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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노망(老妄)과 로망(roman) 사이
2023. 여름 김수형
1부 회상
‘H’가 프랑스에서 화가로 성공했다는 소식은 그간 익히 들었고, 유튜브에서 그녀의 작품도 몇
점 감상했다. 난 미술을 잘 모르지만 색깔이 강렬하기로 내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프랑스 유학을 가서, 프랑스인과 결혼하여 정착한, 우리 초등학교 33회의 자랑스러운 인물 중 하
나다. 사회적으로 잘 됐으니 부럽기도 하고, “참 잘됐다”고 뒤늦게 혼자서 축복도 했다.
학교 동기들 단톡(단체)에 같이 참여하더니, 또 어찌어찌 되어 나와도 단톡(단독)을 하기도 한다.
오래 전에 남편과 사별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잠시 좋아하는 마음을 품
었다가 체념한 그녀와, 다 늙어서 아내 모르게 단둘이서 톡을 한다는 것은, 그게 ‘나쁜 짓’은 아닌
지, 염려스럽기도 한 나는 쫄보 할배다.
그녀는 한국에는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프랑스 유학을 한 후배 화가들이 적극 후원해서
모처럼 서울 인사동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여는데, S호텔에 10일 간 머문다고, 단톡방에다 소식을 올렸다.
그러더니 단독 톡으로 연락이 왔다. 한국에 오면 친구들과 같이 만나는 시간도 가지고, 체류 7일째 저녁
시간에는 나에게 그 S호텔에서 만나자 했다.
그 톡을 받고 나는, 아내는 물론 가까운 친구에게도 그 말을 숨겼다. 사슴 두근거려지는 고민에
빠진다. 우린 가슴을 사슴이라고도 말한다. 예전에 우리 친구들은 남진의 ‘가슴 아프게’ 노래를
‘사슴 아프게’라고 불렀지.
이 나이에 뭐 그녀를 그냥 친구 대 친구로 만나면 되는 건데, 좀 복잡한 생각을 품으니 부담스럽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건 처음 밝히는 사실로, 그녀는 초딩 때 나의 첫 사랑이고, 또 성공한 여인이니, 그런 그녀를
대할 일에 혼자 온갖 상상을 하게 된다.
흑심(黑心)이라기보다는 분홍심(粉紅心)이라 표현해야 어울릴 그런 마음도 사실 품었다. 그러니 단 둘이
호텔에서 만나는 건 부담이 된다.
원래부터 이뿐 애였으니 얼마나 곱게 늙었을까? 화가는 주름도 우아하겠지? 미소는 온화하고? 몸가짐은
중후하고? 말투는 고상하고? 머리 모양은 예술가고?
한 편 쫄보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자면,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났는데, 그녀와 앞으로 무
슨 일이 일어난다는 징조조차 없는데, 초청 한 번 받았다고 이렇게 중심이 흔들리는지, 이 나이에
도 나는 인격 수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몹시 느낀다.
초등학교 때 우리 친구들 사이에는 ‘꼬리물기 첫 사랑’? 뭐 좀 그랬다.
나를 좋아하는 소녀가 있었지만, 나는 H를 좋아했고, 그러나 H는 그 사실을 모르고, H는 A를 좋
아했는데, A는 그녀를 안 좋아했다는 거 아녀. A는 참 대단해. 대체 H를 안 좋아할 수 있다니, 대
단한 친구도 다 있지?
난 멀찌감치서 혼자 그녀를 바라보다가 포기한 거지. 내가 뭐 잘 살기를 해? 배경이 있어? 내세
울 것 없으니, 지 풀에 주저앉고 만 건데, 잘 생각해보면 그게 어른이 되어 늙어가는 내내 세상살
이 기죽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6학년 때. 나를 좋아한다고 대놓고 떠들며 대시하던 소녀가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도 촌동
네 우리 오두막까지 찾아오던 소녀였어. 난 어른스럽게 안 만나줬고, 상대를 안 해줬지.
그 애는 귀엽고, 발랄하고, 특히 목소리가 좋아 노래에 재능이 있어서 누구도 좋아할 아이였는데,
조선시대 바른생활 소년인 내 앞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이지.
뭐냐고? 불륜을 저질렀나? 아니야. 애들이 무슨…
그런 건 아니고, 그 애가 나랑 같은 삼척 김씨 먼 친척이라는 것을 난 일찌감치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거든.
이런 내가 얼마나 어른스러워!? 어린 마음에 작은 상처는 줬지만, 더 큰 상처를 막아준 거지.
그런데 그 애는 “종씨면 어때?”라며 직진하더군. 결국 철이 들면서 제 풀에 꺾이긴 했지만.
그런데 많이 나이 들어서, 지금 초딩 첫사랑과 단 둘이 만난다고?
첫사랑? 그녀는 알지도 못하는 사실인데?
학교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마디 말도 나눈 적 없이 난 지레 체념했지만, 그래도 그 동안 사회에
서 열심히 산 나를 그녀가 인정한 건가? 단독 톡에서 나를 콕 집어 만나자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일로 기가 눌렸던 내겐 이것이 내 자존심을 세우는 일
이니, 이 참에 가만 있을 수는 없지. 암! 그렇고 말고!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첫사랑 소녀를 호텔에서 만난다고라!?
2부 바람
전시회 개막식에 맞춰 거기서 동창회가 있던 날, 60여 년 만에 처음 만난 그녀의 모습에 대해서
는 설명을 생략하겠다.
이틀 더 지나고, 호텔에서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여태 누구에게도 선물한 적 없는 장미를 서른 세 송이 곱게 포장해서, 호텔로 찾아가 그녀에게
건넨다. 우리는 초등학교 33회 졸업생이므로 서른 세 송이다.
그녀의 화가로서의 노숙함에 폭 빠져서 둘이서 대화와 식사를 이어가고, 고급 와인 몇 잔 하다
보니 스스럼없는 옛날 얘기에 섞여서, “너가 내 첫사랑이야” 라고 고백 같은 실토하고, 그 말에
“난 전혀 몰랐어!”라며 놀라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어릴 때 내가 좀 조숙해서
너네 집이 어딘지 알아뒀고, 집 주변을 몇 번 서성거리며 배회했는데도, 한 번도 마주치지 못 했
다”는 얘기도 털어놓을 수 있다.
그녀에게 내가 기억이 나는 것은, 1,2반 합반(合班) 자습시간에, 내가 앞에 나서서 동화를 재미나
게 들려준 때문이라는 반응을 말해주었으니, 기분이 좋다. 영 관심 밖은 아니고, 기억이라도 한다
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런데 만약에 말이다.
10000약에 10000분지 1이라도 걔가 “방에 올라가서 1잔 더 하자”고 하면 어쩔 테냐?
이럴 땐 단순하게 생각하자. 두 가지 중 택일이다.
첫째는 까무러칠 정도로 기뻐할 거냐?
그걸 너무 기뻐하면, 아내에게 죄를 지은 마음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혼자 맥심(Maxim)커피 타서
마실 때마다 후회 막심으로 살게 된다.
둘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아, 나 와이프가 일찍 들어오랬어”라면서 거절할 거냐?
그래서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아내를 배신때리지 않은 도덕적 자부심을 이어갈 거냐? 그래놓고서
는 아이고!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고 이따금 끙끙거리며 후회할 거냐?
그런데, 사내 자식이 여자가 호텔방에 들어가자 하는데, 쭈굴시럽게 못 간다?
뭐야? 사람이 친한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일 잔 더 하자는 것도 이상하냐?
서울에 집이 없으니, 묵고 있는 호텔이 고급이기도 하여, 방에서 손님 접대 좀 더 하겠다는데, 미
리 얼마나 엉큼한 마음을 먹었으면… 예라이, 사내자식이…
그건 너무한 거 아니야? 프랑스에서 서울까지 온 사람 체면도 좀 세워줘야지.
그래서, “그래 좋지!” 라면서 맞장구 치고 방에 같이 올라간다.
호텔방에 들어가자는 것 자체가 무언의 어떤 약속이나 다름없다고 단정하니, 영화에 나오는 것
처럼 도어를 여는 순간 그게 다 닫히기도 전에 격정적으로 와락 끌어안고 한 쪽 벽에 밀쳐 세우
고서는 뜨겁게 키스를 하며, 외투부터 벗기고, 목덜미에 자국이 남도록 키스를 하며, 그냥 번쩍
들어 침대에 냅다 던지며, 그대로 돌진하며…
그런데 7학년 5반이니 팔 근육도 다 빠져 허물거리고, 다리도 후둘거리고, 또 저쪽도 나잇살이 붙
어서 뭇질할 거고, 그러니 하이고! 번쩍 드는 거 좋아하시네, 그녀를 안고 침대로 갈 힘이 있어야
뭘 하지, 떠거랄…
노신사 답게 조용히 숨 죽이고, 약간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눈알로만 주변을 살피며, 부부인 척,
은근한 불빛이 비치는 복도의 폭신한 카펫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따라 들어가야지.
방에 있는, 아니지, 그 말은 촌스럽다. ‘룸’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서, 룸 바에 있는
고급 양주를 꺼내 마신다. 룸 서비스로 달콤한 안주를 주문해서 말이지. 노래도 조용하게 틀고.
몇 잔 주고받아 취기가 오르자, 그녀는 무드 있는 부르스곡으로 바꾸면서, 조명도 은은하게 조절
하면서, 내게 춤을 추자고 하면?
“나 춤 못 춘다”고 말한다. “부르스니까 누구나 출 수 있어”라면서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킬 거야.
난 못 이기는 척 완전 수동식이 되겠지?
그런데 부르슨들 어디 배워봤어야지. 그냥 룸 싸롱에서 술에 취해 헤롱거리며 아가씨 허리 부여
잡던 그거밖에 뭐 알아야 어떻게 하지. 그냥 왼 손은 그녀 오른 손과 가락지 끼어 쳐들었다 내렸
다 하고, 오른손은 그쪽 허리를 황송한 듯 안고 도는 거지 뭐.
그러다가 깍지 낀 손에서는 촉촉하게 땀이 배고, 몸이 밀착되니 가슴도 슬쩍슬쩍 닿고, 가쁜 숨소
리는 귀에 후꾼하여 뭔가 다급하게 들리고, 중요 부분도 살짝살짝 건드려질 거고…
몸이 비벼지면, 서로 술 냄새는 향기로 느껴질 만큼 감정은 달콤해져서 무디어질 거고, 몸에서 나
는 향기는 오감을 자극할 거고, 그러면서 춤은 계속된다.
그렇게 귀속말도 좀 하면서 충분히 몸이 느꼈다고 생각될 즈음에, “숨이 차다”면서 그녀가 침대
에 풀썩 자빠지면, 여태 손을 잡은 상태라 나도 부드럽게 그녀의 몸 위로 넘어지면서 저절로 포개
지는 양상이 되겠지.
그런데 하필 이 대목에서 나 어떡해?
난 낯을 가리는데…
내가 性에 관한 한 아내에게 미안할 일 한 번 안 하고, 바람쟁이 녀석들은 못 된 놈들이라고 욕하고,
너무 헤푼 이 사회 풍조를 맘껏 나무라며 살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녀석이 낯을 가리는데 내가 무슨 바람을 펴?
잘못하다가 파트너에게 귀쌰대기라도 얻어맞으면? 왜 낯을 가리는가 하니, 녀석이 자신감이 없어
서 그러는 모양인데, 난들 어떡하냐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품행이 방정한 윤리 도덕적인 행실과 실천이 내 인격을 높여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나와 내 가족, 내 조직 모두들에게, 알게 모르게 복(福)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
다.
그래서, 지놈 자신도 못 생긴 유명 가수 아무개가 조강지처를 못 생겼다면서 바람을 폈다는 둥,
잘생긴 유명 배우 아무개가 조강지처 듣는 데도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떠들어대는 것을
경멸할 자신이 생겼던 거다.
세상이 환락을 추구하더라도 난 정도를 걸어야지 하는 마음은 확고하지만, 황진이 앞에서 안 녹
아날 남정네가 화담 서경덕 말고 또 있던가?
내게도 달콤한 시련(?)이 닥치면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그런 것은 사실 미지수 아닌가?
수컷에게는 도덕적인 생각도 순간적으로 잊혀지는 때가 있다. 그것을 동물적 본능이라 부르겠
지? 더구나 풍류를 알고, 멋을 아는 남자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대비해서 남자로서의 비장의 무기,
최종병기를 상비한다.
이건 나 같은 수컷에게 멕이는 ‘용기(勇氣) 한 알’이다.
한 방 멕이는 데는 한방 메기탕이 최고로 좋다 하지? 바로 그런 거지 뭐. 녀석이 낯을 못 가리게 앞을
못 보게 하는 짙은 썬글라스, 즉, 북한 용어로 먹물 안경이랄까…
‘비켜서라’.
그 의학의 도움이면 녀석의 눈을 가려서 낯을 안 가리고, 철면피에 안면몰수, 체면불구, 내로남불,
후안무치도 할 수 있다.
친구에게서 선물받아 고이 숨겨놨던 ‘비켜서라’ 그거 있잖아?
그러니 됐다. 오라! 얼마든지 상대해 주마!
침대에 포개진 우리는 그런데 이게 대체 꿈이냐 생시냐?
여기서 또 잠깐!
나더러 먼저 씻으란다. 아! 참! 나도 ‘비켜서라’ 그거 아직 먹을 새가 없었잖아? 천우신조! 마침 잘
됐네.
샤워하기 전에 그거부터 얼른 탁 목을 꺾어젖혀 넘기고, 씻고, 침대에 걸터앉아 기다리는데, 마음
은 조바심에 탄다. 이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소 한 시간은 끌어야 하니 말이다.
아이구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다. 아이구 이럴 수가!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자랑스럽게, 웃
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오네?
그러나 나는 시간을 지체하기 위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오늘은 기분이 너무 좋아 술이 잘 안 취하니 와인 한 잔 더 하자”하고, 천천히 한 잔 더 하고는
또 시간을 끌려고, 춤 한 번 더 추자고 제안한다.
은근한 조명 아래 낮은 음악 틀고 다시 부루스를 춘다.
드디어 거총. 애쓴 보람이 나타난다. 거총이 무슨 말인지 모르면 군대 입대하면 안다.
그녀는 장미 다발에서 몇 송이를 빼더니, “메흐시”라면서, 코에 대고 향기를 맡으면서, 침대 한 복
판에 반듯하게 눕는다. 아름답다.
내게 장미 꽃잎을 따서 몸 위에 뿌려 달란다. 여왕이 되겠다는 거다.
나는 여왕을 사랑하는 王이 된 기분으로 꽃잎을 하나씩 떨어뜨린다.
천천히 장미향을 음미하며, 특별한 부위에는 따로 꽃 잎을 올려준다.
….
그 후에…
갑자기 자기를 따라오란다. 욕실로 데리고 간 그녀는 황금장식이 눈부신 욕조에 나를 넣어 앉
히고, 따뜻하게 온도를 맞춰 물을 틀어 놓고 방에 가서 남은 장미를 가져온다.
함께 욕조 안에 마주보고 앉아 꽃 잎을 하나씩 따서 물에 띄운다.
잎 하나 하나 벗길 때마다 향기도 맡고, 그렇게 따뜻한 물 속에서 노익장이 발휘된다.
장미 향기 그득한 황금장식 욕조에는 사랑의 향기가 더해진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다리는 하루 하루가 즐거우면서도 떨린다.
몽롱한 시간이다.
3부 참사랑
남녀의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여성의 아름다운 육체미나 남성의 알통 근육미, 여성의 부드러운
피부나 남성의 거무틱틱함, 여성의 독특한 향기나 남성의 속삭이는 귓속말, 여성의 애원하는 듯한
요구나, 남성의 배려 깊은 리드, 여성의 특별한 분위나 남성의 씩씩함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정신적 합일(合一)을 만드는 일이다.
그 요체는 육체도 중요하지만, 마음이다.
바람피우는 사람이 생각할 일은 오직 말초적 쾌락이지만, 그러나 이성적인 사람 간의 사랑은 극
히 짧은 한 순간의 동물적 본능에서 나오는 행복 추구보다 그 극히 짧은 한 순간의 합일조차도
서로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훗날에도 가끔 생각나게 하는 ‘둘만의 비밀’을 만드는 일이다.
누가 누구와 연애했더냐?
지금 누가 누구 품에 있는가?
나는 지금 승리자다.
드디어 몽롱한 정신으로 기다리던 날이 왔다. 밀회(密會)에 나간다.
아내에게는, “미국서 일시 귀국한 남자 동창과 친구들 함께 호텔에서 저녁 약속이 있다”고, 좀 늦
을 수도 있다고 찰떡같이 말하는데, 찔리는 바가 있었지만, 포커 페이스를 지켰다.
장충동에 있는 그 한옥 호텔에는 한 번도 들어가본 일이 없다. 그리고 들어가 볼 일도 없었다.
떨리기도 하고, 그런 내가 좀 비굴하기도 했다.
좋은 날 아내 한 번 데려 와야지…
수십 년 같이 살면서 이런 데 한 번 못 데려오다니…
갑자기 철 늦은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약속시간보다 한 5분 전에 호텔에 들어갔다. 로비 옆에 터진 널직한 자리에 커피숍이 있어서
찾기 쉬웠다. 두리번거리며 살피는데, “여기야, 여기!”하면서 누가 낮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반긴다. 본능적으로 같이 손들어 어색하지만 반가운 척하면서, 속으로, “어라? P가 왜 여기 와 있지?”
라는 생각하는 순간, 그 옆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예쁜 S도 보이고, 어라? 야들 시선이
금방 입구쪽으로 쏠리는 걸 보니, 내 뒤에 어떤 넘이 또 나타났구먼.
순간 “Dream is dream”이라 즉각 판단하고, 얼른 냉수 마시고 속차리기로 했다.
난 체념 하나는 잘 한다. 미련 잘못 가져서 인생 초라하게 되는 것 보다는, 가급적이면 내가 상
처받지 않으려고 터득한 기술 하나, 빠른 체념이다. 그게 세상살이 하면서 나를 보호하는 수단이
되었지.
남녀 각 5 명. 합이 열.
서울에 사는 친구들만 불렀다는데, 단 둘이 만나자는 말은 없었는데, 난 왜 지레 둘만의 밀회로
착각한 건지 모르겠다. 그런 바람이 심해도 너무 심했던 모양이다.
바람…바램…꿈… 이 나이에도 이렇다.
맛있는 저녁 식사 후에, 생음악을 하는 자리로 옮겨, 남자들은 양주 한 병 Bottom Up(병나발)하고,
여자들은 와인으로 기분 좋게 취기가 올랐다.
그녀와는 둘만의 의미를 가질 만한 대화도 없었고, 특별한 눈길도 없었다.
“다음에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라며 악수하며 아쉽지만 헤어졌다.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나오면서 뒤돌아본 호텔이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도 않고, 갑자기 내가
노망이 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술이 싹 깬다.
노망이 들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녀가 그런 적극적으로 성을 즐길 사람으로 생각했을까?
대체, 점잖은 여자를 왜 그렇게 쉽게 본 거야?
그토록 그런 사랑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거야?
“H야, 미안하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 나의 욕망을 너를 대상으로 나 혼자 꿈꿔 본 것이니 부디
용서하길 바란다”.
전시회 때 본 그녀의 문화적 위엄에서부터, 친구들과 대화하는 내내 따뜻하게 웃던 모습을 상기
하니, 그녀에게 큰 결례를 범한 것이 되어 몹시 부끄럽다.
“그래, 내가 노망이 들려 잠시 로망을 꿈꾸었던 것이고, 그만큼 너를 좋아했다는 것이니, 부디 이
해해 주길 바래”.
택시를 타고 오는 중에 다시 한 번 중얼거린 말이다.
윤리와 도덕을 앞세워 성인군자연(然) 살아온 내가 부끄럽지만, 스스로 자작극을 상상한 나에게
는 당장 오늘밤부터는 노망과 로망이 내 번뇌 속에 번갈아 나타날 거고, 나타나면 ‘허튼 욕망’과
‘빠른 체념’이 서로 ‘지우기’를 하는 싸움을 반복할 것이다.
망상과 수양을 번갈아 곱씹으면서 노망과 로망 사이를 왔다 갔다 할 것이다.
늦게 집에 오니 아내는 세상 천지도 모르는 천치같이 자고 있다. 나는 내 허황된 꿈을 합리화
하려는 듯이 엉뚱한 생각을 한다. 내가 그런 로망에 휩싸여 노망이 든 노인이 되어 망상을 했던 것처럼,
아내도 틀림없이 자기 남자 동창과 나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어떻게 아느냐고? 다 아는 수가 있다.
젊을 때부터 아내가 하는 말이 있다. 자기는 내가 바람피운 만큼 똑같이 피우겠다고. 그러니 그게
그 말이지 뭐야.
자고 있는 아내의 머리칼이 목덜미에 흐트러져 있다.
내 생애 첫 여자.
첫 키스 때 서툴러서 자국을 남겼던 저 목에 주름이 졌구나.
그래. 밖에 나가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는 철들지 못한 남편의 안방을 말없이 지켜주고 있
으니 고맙지. 내, 심지가 굳지 못해 비록 혼자서나마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마는, 이렇게 한 보따
리 반성하는 마음을 짊어지고 무사하게(?) 돌아오지 않았냐?
참사랑이란 이렇게 슬픔을 주나 눈물을 주나…
김상희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아내의 비틀어진 베개를 바로 비콰주었다.
옷 갈아입으려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데, 케이스에 붙었던 ‘비켜서라’가 따라 나와 방바
닥에 떨어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