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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정기 경진년 〔觀瀾亭記 庚辰〕 1820년 홍직필(洪直弼)
觀瀾亭記 庚辰
君子行。素乎患難而不失其正者。死而已。當死而死則心安而德全。是之謂有重於泰山也。亦有以時則必死。而以地則不必死。不求生以害仁。而生有難於死者。或死或生。殊塗而同歸。要盡其義之所至。而蒙難以正則一。是固無入而不自得者也。粤若莊 光之世。爲舊君死者。前後數百人。而六臣最著焉。有全身自在。不被崑岡之炎。而能守鐵石之貞衷。勵松柏之苦操。視鼎鑊其如歸。蹈參夷而不恤。與六臣異體而同腸者。卽所謂生六臣也。集贒殿直提學元先生昊。乃生六臣中一人耳。先生知有靖難之變。謝病歸鄕。逮端廟遜國于越。先生亦竄身於越之府西沙羅坪而宅焉。前臨二水合流。有石壁特立于其上。卽其地而臺焉。又亭于臺傍而曰觀瀾。默寓朝宗之義。每晨自亭而臺。東望行在。呑聲歔欷。隨日而入。不以風雨寒暑而輟焉。里中有孀婦。日洴澼于川邊。每往先生已出臨矣。其女怪而問。先生泫然曰烈女不更二夫。忠臣不事二君。吾君方在越中。故出而展望美之懷耳。其女泣曰妾將不日改適。臨流浣衣者。卽爲此也。妾雖卑賤。聞公言自然激感。不忍爲此行。遂泣下如雨。全節以畢生云。逮丁丑之變。先生服方喪三年。坐必東向。卧必東首。遂不出戶庭而終焉。余遊越中。得其事甚悉。屋毁已久。而尙傳爲元先生遺墟。老石蒼秀。蘸影于水心。想像先生英靈。赫赫在亭臺林壑之間。乘雲御風。日朝于仙寢。與六臣者列侍珠丘玉欄之傍也。嗚呼。幷時之東峯秋江諸賢。毁形以逃世。登山以採薇。而俱是韋布少年耳。其出處行藏。由己而不由人。若先生者。已登顯仕。蜚英聲矣。旣不同死于丙子之禍。則窄逕窘步。不自蹎跌者。斯已難矣。而用能見幾而作。不俟終日。因之潛隨荊蠻之行。瞻依日月之光。自伸其所在致死之義。是所謂遠不違君。死不忘國者歟。經夷險而一節者歟。六臣之死。死非得已。先生之生。生亦得所。然則死固不重於生。生且無愧於死。俱得實理于心。而成就一箇是而已。然六臣之一時殉國。卽所云慷慨殺身。先生之沒身自靖。卽所云從容取義。如先生之爲者。詎不尤難哉。天地變化而我得其正。豈不誠大人哉。村婦至無知也。纔服一言。卽發善心。臨再嫁而自悔。完一節而靡他。苟不固得聲氣之相感者。孰能與此。其入人深而化人速者。殆影響不翅。其非以不以言而以身歟。嗚呼。靖難諸人。或有聞此寡婦之行者乎。曾謂朝廷之君子。不如下邑之賤女乎。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2
고전번역서 > 매산집 제28권 / 기(記)
관란정기 경진년 〔觀瀾亭記 庚辰〕 순조 20년 1820년 홍직필(洪直弼)
군자의 행실이 평소 환난(患難)에 처하여도 그 바름을 잃지 않음은 오직 죽음뿐이다. 마땅히 죽어야 할 때에 죽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덕이 완전해지니, 이를 일러 ‘죽음이 태산(泰山)보다 더 무겁다’라고 한다. 또 시기로 보면 반드시 죽어야 하나 처지로 보면 굳이 죽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으며, 삶을 구하기 위해 인(仁)을 해치지 않으나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어려운 경우도 있다. 혹은 살고 혹은 죽는 것이 길이 다르나 같은 곳으로 돌아가니, 요컨대 의가 지극한 바를 다하여, 난을 당하여도 그 바름으로써 행함은 똑같으니, 이와 같은 경우는 진실로 어디로 들어가던 반드시 스스로 만족하게 된다.
옛날 장릉(莊陵 단종)과 광릉(光陵 세조)의 시대에 옛 임금을 위해 죽은 자가 전후로 수백 명이지만, 이중 사육신이 가장 이름이 드러났다. 그러나 몸을 온전히 보존하고 그대로 생존하여 곤강(崑岡)의 불길에 해(害)를 입지 않았으나, 능히 철석(鐵石)과 같은 곧은 충정(衷情)을 지키고 송백(松柏)과 같은 고조(苦操)에 힘써서 솥과 가마〔鼎鑊〕 보기를 마치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히 여기며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범하면서도 근심하지 아니하여 사육신과 몸은 다르나 그 마음은 똑같은 분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른바 생육신(生六臣)이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원호(元昊) 선생이 바로 생육신 중의 한 분이시다. 선생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의 변란이 있음을 알게 되자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갔는데, 단종께서 나라를 선양(禪讓)하고 영월(寧越)로 가시자, 선생 또한 영월부의 서쪽 사라평(沙羅坪)에 집을 짓고 은둔하였다.
집 앞에 두 물이 합류하고 그 물가에 석벽(石壁)이 우뚝 서있는데, 선생은 바로 그 자리에 대(臺)를 짓고 또 대 옆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관란(觀瀾)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묵묵히 조종(祖宗)의 의리를 붙인 것이다.
매일 새벽마다 정자에서 대로 나아가 행재(行在)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울음소리를 삼키며 흐느끼다가 해가 지면 돌아와서, 비바람이 불고 춥거나 덥다고 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향리에 청상과부가 있어 날마다 냇가에서 솜을 빨았는데, 갈 때마다 선생이 냇가에 나와 있었다. 과부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연을 묻자,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열녀(烈女)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오. 나의 임금이 지금 영월에 계시기 때문에 나와서 미인(美人)을 바라보는 회포를 펴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 과부가 울며 말하기를 “천첩이 불원간에 개가(改嫁)할 예정인데, 흐르는 물에 나와 옷을 빨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천첩이 비록 비천(卑賤)하나 공의 말씀을 듣고 자연히 감격하게 되니, 차마 개가를 결행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끝내 눈물을 비처럼 쏟았는데, 이 과부는 수절(守節)한 채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정축년(丁丑年)의 변란에 선생은 방상(方喪) 삼년복을 입었고, 이후 앉을 때에는 반드시 영월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앉고 누울 때에는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누우며 지냈는데 마침내 호정(戶庭) 밖을 나가지 않다가 삶을 마쳤다. 나는 영월을 유람하던 중에 이 일을 매우 자세히 알게 되었다.
고택이 허물어진 것이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원선생의 유허(遺墟)는 여전히 전해온다. 오래된 바위는 푸르고 수려(秀麗)하며 그림자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상상하건대, 선생의 영령(英靈)이 혁혁하게 정자와 대와 숲과 골짝 사이에 계시어 구름을 타고 바람을 몰고서 아침마다 선침(仙寢)에 조회하여, 사육신과 함께 주구(珠丘)의 옥난간 곁에서 나란히 단종을 모시고 있을 것이다.
아, 동시대의 동봉(東峰)과 추강(秋江) 제현이 신체를 훼손시키고 세상에서 도피하고 산에 올라 고사리를 캤으나, 이는 모두 위포(韋布 벼슬하지 않은 미천한 선비)의 젊은 분들이었으니, 그 출처(出處)와 행장(行藏)이 자신에게 달려 있고 남에게 달려 있지 않았다.
선생과 같은 경우는 이미 현달한 벼슬에 올라 아름다운 명성을 날렸는데, 병자년(丙子年)의 사화(史禍)에 같이 죽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좁은 길에 궁색한 행보였는데, 스스로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능히 기미를 보고 일어나서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고 이어서 남몰래 형만(荊蠻)으로 가는 행차를 따라가 해와 달의 광명을 바라보고 의지하여 스스로 군주가 있는 곳에서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폈으니, 이는 이른바 멀리 있어도 임금의 뜻을 어기지 않고 죽어도 나라를 잊지 않는 분일 것이며 평탄한 길을 가든 험한 길을 가든 절개를 한결같이 하는 분일 것이다.
사육신의 죽음은 부득이한 것이요 선생의 삶 또한 합당한 것이니, 그렇다면 죽음이 진실로 삶보다 무겁지 않고 삶이 또 죽음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이는 모두 그 심중에 진실한 이치를 얻은 것으로 하나의 옳음을 성취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사육신이 일시(一時)에 순국한 것은 바로 이른바 비분강개하여 몸을 죽인 것이요 선생이 몸을 숨기고 자정(自靖)한 것은 바로 이른바 조용히 의를 취한 것이니, 선생이 행하신 바가 더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천지가 변화하더라도 자신은 그 바른 이치를 얻었으니, 어찌 진정한 대인이 아니겠는가.
시골 아낙이 지극히 무지하였는데도 선생의 한마디 말씀을 받아들이자마자 곧바로 선심(善心)을 내어 개가를 앞두고 스스로 뉘우쳐 한결같은 절개를 완전히 하여 다른 뜻을 갖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공의 성기(聲氣)를 듣고 감동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남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서 남을 빠르게 교화시키는 것이 거의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빠를 뿐만이 아니니, 이는 아마도 말로써 하지 않고 실천으로써 하여서 일 것이다. 아, 계유정난을 일으킨 여러 신하들이 혹시라도 이 과부의 행실을 들은 자가 있었는가. 일찍이 조정의 군자라는 분들이 하읍(下邑)의 천한 아낙만도 못하단 말인가.
[주-D001] 경진년(庚辰年) : 1820년(순조20)으로, 매산의 나이 45세 되던 해이다.
*찬술자 : 홍직필(洪直弼) 1776(영조 52)~ 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긍필(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 아버지는 판서 이간(履簡)이다. 박윤원(朴胤源)에게 수학했다. 1801년(순조 1) 사마시에 실패한 뒤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1814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장흥고봉사·지평·부사직·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학문 연구에 주력했다. 그의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했으며,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도 통달했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의 입장에 섰으며, 임성주(任聖周)의 주기설(主氣說)을 반대했다. 심선악설(心善惡說)과 심체(心體)에 기질이 내포되었다고 보는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상이설(人物性相異說)이 세상에 큰 해악을 끼쳤다고 보아 반대했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매산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관란정기[觀瀾亭記]를 남겼다. 부친은 홍이간(洪履簡. 1753(영조 29)∼1827(순조 27))으로 1820년(순조20)1월22일 영월부사로 부임, 재임하여 1821년 4월13일 경직(京職서울 경. 職 벼슬 직)으로 이동하였다. 홍직필은 문신이자 학자인 오 희상(吳 熙常 1763~1833)과 아버지 홍이간과 함께 영월을 두루 유람하다 구름에 쌓인 선돌의 경관에 반해 시를 읇고, 암벽에 '운장벽(雲莊擘)이라는 글자를 남겼다.
[주-D002] 죽음이 …… 무겁다 : 이 내용은 한나라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의 “사람은 모두 한 번 죽게 마련인데, 죽음이 혹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혹 기러기털보다 가볍기도 하다.[人固有一死, 或重於太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趨異也.]”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文選 巻41》
[주-D003] 곤강(崑岡)의 불길 : 임금이 옥과 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죽이는 재앙을 이르는 말로 곤강은 옥이 많이 생산되는 곤륜산(崑崙山)이다. 《서경》 〈윤정(胤征)〉에 “불이 곤강을 태우면 옥과 돌이 모두 불탄다.[火炎崑岡, 玉石俱焚.]”라고 하였는데, 채침의 《서경집전》에 “불이 곤강을 태우면 옥과 돌의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않고 태우니, 만약 천리(天吏 왕자(王者))가 되어 덕(德)이 지나쳐서 사람의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고 죽이면 그 폐해가 맹렬한 불이 옥과 돌을 구분하지 않는 것보다 심하다.”라고 주하였다.
[주-D004] 고조(苦操) : 간난과 곤경에 처해서도 굳게 지키는 절조를 이른다.
[주-D005] 솥과 가마〔鼎鑊〕 : 원문의 ‘정(鼎)’은 세 발 달린 솥이고 ‘확(鑊)’은 발이 없는 가마를 가리킨다. 고대에 죄인을 삶아 죽일 때 쓰던 기물들인데, 전하여 혹독한 형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주-D006] 원호(元昊) :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觀瀾),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423년(세종5)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병을 핑계로 향리인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457년(세조3)에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거처하며 단종을 그리워하였고 단종이 죽자 삼 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에 돌아와 은거하며 문밖 출입을 하지 않다가 별세하였다.
[주-D007] 사라평(沙羅坪) : 《관란유고(觀瀾遺稿)》에 실린 〈관란정기〉에는 사내평(思乃坪)으로 되어 있다.
[주-D008] 정자를 …… 것이다 : 옛 임금을 잊지 않고 조회하고자 하는 원호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관란은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물을 구경함에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여울물을 보면 그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조종(朝宗)은 본래 《서경》 〈우공(禹貢)〉에 “강수와 한수가 바다에 조종한다.[江漢, 朝宗于海.]”라는 내용에서 나왔는데, 채침(蔡沈)의 《집전(集傳)》에 “조종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명칭이다.”라고 하였다.
[주-D009] 행재(行在) : 행재소와 같은 말로 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할 때 머무는 곳을 이르는 말인데, 단종이 귀양살이 하던 청령포(淸泠浦)의 집을 말하였다.
[주-D010] 미인(美人)을 바라보는 회포 : 임금을 그리워하는 회포를 이른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楚辭)》 〈구장(九章) 추사(抽思)〉에 “미묘한 이내 속마음을 맺어 사부(辭賦)를 지어 미인에게 올리노라.[結微情以陳詞兮, 矯以遺夫美人.]”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주-D011] 정축년(丁丑年)의 변란 : 정축년은 1457년(세조3)으로 이 해에 단종이 서거하였으므로 변란이라고 한 것이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는데, 이때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고 이어 1457년(세조3) 10월에 영월에서 사사되었다.
[주-D012] 방상(方喪) 삼년복 : 신하가 임금의 상을 당하여, 부모의 상에 복을 입는 예로 임금을 위해 삼년복을 입는 것을 말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군주를 섬기되 면전에서 직간(直諫)함은 있고 은미하게 간함은 없으며, 좌우로 나아가 봉양하되 일정한 방소가 있으며, 부지런히 일하여 죽음에 이르며, 상을 부모의 삼년상에 견줘 입는다.[事君, 有犯而無隱, 左右就養有方, 服勤至死, 方喪三年.]”라고 보인다.
[주-D013] 선침(仙寢) : 신선이 자는 곳이라는 뜻으로 ‘왕릉(王陵)’을 달리 이르는 말인데, 장릉을 가리킨다.
[주-D014] 주구(珠丘) : 구슬이 쌓인 무덤이라는 뜻으로 제왕의 무덤을 가리킨다. 순(舜) 임금을 창오(蒼梧)에 장사 지내자 새들이 물고 온 푸른 구슬이 쌓여 언덕을 이룬 데에서 유래하였다. 《拾遺記 虞舜》
[주-D015] 동시대의 …… 캤으나 : 동봉(東峰)과 추강(秋江)은 생육신으로 동봉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이고 추강은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호이다. 김시습은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자 3일간 통곡하고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고 남효온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술과 시를 즐기며 살았으며 산수를 좋아하여 전국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6] 병자년(丙子年)의 사화(史禍) : 병자년은 1456년(세조2)으로 이해 6월에 집현전의 학사 출신을 중심으로 단종의 복위를 위한 거사가 도모되었으나 실패하여, 거사 주동자인 사육신(死六臣)과 그 외 연루자 70여 명이 모두 처형되었다.
[주-D017] 기미를 …… 않았고 : 시국의 기미를 살펴서 떠남이 옳다고 판단되면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신속하게 떠난다는 말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보인다.
[주-D018] 남몰래 …… 폈으니 : 형만(荊蠻)은 본래 고대 중국의 남쪽에 있던 오랑캐 지역인데, 여기서는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지역인 영월을 비유하였다. 원문의 ‘첨의(瞻依)’는 항상 바라보고 의지한다는 뜻으로, 부모나 존장(尊長)에 대한 경의(敬意)를 나타내는 말인데, 여기서는 단종에 대한 사모의 정을 말한 것이다. 《시경》 〈소아(小雅) 소반(小弁)〉에 “우러러볼 것이 아버지 아님이 없으며 의지할 것이 어머니 아님이 없도다.[靡瞻匪父, 靡依匪母.]”라는 구절에서 나왔다. 해와 달의 광명은 임금의 은혜를 찬양하는 말로 한유(韓愈)의 〈진찬평회서비문표(進撰平淮西碑文表)〉에 “천지의 모습과 해와 달의 광명을 그려낼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뻔뻔스레 글을 지어 분부에 답하는 바입니다.[乾坤之容, 日月之光, 知其不可繪畵, 強顔爲之, 以塞詔旨.]”라고 보인다. 군주가 있는 곳에서 목숨을 바치는 의리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부인 난공자(欒共子)의 말을 원용한 것으로, 《소학》 〈명륜(明倫)〉에 “사람은 세 분에게서 살게 되었으니, 이들을 섬기기를 한결같이 하여야 한다. 아버지는 나를 낳아 주시고 스승은 나를 가르쳐 주시고 임금은 나를 먹여 주셨으니, 아버지가 아니면 낳지 못하고, 임금의 먹여줌이 아니면 자라지 못하고, 스승의 가르쳐줌이 아니면 알지 못하니, 낳아 주신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섬겨서 오직 그 있는 곳에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君食之, 非父不生, 非食不長, 非敎不知, 生之族也, 故 一事之, 唯其所在, 則致死焉.]”라고 보이는데, 《소학집주(小學集註)》에서 오증(吳證)은 “있는 바에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임금에게 있을 때에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아버지에게 있을 때에는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스승에게 있을 때에는 스승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다.[所在致死, 謂在君爲君, 在父爲父, 在師爲師也.]”라고 풀이하였다.
[주-D019] 멀리 …… 분 : 이 내용은 《한서(漢書)》 권85 〈곡영전(谷永傳)〉에 보인다.
[주-D020] 사육신이 …… 것이니 : 이 내용은 주자가 지은 〈발 장충확공가문(跋張忠確公家問)〉에 보이는 “선각자가 말하기를, 비분강개하여 몸을 죽이는 것은 쉽고, 조용히 의를 취하기는 어렵다.[先覺有言, 慷慨殺身者易, 從容就義者難.]”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장 충확공(張忠確公)은 송(宋)나라의 장극전(張克戩, ?~1126)으로 1126년 분주 지사(汾州知事)로 있던 중 금(金)나라 군대를 맞아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는데, 이때 가족 8명이 함께 화를 당하였다. 《宋史 卷446 忠義列傳 張克戩》 주자가 지은 발문은 《주자대전(朱子大全)》 권84에 실려 있다.
[주-D021] 천지가 …… 아니겠는가 : 이 내용은 당나라의 문장가 유종원(柳宗元, 773~819)이 지은 〈기자비(箕子碑)〉에 보인다. 《柳河東集 巻5》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창효 (역) |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