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임기 중 실수를 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아이젠하워는 주저 않고 대답했다. “예, 두 번이나요. 그 두 실수가 지금도 대법원에 버젓이 앉아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34대 대통령이 자책한 ‘두 실수’는 당시의 연방대법원장 얼 워런과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이었다. 자신이 지명한 두 사람의 취임 후 대법원의 진보성향이 더욱 강해졌으니 공화당 대통령으로서는 당연한 후회였다. 그러나 법률역사학자들이 꼽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대법관 5인 중엔 바로 이 두 사람이 들어있다.
중도 보수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이었으나 역사적인 인종통합교육 판결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에게도 평등한 일상을 보장하는 수많은 진보적 판결을 주도한 워런 대법원장은 가장 뛰어난 리더십과 비전을 제시한 법관으로 평가받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캠페인 시절부터 꼽아온 자신의 이상형 대법관이 바로 워런이다.
보다 확실한 진보의 기수는 워런보다 3년 뒤, 1956년 입성한 윌리엄 브레넌이었다. 아일랜드계 이민의 아들인 그는 대법원의 테두리를 넘어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큰 인물의 하나로 꼽혀왔다. 대통령이 8번이나 바뀌는 33년동안 정치압력을 무시할 수 있는 대법관으로 봉직하며 미국을 격렬하게 휩쓴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방향을 이끌었던 그는 “연방대법원은 법조문의 소극적 해석자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시대에 맞는 사회정의를 위해 과감히 도전해야한다”는 진보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 미국인의 일상 곳곳에 영향을 미친 1,200여건 판결의 소견서를 작성한 그는 ‘사법부 내 운동권’으로 매도당하면서도 평등실현을 위한 민권투쟁의 후견인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다.
노령과 질병으로 힘겨워하면서도 민권과 여성단체들의 만류로 몇 년을 버티던 그가 결국 은퇴를 결정했을 때 진보진영의 분위기는 어둡고 우울했다. 우려했던 대법원의 보수화가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브레넌 대법관이 떠나간 빈자리를 채운 후임자가 바로 지난 주말 은퇴를 밝힌 데이빗 수터다. 공화당인 조지 H. 부시대통령이 ‘무난히 인준은 받되, 확실한 보수’를 찾아 고심 끝에 선택한 인물로 워싱턴엔 생소한 얼굴이었으나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 보수진영의 ‘홈런’이 될 것으로 장담했던 연방 항소법원판사였다.
그러나 대법관 수터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었다. 백인을 살해한 흑인 피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판결로 첫 소견서를 쓴 그는 이후 낙태권과 어퍼머티브 액션, 동성애자 권리, 정교분리 등에 대해 확실한 지지를 표명하며 진보와 보수 양진영을 다 놀라게 했다. 진보 쪽에선 예기치 못했던 아군에 기뻐하며 감사했지만 ‘배신당한’ 보수 쪽에선 비난이 쏟아졌다.
대법관 지명 때마다 “더 이상의 수터는 안돼!(No More Souters!)”의 아우성이 터져나오긴 하지만 극우보수가 아니라면 수터에 대한 평가는 높은 편이다. 그의 뛰어난 지적 능력과 업무능력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워싱턴을 혐오할 만큼 권력을 멀리하는 검소하고 겸손한 인격은 누구에게나 존경의 대상이었다. 헌법의 핵심가치에 대한 사명감에 충실했고,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아 사고가 자유로웠다. 조용하게, 그러나 빈틈없이 약자의 권리보호에 최선을 다해온 그가 남기고 갈 빈자리도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캠페인 초기부터 자신의 대법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구상해왔다. 대법관 후보 명단을 참모들에게 주고 검증에 착수하게 한 것이 취임하기 한달 전이다.
수터의 후임자 지명일정은 7월초 지명자 발표-8월초 상원인준 청문회-10월 대법원 회기시작 전 취임 등으로 예상되지만 오바마 팀은 별로 쫓기는 기색이 아니다. 엊그제 대통령과 통화한 상원 법사위의 공화당 중진 오린 해치 의원이 “이번 주말전후로 발표할 수도 있다”고 전하는 걸 보면 이미 지명자 윤곽은 잡혔을 지도 모른다.
후임자 선정이 워싱턴 정가의 핫 토픽으로 회자되면서 2개의 단어가 떠오르고 있다. 공감과 다양화다. 보통사람들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법관, 그래서 법이론 뿐 아니라 실생활의 경험을 가진 후보를 오바마는 원한다. 이런 오바마에게 압력을 가하는 각 이익단체들의 표제는 ‘다양화’다. 아예 ‘백인남성은 응모도 하지 말 것’이라는 농담까지 나돈다. 후보군에는 여성, 히스패닉, 아시안, 장애인, 동성애자…각계각층이 다양하게 포함되어있다.
누구를 지명하든 인준의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과격한 리버럴일 경우 공화당의 반대가 시끄러울 테지만 표결결과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진보법관의 빈자리를 진보법관으로 채우게 될 테니 대법원 이념지형에도 별 변화를 가져오진 않을 것이다.
소수민인 우리도 크게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번엔 헌법학 교수를 역임한 대통령의 인도적인 법 철학관을 믿고 그 결과를 느긋하게 지켜보아도 될 듯싶다.
사족 하나 : 뉴욕타임스가 “당신이 대통령이라면 누굴 지명하겠는가”라는 온라인 여론조사를 실시 중이다. 6일 오후까지의 결과를 보면 히스패닉계 여성판사인 소니아 소토메이어가 압도적 1위, 그 뒤로 8위까지는 비슷비슷한데 모두 여성인 이들 8명 후보 중 단 한사람의 남성이 7위에 랭크되어 있다. 한국계인 고홍주 예일법대 학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