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기술 유출을 막는 4가지 전략
형민우 | 주간경제 814호
최근 해외로의 핵심기술 유출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기술 유출 방지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이제 우리 기업들도 기술 확보 뿐 아니라 기술 관리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선진 기업들의 사례에서 시사점을 찾아보자.
지난 10월, 국내 대기업의 주요 반도체 기술이 담긴 기밀 문서를 빼돌려 대만의 경쟁업체에게 넘겨준 뒤 미국으로 도피했던 J모씨가 본국으로 송환, 구속되었다. 12월에는 국내 주요 LCD 제조업체인 A사의 6세대 TFT-LCD 컬러 필터 공정 기술을 대만 업체로 유출하려 한 3명이 검찰에 의해 구속되었다.
산업자원부의 발표에 의하면 1998년 이후 해외에 기술을 유출하려는 단계에서 적발된 사례는 총 51건에 달하고 유출됐을 경우 피해액은 44조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작년 한해에만 사전에 포착된 기술 유출 시도는 11건이고, 피해액은 18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집계된 자료도 사실상 대기업이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기업들의 기술 유출 시도만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벤처기업의 기술 유출, 그리고 인수 합병 등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술 유출까지 감안한다면 실제 피해액은 정부 발표치를 크게 웃돌 것이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의견이다.
국내 기술력 향상으로 기술 유출 급증
기술 유출이 늘어난 첫번째 이유는 국내 기업의 기술력 향상을 들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는 주로 외국의 기술을 들여와 단순 조립, 생산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제는 CDMA, PDP, LCD 등 첨단 IT분야에서 우리 기업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쌓으면서 세계 각국의 경쟁 기업들로부터 표적이 되고 있다. 세계 경제 포럼의 2004년 보고서에서는 우리나라의 기술 경쟁력을 세계 102개국 가운데 미국, 핀란드, 대만, 스웨덴, 일본에 이어 6위로 평가하였다. 이제 우리나라도 기술 강국이라 부를 만한 수준이 된 것이다.
이렇게 국내 기업의 기술 경쟁력이 향상되자 해외 기업의 국내 기업 인수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최근 급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 기업들의 한국 기업 인수가 증가하면서 중국과의 기술 격차 폭이 점점 줄어드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례로 중국의 UT스타컴은 2004년 2월 CDMA 통신장비 업체인 현대시스컴을 매입한데 이어, 10월에는 휴대폰 제조업체인 기가텔레콤의 단말 R&D 부문을 인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CDMA 기술이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기술 유출의 또다른 이유로 인력 이직의 보편화 현상을 들 수 있다. 한국 노동 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평균 이직률은 외환 위기 이후인 1998~2001년에 22.2%로, 1993~1996년의 18.9%에 비해 증가했다고 한다. 과거 우리 사회에서 직장 이동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 부족이라는 이유로 금기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이직을 새로운 경험을 쌓고 자신의 경력 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직장인들 사이에 강해지고 있다. 또한 직장을 선택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얻을 수 있는 소득이나 명예보다는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현금, 휴가 및 자기 계발 시간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R&D 인력의 경우에 이직 보편화 현상은 더욱 크게 나타난다. 산업자원부의 조사에 의하면 ‘퇴사 시 비밀 유지 및 경쟁업체 취업 금지 서약서’를 받는 기업이 37.8%에 달하고 이들 대부분은 휴대폰, 반도체, PDP 등 IT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있는 기업들이다. 이러한 서약서의 이직 자유 침해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주요 IT 기업들이 R&D 인력 이직에 대해 매우 예민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생 직장의 개념이 사라져가는 사회 전반의 풍조를 감안할 경우 R&D 인력의 이직률은 앞으로도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법적 안전망 구축은 기본
이렇게 국내 기술의 해외 유출이 늘어나면서 기술 유출 방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특히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첨단 산업 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가칭, 이하 첨단기술보호법)”이 발의된 것은 기술 유출의 심각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증대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법 정비를 통한 안전망 구축은 기술 유출 방지에 있어서 필수 조건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기술 유출을 막을 수는 없다. 법만으로 R&D 인력의 이직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근 정부와 과학 기술인들이 모여서 첨단기술보호법 제정에 관한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치고 있는 것도 법안 자체가 이공계 인력의 이직 및 창업의 자유를 상당 부분 제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이공계 인력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켜 국가 전체의 ‘이공계 살리기’ 정책에도 역행하는 측면이 있다.
결국 법적 안전망 구축이 기업 및 국가 경쟁력을 심대하게 침해할 수 있는 명백한 ‘산업 스파이’ 행위에 제한될 수 밖에 없다면, 기업들은 법의 힘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체적인 기술 관리 전략을 실행해야 한다.
선진 기업의 핵심 기술 관리 전략
그렇다면 선진 기업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핵심 기술을 관리하고 있는가?
● 철저한 보안 인프라 구측
기업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시행해야 할 일은 보안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다. 한국과학기술진흥협회가 2000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사 업체 중 47%의 업체만이 비밀보호 규정을 보유하였고, 보안점검을 실시하는 업체는 34%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대기업을 중심으로 연구소 내 디지털 카메라, 카메라 폰 반입 금지, 파일 유출 금지 등의 정책이 실시되면서 보안 의식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중소 벤처기업에서는 이러한 보안의식 자체가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벤처기업에서 기술력은 곧 기업의 존폐를 좌우하는 핵심 자산이다. 보안에 쓰는 돈은 비용이 아니라 기업의 장래를 책임질 투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얼마 전, 일본의 히타치 그룹은 PC로 인한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2008년까지 사내 업무용 PC 30만대를 모두 사내 네트워크 단말기(NC : Network Computer)로 교체하기로 결정하였다. NC는 개인적인 정보 저장과 입출력이 불가능하고 모든 소프트웨어는 본사의 중앙 서버를 연결해야만 접근할 수 있다. 회사 측은 사원들에게 별도의 인증장치를 배포해 네트워크 사용때마다 접속할 수 있는 자격 여부를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중앙 서버와 네트워크만 관리하면 보안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연간 60만대의 PC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정작 PC의 모습은 사라지는 아이러니컬한 모습이다.
● 개발 단계에 따라 차별화 된 보상 시스템
기술 유출 경로에는 부품 및 장비에 의한 기술 유출, 기술 거래, 인수 합병, 산업 스파이 등과 같은 다양한 경로가 존재하지만, 합법적이면서도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경우가 바로 인력 이동에 의한 기술 유출이다. 사람의 머리속에 체화되어 있는 노하우는 유출 방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R&D 인력에 대한 처우 개선은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기업이 핵심 R&D 인력들에게 경쟁사보다 항상 많은 돈을 지급할 수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경쟁사보다 두배, 세배 많은 보상을 해주면 된다. 문제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얼마나 효율적으로 지급하는가가 관건이다.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바로 R&D 단계에 따라 보상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R&D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기술 개발을 통해 혁신적인 제품을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R&D를 위한 R&D, 즉 새로운 기술이긴 하지만 제품화가 불가능하거나 고객이 필요로 하지 않는 기술은 별 의미가 없다.
따라서 R&D 인력에 대한 보상도 특허 신청 및 시제품 출시 단계보다는 양산 및 대규모 매출 발생시에 파격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경쟁 기업이 가장 탐내는 기술 역시, 양산도 가능하고 고객에게도 인정받은 기술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인력 유출 시도가 많다. 기업은 기술의 가치가 가장 높은 시기에 파격적인 보상을 해줌으로써 핵심 인재 유지는 물론 자원의 효율적 활용도 도모할 수 있다.
지난 해 3월, LG그룹은 매년 시행중인 ‘LG연구개발상’ 대상으로 선정된 친환경 냉장고용 리니어 압축기를 개발한 LG전자 연구팀에게 3억 2천만원의 파격적인 보상을 실시하였다. 리니어 압축기는 LG전자가 세계 최초로 양산에 성공한 제품으로 기존 제품보다 에너지 효율이 17% 가량이나 높아 양문형 냉장고의 전력 손실 및 소음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이 같은 기술 혁신으로 LG디오스 냉장고는 지난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할 수 있었다. 핵심 인재 유지를 위해서는 이처럼 사업화에 성공한 제품에 대하여 파격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 특허와 블랙박스 전략을 적절히 활용
기업의 핵심 기술을 보호하는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은 특허 전략이다. 자사 기술에 대한 꼼꼼한 특허 출원을 통해 무단 도용을 막고, 로열티 수입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허 전략은 한계점이 존재한다. 특허를 출원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경쟁업체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특허를 도용한 업체와 분쟁이 발생할 경우 실익도 없이 수년간의 법정 분쟁으로 경비만 많이 들어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 다른 기술 보호 전략은 블랙박스 전략이다. 이는 신기술과 관련된 특허를 아예 등록하지 않음으로써 경쟁 업체의 모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전략으로 90년대 후반부터 일본 업체를 중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국내 기업에도 서서히 도입되는 추세이다. 블랙박스 전략 역시 단점은 있다. 블랙박스에 저장된 핵심 기술은 유출이 되었을 경우,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기 때문에 유출 방지에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해서는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전략을 적절히 혼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 기술이면서 부품 및 장비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경우라면 블랙박스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경쟁 기업의 모방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사의 모방이 예상되고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낮은 기술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특허 전략을 통해 무단 도용 방지 및 로열티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블랙박스 전략과 특허 전략을 적절히 구사하는 대표적인 기업이 캐논이다. 캐논은 토너, 잉크탱크 등 핵심 부품은 블랙박스로 만들어 경쟁기업들이 쉽게 모방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며, 이들 제품의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또한 생산 장비의 자체 제작을 크게 늘림으로써 장비 생산을 위탁받은 업체를 통한 기술 유출을 차단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캐논은 동시에 모방품 문제가 심각한 중국에서는 현지에 2명의 전담인력을 배치하고 특허신청을 강화하고 있다. 2002년 200건이던 특허 누적 등록건수가 2004년 800건(계획)으로 크게 확대될 정도로 중국에서는 적극적인 특허 전략을 통해 자사 기술을 보호하고 있다.
● 모듈별로 개발 프로세스를 관리
기술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수십명에서 수백명의 연구원들이 참여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공정을 거치게 된다. 이들은 대개 수명씩 짝을 지어 모듈별로 투입되어 신기술 개발에 참여한다. 따라서 새로운 기술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모듈뿐만 아니라 전 개발 프로세스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만약 각 공정의 레시피(Recipe)를 전 개발자들이 공유할 경우, 수많은 개발자 중 한명만 매수하여도 기술 유출이 가능하게 된다. 전 구성원들이 모든 공정을 알고 있다면 연구 개발의 효율성은 높아지겠지만, 그만큼 기술 유출의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따라서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해서는 전체 공정을 알고 있는 사람을 프로젝트 책임자 몇 사람으로 한정시킬 필요가 있다. 기업은 몇몇 핵심 인물로 관리의 포인트를 좁힐 수 있기 때문에 전체 팀을 빼내 오지 않는 이상 기술 유출은 어렵게 된다.
루슨트 테크놀로지는 특정 연구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연구원들이 전체 사업 내용을 인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첨단 기술 유출을 방지하고 있고,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도 각 공정의 노하우를 담은 레시피를 따로 떼어 한 사람이 모든 공정의 레시피를 보유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개발 프로세스의 모듈화는 경쟁 업체들이 전직한 엔지니어로부터 입수한 레시피를 통해 기술을 모방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
핵심 R&D 인력과 기술의 가치를 재인식해야
기술 경쟁력이 향후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라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과거 우리 기업들이 기술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주력해왔다면, 이제는 기술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CEO부터 핵심 R&D 인력이 창출할 수 있는 Value를 인식해야 한다. 핵심 R&D 인력 한 명이 수백억에서 수조원에 이르는 가치를 기업에게 안겨줄 수 있다. GE, 월마트, 인텔 등 선진 기업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핵심 인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들을 확보, 육성하기 위한 별도 HR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최근 우리 기업들도 CEO가 직접 미국의 대학을 돌며 글로벌 인재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거나 별도의 핵심 인재 풀(Pool)을 운영하는 등 핵심 인재의 확보 및 육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사실이다.
CEO는 핵심 R&D 인력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이 개별 기업은 물론 국가 산업 전체의 붕괴까지 초래할 수 있는 첨단 핵심 기술 유출을 방지하는 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