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해전 승리의 길 탐사 기행록 3(석주관 - 압록 30km)
- 충무공의 구국기반이 된 구례를 관통하다
3월 3일목) 아침 7시 반, 구례군 토지면 석주관을 출발하여 구례읍쪽으로 향하였다. 석주관은 충무공이 진주 수곡의 손경래가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교지를 받자 곧바로 하동을 거쳐 구례 석주관에서 구례현감 이원춘과 류해를 만나 적을 토벌할 계책을 의논한 곳, 충무공의 왜군 척결을 향한 출발점이 된 지역이다. 석주관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한 시간여 걸으니 토지면소재지에 이른다.
석주관 출발 후 전망대에서 바라본 섬진강 모습
이곳에서 국도를 벗어나 찾은 곳은 토지면 오미마을, 조선시대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양반가옥의 대표건물이다. 그 집보다 유명한 것은 쌀이 떨어진 서민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가져가게 한 쌀독을 비치해 둔 속깊은 마음씨, 뜻깊은 노정에 본이 될만한 지역을 보너스로 둘러보기 위함이다. 운조루에서 나와 다시 섬진강변에 들어서 찾은 곳은 용호정, 이 정각은 1910년 경술국치 후 구례군내 뜻있는 유림들이 수차 모임을 갖고 항일울분을 달래기 위해 시계를 조직하여 민족혼을 빼앗긴 국치의 한을 시 창작으로 달랜 계모임 장소다. 우리 모두 타인을 위한 배려와 우국의 충정을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수달의 생태지역이라 표시된 섬진강변을 따라 구례읍에 들어선 후 찾은 곳은 구례읍 봉북리의 손인필 비각, 손인필은 충무공과 함께 조선수군 재건을 위해 구례지역의 여라 사창을 관리하고 그의 집은 충무공의 통제영 주둔지로 사용하는 등의 중요한 조력자다. 이곳에는 손인필 비각 외에도 구례를 중심으로 구국열정을 구체화한 다양한 조형물들이 한데 모여 있다.
손인필 비각 앞의 조형물
이어서 들른곳은 현재 구례읍사무소 자리에 있는 옛 구례현청, 이를 살피고 나니 12시가 가깝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구례읍을 벗어나 구례구 방향으로 향하였다. 다시 섬진강변, 한참 걸으니 아름다운 대숲길이 나타난다. 대나무는 곧은 의지와 굳건한 기개의 상징, 구국의 기운이 크게 서린 지역을 표징한듯 울창한 대숲길이 아름다워라.
대숲길 지나 한참 걸어가니 섬진강과 두꺼비를 표상한 두꺼비다리에 이른다. 그곳에 '섬진강과 두꺼비다리'라 새긴 나무판이 세워져 있다. 그 내용, '전북 진안에서 발원하여 곡성, 구례, 하동을 거쳐 남해로 흐르는 섬진강의 길이는 212km로 한강, 낙동강, 금강에 이어 남한에서 네번째 긴 강이다. 1385년(고려 우왕11년) 경 왜구가 섬진강 하구를 침입하였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 갔다고 전해지고 있어, 이때부터 두꺼비 섬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런 사연이 깃든 강 이름인가?
섬진강과 두꺼비다리 설명문 앞에 세워진 다리를 지나며
오후 2시 지나 구례구역의 다리 건너편 신월파출소에 이른다. 석주관에서부터 20여km 거리, 파출소 근처 카페에서 30여분 휴식을 취한 후 섬진강 자전거길을 따라 곡성 방향으로 걸어 올랐다. 구례구까지는 충무공백의종군길 탐사로 두 차례나 지났으나 곡성 쪽은 초행, 차도를 겸한 자전거길이 한산하고 강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강변풍광이 아름답다. 걸으며 구례읍 유곡마을의 정자에서 살핀 길의 성격이 그럴 듯하다. '구례-곡성-화순-영암-강진-해남에 이르는 남도의 오랜 역사와 농어촌체험, 경관과 건강증진을 겸한 자연으로 가는 길, 남도오백리역사숲길'
오후 5시 경 보성강과 섬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압록에서 사흘째 걷기를 종료, 30km를 꾸준히 걸었다. 먼길 함께 한 일행, 수고하셨습니다. 푹 쉬고 내일 또 새로운 길을 향해 출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