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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수필가 인수/ 정용하>
□ 곡구당(谷口堂)을 서술하다 □
곡구당은 나에게는 돌아가신 조부이신 어른께서 만년에 누각에서 휴식하시던 장소이다. 선조께서는 한가한 누각촌에서 실존하는 예법을 바로 잡으셨으며 뛰어나신 강학자로서 편협하게 부르짖는 자들로 말미암아 병자년(1816년) 이후에 음해를 당하셨다. 근본에 크게 애착을 지니셨기에 풍우의 세월을 오래토록 가엾게 생각하셨으며 처소가 표류하고 어지러워 아버님(정희승)께서 수백 전(錢)의 비용을 소모하여 집요하게 파헤친 후 쌓여서 축적된 앞의 흙다리(음해)를 제거하셨다. 오래된 띠 집에서 새로운 자료를 수집하여 시대의 어둠과 근심을 공흘산(邛訖山) 아래 개천으로 출타하시어 어두운 형상을 바로 잡으셨다.
밭두렁에 심은 국화에 임시로 의탁하여 은거하시면서 뜻을 펼치셨다. 창헌(蒼軒) 조(趙) 처사(處士:시골에 은거하는 선비)께서 지나가시면서 한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옛날 정 자진(한나라 은거 선비, 본명:정박)이 곡구(谷口)에서 살았고 곡구라는 그 풍미가 군자에게 매우 적합하다고 하시기에 아버님께서 하곡 어른(양명학을 체계화한 하곡 정제두 선생)의 근친에게 부탁의 글을 올려 따르게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사모하고 순종하는 것을 속이는 일이라며 조부께서는 “정 곡구(鄭 谷口)”라고 부르는 것을 거절하셨다. 연로하신 손님들의 연회 자리에서 자리로 계속 이어져 ‘현인의 행적’이라고 거론이 되었으며, 어짊(仁) 외에도 절조에 대해서도 시(詩)를 읊기도 했다. 특별함이 존재한 처소는 선망과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지으신 글로 인하여 이 같은 당호(堂號)가 되돌아왔으니 산림(자연)에서 이미 편안함을 구제하는 계책으로 어찌 우뚝하지 않았으랴!
돈독한 벗의 마음이니 빼어나고 노련함은 쇠퇴하지 않았고 조부를 자신의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평소 어두운 구석에 물을 뿌리고 빗자루로 청소하셨다. 추위와 더위에는 몸소 적합한 동정(動靜)으로 편안함을 함양토록 추구하셨으며 비록 칠십이 넘어서도 옛것을 따뜻하게 하신 공평함의 우두머리이신데 온화함 또한 어찌 능히 이에 보태지 않았으랴. 자신의 사사로운 것은 칭송하지 않으셨고 여기에다 풍류를 읊으셨으니 선망과 공경함이 되돌아온 것을 어찌 이를 듣지 못했겠는가.
그런즉 당호가 귀하지 않다고 하더라고 귀하고, 공경한 덕을 베풀지 않았어도 공경한 것이로다. 무릇 어버이께서 후예가 되는 사람으로서 화려하지 않는 휘장으로 그것을 크게 보위하고 이 집에서 오래도록 세상에 없어지지 않는 효행으로 간직하여 순후한 풍속을 방자하고 열등한 마을에 햇볕으로 전파시켜 그 후손에게도 계승되도록 하고 또한 평안함을 주관하고 존치하시어 거주하는 집이 누수에 이끌려 따르는 것을 개선함으로써 마침내 영원히 지키고 나아가게 하셨다.
그렇게 하는 집안에서는 그 규칙이 반드시 주어지는데, 아버님의 힘이 크시다. 집안을 지휘하지 않으면 모두가 쇠퇴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아버님의 힘은 무궁한지라 이것을 서술하여 행동으로 이행하고 그리고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 매산선생께서 지으신 ‘매곡기(梅谷記)’ 내용을 고찰해 보면 한 구역의 빛나는 풍경은 선조로부터 준비되고 게재되어 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이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군더더기가 아닐 것입니다. 상지(上之:연호) 14년, 임술(1862년) 11월 10일에 장손(長孫:맏손자) 치건(致建:위의 글을 쓴 작가인 정치건), 감읍재배(感泣再拜:감격하여 목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거듭 절을 하다)하며 삼가 서술하다(출처:薈蕞稿).
*곡구(谷口) 정 봉휴(鄭鳳休) 선조의 뜻을 기리고 답습하기 위해 1969년에 직계 후손들이 선생의 출생지 마을에 ‘산천정(일명 곡구정사)’를 중건(重建)하였음.
*서두에서 창헌(蒼軒) 조 처사(趙處士)란 창헌 조 우각(趙友慤, 1754~1821) 선생을 가리킨다. 자는 학중(學仲)이며 본관은 한양으로서 경북 영천, 자천마을 출신이다. 천사 김종덕의 문하생으로 1796년 당시 매곡마을에 임시 체류하였으며 1824년에 한글 가사인 “대명복수가(大明復讎歌)”를 지었다고함.
*본문 중간에 “평소 어두운 구석에 물을 뿌리고 빗자루로 청소하셨다.”라는 구절의 뜻은 쇄소응대(灑掃應對) 환언하면, 곡구 선조께서는 평소에 학문 분야 중에서 다른 선비들이 소홀히 하거나 방치 또는 외면하는 분야(어두운 구석)에 대하여 몸소 체험(물을 뿌리고 빗자루로 청소함)을 통하여 그 뜻을 탐구함으로써 사물의 이치에 형통하였다는 뜻임.
□ 谷口堂序(곡구당서) □
谷口堂粤我王考晩㱓樓息之所也先是有數閒閣村秀講學者構於丙子而仍以扁號者也地甚隘搾年且愛久爲風雨所漂撓府君費數百錢鑿後堆築前圯捐舊茅輯新材歲庚冥秋邛訖山下出泉象蒙正也畔種菊寓遯趣也蒼軒趙處士過而歎之曰昔鄭子眞居於谷口而其風味沕合君以谷口號之府君遂請書於霞谷翁揭諸堂從以世之慕悅者罔不稱之鄭谷口而賢轍賓笻筵筵登賢外風詠而特有所艶敬而敀於乎府君之作是堂豈犻山林康濟之策已也篤友之心愈老不衰奉我生王考而夙宵聯處灑掃焉躬之寒煖焉適之動靜焉隨之安養七十有年餘雖古溫公之於伯康亦何能加此非余私誦其外風咏而艶敬敀者盖以是耳然則堂非貴號爲貴也號非貴德爲貴也凡爲府君後裔者縵厥俺保是堂永世不遣之孝而淳風肆下村景散落又安知奠居堂下隨漏牽補令終得永守也然堂有與厥令府君之俺不扝堂有咸衰而府君之心無窮斯序之所以作而傳于後也一區麗景備載於先祖考梅山先生梅谷記中今不贅是云甭上之十四年壬戌至月上澣長孫男致建感泣再拜謹序
《다정한 아우 한양(본관) 조 찬한》
*뢰(誄:애도하는 글의 한 장르)
*작가(조 찬한)께서 곡구당의 백씨이신 석윤 정인휴 선조의 초상 때 지은 제문인데, 제문 내용 중에 곡구 정 봉휴 선조에 관한 글이 언급되어 있음.
간소선생에게 증손이 있는데 이름은 모(某)이며 자는 아무개(석윤 정인휴 선조를 가리킴)로서, 노병으로 인해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칠십에 다섯이 남는구나. 아! 좋은 분께서 돌아가셨도다. 고인이신 군자께서는 열세 번을 부추겨도 아첨을 하지 않았으며, 이 사람이 곡구서사(곡구선생의 서재인 산천정)에 들어가 만나 뵌 적이 있는데 높이 우뚝 치솟은 으뜸인 오동나무로서 산과 연못에 대항하여도 능히 파리하게 할 수 있는 웅장하고도 위대한 대인이셨다. 용(龍)과 봉(鳳)의 모습으로 생애를 마친 죽비공(통덕랑, 휘 정일찬)은 고인의 할아버지(王大父)로서 비록 본인이 어릴 적에 보았지만 행동하시는 그것이 마땅히 당대에서는 크게 존경받는 어른임을 알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을 넓혀 보니 함계와 매산 선생, 호수와 백암 선생의 유래에 도달한다면 명성의 여운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공(公:정인휴 선조)께서는 그릇이 큰 사람으로서, 형제들이 측근에서 공(公)을 시중들고 있었는데 모두가 석학이시며 크게 왕성하고 훌륭하셨다. 울퉁불퉁한 돌무더기가 엉켜있어 무게감이 있으니 소씨(고대 중국 문장가 소동파를 지칭) 집안의 ‘목가산 형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데, 공(公) 역시 그 측근들을 햇수로는 20년 넘게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따뜻한 인정과 윤택함을 지니면서 받들고 있었던 것이다. 옥같이 아름다운 봉황은 풍요로움이 가득 찬 동산을 좋아했고, 천 길이나 되는 편안한 문장이 항상 자라나고 있었는지라, 남은 것(여분)으로 인하여 성장하기에 함께하는 마을에는 ‘담장이 형의 일과 교제를 하니’ 어찌 공(公)과 어울리지 않겠는가? 함께 풍류를 즐기면서 휴식하고, 함께 출입하며, 함께 탐구하고 글씨를 쓰면서 일생을 편안하게 소모했는데, 비록 해와 달이 저물어 이별한 후에라도 찾아가서 화답하였도다. 소문이 서로 통하여 면전의 범위 안에 미칠지라도 발원지에 출처가 없으면 마땅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거처하는 곳은 산이 으슥한 수 칸의 집인데, 어둡고 답답한 생각이 드는 시점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나무라거나 걱정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금지하는 규칙이 처음부터 끝까지 두 손으로써 노인(저자 자신)을 부축하는 것을 빌려주지 않았기에 혼자 힘으로 조금 걷다가 멈추어 쉬면서 먼저 방문한 곳은 중씨(仲氏, 휘 정 봉휴)의 산정(山亭=산천정) 즉 공께서 매우 즐기는 곳인데, 군자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던 차에 마침내 공(公)의 4형제가 모두 도착하여 연이어 옷자락을 나부끼며 나란히 둘러앉았다. 모두가 수염과 눈썹이 희고(白眉: 중국 촉한 때 마량의 고사를 연상시켜 학문이 뛰어남을 암시함) 하얀 얼굴인데, 모습은 봄날처럼 화사했다. 처마를 가운데 두고 온화한 표정으로 대접을 받았는데 깨끗함이 가지런하고 질서정연하여 마치 셈법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이 모든 것은 유년시절 이후 우리네가 50년 동안 갈고 닦은 창(矛)과 같은 교제인데 나 역시 늙고 병든 몸인지라 산수지간의 정자를 아래로 굽어보고 위로 쳐다보며 옛날로 돌아가니 마을의 거리는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당시를 차례로 계산해 보니 생애를 마감하는 날이 많지는 않고 이미 펼쳐놓은 흔적이 완성되었는데도 우리네 모두는 물거품 한가운데 앉아 있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산이 슬퍼하는 골짜기를 향하여 말을 전해주고 있구나.
비상하는 학의 날개 치는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가니 공평함이 대쪽 같은 기룡산으로 가는 수레(상여를 지칭)가 우리네 무리를 선도하는구나. 공(公)의 아우들도 우리들처럼 열등한 교제를 거듭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어려움을 수시로 변화하는 환상세계 일진데 아!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신 공(公:정인휴)께서 내게 안 계시니 종전의 단체 모임에서의 일을 어찌하고 어찌하려나? 공에 대하여 사뢰어보니 부(賦:문장)는 풍성하고 두터웠으며, 자질과 성정은 어질고 후하여 세상을 적시면서 염색(세상을 올바르게 변화시킴)을 하였구나. 고풍스러운 옛집에서 듣고 본 것을 보호하고 지켰으니, 전날의 법전(法典:모범이 되는 행동)은 효와 우애, 충성과 믿음에 대한 풍속을 능히 따르도록 해주었고, 한 집안의 피붙이들을 사랑하고 받들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공을 사모하고 우러렀으니 엄연하신 풍채와 태도로써 팔십 년의 세월을 엄정히 다스렸도다. 우리네 동남쪽(영남지방) 인사들이 겪어온 과정은 '물가의 볕'과 같아 그 가문에는 그 예법인지라 모든 것을 대처 함에 있어 공(公)의 견해를 사람들이 존중해준 것은 지니신 넉넉함을 숭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은 공의 혼백이 내려오시는 날이니, 인정상 마땅히 기어서 가야 하나 조례(條例:법규나 규정)가 쇠퇴하고 껄끄러운 병에 걸렸으며 또한 껍질이 차가운 것을 두려워하여 6할을 감춘 상태(날씨가 추워 옷을 제법 두껍게 입었다는 뜻임)인데 다가 엉킨 동아줄을 다스리는 노래가 공공연히 그것을 알려주지 않기에 고요하고 적적함을 몇 마디 말로써 우러르고 기리노니 아~ 슬프도다! (출처:鐫慕錄)
*간소선생: 매산 정중기(영조 때 형조참의) 선생의 별호이다. 간소(艮巢)란 ‘처신을 보금자리에 한정’시킨다는 뜻인데 황조(꾀꼬리)가 멈추는 시기를 미리 짐작하는 것처럼 시운에 맞추어 세상에 나아가 화합하고 그리고 감춤을 행한다는 것으로서 고대 중국의 장량이 스스로 지위를 끊고 벽곡에 은거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며, 탁월한 것에 대하여 ‘적절히 만족’하는 것은 자신의 궤도를 비추어 주는 스승의 거울로 보았음.
*함계 정석달(1660~1720): 향리에서는 남북은자 중 ‘북쪽은자’로 호칭되었으며, 이기론과 예학에 통달하여 당시 경주부윤이신 이 형상선생(호는 병와, 효령대군 10세손)과 편지로 교환하신 “답 이병와 이기변”이 유명하며, 문답식 예서인 가례혹문과 가례집요를 집필하셨고 또한 천문과 기상학에도 밝아 발몽설을 지으셨는데 그 내용이 오늘날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문학집인 염락풍아를 모방하여 영락풍아를 저술하시기도 했다. 당시 자신보다 40세가량 연배이시고 국내에서는 학문이 최정상이셨으며, 원주 치악산에서 학문을 하시던 우담 정시한(丁時翰)선생 등과도 서신 왕래를 하셨는데, 함계선생의 조부께서는 해남현감을 지내셨고, 부친은 대호군으로서 함경도 우후(함경도 부 절도사), 내금위장 등을 지내셨는데 병중에 계신 부친께서 함경도로 발령을 받자 그곳까지 배종하신 후 함흥에 있는 대덕산에서 학문을 하시다가 이듬해 전염병이 발생하자 부친의 명을 받들어 귀향길에 원주 치악산에 들러, 타고 오신 말의 고삐를 강 입구 다리에 매어놓은 30대 초반의 선비이신 함계선생께서 잠시 도보로 70세가 넘은 고령이신 우담선생의 거처에 임하였으나 당시 우담선생께서는 백운산으로 출타 중이어서 상봉하지 못하셨는데 그때 남기신 시 구절이 爲訪仙翁 雉嶽山(위방선옹 치악산) 신선 같은 노인을 뵙고자 치악산을 찾으니, 山童遙指 白雲間(산동요지 백운간) 산동이 멀리 흰 구름 사이를 가리키네....중략...라는 시를 남겼는데, 후에 산동(山童)으로부터 시(詩)를 받아 보신 우담선생께서도 자신을 그렇게 묘사해 주는 것이 싫지 않았는지 그 후에 서로 간에 서신 왕래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함계선생의 장남이 매산선생이신데, 함계선생 부자(父子)분의 편지를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연령이 웬만큼 되어서는 항상 질병으로 고생하신다는 내용을 빠트리시지 않으셨는데, 독자가 보기에도 거의 민망할 수준이다. 물론 질병이 없으신 것은 아니지만 수신인에게 심리적 견제를 해소시켜 주시려는 배려의 측면도 엿보이시기에 당시 관리나 선비들 사회에서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 관계의 내면을 감지할 수 있으며 또한 두 분 모두 관직보다는 학문을 좋아하셨기에 후일 조정에서 벼슬을 내리면 거부할 명목의 근거로 삼고자 미리 포석을 깔아둔 것으로도 보이는데, 매산선생께서는 관직에 계시다가 중도에 사직하신 일이 아홉 차례나 있으셨고, 함계선생 역시 당시 경주부윤이신 이 형상 선생에게『이 중옥 형상에게 화답하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하필이면 분수 밖의 사사로움에 얽매이겠는가.”라는 구절로 미루어 보아 관직에 대한 천거에 거부한 사실이 있으신 것으로 보여진다.
*호수와 백암:호수는 영천의 임란 의병장 호수 정세아 선생(병조판서 추증)과 임란 당시 부친을 보필한 아드님인 백암 정의번(이조참판 추증) 선조를 가리킴.
*소씨 집안의 목가산 형상: 소순, 소식(소동파), 소철 3부자는 ‘당송8대가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소동파의 父 소순이 강물이 흐르는 모래 속에 묻혀있는 막대기를 뽑아서 심었더니 그것이 살아나서 큰 나무가 되고 또한 그것이 산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는데, 후세 사람들 중에서 혹자는 그것을 가짜 나무산 즉 목가산(木假山)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진짜산(眞山)이라고도 하였음(외형상 2개의 동일한 사안을 두고도 그 역사성과 가치의 비중에 차별성을 부각시킬 때 인용되는 고사로 보임).
*“금지하는 규칙이 처음부터 끝까지 두 손으로써 노인(저자 자신)을 부축하는 것을 빌려주지 않았기에 혼자 힘으로 조금 걷다가 멈추어 쉬면서 먼저 방문한 곳은 중씨(휘 정봉휴)의 산정(山亭=산천정)인데”.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뜻은, 군자는 나이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여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존중했음을 알 수 있으며, 곡구 정 봉휴 선조께서는 그 규칙을 엄중하게 실천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산정(山亭:산속의 정자)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을 흠모하셨는지 마을 뒷산 산기슭 울창한 대나무 숲 뒤에 있었다고 하는데 올라가는 길은 대숲 사이로 자연 상태의 가파른 바위로 되어 있었고 거리는 평지에서 50미터 가량 되는데 중간지점에 모과나무와 배나무가 있었으며 번역인이 6~7세 때 그곳에 자주 가서 집을 철거한 기왓장 더미에서 죽마고우와 함께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우측 편 지척에는 당시 고목이 된 큰 살구나무가 있어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살구꽃에 비친 달빛풍경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며, 좌측에는 붉은색을 띤 낙락장송이 홀로 우뚝함을 자랑했는데 한겨울 날 번역인의 집 마당에서 뒷산 기슭을 바라보았을 때 눈 덮인 소나무의 모습은 운치가 있었다.
《情弟 漢陽 趙纘漢(정제 한양 조 찬한)》 * 誄(뢰)
艮巢先生有曾孫諱某字某以老病卒于家享年七十有五嗚呼善人亡矣顧不侫十三隨先君子入谷口書社見巍然大人魁梧雄偉有如山澤之瘦龍鳳之老乃公之王大父竹扉翁也雖以童觀可知其爲當世大老以今想之推以至於涵梅湖栢之由來聲韻可知公之大人公兄弟侍其側皆碩大豊偉碨磊凝重無異蘇氏家木假山形容公又侍其側年終二十有奇溫潤而良玉之鳳好豊盈菀然而千丈豫章之茁長也余仍成長于同里閈未幾與公爲兄事之交而同遊息同出入同硏槧便費一生日月晩後雖有離索之歎而聲氣之通顔範之承未嘗不源源也卽今所居不過數嶺間有時幽鬱之思僝僽之懷不能自禁則以一扶老雙不借彳亍孤往先訪仲氏山亭則公必欣然而仰曰君其來耶公之四棣聯翩幷坐亦皆鬚眉皓白顔貌韶華與樀中之老啇顔之皓可齊數也此皆吾童穉後五十年磨戛之交而余亦老且病矣俛仰山水之間亭社依舊閭巷猶存而歷數當時老少已成陳跡吾輩共坐泡花中自不覺山日之向悲谷今公策騎龍駕飛鶴翛然遠擧爲吾輩先導公之諸弟如吾劣交更難生幻化世界團會如前日其奈何乎嗚呼知公無如我矣公稟賦豊厚資性仁厚擩染故家聞見保守前日典刑孝友忠信之風能使門族愛敬鄕黨慕仰儼然風度以八十歲爲春秋東南人士之歷過瀕陽者皆候其門而禮焉公之見重於人者盖有以也今公降魄之日情當匍匐往詜衰澁病殼怕寒藏六只以寂寥數語仰助執紼之謳公其知否嗚呼悲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