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과 인간>
-정병설 지음/문학동네 2023년판/448page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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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리라는 함정에 쉽게 빠져들어 착각을 하기 쉽다. 그건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과 학습에 기인한 결과라 이 습관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습관을 조작하는 조건반사 실험인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실험 결과와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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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역사 교육을 받고 문화적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놓고,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이 책 역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분명하게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다. 그건 역사 자료의 불명확성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에 접근하는 성실성과 논리의 명확성에서 기존에 나온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책들과는 차별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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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쟁점은 두 가지로 압축되고 있다. 사도세자가 일찍부터 앓아온 광증(狂症)으로 군왕의 자질이 의심된 아버지 영조가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설과, 그렇지 않고 어릴 때부터 명민했던 사도세자를 놓고 당시 영조조차 망국의 원인이 되는 당쟁을 일소하고자 펼쳤던 ‘탕평책’이 무색하게 당파간의 정치적 음모로 제거되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후세 학자들은 그 사실을 <조선왕조실록>의 <영조>, <정조>와 <승정원일기> 그리고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을 바탕으로 연구했고, 기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당시 여러 신하가 개인적으로 집필한 책들을 바탕으로 분석했다.
문제는 이 사료에 접근한 학자들의 시각과 자세라고 하겠다. 방대한 자료 수집에 대한 성실성과 해석에 따라서 내용이 다를 수 있는 ‘한자’에 대한 학문적 정확한 해석, 그러한 결과물의 상호 연계 하에 따르는 논리적 명확성 그리고 결론에 대한 정치적 시각이 사전에 형성된 채 결과물 도출에 이르렀는지의 여부 등이 관건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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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병설 서울대 교수는 전공이 역사학이 아닌 국문학과 교수라는 점은 퍽 이채롭다. 어쩌면 그러한 타 전공분야의 교수라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접근과 분석이 시작부터 다른 연구자들보다 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고전 산문의 백미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고 후세 사가들이 평가하는 <한중록>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 폄훼함을 평소 눈 여겨 보았던 것 같다. 그는 <한중록>을 국문학적 관점에서 높이 평가했으며, 이후 여러 사료-<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접근하여 여러 정황을 관련 학자-한문학자, 심리학자, 의료계-들에게 문의를 해 볼 정도로 열의가 가득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정황을 놓고 논리적 분석과 치밀한 추측(혹은 상상)을 통해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 역사학계에서 발표하지 않거나 못한 사실들을 찾아내고는 2012년에 이 책을 발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2020년에 관련 자료에 대한 비판적인 역사학계 교수들과 관련 자료에 대해 긍정적인 교수, 그리고 심리학, 한문학 등 타 분야 교수들을 모시고 공개토론회를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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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새로 느끼는 부분은 조선의 훌륭한 통치자로 일컬어지는 ‘정조’왕에 대한 분석 자료 부분이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룬 칭송이 자자했던 왕이었는데, 학계 입장에서 보면 그는 자신의 왕권 도모를 위해 역사 자료를 왜곡한 그것도 치밀하게 변조한 중차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어떤 책인가. <승정원일기>는. 청렴한 선비 교육을 받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원으로 임명된 엘리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꼿꼿하게 적어 내려간 기자(記者)정신의 백미가 아니던가. 그런 사료를 삭제하거나 왜곡한다면 그건 일국의 종사와 사직의 미래를 염려하는 왕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과장해서 말하면 윤리적, 정치적 범죄라고도 여겨질 수 있다.
자신이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의 입지에서 왕으로 등극하면 만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고 신하들의 복종과 충성을 얻어낼 수 없음을 염려하여 역사 사료들을 말년에 병중인 영조의 허락을 얻어 삭제해 버린 것이다.
그런 행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통치 후 삼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왕권이 안정된 시기에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원시키기 위해 그런 자료가 있었는지 여부가 불명확한 ‘금등지사’를 뒤늦게 밝히면서 억울했던(?) ‘사도세자의 죽음’을 완전히 복원시키고 추숭에 이르러게 된다.
이럴 때 정조의 치적과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작성한 <한중록>은 양날의 검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 둘 중의 하나는 거짓이 되기 때문이고 누군가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왜곡된 사실을 유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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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역사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당대의 학자들의 시각에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 될 수밖에 없다. 위의 사실에서 보듯 역사를 당대 관련 인물이 조작,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책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독서를 하는 독자들의 시각에 심히 우려를 표명하는 것은 나 역시 그런 책들과 자료를 통해 오랜 시간 속에서 습관적으로 지금의 사고체계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료들이 새로 조명되면 생각을 다시 해 봐야 한다. 소위 진리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하면 자신의 지식체계와 사고 한도 내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며 읽어나가지만 대개 책 내용이 마음에 들면 저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진리를 흡수하듯 젖어들고 말기 때문이다. 독서에서 가장 해악을 끼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하루는 평소와 다름없이 다가오는데 세상이 다소 달라보이게 만들 수 있는 책이다. 불교의 선가(禪家)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말을 해왔다.
-진리를 만나면 진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