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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스가랴-01 열조를 본받지 말라(스가랴 1장 1-6절)
성경말씀은 스가랴서 1장 1절에서 6절까지 봉독합니다.
[스가랴 1장]
1 다리오 왕 이 년 팔 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6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2008년도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성경말씀을 따로 본문을 선택하지 않고, 그저 대하설교 흘러가는 대로 스가랴서를 우리가 살펴볼 차례인데,
그런데 제목이 오늘 주보에 보시면,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제목이 좀 이상하죠?
그런데 성경에 있는 말씀을 제목으로 한 건데, 다시 말하면 저도 언젠가 이렇게 보니까 나이가 6학년이 된 거예요.
그래서 살아온 것을 보니까 우리 젊은 사람들 앞에 이런 저런 부끄러운게 더러 있어요.
그리고 그 부끄러운 것이 제가 독자적으로 잘못한 것도 있지만, 가만히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하던 것을 본받아가지고, 우리 아버지의 일생을 냉철하게 분석해볼 때 좋은 것도 더러 본받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놀랍게도 좋지 않은 것까지도 본받은 것 같아요. 제가..
좋지 않은게 뭐냐 하면, 마음이 소심하다는 거야.
여러분 보기에는 제가 소심하지 않은 것 같이 보이죠.
사실은 굉장히 마음이 소심한 거야.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일본에도 세번씩 갔다오고, 한국조선 팔도는 금광과 탄광이 있는 곳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가셨어요. 다이나마이트 기술자니까..
그렇게 하셨으면서도 마음이 소심해가지고 좀 대도시로 가서 자리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제가 3학년까지 살던 데에서 제가 일곱 중에 다섯 번째로 태어났거든요.
그러면 거기에 살다가 온 세계로 견문이 넓어졌으면 좀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뭘 할려고 한게 아니고, 제가 3학년때 더 산골짜기로 간 거야.
오히려 우리 어머니는 조금 대범한데 우리 아버지가 마음이 소심해요.
그리고 대사를 도모하지 않는 성격이야. 큰 일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 것까지도 제가 닮았다는 거야. 지금보니까..
별로 좋지 않은 건데..
인생이 한번밖에 없는데 너무 위축되게 그렇게 살아왔어요.
저도 보니까 저는 원래가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겁이 많아요. 사람을 겁내는 거야.
호랑이는 별로 겁 안 나는데 사람이 겁이 나가지고 여러분 저에게 겁주지 마세요.
그래서 그렇게 돌아보니까, 이만큼 되니까 전에는 제가 저를 돌아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삶을 돌아보고 내 삶을 돌아보니까 내가 아버지에게서 그 안 닮아야 될 것도 닮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 청소년 젊은 분들, 할머니 할아버지는 별로 해당이 안 됩니다.
이미 열조를 본받고 말고 할 때는 다 지나갔으니까..
젊은 사람들 볼 때 선배들이 잘 하는 것은 물론 본받아야죠.
잘못한 것까지 본받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잘 하는 것을 어른들이 잘 하는 것을 본받고, 잘못한 것을 본받지 않으면 우리 역사는 발전합니다.
잘못된 것까지 본받아 버리면 역사를 퇴보하는 거야.
제가 역사 발전이 없는 나라를 가서 보니까, 예를 들면 이슬람권이나 불교권에 가서 보면, 조상들이 한 못된 것까지 그대로 해요.
이번에 성지순례 같이 갔던 분들이 이집트에서 순례하면서 그 가이드가 자꾸 하는 말 들었죠?
참 이상하다는 거야. 이집트 사람들은..
쉬운일을 어렵게 하기 위해서 무지무지 노력한다는 거야.
쉬운 일을 쉽게 할려고 머리를 안 쓰고 쉬운 일을 어렵게 할려고 노력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른들이 한 그대로 답습하고 어른들이 잘못한 것을 비평이나 비판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해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역사가 발전하지 않아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람들이 자기 자의식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인식한다든지 그런 의식이 자라갈 때, 맨 자기 생각이라고 ‘안해! 싫어!’ 하는 말을 보통 빠른 애들은 3살에도 하고 4살때쯤 대개 싫어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참 놀라운 일 아닙니까? 싫기는 뭐가 싫어.. 지가..
그런데 엄마 아빠가 오죽하면 옳게 시키겠어요? 그런데 싫다는 거예요.
그럴 때라도 그런 거부의 의사를 나타낼 때지만 그래도 4살 때쯤 되면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아버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대요..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다.
그러니까 조금만 하면 아빠한테 일러준다고 하죠?
아빠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4살때..
그러다가 10년 지나서 14살 되면, ‘아빠요? 한마디로 세대차이나요.’
14살 때에는 모든 아이들이 한마디로 세대차이 난다 이렇게 말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10년 더 지나서 24살 25살 되면, ‘글쎄 아버지를 이해는 하지만 한마디로 답답합니다.’ 이해는 하지만 엄마 아빠가 한마디로 답답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10년 더 지나서 34살쯤 되면, ‘아버지 말이 맞는지도 몰라..’
그런데 34살쯤 되면 아버지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44살쯤 되면 ‘내가 잘못됐다.’
44살 쯤 되었을 때 ‘내가 잘못되었고, 아버지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때는 이미 대개 늦었습니다.
44살쯤 되면 상당히 성격이 굳어지고 방향도 직업도 거의 다해가지고 후회하게 되고..
54살쯤 되면 사람이 겸손해지게 되면서, 64살 되면 ‘내 삶에서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보통이예요. 특수한 사람 말고, 보통사람이 가는 길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리고 60살이 넘어가서는 ‘오늘의 나를 보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
그러면서 사람이 그렇게 성숙해가는 거죠.
그러니까 어릴 때와 부모를 생각하는게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거죠.
여기 청년들이 나이가 30살인데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답답해.’ 하면 성장을 안 하는 거야.
20대에서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답답해 보이고 그렇게 하다가 34살쯤 되면서 좀 달라져야 되고,
그런데 그럴 때 제가 여기 스가랴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하신 말씀을 지금 이야기 할려고 해요.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 혹은 선배 아니면 목회자 아니면 우리 장로님들 권사님들 먼저 믿은 사람들 오래 믿은 사람들 어떻든 범사에 앞서 가는 사람들이 잘 한것이 있으면 그것을 정말 기리고 본받고 흠모하고 그렇게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제발 부탁인데 우리 잘못한 것, 나이든 사람들이 잘못한 것은 본받지 마세요.
제가 돌아보니까 그 외에도 이런 저런 것 잘못한게 더러 보이는 거예요.
‘내가 그 때 그렇게 안 했어야 되는데..’ 그렇게 보이는 거죠.
그런데 내가 나를 볼 때 딴 사람은 얼마나 많이 보였겠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비쳤겠나..
자기 자신은 자기를 잘 못보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볼 때 잘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떠들고 다니라는 말이 아니라, 잘못하는 것을 볼 때, 자기를 돌아볼 수 있어야 돼요. 젊을 때..
그래서 조용히 고치면 우리 역사는 발전합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가랴 1장]
1 다리오 왕 이 년 팔 월에,
지난번에 우리가 학개서를 볼 때에는 다리오 왕 2년 6월에 이렇게 하는 것을 봤는데, 다리오 왕 2년 8월에 이렇게 해요.
이 다리우스가 BC518년내지 519년 정도에 등극을 했던 사람 같아요.
그런데 그 때
..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이 가문도 제사장의 가문이예요.
..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잇도라는 이름은 많이 알려진 이름인데, 베레갸라는 이름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베레갸가 아무래도 스가랴의 아버지가 조금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스가랴라는 이름은 아마 어쩌면 이스라엘 사람들 이름 중에 제일 흔한 이름이 아니겠는가..
시몬이라는 말도 좀 많이 나오는 이름이죠. 시몬..
그런데 아마 제가 보는 대로는 스가랴라는 이름이 제일 많은 것 같아요.
성경에 나오는 스가랴가 제가 나름대로 찾아보니까 한 30명 이상입니다. 30명 이상이 스가랴예요.
여러분 ‘스가랴’와 ‘사가랴’ 같은 이름입니다.
스가랴라고도 발음하고 사가랴라고도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스가랴나 사가랴 누가 있어요?
이 스가랴 말고..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사가랴죠. 그리고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도 스가랴죠.
그 외에도 스가랴가 30명 되니까..
그 스가랴라는 이름은 뜻은 ‘여호와는 기억하신다’는 거죠.
하나님은 건망증 환자가 아니고 아주 기억력이 그야말로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그런 완벽한 분이죠.
그러니까 한번 말씀하시고 말씀하셨는데 그냥 세월이 지나간단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할 때 꼭 하나님이 우리 같은 줄 알고, 우리는 깜박 깜박 잊어버리잖아요.
잊어버리고 무관심으로 지나가다가 지나놓고, ‘어?’ 그러면서..
이렇게 되지만, 하나님 그런 일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쭉 보다가 깨달은 것이 이스라엘 백성중에 믿음이 있는 가정 믿음이 있는 가문 그런 데에서 하나님 하신 일을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 한번 말씀하신 후에 반드시 그것을 기억하시고 이루시는 것을 봤다는 얘기죠.
그것도 한번 두번 본게 아니고 여러 번 그런 것을 보고는 그 아들 이름을 짓기를 ‘여호와는 기억하신다’고 이름을 지은거죠.
그런 이름을 지은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사람만 해도 한 30명이 넘는 것을 볼 때에, 그래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고 믿고 아들 이름까지 사가랴 스가랴라고 짓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신앙의 맥이 이어져 올 수 있었다는 거야.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으로, 절대로 기억력 나쁜분이 아니고, 하나님은 철저히 기억하시는 분으로 믿었다는 거예요.
그런 이름들이 제사장 가문에 많은 것 같이 보입니다. 볼 때에..
그러니까 아무래도 제사장 가문쪽에서 믿음이 좀 이어져올 수 있는 확률이 높지 않느냐.
지금도 목사 가문의 아들이 다 착하다는 보장도 없어요.
제가 볼 때는 목사 아들이 더 못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애들은 목회자 가정이니까 ‘목사 아들이 되어가지고.. 너는 목사 딸이야’ 하고 윽박지르니까..
강요된 경건이 반발심을 일으켜가지고 영 어긋나고 이런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아이들을 지도할 때 그냥 경건도 없이 내 풀어도 안 되고, 너무 경건을 강요하게 되면 반발심이 일어나요.
그래서 일부러 빗나가는 행동을 해요.
우리 성지순례 인도했던 가이드가 자기 아버지가 목사님인데, 얼마나 목사님인 자기 아버지 싫어하는 것만 골라가면서 하고 빗나가다가 그저 어디에서 복사해 준 노목사 강의 CD를 듣고 깨달아가지고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 셋을 기르면서, ‘목사 아들이다 목사 딸이다’ 해가지고 경건을 강요하지 않을려고 노력하고, 그렇다고 또 내버려놔두면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적당하게 한다는게 참 어려워요.
여기 스가랴도 제사장 가문이고 예레미야도 제사장 가문이고 에스겔도 제사장 가문이고 세례요한도 제사장 가문이고 사무엘도 제사장 가문이고..
제사장 가문에서 인물들이 더러 나기는 했는데, 아까 말씀드린대로 목회자 가정이라고 다 착한 아들만 나는것 같지는 않아요.
여러분 목회자 가정에서 천하의 무신론자가 난 사람 많습니다.
무신론자가 목회자 가정에서 난 경우가 상당히 있어요.
반면에 또 굉장히 위대한 인물이 목회자 몇대 가정에서 난 그런 경우도 있는 거야.
제가 확인은 못했는데, 제가 듣기로 칼바르트 같은 경우는 19대째 목사 가정이라는 거예요.
19대째.. 굉장하죠?
그래서 여기 스가랴라는 사람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면, 이 사람은 젊어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아마 바벨론에서 태어났죠. 바벨론에서 태어나서 그가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가 12살이나 13살. 아니면 11살..
하여튼 10대 초반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거예요.
돌아와서 1년 2개월만에 성전 기공식을 할 때 그 때 스가랴는 아마 12살 13살 정도 되고 떡이나 먹고 성전 기공식을 하면서 빵도 먹고 하니까 좋아서 날뛰고 했던 그런 아이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 아버지 가정이 제사장 가문이다 보면 그런 일에 가까이에서 보고 즐거워 했을 텐데, 무슨 애들이 보기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성전을 건축하다가 중단된채 한 15년 씩이나 방치되는 그런 것을 목격하다가 그래도 자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할지라도 잇도의 손자로, 잇도라는 어른의 지도로 경건훈련을 받다가 이 아이가 하나님 음성을 들은 거예요. 한 30살쯤 될 때..
그래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2절이죠.
2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지난번에 우리가 스바냐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이런 책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셨는가 이런 것을 보셨겠죠.
그런 것을 안 봤으면 이런 말도 하나도 이해가 안 돼요.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 잡혀가게 하기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우리가 읽어왔으니까 어느 정도 이해가 되겠죠?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자, 이리 보세요.
우리 세상 인간세상에는 조금 다릅니다.
인간세상에는 자녀가 잘못하는 수가 있고, 또 부모가 잘못하는 수가 있어요.
대개 부자지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세히 보면 자녀들이 잘못하는 수도 있고 부모가 잘못하는 수가 있고, 양방 다 잘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잘 했는데 문제가 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녀가 잘못했거나 부모가 잘못되었거나 해가지고 관계가 벌어집니다.
그럴 때 그 부자지간에 관계가 깨어지거나 아픔이 있거나 이럴 때 결국은 누가 손을 먼저 내미는 거예요?
누가 먼저 말을 걸고 시작합니까?
그것은 원칙이 없어요.
부모가 먼저 말을 꺼내는 수가 있고, 아들이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 하는 수도 있어요. 그렇죠?
그럴 때는 그러면 제일 쉽습니까? 그렇죠?
아들이 자기가 얻어맞고 잘못한줄 알고 진심으로 와서,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그러면 다음에 그럴 값이라도..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하면 다 용서해요. 아버지 어머니가..
그래서 인간세상에서는 부모나 자식이나 서로 잘못할 수 있고, 어느 한쪽이 잘못할 수가 있는데,
하나님과는 안 그래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하나님은 한번도 잘못한 적이 없어요. 맞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야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누가 돌아와야 돼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돼요.
하나님이 가서, ‘야 내가 잘못했다. 이해해라.’ 이렇게 할 수 없어요. 도저히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성경을 아무리 봐도 예수님께서 ‘미안하다.’ 그런 말 한마디도 없습니다.
한번도 예수님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이런 말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도 안 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하나님은 잘못이 없기 때문에 천상 관계에 회복될려면 사람이 돌아와야 돼요.
그래서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안 돌아옵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야.
이게 일반적으로 사람들 세계는 아버지가 잘못하는 수가 많이 있다니까..
그러니까 ‘야 내가 잘못했다. 이해해라. 그만..’ 그렇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게 안 돼..
그래서 천상 사람이 돌아와야 돼요.
사람이 자기 힘으로 돌아오느냐 하면 잘 안 돌아와요.
그래서 누가 필요하냐? 그래서 목사가 필요하고 전도사님 권사님 장로님이 필요하고 먼저 믿은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이렇게 누가 좀 도와줘야 돼요.
그래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실 때는 ‘돌아오면 받아주겠다, 용서하겠다, 돌아오기만 하면 관계가 회복 되겠다’ 하는 마음만 열어둔 것 뿐이지, 돌아오는 것은 사람이 해야 돼요.
그러니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반드시 사람이 먼저 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은 잘못이 없으니까..
그런데 잘 안 돼요.
그러니까 인간이 깨닫지 못하거나 인간이 깨닫고도 고집을 부리거나 하면 아무리 세월이 가도 하나님 편에서 와서 ‘야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안 된다는 거예요.
반드시 사람이 돌아와야 돼요.
그래서 상담이 필요해요.
우리 기독교 신앙이라는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 관계를 잘 이해해야 돼요.
하나님의 우리 인간과 다른 면이 있어요.
여러 가지가 우리 육신의 아버지와 비슷한데 딱 한가지 다른게 하나님께는 잘못이 없어요. 단 한번도 하나님은 잘못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잘못되었을 때는 사람이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와야 된다. 이것을 아주 분명히 해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사람이 삐어져 있는 그것처럼 미련한게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잘못이 없는데 지가 삐어지면 어떡할 거예요. 지만 손해지..
사람들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잘못해요. 아버지가 나도 보니까 나도 잘못한게 더러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로 잘못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삐어지는 것은 말이 안 돼요.
그런데 가끔 그런 사람이 있어요. 보면..
하나님을 잘 이해를 못해서 그래요.
자기가 잘못해놓고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러시는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교통 사고를 내놓고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가..’
아니 하나님이 할일이 없어서 교통사고 냈겠어요?
그것은 상대방이 낸 것이거나 내가 낸 거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래서 삐어져서 교회에 안 나오고 그런 사람이 있어요.
여기 말고 딴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를 제대로 안 한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절대로 어려움 닥쳐도 삐치고 토라지고 그러면 안 됩니다.
절대로 하나님 잘못이 없어요.
잘못된 것은 우리가 잘못된 거야.
아니면 내게 가해한 그 사람이 잘못된 거죠.
그래서 4절에,
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그 열조가 자기가 잘못해서 맞아놓고 삐치고 토라지고 그러한 거야. 그러니까 그런 것 본받지 말라는 거야.
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돌아온다’는 말이 무슨 공간적인 돌이킴이 아니라, 자세 삶의 자세죠.
지리적 공간적인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돼요.
마음으로 생활로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는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탕자같은 사람처럼 돌아온다는 것이, ‘이에 돌이켜’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돌이켜’ 라는 말이 헬라어 원어에 보면 ‘제정신이 나서’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삐어지고 토라지고 돌아서고 멀어지고 하는 것은 이게 본정신이 아닙니다. 이게..
본정신 제정신이 뭐냐? 돌아오는 거예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악한 길 악한 행실에서 떠나서 돌아오는게 제정신이예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잘못했지만 그래도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 이게 정보예요.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정보인데 이게 복음이죠.
하나님은 받아줄 마음이 있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할 마음이 있고 그러니까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니까 여러분 탕자의 비유라는 얘기가 진짜 복음중에 복음이예요.
그 아들은 분명히 잘못된 거죠.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고 갔으면 갈 때 주의사항도 말해주고 더 챙겨줄 수도 있었는데, 말도 하지 않고 가서 자식이..
벌써 가서 다 탕진하고 창기와 함께 먹어버리고 그랬어도 아버지 마음은 그런 것 재산을 먹어버렸다 언급도 하지 않고 건강하게 돌아온 것 때문에 잔치할 마음밖에 없는..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5절,
5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그러니까 열조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고 밤마다 문열어놓고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안 돌아오고 죽어버려..
여러분 안 돌아오고 안 돌아오고 하다보면 조금 있으면 못 돌아옵니다.
안 돌아오는게 아니라 못 돌아오는 거예요.
열조가 다 죽어버렸잖아.
선지자가 맨날 부르고 있겠습니까? 때로는 선지자가 끊어지는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까이 계실 때 만날만 할 때 돌아와야 돼요. 사람이..
그래서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다 죽었지 않느냐? 돌아오지도 못한채..
그리고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여러분 선지자도 노목사도 아무도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오래 건강해서 추태부리지 않고 사역할 수 있는 충성할 수 있는 어떤 기회가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은 일반적인 마음이죠.
홈페이지에나 메일에 그래요. 33살 먹었다는데, ‘목사님 저보다 더 오래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내 아들이 성경강좌 들으러 갈 때까지 사십시오.’ 그런 사람도 있고,
‘목사님 죽지 마세요. 목사님 아프지도 마세요.’ 그런 말들이 나오는데,
사람이라는 것은 그저 70이요 강건하면 80인데, 잘 건강 간수해가지고 혹 우리 사회에 우리 지금 현대사회에서 100세 넘은 사람 가끔 있지만, 오래 살지 못해요.
오래 산다고 나이 들면 기억이나 총명이 유지가 안 되거든요.
저나 여러분이나 벌써 후반전에 들어선 사람들은 떠나는 날 받아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야.
얼마 안 가서 다 떠납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오래 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보다 더 잘 배워야 돼요. 열심히 배워야 돼요. 열심히..
그래서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6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열조에게 내가 한 말이 전부 다 임하지 않았느냐?
..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이런 말이 가끔 나오는데 참 어렵죠?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화가 나시고 나중에 ‘돌아오라 돌아오라’ 해도 끝까지 안 돌아오면 그냥 마음먹은 대로 다 해버려요. 마음먹은 대로..
그래버리면 끝장 나버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대로 처단해버리면 우리 중에 아무도 여기에 앉아 있을 사람 없어요.
그래서 오래 참으시고 또 기다려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 앉아있는 거죠.
7 다리오 왕 이 년 십 일 월 곧 스밧월 이십 사 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는 스가랴같고, ‘사람이’ 할 때, 사람은 천사 같고,
‘홍마’는 그냥 붉은 말이예요.
주석하는 사람이 ‘홍마는 뭐다. 자마 백마는 뭐다.’ 하는데, 홍마는 그냥 붉은 말입니다.
화석류 나무를 보통 우리 학명으로 속이나무라고도 하는데,
홍마 자마 백마는 그냥 ‘색깔이 다양한 말들이 있더라’ 그러면 돼요. 깊은 뜻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으면 어딘가 흔적이 있어야 되는데, 없습니다.
9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거기 줄을 그으세요.
스가랴라는 예언자가 30살 쯤 되는 예언자인데, 아직은 미숙하고 별로 성경이라든지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깊은 어떤 지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뭘 보기는 잘 보는데 봐도 잘 모르니까 물어요. 천사에게..
계시를 보여주는 천사에게 계속 묻는 얘기가 나와요.
여러분 묻는 신앙이 좋은 신앙이예요.
한국사람은 학교에서부터 묻고 질의하고 대답하고 하는게 잘 안 돼요.
일방적으로 그냥 주입하고 암기하고 끝나버리고, 대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고등학교까지는 우리가 세계 학업성취도가 1위인데, 대학가면 꼴찌가 되어버려요.
묻고 대답하는게 안 되어서 그래요.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날에 우리가 어릴 때 초등학교때에 중학교는 해보지도 못했고, 초등학교때에 선생님 바라보고 책상을 줄줄이 하지 않고 책상을 그룹별로 만들어서 시도한 적이 있었어요.
그게 어디에서 온 거냐 이스라엘에서 온 거예요.
워낙 묻고 대답하는게 안 되어가지고 토론식 수업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스가랴의 좋은 점은 묻는다는 거야.
모르는게 있을 때 묻는 신앙이예요.
우리나라 학교나 교회도 마찬가지죠.
한국교회에 묻는 문화가 없어요.
목회자에게 질문하고 대답하고 이런게 없는 거야.
성도들도 안 묻지만 모처럼 누가 물으면 목사님은 그것을 굉장히 기분나쁘게 생각해요.
‘뭘 그냥 따지기는 따져? 그냥 믿어!.’
그러면 다시는 질문을 못하는 거죠.
또 물어도 답이 안 나오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잘 안 묻는데, 저는 학교다닐 때부터 물었습니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교수님에게 또 질문같은 질문을 해야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 강의하는 사람 기분나쁩니다.
그러니까 꼭 물어야 될만한 것을 물으면 그것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덕을 봐요.
그래서 제가 교수님께 물을 만한 것을 물으니까 교수님이 저를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부산 신학교 생기고 나서 100% 장학금 제가 처음 받았어요.
잘 물어야 돼요.
스가랴는 보는 것마다 다 묻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스가랴가 묻는 것을 볼텐데,
9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알았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야.’
누가? 홍마 자마 백마 이런 말을 탄 사람이 땅에 두루 다니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이라는 거예요.
물어봅시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한 것 믿습니까?
그러면 홍마 자마 백마가 안 가보고 보고 안 해도 하나님 다 아시겠죠?
그런데 뭐하러 보냅니까?
안 물으면 아는데 물으면 잘 모르시죠?
아니 하나님은 전능하시면 다 아실텐데, 꼭 천사 귀찮게 보내가지고 돌아보게 하느냐?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이 다 처리하는게 아니고, 영적 세계의 일을 처리할 주체가 천사들이예요.
그래서 가서 보고 보고하면 그 보고를 받아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나님은 다 아시지만 천사는 다 몰라요.
그래서 천사들이 돌아보는데, 그러니까 매일 같이 천사들이 이렇게 돌아보는 거야.
우리 오늘 샤론교회도 천사들이 다 돌아보고 가는 거야.
‘예배 다 나왔더냐?’
‘대체로 다 나오는데 오늘 몇사람 철쭉 구경 갔습니다.’
그렇게 돌아보고 천사들이 보고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거기 11절에,
11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줄을 그으세요.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
이분은 일반 천사와 다릅니다.
‘말라크 야웨’라고 하는 이 분은 천사들에게 보고를 받는 입장이예요.
모든 굉장한 천사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또 이 여호와의 사자는 그 보고를 받은 다음에 하나님께 중보하는 장면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모든 천사를 관장하고 그리고 어떤 사안은 하나님께 중보하는 것을 볼 때에 여기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님이실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거의 공통되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호와의 사자로서 그렇게 천사들을 관장하고 천사들을 파송하고 보고도 받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정온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샤카트라는 말인데, 조용하다 편안하다 아무 일 없다. 이런 뜻이예요.
그래서 천사의 보고가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그러면 상당히 긍정적인 보고죠?
온 땅이 평안하고 그때만 해도 쇠고기 파동이 난 것도 아니고,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다는 거예요.
그 때 12절에,
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사자가 응답하여 가로되,
그러니까 보고는 천사에게로부터 받았어요. 그렇죠?
홍마와 자마와 백마를 타고 나가서 온 세상을 두루 돌아보고 온 천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그 여호와의 사자가 어떻게 응답하느냐?
..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이리 보세요. 지금 천사에게 하는 말이 아니죠.
보고는 천사에게 받아서 말씀을 누구에게 하는 거죠?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하는 거죠.
..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예루살렘에 대해서 진노하셔서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이 징벌을 받은 것이 70년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고 여호와의 사자 예수님께서 중보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세상 일이 바빠서 정신없는데 이렇게 품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모두가 정리되고 정온하다 하니까..
이해가 됩니까?
다른 특별한 별일이 없고 온 땅이 평온하여 정온하다하니까 하나님께 예수님의 견해를 품하는 거예요.
예루살렘을 노하신 지가 70년이 되었는데, 이제는 용서하실 때가 되셨지 않은가.. 이렇게 품하는 장면을 볼 수 있어요.
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품하는 것을 듣고는 예수님보고 답하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홍마와 자마와 백마를 탄 천사들에게 선한 말씀으로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장면이나 분위기 파악을 잘 해야 돼요.
이런 것을 볼 때에 요절 한절은 아무 의미가 없고, 실제로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고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 계시고 두루 돌아보고 있는 천사들이 있고, 예언자가 있고 그리고 그 사이에 예수님이라는 여호와의 사자라는 중보자가 있어서,
지금 그 시대에 무슨 얘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을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돼요.
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이 천사는 스가랴라는 예언자를 불러가지고,
..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5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이것 상당히 의외예요.
앞을 보세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정치를 한다든지 목회를 하면 보고를 받을 때, 아무일 별일 없고 온 땅이 평온하고 정온합니다.
이렇게 하면 ‘음 그래? 다행이다. 수고했다.’ 이렇게 하는게 상식이죠.
그런데 여기는 전혀 달라요.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다 할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노하신지 70년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씀드렸더니,
그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해서 내가 질투한다.’ 하시면서 무슨 얘기냐?
‘내가 원래 앗수르나 바벨론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손봐주라 할 때, 나는 조금만 노한 거야. 원래는..’
조금만 노해서 조금만 손봐라 했는데, 이 자식들이 가서 제멋대로 힘을 내어서 고난을 더했다는 거야.
심지어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라버리고, 노인들까지 학대를 해버리고, 이런 야만적으로 했다는 거야.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은 오히려 예루살렘을 위하여 너무 심하게 얻어맞은 예루살렘 그리고 너무 심하게 얻어맞은 시온을 향해서 오히려 질투한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혹시 누가 잘못했다 할지라도 미워하거나 또는 징벌도 어지간히 해야지..
내 감정을 더해가지고 너무 심하게 해버리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얻어맞은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 질투한다는 거예요.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 하나님께 잘못한 것 맞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릴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데, 때리는 놈이 자기 감정을 보태어서 너무 세게 때렸다는 거야.
‘너 이리 와. 너 왜 세게 때렸어 자식아.’ 하고 때린 놈을 손봐 줄 마음이 있다. 그런 얘기예요. 굉장히 섬세한 하나님의 감정이죠.
그래서,
..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다시 예루살렘에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게 한다는데, 앞을 보세요.
왜 이 말씀이 나오느냐 하면, 지금 성전 건축하다가 중단된지가 한 15여년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부 사람들이 낙심이 되어가지고 이러다가 건축도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나중에 읽어가다 보면 알겠지만, 저렇게 스룹바벨이 나약해가지고 학문과 지식은 있는지 몰라도 지도력이 저렇게 없어서 뭐가 되겠나 말이야.
이러다가 예배당 짓지도 못하는 것 아냐?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 좀 더 나중에 비약이지만 미리 언급을 하자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이방여자를 취해서 아내를 삼았어. 보나마나 바벨론에 자기 본 부인이 있을 텐데..
이런 것을 가지고 전부 다..
이래가지고 뭐가 되겠나 하면서,
성전이 중단된 것도 지도자가 무능해서 그렇다..
전부 지도자에게 덤태기를 씌워서 안 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때 학개 선지자가 나와서 ‘무슨 소리냐고..’
건축이 중단되었을 때,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안 되었다든지 하나님 뜻이 아닌가 보다 한다든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 같다든지, 스룹바벨이 시원치 않아서 그렇다.
이런 식으로 말들이 오고 갈 때 학개 선지자가 와서 무슨 소리냐고 말이야.
‘하나님의 뜻이니까 고레스 칙령이 난 것이 아니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와서 전을 건축하라.’ 이렇게 하는데,
그 학개 예언자는 불과 4개월 정도 사역한 것 같아요. 보니까.. 4개월 정도..
그런데 그보다 2개월 늦게 출발한 이 스가랴는 상당히 오랫동안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데,
그래서 그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시면서 너무 얻어맞은 예루살렘에 대해서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다시 택할 것이고 거기 내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 하나님의 집이 지어진다.
여기 우리가 구약성경에 이런 예언자들을 보면 대부분은 죄를 책망합니다.
그 시대의 죄악을 책망하고, 지도자 방백 왕이나 제사장이나 아니면 거짓선지자나 재판장이나 이런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하는데,
놀랍게도 예언서 중에 딱 두권이 아무 책망이 없는 책이 없어요.
지난번에 우리가 본 요엘서라는 책이 책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스가랴서도 책망이 없어요.
왜 책망이 없느냐 하면, 요엘서때에는 책망을 하다가 하다가 안 되어서 하나님이 세게 때렸습니다.
이중 삼중 사중으로 때린 후이기 때문에 책망이 없는 그런 입장이었고,
여기 스가랴서에는 왜 책망이 없느냐?
이것은 한 두가지 세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바벨론에 가서 호되게 댓가를 지불하고 왔어요.
둘째는 학개라는 예언자가 100살쯤 되는데 추상같은 위엄이 있는 학개 예언자가 호되게 책망을 한 후입니다.
세 번째는 스가랴는 나이가 젊어요.
그런 백발이 성성한 어른이 책망을 했는데, 젊은 애들이 나와서 떠들어봐.. 책망할 수 없죠.
그래서 몇 가지 원인들 때문에 스가랴서는 전혀 책망이 없다는 거예요.
책망보다 오히려 위로와 소망쪽에다가 비중을 두는 그런 예언서가 이 스가랴서예요.
그러니까 이 책의 성격과 이 책이 주어졌던 그 배경과 분위기를 알고 읽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그러니까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진다는 것은, 꼭 누가 가서 예루살렘 도시에다가 먹줄을 튕기는게 아니라 도시계획을 한다는 거예요.
마음을 넓혀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예루살렘에 먹줄이 친다는 것은 도시 계획을 한다. 도시건설할 계획이 있으니까 도시 계획하는 거죠.
..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지금은 아니거든요. 이 예언서를 쓸 때 현실은 아니지만, 곧 머지않아 미래 미구에 다시 풍부할 것이다.
..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18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내가’는 스가랴죠.
19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또 묻죠? 모르면 물어야 됩니다.
우리 한국사람은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그러니까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고..
그러면 곤란하다는 거야. 모르면 물어야지..
..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뿔’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케렌’이라고 하는데, 뿔을 가지고 이 사람들이 잔을 만듭니다. 잔.. 물소뿔로 잔을 만들기도 하고 여기서는 그 잔이 아니고 그냥 뿔입니다. 뿔..
소나 양의 머리 위에 붙어 있는 뿔..
20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여기 ‘공장’이라는 말은 공장이 아닙니다.
억양을 공장(工場)을 해버리면 엉망이 되어 버려요.
공장(工匠)하는 말은 어려운 말인데, 장인 기능공.. 히브리어로 ‘하라시’라고 하는 말인데, 기술자 이런 말이예요.
이런 것은 공장이라는 번역하면 안 되고 ‘기술자나 장인’ 이렇게 하면 좋겠어요.
21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떠받아서 흩어지게 한 뿔은 앗수르라는 나라죠. 뿔이 그런 것이고, 유대인들을 그렇게 흩어지게 하는 것은 바벨론이라는 뿔이 그렇게 한 거야.
이런 큰 뿔 가진 큰 강대국의 뿔을 빼어 버릴려고 천사가 파송되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좀 크다고 힘좀 있다고 까불고 하다가는 빠질 수가 있어요.
옛날에 한니발이 그랬고 로마가 그랬고 앗수르 바벨론 애굽 다 그랬고, 독일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고 러시아가 그랬고..
하여튼 큰 나라라고 까불다가 뽑힌 나라가 많잖아요.
2장에,
[스가랴 2장]
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척량줄’ 하는 것은 줄자예요. 줄자..
길게 줄로 된 자를 잡았기로,
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
3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4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그 소년이 스가랴입니다.
여러분 소년이라고 해서 초등학교 5학년 그런게 아닙니다.
보통 30살 40살 되어도 ‘보소서 나는 아이라’ 그렇게 해요.
이게 히브리인들이 그런 면에서는 꼭 우리 경상도 사람 같아요.
어제도 산에 갔는데 ‘얼마나 갑니까?’ 하니까 ‘한시간만 가면 충분합니다.’ 하는 거야.
가보니까 두시간 넘어 걸리는 거야.
내려오는데 한시간 더 걸려보니까..
한국 특히 경상도 사람은 ‘요 아래’ 그러면 200m 그런게 아니고 50리 아래야.
‘요 전에’ 하면 두주간 되었는가 물었더니 6.25사변 전이야.
이런게 히브리인들의 과장법 이런 것들인데, 잘 알아들어야 돼요. 어감을..
그래서 여기 그 ‘소년에게 ’한다해서 어린애가 아니고 30살..
하나님께서 30살 안 된 사람을 들어서 쓴 일이 별로 없어요. 거의 30살이예요.
예레미야도 30살, 에스겔도 30살, 예수님도 30살, 세례요한도 30살, 저도 30살.. 거의 30살쯤 되어서 일 했어요.
..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그러니까 성곽이 없는 촌락처럼 되지만, 그러니까 사람이 어느 정도 될 때는 성 안에 살 수 있는데 너무 많으면 안에 살 수 없고 그렇지만 성곽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불성곽이 되어 주실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
그러니까 전체가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낙심하지 말라..
그런 얘기죠.
위로의 말씀, 위로와 소망의 말씀으로 스가랴서가 쭉 이어집니다.
6절입니다.
6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너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 하늘의 사방 바람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은 아직도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이예요.
7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1차 귀환에 돌아온 사람 말고, 아직도 바벨론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왜냐하면 지금 거기 뿔을 뺄려고 한다니까, 그 바벨론의 뿔을 뺄려고 할 때 바벨론도 크게 요란할테니까 빨리 돌아오라 그 말이야.
그 바벨론이라는 세상에 너무 오래 정 붙여 있지 말고, 빨리 하나님이 시온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까 예루살렘으로 시온으로 돌아오라, 시온은 앞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차게 넘치게 될 것이고 거기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 줄 것이지만,
지금 너희가 세상을 잠을 자고 있듯이 바벨론이라는 그 도시에 눌러 앉아있는데, 그게 요란하게 된다.
그 요란하게 되는 사건이 에스더 사건이예요. 바로..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돌아오라’ 할 때 빨리 돌아와야 돼요.
괜히 바벨론이라는 세상에 너무 오래 눌러 붙어있으면 그 뿔을 뺄 때 환난을 당할 수 있는 거예요.
8절,
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 예루살렘 사람 유대인들에 대해서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계시냐 하면, 예루살렘 사람 내 백성을 건드리기만 해봐라..
내 백성 예루살렘 사람들 건드리는 것은 내 눈동자를 범하는 거야.
여러분 누가 우리 눈동자 건드려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렇게 긍휼히 여기고 사랑스럽게 여기고 전혀 분위기가 바뀐 겁니다.
9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제는 울고 애통하고 할 것이 아니라, 노래하고 기뻐하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네게 예루살렘에게 은혜 베풀기를 시작했으니까 노래하고 기뻐하라.
..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임마누엘이죠.
하나님께서 그 예루살렘에 함께 하겠다는 거예요.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그래서 스가랴라는 예언자를 보내어서 하나님께서 이런 위로의 말씀 소망의 말씀을 하신다는 거죠.
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13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자꾸 떠들지 말라는 거야.
하나님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신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하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가만히 보고 입에 손을 대어야 돼요.
떠들지 말고..
너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 하시는 것을 보지도 못하면서 혼자 떠들어. 그러면 실수하는 거야.
너무 우려하거나 너무 염려하거나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래서 지금 현재 아주 불안하고 가진것도 없고, 성전 짓다가 한 15년 방치되니까 엉망이 되어가지고 ‘여기 뭐가 되겠나’ 하고, 계속 눈 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매우 낙심되는 일이지만, 여기 학개 선지자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은, 학개는 책망도 있었지만, 여기는 책망도 없고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그런 말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3장 4장에는 당시에 지도자들이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요.
그 문제는 조금 시간이 가야 되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다가 성전을 짓기 위해서 기공식을 하고 얼마간 공사가 진행되다가 이렇게 중단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책망과 아울러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불어넣으신 그런 말씀으로 오늘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현실을 볼 때, 정말 눈앞이 캄캄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세상은 혼탁한 가운데 어지러운 가운데 있습니다.
이럴 때에도 우리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깨달을 수 있는 지각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일할 것인지를 성실히 살펴서 그 길로 묵묵히 걸어가는 신실한 종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