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칼럼 2006.6.2.금
임실 오수의 삭녕최씨
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동촌 마을에는 삭녕최씨가 뿌리를 내려 살고 있다. 이곳은 또 전주이씨 효령대군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삭녕최씨 가운데 이 마을에 처음 이사를 온 사람은 통례공(通禮公) 최수웅(崔秀雄.1464-1492)이다. 그는 세종과 세조 때의 명신이었던 최항(1409-1474 호는 태허정)의 손자다. 최수웅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처가인 진주하씨 때문이다. 사위가 처갓집 있는 곳으로 이사하는 일은 당시 흔한 풍습이었다.
최수웅의 장인은 하응 이며 하응의 증조부는 하중룡이다. 조선초 전라도안찰사를 지낸 하중룡은 둔덕의 산수가 좋아 이곳에서 살게 된다. 그 뒤 하중룡의 후손들이 줄곳 이곳에 살게 됐으며 이 집안의 사위인 최수웅도 이곳에서 뿌리를 내린다.
원래 하중룡이 터를 잡은 곳은 동촌에서도 맨 윗뜸으로 마을의 서북 쪽 끝의 산기슭이었다. 같은 동촌이지만 그 윗뜸을 특히 상동이라고 한다. 하중룡이 살았던 자리는 그 상동에서도 맨 끝 부분에 해당된다.
그러나 하씨 집안은 언제부터인가 상동을 떠나 동촌의 바로 남쪽 능선 하나를 넘는 곳에 있는 방축리(축동이라고 부른다)라는 마을로 옮아간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방축골 하씨”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효종과 현종 때의 인물 하만리(1597-1671)는 바로 이 방축골 하씨 출신이다.
최수웅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그의 처가가 사는 상동 바로 그곳이었다. 그 후 하씨는 모두 떠나고 결국 상동은 최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그러다 차츰 최씨의 일부 후손들도 인근으로 옮겨가 살기 시작한다. 일부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남원시 사매면 계수리 혹은 사매면 노봉으로 터를 옮긴다.
한편 삭녕최씨(朔寧崔氏)의 시조 최천로(崔天老)는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벼슬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최인을 각각 1세조로 하여 낭장공파와 부사공파가 계대를 잇고 있다.
2세 최충 이래로 경기도 연천에 속해있던 삭녕에 살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삭녕으로 했다. 그 뒤 일부 후손들이 전북 남원과 임실 등지로 옮겨와 산 것은 7세 최수웅 때이다.
삭녕최씨 가문을 가장 빛낸 이는 조선조 세종 때의 명신 최 항이다. 세종 16년 과거에 급제한 그는 대사성, 대사헌, 이조. 형조. 병조판서, 대제학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한글창제를 거들고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동방정음 등의 편찬에도 참여한 훈구파의 대학자다.
최 항은 문장이 뛰어나고 역사, 풍속, 언어 등에 해박했다. 당시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들의 표전문을 도맡아 집필하다시피하며 명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최 항의 장원급제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과거 결과 발표 이틀 전 밤에 세종은 꿈을 꾸었다. 한 마리의 용이 성균관 잣나무를 휘어감고 있는 꿈이었다. 날이 새자 세종은 신하를 성균관으로 보내어 잣나무 주위를 살펴보고 오게 했다. 잣나무 밑에서는 한 선비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최항 이었다. 다음날 발표된 과거 급제자 명단에는 그가 장원으로 올라 있었다.
이후 성균관 유생들은 이 잣나무를 장원잣나무(장원백)라 불렀으며 과거를 앞두고는 그 밑에서 일부러 잠을 자고 응시하는 풍습도 생겨났다.
후에 최 항의 손자 최수웅은 충의정략장군, 좌통례 등을 지낸다. 최수웅의 손자 언수(9세. 정언)와 그의 후손(10세. 대사헌) 상중(11세. 호남초유사). 연(12세. 좌윤). 유지(13세. 사간). 치옹(14세. 지평) 등은 대를 이으며 문과에 급제, <6대 등과>로 이름을 떨쳤다. 이 가문은 10현8한림5대 진사를 배출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도 바로 삭녕최씨 후손이다. 그는 1947년 전북 전주시 경원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혼불의 무대인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은 최명희의 아버지 최성무의 고향이다.
노봉마을은 삭녕최씨의 500년 세거지로 유명하다. 처음 마을을 세운 최수웅은 세조 때 명신 최항의 손자로 그의 5대손 최온이 <폄재>라는 호를 사용하면서 그의 집안은 세칭 폄재집안으로 불렸다. 최명희는 최수웅의 17대손이다.
( 정복규 논설위원 )
첫댓글 삭녕최씨 500년세거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