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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泰鳴칼럼] 日本 안의 韓民族遺跡과 日本歷史의 源流를 찾아
“다이꼬(太閤)가 노려 본 西쪽이 바다에 피어 오른 안개였던가”
두 번에 걸친 朝鮮侵略에 실패하고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生을 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과대망상에 찬 허무한 生涯를 한 詩人이 요약한 碑石 글이다. 朝鮮侵略戰爭의 總指揮府였던 日本 九州 北端 옛 나고야(名護屋)城(現ㆍ唐津市鎭西町)本殿 자리에 이 碑가 서있다. 말라버린 靑苔처럼 세월의 때가 겹겹이 달라붙은 이 碑石은 패기에 찼던 히데요시가 노려보았을 朝鮮 땅을 향해 서있다.
草書로 심하게 흘려 쓴 書體인데다 字體가 돌과 함께 검게 變해 30여분간이나 머물면서 오는 사람마다에 물어 보아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결국 포기하고 내려오다가 城入口 매표소의 여직원에게 물어 정확한 文章을 알게 되었다.
후꾸오까(福岡)市에서 서쪽으로 100여km거리 육지 끝 부분에 위치한 나고야성은 400여년전 본래 그 지역의 하급무사의 조그마한 성이던 것을 城壁을 높게 쌓아 大城으로 개조한 것이다. 朝鮮侵略의 사령관이던 가또기요마사(加藤淸正)가 히데요시의 특명으로 총감독이 돼 단 6개월 만에 완공했다는 나고야성은 朝鮮쪽으로 펼쳐지는 바다가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當時 日本第一의 城이던 오사까(大阪)城 다음으로 큰 성이었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總面積 17만평방m에 이른 나고야성은 本殿(本丸)외에 5개의 城廓과 크고 작은 11개의 부속 구획으로 이루어진 平山城으로 해발 88.8m의 山 위에 건물면적이 4,333평방m에 이르는 규모였다.
5層7重의 天守閣과 望樓, 書院, 茶室 등을 골고루 갖춘 나고야城은 朝鮮侵略戰爭이 시작되면서 城을 중심으로 직경 3km에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軍을 비롯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가또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등 130여개의 당시 日本의 全國主要 다이묘(大名)들이 이 곳 한 곳에 다 모여 진제이(鎭西), 요부꼬(乎子), 겐까이(玄海)등 인근지역에 부채꼴 모양으로 진을 쳤다.
城入口인 오데구찌(大手口)를 비롯하여 히데요시가 먹었다는 우물과 茶室, 그리고 그가 심었다는 벚꽃나무가 觀光客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本殿 옆 天守閣 자리에는 지금도 유물발굴과 石壁복원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나이 어린 처녀가 측량기를 들여다보면서 일꾼들에게 발굴현장을 지휘하고 있다.
城터 바로 건너편에 1993년에 開館했다는 규모가 꽤 큰 산듯한 博物館이 자리하고 있다. 찾아갔던 날이 月曜日인데 運 나쁘게도 休務日이라 문이 닫혀있다. 博物館은 꼭 봐야겠기에 가서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한 참 뒤 나타난 수위에게 용건을 설명하고 들어가 직원을 소게 받았다.
學藝課 係長인 이에다(家田)씨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日本의 朝鮮侵略을 反省하고 앞으로 兩國間의 交流와 友好增進을 목적으로 博物館을 나고야城터 옆에 세웠다고 설명하였다. 이에다씨의 특별배려로 外部人에게 撮影이 엄격히 禁止된 나고야城과 주변을 그린 여섯 폭짜리의 大型屛風 “히젠나고야성도병풍(肥前名護屋城圖屛風)”과 히데요시의 “木座像” 등을 촬영할 수가 있었다.
博物館에는 日本의 유물 외에 模型거북선, 任辰.丁酉倭亂 때 우리나라가 사용했던 大砲인 佛狼機砲, 李舜臣將軍의 초상화와 충무공 都督印(複制)외에 朝鮮時代의 黑漆塗鳳龍文欌(옷장), 高麗金板經, 文官夫妻像, 文綠色雲寶文帖裏(문,무관의 상,하의), 忠武公全書등 우리나라의 공예품과 유물이 전시장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博物館에서 받은 몇 권의 자료를 옆구리에 끼고 기분 좋게 나오다 보니 正門옆에 일본사람을 조롱이라도 하듯 넉넉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제주 하루방이 의젓한 자세로 박물관을 지키고 서 있다.
日本歷史에서 韓半島로부터 건너간 이른바 渡來人이 등장하는 것은 4世紀 중엽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日本이 아직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갖추기 조금 전이다. 그러다가 6-7世紀에 야마토(大和)朝廷이 확립될 때에는 韓半島에서 건너간 渡來人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當時 약 100년간 日本朝廷을 支配한 소가(所我)씨는 新羅에서 건너 간 王族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日本人들이 가장 존경하는 聖德太子는 그의 아버지인 用明天皇이 蘇我一代 實力者인 우마꼬(馬子)의 조카이고 어머니가 또한 蘇我家의 여인이었다는 日本歷史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뒤로 高句麗가 멸망하면서 若光이란 貴族이 2,500여명의 高句麗流民을 모아 지금의 도꾜 인근 사이따마(琦玉)縣에 高(句)麗村을 세웠고 百濟와 新羅에서도 수많은 王族과 貴族, 百姓이 日本으로 건너가 古代日本의 문화적 인프라 구축에 기여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특히 지금의 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한 반경 50여km 언저리에는 그 흔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 흩어져 있다.
日本에서 수집한 資料를 근거로 우선 오사카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20여 개소를 추려 撮影作業에 나섰다. 現存하는 거대한 寺刹과 神社 및 橋梁, 商店街 등이 있는가 하면 이름만 있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는 곳도 많다. 약 1500년전 聖德太子의 特命으로 건설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오사카 第一의 寺刹인 시텐노지(四天王寺)는 百濟人에 의해 지어졌다. 聖德太子의 특별초청으로 초빙되어 이 寺刹建設을 위해 586년 日本으로 건너간 百濟人ㆍ柳重光(日本名: 金剛重光)은 아름다운 사찰건설의 공로로 聖德太子로부터 영원히 이 寺刹의 補修,管理業務를 부여 받고 오늘 날 까지 金剛組라는 會社이름으로 그 일을 맡고 있다. 金剛組는 사찰옆 大路邊 10여층짜리 중간 급 건물에 간판을 내 걸고 있다.
어둠이 아직 완전히 걷히기 전 카메라를 메고 호텔을 나와 電車를 타고 촬영에 나섰다. 오사카는 규모가 큰 都市이다. 以前에도 이런저런 일로 몇 번 들른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20여개소를 찾아다니는 일은 아니었다. 떠나기 전 日本人 친구가 撮影對象을 표시해서 보내 준 地圖冊을 들고 찾았지만 걷는 거리가 너무 멀어 세 시간에 겨우 세 군데를 돌았다. 안되겠다 싶어 택시를 專貰내었다. 時間을 마냥 끌 수 없는지라 돈 몇 푼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후 4時半께 市內에서 30여km 떨어진 한 곳을 제외하고 다 마쳤다. 点心은 건너뛰고. 市外電車가 目的地에 이르자 이미 街路燈이 켜지고 어스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달음박질로 5분정도 뛰어가 간신히 카메라에 담을 수가 있었다.
아직도 建物에 “百濟驛”이란 커다란 看板이 붙어있는 오사카市內 한 복판의 貨物驛, 市立南百濟小學校, 百濟本通商店街, 百濟大橋, 百濟系依羅씨의 阿麻美許曾神社, 지금은 동네 어린이 놀이터가 된 곳에 남아있는 行基菩薩安住石碑, 헤이안(平安)時代 初期에 東北地方을 평정한 높은 계급인 征夷大將軍이었던 坂上田村麻呂의 墓, 어머니가 百濟人이었던 50代天皇인 桓武天皇의 側室인 娘春子가 세운 長寶寺, 鶴滿寺의 高麗鐘, 高麗橋 등등.
한 가지 더. 日本의 傳統依裳을 “고후꾸(吳服)”이라 한다. 이 日本傳統衣裳을 지금의 모양처럼 만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바로 高句麗에서 건너간 후예들이다. 오사카에서 30여km 서북쪽에 위치한 이께다(池田)市에 제법 규모가 큰 吳服神社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吳服을 “고후꾸”라 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구레하”라고 읽는다. 그래서 神社도 “구레하진자”이다. 日本에서는 이 지역을 옛날부터 “吳服의 故鄕”이라 부르면서 神社를 세우고 吳服神인 “吳織姬(吳服大明神)”에게 때를 따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당시 손으로만 만들던 옷감을 高句麗人들은 기계를 사용하여 직물을 짰으며 養蠶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吳”는 古代朝鮮에서 “句麗”(구례=고구려)를 나타냈기 때문에 “구려”를 日本發音으로 “구레”로, 그리고 섬유에 관계되는 신으로 알려진 “아야하”의 뒤 자인 “하”를 붙여 “구레하”로 부르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아무튼 당시 高句麗人들의 직물기술이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대목이다.
오사카에서 한 神社를 찾는데 地圖에 나타나 있는 대로 가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마침 70代의 老人을 만나 물었더니 가던 길을 돌려 자기를 따라오란다. 미안한 생각에 가르쳐 달라고만 했더니 따라오라고만 한다. 둘이서 동네迷路를 뱅뱅 돌아도 또 나타나지 않는다. 마침 집 앞에서 길을 쓸고 있는 80줄의 자그마한 할머니에게 동행한 노인이 물었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하던 일을 놓고 앞장서며 따라 오란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물으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니 시간만 허비할 뿐이라며 종종걸음으로 안내해 주었다. 일을 끝내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더니 더 갈 데가 없느냐고 묻는다. 그 뒤로 택시를 잡았다.
千年이 넘은 남의 나라의 遺跡. 그 것도 有名한 곳이 아닌 것이 大部分이라 집 옆에 두고도 동네사람들조차 무엇인지 모른다. 資料에는 分明히 公園이라고 나타나 있는데 가보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을 길모퉁이거나 어린이놀이터이기도 하고. 그래도 그 오랜 세월 용케도 남아있다 싶었다.
尹奉吉義士의 墓는, 묘 옆 조금 떨어진 곳 높은 언덕에 韓國式碑가 우뚝 서있어 같이 찾아 간 日本人 택시기사에게 체면이 섰다 싶었다. 東海에 面한 호쿠리꾸(北陸)地方의 이시가와(石川)縣 가나자와(金澤)市 郊外의 노다야마(野田山)에 위치한 이시가와縣立共同墓地.
1932年4月29日 日王生日날 中國上海의 홍구공원에서 거행된 日本戰勝記念行事는 尹奉吉의사의 폭탄투척으로 시라가와 日本軍團長과 가와바타 現地日本人居留民團長이 卽死하고 그 외 많은 日本要人 들이 중상을 입는 등 순식간에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이 事件으로 尹奉吉義士는 1932年12月 가나자와刑務所에서 총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무덤에는 두 개의 작은 太極旗가 걸려있고 그의 生前의 寫眞과 功績을 기록한 작은 板도 걸려있다. 무덤으로 가는 길목 두 곳에 尹奉吉義士墓라고 쓰인 깔끔한 패 말이 꽂혀있고 그 위 높은 언덕에 4m정도 높이의 비석이 우뚝 서있다.
찾았던 때가 문을 닫은 時間이라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어 돌아서는 데 管理人인 듯한 60代의 남자가 나왔다. 墓가 멀지않다며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기사에게 尹奉吉義士얘기를 해 주었더니 자기도 처음 알았다며 다음부터 韓國사람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墓所엘 안내하겠노라고 했다.
갖고 간 墓所住所를 적은 쪽지를 잃어버려 그 날 오전 나고야(名古屋)에서 總領事館에 電話로 問議했더니 電話를 받은 領事館職員이 어이없이 應對해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자기들의 管割區域이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를 뿐 아니라 墓地에 대해서는 들어 본 일도 없다는 게 아닌가. 길거리의 張三李四도 아닌 위대한 獨立鬪士의 무덤이 근무하고 있는 나라에 묻혀있는데 관할이 아니라느니 들어 본 일도 없다느니 하는 外交官이라니. 말이 막혀 그냥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 날은 내내 화가 나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도꾜의 궁성(皇居)은 全體面積의 3분의1 정도가 옛 도꾸가와(德川)幕府가 들어있던 城터로 皇居東御苑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城은 다 없어졌지만 幕府當時의 警備兵勤務建物과 일부 부속건물 들이 아직 몇 개 남아있고 우람한 성벽이 옛 날의 권위를 풍겨주고 있다. 입구 맞은 편 끝에 위치한 天守閣 자리의 石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앞으로 아름답고 깔끔하게 정돈 된 수 만평의 정원이 펼쳐져 있다.
지금 皇居의 正門은 니쥬바시(二重橋)이지만 幕府時代의 正門은 도꾜역 옆에서 직선으로 뻗은 길과 연결되는 오데몬(大手門)이었다. 그런데 이 大手門入口 오른쪽에 높이가 50센티m정도인 橢圓形 돌에 “大手高麗門”이라고 씌어있다. 當時의 正門의 이름이 大手高麗門 이었던 것이다. 히데요시時代는 日本과 朝鮮과의 관계가 나빴지만 도꾸가와幕府는 朝鮮과의 관계개선에 상당히 신경을 썼기 때문에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등 두 나라 사이가 많이 개선되었다. 아무튼 도꾸가와幕府本城의 正門名이 高麗門 이었다니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日本에는 어디를 가나 수 없이 많은 神社를 만나게 되는데 이 들 神社 앞에는 맨 앞 正門 양쪽에 우리나라의 해태에 해당한다고나 할, 머리가 獅子를 조금 닮은 두 마리의 짐승이 正面을 응시하며 앉아있다. 이 동물의 이름이 “고마이누(高麗犬)”이다. 집안에 귀신이나 잡신의 침입을 막는 把守兵이다. 말썽 많은 야스꾸니(靖國)신사도 물론 고마이누가 지키고 있다.
日本人의 영원한 마음의 故鄕, 日本의 至聖至所인 伊勢神宮. 나고야(名古屋)에서 特急으로 1時間20여분 거리의 志摩半島의 바다 가까이에 자리한 伊勢市는 人口 12만 정도의 작은 都市이지만 이곳은 日本의 聖地로 대접받는다. 神宮으로 들어가는 入口에 맑은 물의 이스즈(五十鈴)江이 흐르고 그 위에 10년마다 완전히 뜯어내고 새로 만드는 우지(宇治)橋가 놓여있다. 다리를 건너면 정갈하게 다듬어진 콩알만한 크기의 검은 색의 넓은 자갈길이 이어진다. 길 양 옆으로 아름드리 스기(杉)와 구스노끼(樟木) 등이 키 낮은 나무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먼지가 일지않게 길에는 항상 물이 적당하게 뿌려져 있다.
伊勢神宮은 日本人들이 建國神으로 받드는 아마데라스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신 祠堂이다. 이 神殿은 日本古代 야요이(彌生)時代의 高床式 穀食倉庫가 그 原形이라 한다.
神殿앞에는 600年에서 800年 된 巨木이 하늘을 덮고 있다. 완만한 돌계단을 20여m 오르면 나무 도리이(鳥居)가 있고 그 안으로 입구에 해당하는 집이 나타나고 그 안으로 두개의 집을 지나 正殿이 자리하고 있다. 參拜는 身分에 따라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日本總理는 入口 다음의 첫 건물 앞에서만 參拜할 수 있으며, 王世子가 그 다음 건물 앞, 그리고 天皇夫妻만이 正殿앞에서 參拜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天皇도 正殿 안에는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神殿의 촬영은 돌계단 저 아래 자리 외에는 어떤 경우라도 절대 금지되어 있다. 木柵을 사이에 두고 양 쪽에 똑 같은 면적의 부지에 20년마다 먼저 있던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교대로 새로 건축한다. 건물은 어느 부분도 휘는 데가 없는 直線式이며 히노끼(檜)만을 사용하되 지붕 양 끝에 X자형으로 짜서 지붕 위로 솟아나게 하고 그 표면 一部에 금박을 입힌다. 木材는 나가노(長野)현의 기소(木曾)라는 지정된 곳에서 자란 나무를 가져오고 지붕은 억새로 덮는다.
日本人들은 이곳을 聖所로 여긴다. 내가 갔던 날도 7시가 조금 넘은 이른 아침 時間인데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허리가 휜 老人이 神殿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는가 하면 젖먹이를 안은 젊은 엄마도 뒤를 따른다. 급속도로 변하는 現代文明 속에서 오랜 세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 변하지 않게 하려는 信仰 같은 노력이 그 곳을 찾는 參拜客의 엄숙한 표정과 神殿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얼굴에서 확실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기후(岐阜)縣과 도야마(富山)縣의 두 縣에 걸쳐있는 시라가와고(白川鄕)와 고가야마(五箇山)의 갓쇼쯔꾸리(合掌造)집은 참으로 아름답다. 호꾸리꾸(北陸)地方의 險山사이를 흐르는 쇼가와(庄川)강 옆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치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의 두툼한 초가집이 참으로 아름답다. 두 개의 재목을 逆V자 모양으로 맛 대어 지붕각도를 60도로 만들어 지었기 때문에 눈 많은 그 지역에서 쌓인 눈이 쉽게 흘러내린다.
전 날 尹奉吉義士墓所에 같이 갔던 택시를 다시 불렀다. 10년 이상을 그 地域 險山 꼬부랑길에 관광버스를 몰았다는 기사의 운전솜씨가 역시 믿을 만 했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날씨가 쾌청이다. 호꾸리꾸(北陸)지방의 아침 공기가 상쾌하기 그지없다. 첫 마을인 아이노꾸라(相倉)의 國家主要文化財로 지정되어 있는 집엘 들어갔다. 80줄의 老夫婦가 나를 맞는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다다미 20장정도 크기의 현관 방 한 가운데에 사방 2m크기의 맨 흙바닥에 장작불이 빨갛게 타오르고 그 위에 천장에 쇠줄로 매 단 새까만 주전자(이로리, 圍爐裏)에서 새 하얀 김이 연신 푹푹 뿜어 나온다. 할머니가 따끈한 綠茶 한 잔을 내 준다.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몸이 확 달아오르는 듯하다.
지은 지 400여년이 되었다는데 3層까지 올라가도 삐걱 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기둥과 서까래가 마치 옻칠을 한 듯 새까맣다. 2층에는 옛날에 煙草製造와 和紙製造에 사용했던 각 종 道具 등 民俗資料가 그득하다.
마을 앞 높은 展望臺에서 내려다 본 시라가와고는 동화책에 나오는 장난감 마을 같다. 사방이 險山에 둘러싸인 펀펀한 盆地의 하얀 눈, 벌판에 납작이 엎드린 집들이 마치 찾아오는 손님에게 두 손 모아 환영하는 듯하다. 마침 젊은 남녀가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길레 찍어줄까 했더니 고맙다며 나란히 선다. 프랑스에서 온 젊은 夫婦였다.
1995년 유네스코文化遺産으로 지정된 이곳의 집들은 대개 100-400년 정도의 年輪을 가지고 있다. 억새풀인 지붕은 대체로 15-20년 마다 한 번 씩 온 동네가 품앗이 형식으로 새로 이었는데 지금은 山林組合이 중심이 되어 작업을 한다. 동네에는 民泊 집이 몇 개 있고 그 중 日本皇室의 王世子가 묵고 간 집 앞에는 記念石을 세워 놓았다.
1969년 韓日經濟閣僚會談取材 때 日本땅을 처음 밟은 이래 지금까지 여든 번은 더 드나든 日本이지만 新幹線부터 특급, 완행을 골고루 바꿔 타면서 이번처럼 한 번에 여러 곳을 다람쥐 뛰듯 바쁘게 돌아다니기는 처음이다. 규슈 (九州)서쪽 끝에서 시작한 여행은 6일 간에 걸쳐 오사카, 교토, 나고야로 그리고 이세(伊勢)에서 다시 나고야 올라가 日本人들이 후지산(富士山)) 다음으로 사랑한다는 비와꼬(琵琶湖)를 거쳐 눈 많은 호꾸리꾸의 후꾸이(福井), 도야마(富山), 가나자와(金澤) 그리고 니이가타(新瀉) 아래의 나가오까(長岡)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 다시 新幹線으로 갈아타고 도꾜로.
예년 같으면 지금쯤 2m이상의 눈으로 덮여있어야 할 호꾸리꾸地方도 3000m 前後의 北알프스連峰만이 눈으로 덮여있을 뿐 아래로는 논밭에 파란 색이 감돌고 陽地에는 꽃 봉우리가 눈을 뜨는 곳조차 있다. 이 지역사람 들은 눈 없는 겨울에 생활리듬마저 깨진다고 오히려 불만이다. 도꾜로 가는 길목의 溫川地인 에찌고유자와(越後湯澤)만이 온 天地가 눈으로 덮였다. 이곳은 日本의 첫 노벨文學賞 受賞作家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抒情小說인 설국(雪國)의 舞台이다. “터널을 빠져나가자 온 天地가 하얘졌다”는 小說의 첫 구절이 생각났다.
平均時速 250km인 新幹線으로부터 單線을 운행하는 완행열차에 이르기 까지 출발과 도착시간을 秒單位로 맞추는 그들의 정확성이 놀랍다 못해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10여년의 긴 불황을 딛고 다시 擴大成長의 엔진에 시동이 걸린 日本經濟의 再跳躍이 列車의 發着時間을 반드시 지키려는 이들의 고지식한 執念과 無關치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07. 1. 28.
權 泰 鳴
[權泰鳴 칼럼] 비파호(琵琶湖, 비와코)호반의 무궁화
교토(京都) 동쪽의 히라산지(比良山地) 너머 남북으로 길게 뻗은 비파호는 후지산(富士山)과 함께 일본사람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자연의 호수이다. 항상 일정량의 수량을 유지하는 이 호수는 둘레가 240킬로미터에 674평방미터의 넓이를 가진 일본제일의 담수호로 긴키(近畿)지방 1300여 만 주민의 음용수는 물론 농사와 관광의 젖줄이 되고 있다.
7세기 덴치(天智)천황 때 5년 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도읍이었던 호수 남단의 오오쓰(大津)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호수 일대에는 고대 우리민족이 남긴 유적과 흔적이 사방에 산재해 있다.
간사이(關西)공항에서 기차로 교토로 가, 미리 약속한 일본인 친구와 함께 바로 오오쓰로 향했다. 오오쓰는 교토에서 두 정거장 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로 교토와 이어져 있어, 교토시와 다름없는 곳이다. 지금은 호수 동쪽만을 오오미(近江)라고 부르지만 도읍이었던 7세기에는 비파호 일대 전역이 오오미라였다. 일본3대상인의 하나인 오오미상인의 본거지가 바로 호수 동쪽 일대이다.
호수 서쪽의 히라산지, 동쪽으로 이부키(伊吹)산지, 남쪽의 스즈카(鈴鹿)산맥, 그리고 북으로 노사카(野坂)산지로 둘러싸인 비파호 일대는 커다란 분지로 호수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넓은 평야로 농업이 주산업이나 지금은 관광도 지역경제를 돕고 있다. 갔던 날도 늦여름의 30도를 넘는 더위에 호수 면을 여유롭게 미끄러지는 유람선이 한가롭게 보였다.
오오미상인으로 이름났던 상업은 가마쿠라(鎌倉)시대부터 명치(明治)시대에 이르기 까지 지역경제에 버팀 목이 되었으나 지금은 이름만 남았을 뿐이다. 이도츄(伊藤忠)상사, 마루베니(丸紅), 도레이, 도멘, 다이마루(大丸), 다카시마야(高島屋)와 세이브백화점, 일본생명, 동양방직 등 지금도 대 그룹반열에 올라있는 이들 기업이 모두 오오미상인에서 출발했다. 오오미의 중심지인 오오미하치만(近江八幡)시 중심엔 에도(江戶)시대에 조선통신사가 지나갔던 길로 이를 설명하는 표지석이 길 모퉁이에 서 있다.
비파호에서 발원하여 오오쓰시 남쪽으로 흐르는 세다(瀨田)강에 걸쳐있는 아름다운 교량 가라하시(唐橋)는 본래 한자이름이 “韓橋”였다. 이른바 한민족도래인이 건설한 교량이다. “가라” 라고 읽는 “韓”자를 같은 발음의 “唐” 이나 “辛”으로 표기가 바뀐 경우는 수 없이 많다. 오오미팔경의 하나인 일대는 옛날에도 사람들로 붐볐던 곳이지만 지금도 자동차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번화가이다. 현대의 기술로야 별 것 아니지만 백 미터 가까운 교량을 1300여 년 전 먼 옛날에 건설했다니 대단한 기술이다 싶었다.
백제도래인 후예인 양변(良弁)승려가 개산(開山)한 석산사(石山寺)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다보탑을 촬영하고 서둘러 비파호 서남쪽의 일본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목조 신라명신상(神羅明神像)이 안치되어 있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을 찾았다. 노송나무껍질로 지붕을 덮은 신당은 천삼백 여 년의 세월을 이어 온 연륜에 거룩함이 느껴졌다. 지붕을 덮은 파란 이끼가 짙은 회색의 노송껍질과 빚어내는 수수한 조화가 보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편하게 해 주었다.
多宝塔 (国宝, 日本三塔의 하나)
한갓진 산자락에 자리해서 일까 아니면 도래인의 신당이라서 일까 장터 같던 일본신사에 비해 너무나도 조용하여 쓸쓸하기까지 했다. 오오토모(大友)씨족이 조상신인 신라 신을 모시기 위해 세운 이 신당은 우리의 성황당과 같은 것이다.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신라명신상은 높이 78.5센티미터의 착색목상으로 우리조상들이 썼던 갓처럼 산모양의 관에 갈색 도포를 입은 장발의 노인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신상(神像)에 관한 모든 사항이 절대비밀로 되어있고 일반공개가 금지되어 있어 신사관계자 외에는 거의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기차시간이 되어 일본인 친구를 돌려보내고 히에이산(比叡山)의 엔랴쿠지(延曆寺)로 향했다. 호수 서쪽의 사카모도(坂本)에서 마지막 케이블카를 탔다. 늦은 시간이라 올라가는 승객은 달랑 혼자였다. 나 혼자인데도 운전기사는 관광객들에게 하는 설명을 다 해 주었다. 기계적이다 싶었지만 규칙에 충실한 그들의 성실함이 돋보였다.
(延曆寺)
일본불교 최대종파인 천태종의 총본산인 엔랴쿠지는 백제후예인 사이쵸(最澄, 傳敎大師)가 개창한 사찰이다. 엔랴쿠지는 전국시대인 16세기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사찰과 함께 3천명의 승려를 불태워 죽인 일로도 유명하다. 사이쵸의 후임이 된 역시 백제후손인 엔친(圓珍, 智增大師)이 천태종을 더욱 발전시켰다. 시간이 촉박해 한 걸음에 본당인 근본중당(根本中堂)과 사이쵸의 동상 촬영만 끝낸 후 바로 걸음을 되돌렸다.
다음 날 아침 7시 비파호 동쪽 오미(近江)로 택시를 몰았다. 백제사는 이름과는 달리 신라도래인 고대 호족 하다(秦)가문사찰이다. 백제사는 신라와 가까웠던 성덕태자가 고구려도래인 승려 혜자(惠慈)와 함께 백제의 용운사(龍雲寺)를 본 따 606년에 건립했으며 사이쵸가 뒤에 중흥시킨 사찰이다. 성덕태자가 혜자승려와 함께 지금의 백제사가 있는 곳에 들렀을 때 산 속에서 빛이 나타나 찾아갔더니 한 거목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둘은 나무를 뿌리 채 뽑아 11면 관음상을 만들고 불상을 모실 건물을 지은 것이 현재의 백제사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백제사에서 남동방향으로 들판 길을 20여 분 달려 백제인 귀실집사(鬼室集斯)를 받드는 귀실신사에 갔다. 길가에 세워 둔 간판이 너무 작아 보지 못하고 한 참 지나쳤다가 차를 다시 돌려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에게 물어 간신히 신사를 찾았다. 일본에서는 흔치 않게 짧은 설명이지만 백제도래인 귀실집사를 모시는 신사라는 사실이 일본어와 한글로 병기되어 있어 반가웠다.
(鬼室神社의 境内)
신사모양새가 흡사 일반주택 같은 기와집이어서 얼른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신사는 도로에서 30여 미터 들판으로 들어가는 거리에 있었고 제법 큰 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게 주변과 달랐다. 입구 옆에 팔각정 건축공사로 어수선하고 신사건물도 보수 중이었다. 신사 앞에 반드시 있는 고마이누(高麗犬)보초도 없고 신사전면에 편액(扁額)마저 걸려있지 않아 초라한 모습에 마음이 허허해 졌다.
오오미가 나라(奈良)의 도읍이었던 7세기 후반 백제가 멸망하면서 많은 백제인들이 오오미로 건너갔고 그 가운데 이 신사의 주인공인 귀실집사가 끼어있었다. 백제에서 고관을 지냈고 학식이 높았던 그는 이주 얼마 뒤 당시 야마토(大和)조정에 중용되어 지금의 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학식두(學識頭)에 임명되기도 했다.
외국인인 귀실집사가 일본조정의 장관직에 임명된 데 대해 후 날 언어소통문제가 논란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 “대일본지명사전”은 “상고에는 일본과 한국은 동어동언(同語同言)민족으로 법속은 달랐지만 언어의 근원은 같았다. 다만 사투리처럼 표현이 다소 달랐을 뿐 고대에 양국은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9세기까지 왜국과 고구려, 신라, 백제등 나라 사이의 어떠한 회담에서도 통역을 두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게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귀실신사 뒤에 수 백 년이 넘은 거목 한 그루가 있고 그 바로 옆에 기와집 모양의 작은 귀실집사의 석조 묘가 있다. 높이 1미터의 작은 석조사당 안에 48센티미터의 8각형 석묘가 있고 앞 면에 “鬼室集斯之墓,” 왼쪽 면에 “朱鳥三年(668)戊子十一月八日沒,” 그리고 오른 쪽에는 “庶孫美成造”라고 새겨져 있다. 신사 앞 작은 뜰에 하얀 꽃을 몇 송이 단 댓 그루의 무궁화가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 입은 조신한 여인처럼 서있다.
도중에 택시가 속도위반에 걸려 조사를 받는 바람에 예정했던 4시간이 넘었다. 11시를 넘겨 류오쪼(龍王町)라는 마을 길가에 있는 가가미(鏡)신사와 오오쓰시 옆의 쿠사쓰(草津)시에 위치한 야스라(安羅)신사를 찾았다. 두 신사는 모두 상고시대의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天日槍)을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로 이 중 가가미신사는 규모는 작지만 일본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아메노히보코는 이 지역 주민들을 위해 농경지개발과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토기인 스에키(須惠器)제조와 제철기술 및 의술을 전수하는 등 지역민들의 생활향상에 기여한 공로가 커 주민들에게 도자기신과 의술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아메노히보코는 일본으로 건너갈 때 거울, 옥구슬, 검 등 일곱 가지의 “신물(神物)” 가지고 갔는데 현재 일본황실의 3대 보물인 검과 거울, 옥구슬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시간 치의 요금에 1활의 팁을 택시기사에게 건네고 바로 기차로 호수 서북부의 다카시마(高島)교외의 넓은 평야지대인 아도(安曇)의 이나리야마고분(稻荷山古墳)으로 향했다. 이 일대는 일찍이 한민족도래인들이 자리를 잡았던 곳으로 그 중심지인 미즈오(水尾)마을에 이나리고분이 보존되어 있다. 나지막한 봉분 위에 세워진 아담한 집 안에 흡사 거북모양의 커다란 백색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이 고분에서 고대 우리나라의 유물인 금은보관과 귀걸이, 금장의 대검, 마구 등 많은 보물이 출토되었다. 전문가들은 유물로 보아 고분의 피장자가 상당한 세력을 가진 호족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시 오쓰에서 교토로 옮겼다. 일본의 낮이 우리보다 30분 정도 짧은데다 시간이 늦어 서둘러야 했다. 서울의 4대문처럼 교토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규모 신사가 있다. 서쪽의 마쓰오대사(松尾大社)와 남쪽의 후시미이나리대사(伏犬稻荷大社)가 신라계도래인인 하다(秦)가문의 신사이고 동쪽의 야자카신사(八坂神社)와 북쪽의 가모신사(賀戊神社)는 고구려계인 야자카(八坂)가문의 조상신을 모신 신사이다.
지하철과 택시로 4대 신사를 급하게 돌고 고류지(廣隆寺)로 내 달았다. 교토시내의 3천 여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고류지는 신라계도래인인 하다가문의 교토본거지 우즈마사(太秦)지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하다가문이 조상숭배를 위해 세운 사찰이다. 그래서 지금도 “太秦 의 廣隆寺”라고 부른다. 정문으로 뛰어갔더니 4시 반이 넘어 이미 문이 닫혀버렸다. 관리인에게 사정을 이해시켜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廣隆寺)
(彌勒菩薩半跏思惟像)
고류지는 일본의 조각부문국보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 안치되어 있어 더욱 유명하다. 목각불상이 모두 회목(檜木)인 일본에서 유일하게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이 불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9년 2월 반가사유상 앞에 선 독일 철학자 칼 야스파스의 아래와 같은 평가가 유명한 일화로 전해오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고대 그리스 신과 로마시대의 조각상 등 인간존재가 최고로 완성된 모습을 표상하는 수 많은 모델을 보아왔다. 그들에게는 현실을 완전하게 초월하지 못한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냄새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 광륭사의 미륵상에는 참으로 완성된 인간실존의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또한 일본의 한 작가는 이 미륵상을 “절대의 미소”로 표현하기도 했다.
셋째 날 아침 7시 전차로 오사카 남쪽 가시와라(柏原)인근의 다카이다고분(高井田古墳)으로 향했다. 백제계 후손들의 집단거주지였던 이 지역의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한 야산에는 160여 기(基)의 한반도 식 횡혈석실(橫穴石室)고분이 밀집해 있다. 정상에는 한 석실에 두 사람을 매장한 모델석실이 전시되어 있고 고분 모두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시 가시와라 서쪽의 하비키노(羽曳野)시에 있는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로 향했다. 기사에게 가져 간 위치지도를 보여주었으나 찾기 어렵다며 회사에 물어 장소를 확인해야 했다. 들 길과 마을을 지나 산 발치의 작은 마을 입구에 있는 도리이(鳥居) 앞에 차를 세웠다. 금방인 줄 알았는데 2백 여 미터나 걸어야 했다. 일대가 포도밭이었고 신사는 포도밭 끝에 달랑 붙어 있었다. 열 평 정도 안팎의 작은 신사였다. 규모는 작았으나 배전과 본전이 구분되어 있었다.
아스카베신사는 우리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는 신사이다. 본래 이름은 “곤지왕신사(昆支王神社)였으나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우리역사 말살정책의 하나로 이름을 지금의 아스카베신사로 바꾼 것이다. 5세기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는 백제 21대 개로왕의 둘째 왕자이다. 이 곤지왕자가 바로 일본이 고대의 대왕으로 받드는 15대 오진(應神)천황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설은 동경대학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교수와 와세다대학의 미즈노 유(水野祐)교수, 그리고 일본고대사학자인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新一郞)를 비롯한저명한 일본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신사는 곤지왕자의 후손인 아스카베노미야코(飛鳥戶造)가 곤지왕을 받들기 위해 세운 것이며 신사 뒤 산에는 수 백기에 이르는 후손들의 분묘가 밀집한 관음산고분이 있다. 주변의 넓은 포도밭이 신사 앞 뜰에까지 닿아있다. 이 지역의 옛 이름은 고대에 백제인들이 안주한 곳이라는 뜻에서 안쥬크(安宿)라고 불렀으며 지금의 아스카란 지명도 이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이 가능해 거리가 다소 멀지만 일본최초의 문자기록인 와카야마(和歌山)현 하시모도(橋本)시의 스다하치만신사(隅田八幡神社)에서 발견된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을 보러 갔다. 이 인물화상경은 일본역사학계에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역사적 유물이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이 동경(銅鏡)에 새겨진 금속명문(銘文) 48자의 해석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결착되지 않고 있지만 문장의 내용은 “일본의 26대 게이타이(繼體)천황이 백제왕자”를 의미한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동경의 요약된 내용은 “503년 사마(斯麻)가 남제왕(男弟王)의 장수를 빌기 위해 최상의 동으로 거울을 만들었다” 로 여기서 사마는 백제 곤지왕의 아들인 무령왕이고 남제왕은 무령왕과 형제간인 즉위 전의 일본26대 게이타이천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백제왕자 남제왕이 일본의 26대 게이타이천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하시모도에서 다시 오사카 남쪽 이즈미(泉)시에 있는 고대에 토기를 만들었던 스에키(須惠器)가마를 찾아갔다. 스에키토기는 5세기 고분시대부터 10세기 헤이안시대에 걸쳐 만들었던 토기이다. 고대 일본인들은 생활용기를 흙으로 빚어 노지에서 장작불에 구워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부서지는 등 품질이 극히 조악했는데 한반도도래인들로부터 지금의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가마를 만들어 굽는 방법을 배웠다. 스에키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적색이나 짙은 회색을 띄었다. 이즈미 시 이즈미가오카(泉ケ丘)마을의 스에키박물관에는 각종 스에키제품이 전시되어 있고 우리나라식인 상향식 가마가 남아있다.
한민족도래인으로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백제후예인 사카노우에노다무라마로(坂上田村磨呂)의 묘가 교토에 있다는 일본친구의 연락을 받고 귀국 날 아침 일찍 다시 교토로 올라갔다. 1919년 교토대학의 요시가와마사쓰카사(吉川眞司)교수가 발견한 묘는 교토시 야마시나(山科)의 작은 마을공원 안에 있었다. 보통 크기의 봉분이 화강석으로 둘러져 있고 묘 앞에는 “征夷大將軍, 正二位左大臣坂上田村磨呂公墓”라고 쓰인 1미터 크기의 돌 비석이 서있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묘 앞 설명판에는 그가 백제인 후예라는 말을 한마디도 찾을 수 없었다.
(坂上田村磨呂)
757년 무인가문에서 태어난 다무라마로는 40세와 47세에 두 번이나 지금의 참모총장 격인 정이대장군을 지냈고 53세 때에는 조정의 최고의결기관인 다이나곤(大納言)에 올랐다. 그는 또한 불심이 깊어 현재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교토의 유명한 기요미즈데라(淸水寺)를 창건하기도 했다. 기요미즈데라에는 그의 이름을 딴 “田村堂” 이란 건물이 남아있다.
나흘 동안의 일정을 끝내고 간사이공항행 열차에 올랐다. 들러 본 유적 중에 한민족도래인이 세웠거나 만들었다고 정직하게 기록한 설명판은 겨우 서너 개에 지나지 않았다. 1910년이래 일본은 일본땅에 남아있는 우리문화유산에 대한 기록은 현장에서든 서적에서든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일부 성씨는 중국 것으로 바꾸기도 했다.
종전 후 다행히 황국사관을 비판하는 학자들이 출판금지를 당하면서 까지 고대 한일간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연구서적을 많이 출간했고 지금은 객관적 사관을 가진 학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학생용 교과서에 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정부간이 아닌 한일국민들 사이의 진정한 우호관계는 두 나라 사이의 역사를 사실대로 인정하고 이를 후세에 정직하게 전달하는 자세의 바탕 위에서만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9. 9. 28.
권 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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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은데~~
공부는 않고 증명사진만 찍고 돌아다닌게 후회 됩니다.가 본곳도 몇군데 있는것 같은데 .......
소중한 자료 잘보았습니다.몰랐던거 알게되 좋으네요.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