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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 섬긴 자들 — 울름계 (1121~1337)
노르트가우백 에리히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으니, 맏이가 게르하르트요, 그 아래로 지크프리트, 루돌프, 에른스트, 요한, 헤리베르트가 있었다.
에리히의 아내는 주군인 슈바벤공 아델하이드 2세 루도핑거였으므로, 맏아들 게르하르트는 아버지의 백작위가 아니라 어머니의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주후 1105년, 그의 나이 열이었다.
게르하르트 1세는 어머니의 습속을 그대로 이어받아 해마다 연회를 열었다. 상 위에 고기가 끊이지 않았고 잔이 마르지 않았으며, 슈바벤의 제후들은 그 상에 앉는 것을 영예로 여겼다.
그러나 1120년에 이르러 그는 창병(瘡病)을 얻었고, 이어 정신이 흐려졌다. 이듬해 죽으니 재위 열여섯 해였다. 장남 에리히가 슈바벤공 에리히 1세로 섰다.
에리히 1세가 즉위한 그해, 노르트가우백 지크프리트가 군사를 일으켰다.
지크프리트는 에리히의 아버지 게르하르트 1세의 아우요, 에리히에게는 종조부였다. 그는 본래 자신을 슈바벤공으로 세우려는 파벌을 꾸렸으나, 사람들이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그런데 슈바벤공의 상속을 장자상속으로 고치자는 명분을 내걸자 제후들이 몰려들었다. 지크프리트는 그 명분을 취하였다. 이리하여 장자상속을 기치로 내건 군대가 장자를 쳤다.
에리히 1세는 이를 막았다. 그러나 지크프리트는 라인펠덴의 남은 자들에게 선물을 돌려 슈바벤의 유력한 영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으니, 뷔르템베르크백 아그네스와 슈비츠백 하이크가 모두 그 편에 섰다. 싸움이 해를 넘기며 에리히의 힘은 바닥났다.
이때 슈바벤백 에크베르트 폰 호엔슈타우펜이 공작의 장막을 찾아왔다. 에크베르트는 에리히의 봉신이었다.
에크베르트가 말하였다.
"공께서는 앞뒤로 적을 두셨습니다. 앞의 적은 공의 종조부이시니, 이기셔도 일족을 죽이는 것이요 지셔도 일족에게 지는 것입니다."
에리히가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을 청하러 왔는가."
"청하러 온 것이 아니라 알리러 왔습니다. 공작의 인장을 내려놓으시면 울름은 그대로 두겠습니다."
에리히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물었다. "울름은 몇 해나 두겠는가."
에크베르트가 답하지 않았다.
에리히 1세는 인장을 내려놓았다. 이후로 그는 울름백 에리히라 불렸다. 울름계 에티코넨은 여기서 비롯한다.
이듬해 지크프리트는 전황이 기울자 항복하였고, 항복의 조건으로 슈바벤의 옥에 갇혔다. 옥중에서 그는 사람을 의심하는 병을 얻었으며, 1126년에 옥사하였다. 장자상속을 명분으로 삼아 싸웠던 자가 아들 없이 죽어, 그의 아우 루돌프가 노르트가우백을 이었다.
세월이 흘러 1141년, 그 루돌프가 슈바벤공작위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명분으로 벨프 폰 호엔슈타우펜에게 전쟁을 걸었다. 유대인에게 돈을 빌리고 아일랜드 용병을 사서 스트라스부르크와 프라일부르크와 라이네크에서 내리 이겼다.
1144년 4월, 슈바벤 공작위는 에티코넨에게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를 '찬탈자'라 불렀다.
공작위는 돌아왔으나, 에리히의 집으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울름의 에리히는 이 일에 대하여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그는 슈바벤의 대장군이 되었고 마구간 관리인을 겸하였으며, 1165년에는 찬탈자의 넷째아들 헤리베르트의 교육까지 맡았다. 그 사이 슈바벤공 헤르만 5세 폰 호엔슈타우펜이 울름 백작위를 박탈하려 음모를 꾸민 적이 있었는데, 이를 적발하여 막은 것은 노르트가우백 루돌프였다. 남의 집을 빼앗은 자가 그 집의 마지막 방 한 칸을 지켜준 셈이다.
이후 울름계는 일곱 대에 걸쳐 종가를 섬겼다.
에리히의 아들 게르하르트는 첩보관을 맡았다. 1183년 슈바벤공 아달베르트 1세가 아내 벤-무먼의 청원을 받아 그를 자리에서 물렸는데, 사람들이 아내의 영향을 걱정하였다. 며칠 뒤 아달베르트 1세는 그를 도로 불러 앉혔다. 게르하르트는 물러날 때도 다시 앉을 때도 아무 말이 없었다. 1220년에 자연사하니, 그 아들 게르하르트가 이었다.
1231년 란돌프가 울름백이 되었다. 1238년 슈트라스부르크 전투에서 그가 중군을 맡아, 육천으로 적군 이천을 쳐서 사백만을 돌려보냈다.
1246년 안드레아스 3세가 즉위하자 대장군이자 마구간 관리인이 되었다. 1260년에 죽으니 아들 란돌프가, 1280년에 다시 그 아들 란돌프가, 1291년에는 기셀베르트가 이었다.
기셀베르트는 1308년 슈바벤의 재상이 되었고, 1314년 슈바벤공 페르디난트 1세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자 섭정을 맡아 공작령을 다스렸다. 이백 년 동안 울름계에서 반란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슈바벤의 유력한 방계 가운데 이러한 집은 울름뿐이었다.
그리고 1337년 7월, 울름백 기셀베르트가 죽었다.
그의 장손 기셀베르트가 이었는데, 이 손자는 이미 브레이스가우백을 가지고 있었다. 브레이스가우는 오래전 상속의 사정으로 대모라비아 왕의 휘하에 있었다. 손자가 두 백작령을 아울러 가지자, 울름은 브레이스가우를 따라 국경 밖으로 나갔다.
기셀베르트가 슈바벤왕 아달베르트 1세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신은 울름을 잃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신이 울름과 함께 여기 있지 못할 뿐입니다."
왕이 물었다. "돌아올 길이 있는가."
"법에는 없습니다."
이후 울름은 전쟁이 아니고서는 슈바벤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리히 1세가 인장을 내려놓은 지 이백열여섯 해 만이었다.
울름계에서 갈라져 나온 알마리히와 그 아들 브뤼게백 군터의 일은 따로 전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적지 않는다.
중권. 울름을 받은 집 — 폰 바이마르와 대모라비아 (1182~1374)
울름을 가져간 집이 어떠한 집이었는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182년 무렵 제국에서 가장 강성한 제후는 마이센공 뤼트베르트 폰 바이마르였다. 그는 마이센과 카린티아와 슬라보니아와 토스카나와 모데나, 다섯 공작령을 홀로 쥐었다. 황제가 부를 수 있는 군세의 절반에 가까운 병력이 그의 이름 아래 있었다.
이 집과 에티코넨은 일찍부터 얽혔다. 뤼트베르트의 손녀 이다 폰 바이마르가 1248년 슈바벤공의 장남 아달베르트에게 시집왔고, 그 몸에서 훗날의 슈바벤공 페르디난트 1세가 났다.
이다는 1266년 천연두로 죽었다.
폰 바이마르의 상속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다의 사촌 빈힐데는 학문에 밝고 자비롭다는 평을 들었으나, 연장자 상속법에 따라 사중공작에서 오중공작에 이르는 작위를 물려받게 되어 있던 친오빠 뤼트베르트를 죽였다.
사람들이 그 일을 알았으되 그녀는 마이센공이 되었다.
이후 그 집안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가 다시 마이센을 거두어 오중공작으로 돌아왔는데, 그 또한 친족을 죽였다.
1305년 7월, 페르디난트 3세 폰 바이마르가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대모라비아왕 페르디난트 1세로 즉위하였다. 왕국의 범위는 카린티아와 슬라보니아와 모데나와 마이센이었다. 그는 슈바벤공 페르디난트 1세 에티코넨과 사촌 간이었으니, 한 세대에 페르디난트라는 이름의 사촌 둘이 각각 왕관과 공작관을 쓴 것이다.
1318년에 죽으매 장남이 대모라비아왕 페르디난트 2세로 섰고, 울름은 그의 대에 들어왔다.
여기서 한 가지를 밝혀 두어야겠다.
우리가 모은 사료 가운데는 이 왕국을 '대마조비아'라 적은 것이 적지 않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 망설였다. 그러나 왕국의 강역이 카린티아와 슬라보니아와 모데나와 마이센이니, 이는 모라비아의 땅이지 마조비아의 땅이 아니다. 마조비아는 폴란드의 땅이요, 뒤에 말할 아담 에티코넨의 집이 다스린 곳이다.
어찌하여 이런 혼동이 생겼는가. 생각건대 그 무렵 사람들의 입에 마조비아가 하도 자주 오르내린 까닭이다. 슈바벤왕 아달베르트 1세가 마조비아 여공 루치야를 후처로 맞았고, 그 소생 테오도리크가 마조비아공이 되었으며, 그 뒤를 아담 에티코넨이 이었고, 상트갈렌이 그 상속을 따라 폴란드로 넘어가면서 온 슈바벤이 마조비아를 원망하였다. 필경사들의 귀에는 마조비아라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렸을 것이다. 붓을 잡고 왕국의 이름을 적을 때 손이 익은 쪽으로 미끄러진 것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다만 나는 모라비아로 적는다.
한 가지 더 바로잡는다. 사료가 페르디난트라는 이름을 두고 어지러운 것은, 공작으로서의 대수(代數)와 왕으로서의 대수를 따로 세었기 때문이다. 오중공작 페르디난트 3세가 곧 대모라비아왕 페르디난트 1세이며, 후대의 기록이 그를 이따금 페르디난트 3세라 부른 것은 옛 공작 서열을 그대로 가져다 쓴 탓이다. 두 이름은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인간사가 기이하다.
1371년, 슈바벤왕 헤리베르트 1세의 아우 로타르 에티코넨이 파혼을 겪고 대모라비아의 공주 유타 폰 바이마르와 다시 약혼하였다. 이듬해 혼인하였다.
그리고 1374년 7월, 유타의 남매가 모두 후사 없이 죽었다.
유타 폰 바이마르가 대모라비아의 여왕이 되었다.
울름을 가져간 집의 왕관이, 울름을 잃은 집의 사람에게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울름은 여전히 슈바벤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권. 왕관을 쓴 방계와 쓰지 못한 방계 (1375~1428)
로타르와 유타 사이에서 장남 아르놀트가 났다. 뒤의 대모라비아왕 아르놀트 1세가 곧 이 사람이다.
한편 슈바벤왕 아달베르트 1세의 차남 필리베르트에게서 갈라진 갈래가 있다. 필리베르트는 학문이 깊고 자비로웠으나 정신이 온전치 못하였으며, 1349년 그의 콜로네이아 소유권을 명분으로 삼은 황제의 전쟁이 패하자 항복의 조건으로 비잔티움의 옥에 갇혔다. 두 달 뒤 두 눈을 잃는 것을 조건으로 풀려났고, 이듬해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그의 장남이 아담 에티코넨이다.
1375년 5월, 아담은 아달베르트 1세의 막내아들 테오도리크에게서 대폴란드와 마조비아 두 공작령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상트갈렌 백작령이 그 상속을 따라 폴란드로 넘어갔다. 상트갈렌은 본래 아달베르트 1세가 차남 필리베르트에게 내린 땅이었다. 아버지에게 준 땅이 아들의 영달을 따라 나라 밖으로 나간 것이다.
이 땅을 되찾은 것은 전쟁이었다. 1379년 12월 황제 만프레트 1세 에티코넨이 폴란드에 선전포고하였고, 1381년 12월 그 뒤를 이은 고트샬크 1세가 상트갈렌을 빼앗아 왔다. 울름의 일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그 무렵의 법도를 짚어 둔다.
땅이 한번 어느 나라의 것이 되면, 그 땅의 임자가 바뀌더라도 땅이 나라를 옮기게 되는 상속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브레이스가우를 따라 나간 울름이 돌아오지 못하였고, 아담을 따라 나간 상트갈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훗날 슈바벤왕 하르트만 1세가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독립을 걸고 싸운 것도 같은 법 때문이었다. 장남 헤리베르트가 비잔티움을 물려받게 되었으니, 제국의 땅이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을 막는 법에 따라 슈바벤 왕국을 그에게 물려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412년 4월, 하르트만 1세는 후계를 바꾸었다. 땅을 나라 밖으로 끌고 나가지 않으면서 자격을 갖춘 가장 가까운 친족, 곧 사촌이자 마조비아공의 후계자였던 아르놀트가 슈바벤 왕국의 상속자로 정해졌다.
아르놀트는 왕국을 받지 못하였다.
1414년 8월 하르트만 1세가 독립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1417년 11월에는 승점이 가득 찼다. 그러나 그 다음 달, 하르트만 1세는 황제 아르놀트 2세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독립전쟁은 무효가 되었으되, 반란 중에는 제국법의 예외가 적용되어 스무 살의 헤리베르트가 헤리베르트 2세로 슈바벤을 이었다.
법을 어기려던 전쟁이 실패함으로써, 법이 지키려던 것이 지켜지지 않았다.
그 헤리베르트 2세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1422년 3월 작센공과 싸우던 중 머리에 타격을 입어 몸을 가누지 못하였고, 두 달 뒤 혼수 상태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 헤리베르트가 다섯 살로 슈바벤왕 헤리베르트 3세가 되었다. 나라의 일은 섭정에게 맡겨졌으니, 티롤백 에기놀프 폰 티롤이 그 자리에 앉았다.
같은 달, 대모라비아왕 아르놀트 1세가 슈바벤 왕위를 명분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아르놀트는 이미 중년이었고, 상대는 다섯 살이었다.
섭정은 먼저 작센공과의 싸움을 거두었다. 전황이 유리하였으나 조건 없이 평화를 맺었으니, 두 전쟁을 함께 치를 수 없음을 안 까닭이다. 그리고 군사를 서쪽으로 돌렸다.
1422년 8월 라우터부르크에서, 9월과 10월 촐레른과 카를스루에에서 슈바벤군이 크게 이겼다. 1423년에는 공을 세운 에른스트 폰 랑그레스에게 켐프턴 백작령을 내려 사람을 붙들었다. 1425년 3월, 아르놀트 1세는 배상금을 물고 슈바벤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였다.
석 달 뒤인 1425년 6월, 아르놀트 1세의 사자가 슈바벤의 궁정에 이르렀다. 마조비아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군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옥좌에는 여덟 살의 헤리베르트 3세가 앉아 있었고, 답한 것은 섭정이었다.
에기놀프가 사자에게 물었다.
"그대의 왕은 석 달 전에 이 아이의 관을 달라 하였다."
사자가 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아이의 군사를 달라 하는가."
"저희 왕께서 이르시기를, 관은 남에게 청할 수 있으나 피는 일족에게밖에 청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어린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섭정이 군사를 보냈다.
1427년 정월 에기놀프가 몸을 쓰지 못하게 되매 위버링겐의 티에트마르 주교가 섭정을 이었고, 이듬달 마조비아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1428년 3월 아르놀트 1세가 다시 청하매, 주교는 다시 군사를 보냈다. 헤리베르트 3세의 나이 열하나였다.
그 밖의 갈래들
이 세가에 온전히 담지 못한 갈래들을 여기 간략히 적는다.
순트가우계. 에크베르트 에티코넨이 세르힐다와 혼인하여 순트가우를 얻었다. 에크베르트는 부를 일구는 재주가 있어 슈바벤의 재무관을 지냈다. 1256년 그가 죽자 다섯 살의 하인리히가 이었다.
노르트가우계. 안드레아스 2세의 사남 알베리히가 분할상속으로 노르트가우를 받아, 카를만·알베리히·카를로 이어졌다. 1332년 바깅 전투에서 카를이 죽자 그 아들 카를이 이었고, 1355년에는 카를만 1세가 순례를 떠나며 그에게 섭정을 맡겼다.
폰 노르트가우. 1210년 슈바벤의 궁정에서 사내아이 하나가 났는데, 누구의 씨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름을 람베르트라 하였다. 그가 뒤에 폰 노르트가우 가문을 열었다. 그 아들 요한은 첩보관이 되었고, 삼남 고트프리트는 비엔나 여백 헤트비히와 혼인하여 비엔나·지부당 이중백작이 되었으며, 1338년 에펜슈타인 전투에서 우익을 맡아 싸우다 죽었다.
뒤에 람베르트 폰 노르트가우는 비엔나 사중백작에 이르러 좌익을 지휘하였다. 아비를 모르는 아이의 집이 네 개의 백작령을 아울렀다.
저지바이에른계. 필리베르트에게서 비게리히로, 비게리히에게서 마티아스로 이어졌다. 비게리히는 일흔넷의 나이에 연장자 상속제를 주장하며 반란하였고, 자신의 반란이 끝나기 전에 죽어 그 작위가 상속으로 손자에게 넘어갔다. 마티아스는 옥에 갇혔으나 죄를 물을 명분이 없어 풀려났다.
킬리계. 지기스문트가 남작령을 받았으나 딸만 두었고, 헬가를 거쳐 잉가에 이르러 1311년 끊어졌다. 남작령은 슈바벤공에게 돌아갔다.
사부아계. 힐데가르트가 외가로부터 얻은 약한 소유권을 명분으로 삼은 전쟁 끝에 1255년 사부아백이 되었다. 뒤에 콘라트가 슈바벤 대장군을 지냈고, 루돌프를 거쳐 노르베르트에 이르렀다.
티롤계. 갈래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집이다. 티롤은 본래 후폴딩거의 땅이었으나, 마지막 티롤공 리치와라 '친절한' 후폴딩거의 피가 외가를 타고 흘러들었다. 지기스문트 에티코넨이 티롤의 주교로 있었고, 그 아들 헤르만이 1330년 5월 티롤공 헤르만 1세로 섰다. 남의 집 땅을 칼이 아니라 혼인과 주교좌로 받은 셈이다.
근래의 일로는, 1409년 9월 티롤공 로밀다 에티코넨이 황권을 낮추자며 제국의 세 번째 내전을 일으킨 것이 있다. 슈바벤왕 하르트만 1세가 그 파벌에 이름을 올려 두었던 까닭에 절로 로밀다의 편에 서게 되었으니, 왕이 일족 여인의 궐기에 끌려 들어간 것이다. 이듬해 6월 조건 없는 평화로 끝났다. 뒷날 헤리베르트 3세의 섭정을 맡은 티롤백 에기놀프는 폰 티롤 가문 사람이니, 이 갈래와는 다르다.
무르시아계. 프로방스공 만프레트 1세의 장녀 엘리자베스가 어머니에게서 에미르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1308년 힐랄과 혼인하며 에티코넨의 이름이 그 땅에서 끊겼다.
종가가 전쟁으로 세운 자들. 비엔나의 헤트비히, 브뤼게의 알마리히, 괴팅겐의 헬렌, 베른의 고첼로, 부르군트의 벤첼이 모두 종가의 군대에 실려 백작이 되었고, 그 값으로 충성을 바쳤다. 오세르백 알브레히트는 싸움 없이 설득으로 들어왔다.
논찬(論贊)
수도원장이 평하기를.
울름의 일을 적으며 나는 여러 번 붓을 멈추었다.
에리히 1세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병을 물려받지 않았고, 어머니의 연회를 이어받지 않았으며, 종조부의 야심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지키려 하였고, 지키다가 힘이 다하였을 때 봉신에게 인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의 자손은 이백 년 동안 한 번도 반란하지 않았다.
그 이백 년의 값이 얼마였는가. 울름 하나였다. 그 울름마저 전쟁이 아니라 혼인으로, 배신이 아니라 상속으로 떠났다.
반면 지크프리트는 장자상속을 명분으로 장자를 쳤고 옥에서 죽었으며,
그 아우 루돌프는 남의 손에서 공작관을 빼앗아 '찬탈자'라 불렸으되 그 집이 마침내 왕이 되고 황제가 되었다.
빈힐데 폰 바이마르는 오라비를 죽이고 마이센공이 되었고, 그 집안은 왕국을 세웠다.
하르트만 1세는 법을 어기려 군사를 일으켰다가 전사하였으나, 그 전사로 인하여 도리어 아들이 왕위를 얻었다.
솔로몬이 이르되,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하였다. 참으로 그러하다.
울름의 흙은 에리히가 인장을 내려놓을 때에도 있었고, 기셀베르트가 국경을 넘어갈 때에도 있었으며, 지금도 있다.
옮겨 다닌 것은 땅이 아니라 땅에 붙은 이름이었다.
솔로몬은 또 이르기를, 바른 저울과 접시는 주님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분이 지으신 것이라 하였다.
내가 이 가문에서 본 것이 바로 그 저울이다.
한쪽에 얹힌 것은 다른 쪽에서 덜어낸 것이며, 슈바벤이 얻은 것은 대개 일족의 다른 갈래가 잃은 것이었다.
노르트가우가 슈바벤을 얻을 때 울름이 잃었고, 슈바벤이 상트갈렌을 되찾을 때 마조비아가 잃었으며,
헤리베르트 2세가 왕관을 쓸 때 아르놀트가 잃었다.
그러하니 방계란 무엇인가. 종가가 무거워지기 위하여 가벼워진 쪽이다.
다만 나는 마지막 한 장면을 오래 생각한다.
아르놀트 1세는 여덟 살 아이의 관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석 달 만에 그 아이에게 군사를 청하였다.
군사는 갔다.
세 해 뒤 다시 청하매 다시 갔다.
그 아이가 무엇을 알아서 보낸 것은 아니다.
보낸 것은 티롤의 에기놀프요 위버링겐의 주교였으며, 아이는 다만 옥좌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그것을 오래 생각한다.
어린 왕이 아무것도 모르는 동안에도 두 접시가 한 대에 매여 있었으니,
저울을 붙들고 있는 것은 저울에 얹힌 자들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이르되, 몸은 하나요 지체는 여럿이라 하였으니, 지체가 서로 다투어도 몸이 하나임은 변하지 아니한다.
에티코넨의 갈래들이 서로 창을 겨눈 것이 백 년에 여러 번이었으되,
마침내 제국의 관을 쓴 것은 그 다툼에서 진 쪽이 아니라 그 다툼을 견딘 쪽이었다.
울름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울름의 이름은 이 책에 남았다.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긴다.
첫댓글 Charinfo 치트 사용시 AI가 움직이는 캐릭터들의 탐욕이나 신심, 플레이어에게 품은 적대감 수치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200년간 반란을 안 일으킬 정도면 아마 저 분파는 AI Greed가 음수값일 겁니다. 저런 건 좋은데 간혹 Zeal 수치가 너무 높아서 기사단에 가버려 스스로 대를 끊는 분파도 나오고...
아하... 낭만이 없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제가 플레이할 계통이 울름계여야 해서 뭔가 미묘한 기분이 그는 가문이죠
@통장 저는 러시아쪽 할 때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지금과는 매커니즘이 달랐는지, 폴로츠크 대공이 동생에게 져서 자리를 내주고 백작이 되었는데...
원래라면 강등된 채 플레이가 이어져야 할 것을, 찬탈자인 동생으로 넘어가더라구요.
쫓겨난 형은 병으로 죽고, 이후 동생양반은 신나게 대공으로서의 인생을 즐기다가, 어디선가 배송된 독주를 마시고 바이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