며 공중파를 타게 된다.
초기 솔로 활동
1979년,
오스본은 블랙 사바스에서 해고되었는데
주 이유는 마약 문제로 인한 신뢰성 부족이었다.
그는 레인보우의 보컬이었던 Ronnie James Dio에 의해 교체된다.
1970년대 후반에,
Necromandus 라는 밴드가 오지 오스본과 리허설을 하였고
짧게나마 그의 Blizzard of Ozz 솔로 프로젝트의 첫 화신이 되었다.
더 오지 오스본 밴드(The Ozzy Osbourne Band) 는
더 블리자드 오브 오즈 (The Blizzard of Ozz) 로 시작을 하였고,
오스본의 새 매니저이자 부인인 Sharon Osbourne 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밴드의 첫 라인업은 드러머 Lee Kerslake (유라이어 힙 출신),
베이시스트/작사가 Bob Daisley (Rainbow 출신),
및 기타리스트 Randy Rhoads (of Quiet Riot 출신) 을 내세웠다.
음반 회사는
이후 음반의 제목을 Blizzard of Ozz 라고 하고
크레딧을 단순히 오스본의 이름하에 올려버렸다.
데이즐리(Daisley)와 로즈(Rhoads)가 대부분의 곡을 썼으며,
오지는 그의 첫 솔로 활동에서 헤비 메탈 팬들에게 잘 팔린 데뷔 앨범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두 번째 앨범, Diary of a Madman 은
더 많은 밥 데이즐리의 작곡과 랜디 로즈의 기타 연주를 내세우게 된다.
랜디 로즈는 2003년 Rolling Stone 잡지에서
역사상 가장 훌륭한 기타리스트 중 85위에 오르게 된다.
1982년 3월,
차기 앨범 while in Florida for the follow-up album Diary of a Madman 투어를 하던 도중,
그리고 New York City의 매디슨 스퀘어 카든에서 연주를 하기 바로 일주일 전에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를 태우고 이륙한 경비행기가
밴드의 투어 버스위로 저공 비행을 하던 도중 불시착하게 된다.
이 치명적으로 되어버린 장난에서
비행기의 좌측 날개가 버스를 치고 나무를 들이받아
마지막에는 근처의 한 가옥에 충돌하며,
로즈와 조종사, 앤드류 애이콕 (Andrew Aycock), 과 밴드의 두발관리사,
레이첼 영블러드 (Rachel Youngblood) 가 죽게 된다.
부검에서 애이콕의 소변에서 코케인이 발견되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밴드 동료의 죽음을 알게 된 오스본은
다시 한 번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음반 회사는 오스본에게 그의 사망한 밴드 멤버를 기리기 위하여
연주를 쉬는 것을 허용하였으나, 오지는 단 일주일 만 일을 멈추었다.
Gillan 의 이전 기타리스트 Bernie Torme 가
투어가 다시 진행되자 처음으로 랜디를 잠깐 교체하였다.
그러나 Torme 는 밴드의 노래들을 매우 빨리 배워야하는 것에 대한 압박과
아직 로즈의 죽음을 애도하는 팬들 앞에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동요를 하게 되었다.
그가 밴드에 머무르는 기간은 한달이 채 되지 않았다.
한 호텔 방에서 기타리스트를 위한 오디션 중,
오지는 Brad Gillis 를 발견하고
그가 다음 기타리스트가 된다.
투어는 계속 되고 그 절정에 뉴욕시의 Ritz에서 녹음된 1982년 실황 앨범
Speak of the Devil 이 판매된다.
이후에 오스본이 로즈와의 관계를 언급한 live tribute album 이 출시된다.
이 앨범은 또한 랜디에 의한 스튜디오 곡을 담고 있는데,
이는 스튜디오의 녹음과정을 담은 것이며 로즈의 어머니를 기리는 "Dee" 라는 노래다.
또한, Total Guitar Magazine 과의 최근 인터뷰에서
오지는 랜디 로즈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게 있나고 질문을 받자,
이 록 스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랜디가 그 비행기에 올라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후회도 없다."
중반기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오스본의 경력은 두 개의 측면에 집중되었다:
로즈 없어 지속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과
맑을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1981년 콘서트들은
실황 앨범을 염두에 두고 녹음되었다.
Entitled Speak of the Devil이라고 명명된 앨범은,
영국에서는 Talk of the Devil 라고 알려졌으며,
원래 오스본의 솔로 작품들이 주를 이룬 1981년의 실황 녹음들로 이루어지도록 계획되었다.
블랙 사바스 역시 "Live Evil" 라는 제목의 실황 앨범을 출시할 것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오스본과 샤론은 그의 이전 밴드의 작품에 선제 공격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앨범은 전체가 블랙 사바스 커버 곡들로 이루어지게 되어버렸으며
길리스, 베이시스트 루디 사르조, 드러머 토미 알드리지와 함께 녹음되었다.
브래드 길리스는 자신이 어떻게 오지를 위해 연주하게 되었는가를 언급한
Guitar Player 인터뷰에서
이 실황 앨범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밴드의 모든 이들이 몇몇 부분을 새로이 작업하고 싶어 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Speak of the Devil 은
음악적으로 내버려진 것이다.
오지는 이후 ("Tribute" 의 표지 안쪽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는 그 앨범에 관하여 아예 신경조차도 쓰지 않는다.
그냥 단순한 엉터리 사바쓰 커버곡 모음일뿐이다
(I don't give a fuck about that album. It was just a bunch of bullshit Sabbath covers.)"
그는 또한 음반 회사가 새 앨범을 원하였고
자신은 로즈와의 실황 연주의 테잎을 출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곧 로즈의 기억에 불명예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1982년, 오스본은
마돈나 가 백킹 보컬로 참여한 Was (Not Was) 의 팝 댄스 곡
"Shake Your Head (Let's Go to Bed)" 의 게스트 보컬리스트였다.
오스본의 컷은 1990년대 초반 유럽에서 Was (Not Was) 의 히트곡 모음 앨범에서
다시 믹스되었고 재 출시되었으며
UK 팝 차트에서 성공을 거두었. 마돈나는 그녀의 보컬이 이 히트 앨범에서 복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Kim Basinger 에 의한 새 보컬이 오스본의 리드를 받쳐주기 위하여 추가되었다.
Jake E. Lee는, 이전 Ratt 과 Rough Cutt의 멤버였으며,
토르메 혹은 길리스보다 더 성공적인 신참 기타리스트였으며
1983년의 Bark at the Moon 를 녹음하였다
(이 앨범은 밥 데이즐리와 공동으로 작곡했으며 토미 알드리지와
이전 레인보우 키보드 플레이어 돈 에어리를 내세우고 있다).
1986년의 The Ultimate Sin 앨범이 뒤를 이었고
(베이시스트 Phil Soussan 과 드러머 Randy Castillo 가 동참),
이 두 앨범에 대한 순회공연도 계속되었다.
1986년 후반, 오지는 북미에서 연이어 일어난 소송에서 첫 목표가 되었으며,
그의 노래 "Suicide Solution" 가 2명의 미국 청소년들이 자살을 하도록 충동하였다는 주장이었고
이는 노래가 지닌 "subliminal lyrics"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판결들은 오스본에게 유리하게 나왔으며 근본적으로
오스본에게 청취자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졌다.
또한 소송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그 노래가 명백히 알코올 과용에 대한 것이었고
'자살 용액'은 말장난이었다는 점이었다.
그 후, 오스본은 공개석상에서 "Suicide Solution" 을 그의 친구이자 ,
AC/DC 의 리드 싱어였으며 알코올 남용으로 사망한 Bon Scott에 관한 이야기를 쓴
노래라는 사실을 인정하였고,
용액(solution)은 문제의 해결책(solution)이자 동시에 화학용액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밥 데이즐리는 자신이 이 노래를 썼다고 했으며
이 노래는 오스본의 약물 남용과의 전쟁에 대한 염려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리와 오스본은
1987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음악적 차이로 인하여 결별하였다.
오스본은 계속하여 약물 의존으로 고생하였고
로즈 사망 5주기를 1981년의 실황 녹음으로 수년 간 출시되지 않았던 Tribute 로 기념하게 된다.
1988년 오지는 The Decline of Western Civilization II: The Metal Years 에 출현하고
감독인 Penelope Spheeris 에게 "sobriety fucking sucks" 라고 말한다.
그 와중에 오스본은
오늘날까지 로즈 대신 들어올 멤버로,
이후 가장 오랜 기간 버티게 될 멤버를 발견한다 — Zakk Wylde 라는 이름의 기타리스트로서
New Jersey에 있는 주유소에서 그를 발견했다.
와일드는 오스본의 1988년 작품, No Rest for the Wicked 을 위해 선발되었고
이 앨범에서는 카시티요가 드럼을 계속 맡고 있었고
데이즐리가 다시 한 번 공동 작곡 및 베이스 연주를 맡기 위하여 돌아옸다.
이후의 순회공연에서는
오스본이 이전의 블랙 사바스 밴드 메이트인 기저 버틀러가 베이스를 맡게 되었고
이 라인 업으로 구성된 실황 EP (제목 Just Say Ozzy) 가 2년 후 출시되었다.
기저는 이후 4개의 투어에서도 오지와 계속 순회 공연을 하였고
이 기간 동안 무대에서 비중이 큰 존재였으며
루디 사르조 이후 누구보다 더 강렬한 연주를 하였다.
1989년
오지 오스본은 Moscow Music Peace Festival의 일부를 맡아 공연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