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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글 과 만남 ☜ 스크랩 백두산근참기
이제학(백두) 추천 0 조회 85 14.01.04 18: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잊혀진간도 카페에서 옮김

白頭山覲參記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쓴 백두산 기행문.

1926년 박한영(朴漢永)과 함께 조선교육회에서 주최하는 백두산 일대의 박물탐사단에 참가한 후 쓴 것으로, 〈동아일보〉에 1926년 7월 28일부터 1927년 1월 23일까지 총 89회에 걸쳐 연재된 것을 1927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권두에 `백두산근참기 권두'라는 장황한 머리말을 붙이고, '광명은 동방으로서'에서 '그래도 그리운 인간세계'에 이르는 40개의 항목을 탐사 순서에 따라 기술했다. 이 글은 동방문화의 중심이 조선의 단군시대의 무대인 백두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입장에서, 백두산을 '불함문화의 시원이요 동방원리(東方原理)의 권두언'이라고 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 국토와 문화에 대한 찬탄과 긍지를 보여주는 '조선주의'(朝鮮主義)와 연결되었으나, 그 발상은 일본 우파의 민족주의사상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고 있어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주장 이후 조선민족과 조선문화의 일본화 주장으로 이어졌다. 〈반순성기 半巡城記〉·〈교남홍조 嶠南鴻爪〉·〈풍악기유 楓岳記遊〉·〈심춘순례 尋春巡禮〉·〈금강예찬 金剛禮讚〉과 더불어 최남선의 중요한 기행문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백두산 근참기 서두에


백두산은 한 마디로 말하면 동방원리의 화유입니다. 동방 민물의 최대 의지요, 동방 문화의 최고핵심이요, 동방 의식의 최고 연원입니다. 동방에 있어서 일체의 추기가 되어 만반을 알선 운화하고,일체의 추기가 되어 만반을 알선 운화하고, 일체의 심장이 되어 만반을 보시 전통하고, 일체의 생분이 되어 소윤 왕신케 한 자가 백두산입니다. 기왕에 그러한 것처럼 현재에도 또 장래 영원히 난사의 할 동덕의 소유자가 그입니다.


  백두산은 천산 성악으로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제도 신읍으로 역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영원화병으로 문화의 일체 종자이었습니다.  동방 대중의 생명의 원적이 었으며, 화복의 사명이었으며, 활동의 주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진 일역의 삼세 변상은 백두산을 만다라로 하여 일체가 구현 되었으며,백두산을 선축으로 하여 일체가 계획 하였습니다. 동방의 신화에 다만 이것이 비기이며, 동방의 보고에 다만 이것이 두약이며, 동방의 묘문에 다만 이것이 현관입니다.


  상하5천재에 신시로, 단군으로, 부여로, 수진으로, 고구려로, 말갈로, 발해로, 금으로, 여진으로, 만주로, 백두산의 영태에서 종육된 천제자의 왕조만도 이미 십지에 넘음이 있습니다. 지중해, 태평양의 사이에 발칸 산으로, 곤륜산으로, 천산으로, 불아한산으로, 음산으로, 태산으로, 태백산으로, 부아악으로, 면악으로, 환군악으로, 영언산으로, 부사산까지 백두산의 화개에 비음된 <불함문화>권의 영장이 또한 수만 리에 뻗쳐 있습니다. 동방의 풍운 치고 그 기류의 동원이 이 백두산에서 발하지 아니한 것 없습니다. 동방의 조화 치고 그 법상의 연기가 백두산에서 비롯하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백두산은 동방 민망에 대하여 이때까지 노력 적공의 계감부이며, 지금 당장 작심 용사의 영사막이며, 언제까지고 계운 선명의 수시탑이며, 그 구언한 행로상의 오직 하나인 지팡이인 것입니다. 세상에 성적 존재란 퍽 많습니다만, 백두산 그 이상의 그것은 없으며, 세상에 신비 하다는 것도 적지 아니하지요마는, 백두산 같은 그것은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다른 것들은 신비스러운 신비요, 신비하게 한 신비요, 신비의 신비지마는, 오직 백두산은 신비랄 것 아니면서의 신비며, 신비랄 수 없는 신비며 신비될 리 없는 신비입니다. 명백한 사실대로의 신비입니다. 돌이켜 말하면 참으로 신비랄 것이 있다 할진대, 오직 백두산이 그것이라 할 것입니다.


백두산은 읽고 읽어도 다할 날이 없고, 알고 알아도 끝날 날이 없는 신에게서의 대계시 그것이요, 동방 사람의 산 경전입니다. 실상 그대로 전현해 있는 우리의 윤리학이며, <과거>란 문자로 기록된 예언서입니다. 푸고 퍼도 마르지 않는 생명의 원천이란 우리의 백두산을 두고 이름일까 합니다. 그런데 씹는 대로 자미가 나고, 먹는 만큼 자양이 되고, 그에게 친근하는 만큼 실행의 대용도 얻고, 표상화하는 영능도 나오고, 신비 세계에의 참가 기회도 늚을 때닫는 것이 백두산입니다.백두산은 실로 조탁을 빌리지 않은 미의 대해이며, 건축을 기다리지 않는 영의 화표입니다. 생을 그의 밑에 품하고, 정신을 그아래에서 쉬려 할 수 있음은 과연 어떻게 큰 우리의 은총이며 특권이며 행복이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밝아야만 할 백두산의 사정처럼 어두움에 싸인 것이 없고, 날카로워야 할 백두산의 의식처럼 무딤에 빠진 것이 없고, 깊어야 할 백두산의 감수처럼 옅은 것이 없고, 부지런해야 할 백두산의 향용처럼 게으른 것이 없습니다. 고인만한 예찬의 성이 없으며, 타인만한 탐구의 열이 없으며, 필요한 만큼 그 비기를 발천해볼 성의도 없이, 한껏 불용의하고 무관심한 체함이 지금 우리의 백두산 푸대접의 실상입니다. 이리 됨에는 어떠한 핑계와 얼마만한 사정이 있다할지라도, 이 무식과 이 무심은 어떻게든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척연히 두려워하고 맹연히 살펴서 국토적 역사적 불충의와 정신상 생활상 불친절을 면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입니다. 백두산 하나를 주체하지 못하고 백두산 하나도 대접할 줄 모른다 함은 무엇이라고 하여도 그 임지의 자랑일 것 아닙니다. 이에 백두산의 의식을 계옥할  요가 있으며 백두산 실정을 피력할 요가 있으며, 백두산 지견으로 할 요가 있습니다.


  불초의 이에 대한 느낌과 걱정은 저절로 심상에 지나기 만만인 것이 잇어 어떻게 하여 크게는 조선인에게 백두산 의식의 한 전화기를 만들고, 작게는 사사로이 적년학구 하는 바의 실험 임증할 기회를 얻지 못할까 하여, 이를 기다리고 이를 노린 것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만반의 감개를 국토예찬에 우한 요즈음에는 그 최고 최본이실 백두산을 첨알지 못함이 아무것보다도 큰 죄려라는 심협을 받게 되어, 몽매가 이를 위하여 편안치 못하기를 누년이 일일 같아왔습니다. 그러나 황새요 심산이라, 단신 편도를 생각 할 수 없는 채로 미죽미죽 지내더니, 작년 여름에 조선교육회이 잭두산 및 압록강 일ㄷ 박물탐사단 파왕을 듣고 이도 기회리라 하여 드디어 순례의 선지식인 석전 노사를 전갈이 시배하여, 그네와 한가지 성산의 근참을 결행하기로 하였습니다. 행정은 겨우 3주관이었습니다. 이 동안에 장백의 1만 척 정상을 극하며, 압록의 1천 리 유역을 내리는 것이매, 관찰의 주도와 고험의 심밀을 기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또 맥진과 노처로 군대하고 행동을 한가지 하매 연사 타군은 본디 생심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마는, 백두산 있어온 뒤로 아직 문적 다운 것이 하나도 없고, 또 변치 아니한 문자라도 백두산 의식을 환성하는 한 자극이 되지 말란 법도 없을까 하여, 흑 군마의 티끌을 뒤집어 쓰고, 혹 노영의 겨를을 훔쳐서 행중의 실력과 도산의 만감을 약간 기록하여 우편닿는 대로 동아일보로 보내었습니다. 봄이 웅대한 풍물에 돌려서 생각을 묘막한 고사에 달리면서 삼복에 손을 불고 한 구  한 구 적어 나가던 일이 나에게는 영원히 즐거운 기억이지마는, 단상 졸문이 성의를 다히 못하고, 요령을 다하지 못한 일을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아울러 깊을 따름이요, 다시 이것을 남의 눈에 걸 용기가 없기도 합니다.


더구나 흉증에 적기가 방박하고, 강리에 온혈윤균하고, 분방한 것이 있고, 등약하는 것이 있는채 상은 더욱 횡일하려 하고, 사는 더욱 번만하려하고, 문은 더욱 분피하려 하고, 의는 더욱 회삽하려 한 것입니다그려, 남을 향하여 보아주소서 할 제법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남은 혹 번용으로 보고 만연으로 보고, 혹과대하 하고 격양이라 할 곳이 없지 않을 이것도 도리어 나는 큰 절제를 더한 것이요, 큰 부족을 느끼는 것으로, 실상 좀더 푸념하고 좀더 잔사설 못 한 것을 섭섭해하는 것입니다. 간하고 요를 특한다 함은 원래 재주의 미치지 못하는 바요, 덜펄지게나 하여 속이 좀 시원하자고 하건마는 이에는 내 상원이 옅으며, 내 어휘가 모자람을 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러해도 이것이 백두산의 전거적 기록일 것 아니요, 또 누가 쓴대로 백두산의 여실적 표현은 가망 밖일 것이니까, 아직 이런 대로나마 거듭수민을 수고로이하는 것이며, 추졸이지마는 백두산의 이름으로 드러나게 도미을 또한 영광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이 속에 혹시 백두산의 시공 이사간 어느 한 모라도 건드려진 것이 있다하면, 이는 진실로 요외의 대득입니다. 시상으로써 사실을 만지작거리려 한 지의의 있는 바를 짐작까지 하여 주시는 이가 있다 하면, 이는 다시 분외의 대영임을 무론입니다.


어허 백두산! 그것은 본디부터 사람의 심수에 그려지고 형용사되고 발명되어질 것이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백두산이 우리에게 있어서 영향한 노력과 구언한 치성의 대상이요, 긷고 길어도 밑바닥이 보이지 아니하는 샘물일 소이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러 하거나 이러고 저러고 해보고 싶음이 우리의 지정이니, 이 변변치 못한 글월도 요컨대 이 충심의 한 발현일 따름입니다. 이 뒤에라도 기회있는 대로 힘 자라는 대로 백두산을 파기도 하고 굽기도 하고, 소리 높여 읊조리고 노래도 할 것입니다. 백두산의 사실적 서술에는 고금을 군척하여 별로 <백두산지>를 찬차 한 것이 있습니다.


이 기회로 동아일보와 단원 제씨와, 특히 막영과 취사를 한가지하여 여러 가지로 신세 지은 제4반원 제씨와 백두산 및 압록강연로민관 첨좌의 공사 후의를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정묘 1월 22일, 영하 17도 7의 엄한도 그날 백두산정보다는 여름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외풍 설렁한 일람각에서 



광명은 동방에서

 

   십여 일에 걸친 궂은비가 겨우 걷히고, 오래 피신하였던 태양이 다시 위대한 모습을 나타냈건마는, 찌는 듯한 무더위가 오히려 사람을 열과 시달림으로 쓰러뜨리지 아니하고는 말지 않으려는 7월 24일이었다.서투른 무다이 궂은 일에는 맞히는 것처럼, 상해 방면에서 동으로 오는 저기압이 무서운 호우를 가지고 온다 하던 측후소(관상대)의 예보가 반갑지 아니한 이 일에만 어쩌다 한 번 맞힐 듯도 하다. 차창으로 으스름한 달빛 아래에도 살펴지는 한강의 탁류를 보고, 비야 올지라도 저놈의 횡포나 없었으면 하는 기원을 금할 수 없었다.


여름방학으로 귀향하는 학생, 원산의 해수욕장과 삼방의 약수로 서늘한 맛을 따라가는 이, 경부선이 불통되어 며칠 밀렸던 남에서 오는 이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기차 안의 붐비는 비할 데없다. 워낙 찌는 날을 사람의 운김이 한층 더 불을 지피고, 좀 서늘할까 했던 반 기차가 에누리없은 용광로 그성이었다. 다만 이 길이 백두산 산행이거니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한 줄기 서늘한 맥이 뛰노는 것을 느껴 적이 스스로 위로할 뿐이었다.


한양 5백 년 찌는 산과 내, 궁예 1천 년의 묵은 자취의 감홍은 벌써 법석과 더위의 아가리로 쑥 들어가 버리고, 잠이나 좀 들었으면 하는 생각만이 마음에 간절하였다. 그러나 염치없는 북새는 한 도막의 잠을 주기에도 결코 활소하지 않고, 겨우 명상의 길목을 얻어서 비로소 이것저것을 다 잊어 버리는 기회를 얻었다. 백두산은 가다니? 손 바닥만한 존선반도가 도무지 백두산 하나가 하늘을 뚫고 우뚝 솟은 통에 생겨난 주름살이요 터진 금들이거늘, 이 제 달리 간다는 백두산이 어디란 말인가? 부루투이거니 골짜기거니, 조선의 어느 흙 한덩이가 백두산의 일부분이 아니며, 궁둥이를 붙임이나 발자국을 옮김이나, 조선 안에서 꿈쩍함이 어는 것이 백두산중에 오비작거림이 아니기에, 이제 이 길을 특별히 백두산으로 간다고 하는고, 하는 생각도 났다.


사람의 공기를 모르고 고기가 물을 잊어 버리는 셈으로, 온통 그 속에 들어 있을수록 그런 줄을 모르는 것이 대개 상례려니와, 조선 사람의 백두산 의식도 실로 이러한 종류가 할 것이다. 언제 아무 데서고 이마를 스치는 것은 백두산의 바람이요, 목을 축이는 것은 백두산의 샘이요, 갈고 심고 거두고 다듬는 것은 백두산의 흙이요, 한 집의 기둥뿌리와 한 동네의 수구막이를 불박은 것은 백두산의 한 기슥이다. 이렇게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고, 떼려 해도 떨어지니 안니할 사정에 있는 것이 우리와 백두산의 관계이다. 백두산과 우리는 본디 한 덩이요 결코 두 조각이 아닌데, 가는 것 오는 것은 무엇이며, 찾는 이 받는이는 누구라 하랴, 억지로 말을 하면, 이번 이 길은 백두산의 아랫골로서 그 윗등성이로 올라감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고 하였다.


어느 틈엔지 잠도 들었다. 깨오보면 걸불랑 마루턱도 벌써 넘은 지 오래고, 동이 트고 나오는 아침의 빛이 오봉산 꼭지를 어둠에 서부터 해방하기 비롯하였다. 들이 높으면 하늘은 더욱 낮고 구름은 더욱 겸손하다.기차 바퀴 구르는 대로 퍼져 나가는 샐빛이 어느덧 숭엄하고 광활한 반가운 신계개르 ㄹ우리의 눈앞에 전개하였다. 광명이 또 한 번 동바에서 왔다. 아침 해에 채색된 숭엄한 고원은 쌀쌀한 대로 훅훅한 봄이요, 꽃없는 채로 찬란한 봉동산인데, 그리로 향하여 마구 달려드는 기차는 극락의 관문이나 뻐기러 들어가는 것처럼 기세좋게 달린다.



이태조의 무대이던 함흥평야


   자고 있던 사람의 가슴을 단번에 시원하게 해주는 안변의 평야와, 언제든지 두 팔을 벌리고 나서서 반가이 맞이해주는 듯한 갈마의 반도는 밤길의 이 차가 원사 가까이서 누리는 한 특권이라 할 만큼, 누구에게든지 쾌감을 주는 것이다. 더구나 아참 안개가 반쯤 걷히고 밥 짓는 연기가 새로 얽혀가는 군데군데 마을 경색은 살아 뛰는 것을 모두 붙잡아다가 그림 속으로 집어 넣음이 얼마나 사람의 신경을 가라앉게 하는지 모른다.


함경선은 이번이 처음인데, 더욱 백사청송 밖으로 끝이 없는 바다의 펀한 파도를 끼고 나가는 풍곽의 아름다움은 굽이굽이 새로운 감동을 자아냄이 있다. 왼편으로 두류산을 헤치고, 오른편으로 송전만을 물리치면서 명랑한 기운이 사방에 그득한 한판국이 내닫는 것은 영흥인데, 산은 웅장하고 들은 넓어, 이 태조의 일어난 곳 됨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


정평 경계로 들면서 멀리 오는 빚쟁이를 알아본 사람처럼 사방의 산들이 꽁무늬를 슬금슬금 빼기에 이것은 무슨 조짐인고 하였다니, 알고 보니 반도 3대 평야의 하나인 합란대야가 열리려 하는 준비였다. 도련포의 장성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허다한 성 자리가 설명하는 것처럼, 이 근방은 오랫동안 우리 나라 사람과 야인과의 각축 갈등하던 곳이니, 고구려가 엎어진 이후로는 고려의 말엽까지도 그 이른 바 동북계란 것이 대개 정평, 함흥의 사이에서 들락날락하던 것이다. 그런데 한번 시원하게 여기 펼쳐진 함흐으이 평야는 실로 두 민족의 갈등과 양편병마가 달리고 쫓고 한 중심이니, 고려 일대의 위대한 업적으로 일컫는 윤시중의 여진 정복, 아홉 성 쌓는 것도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근 북진선이 이 함흥으로부터 흥원, 신홍의 일대에 그친다 하는 것이다.


함경선은 성천강을 끼도 비스듬히 동남으로 달려나가니, 이 태조가 등극하기 전에 살던 본궁을 왼쪽에 볼 수 있다. 푸른 소나무, 버드나무 우거진 그 속에는 5 백년의 풍우를 혼자 가늠하는 데 조가 심은 소나무도 있을 것이다.


두 형제 섬이 온자스러이 바다 위에 벌려 있는데, 심장꼴의 작은 반도가 그리고 내밀고 거울 같은 바닥과 쪽 같은 물이, 가까이는 호수를 이루고 멀 리는 바다를 연한 서호진은 진실로 남부럽지지 아니한 임해의 승지라 하겠다. 해안에는 푸른 소나무가 겹겹이 병풍을 두르고, 그 앞에는 풀솜 바닥 같은 백사지조차 온필 흰 비단처럼 펄쳐 있는데, 사이사이 천막이 쳐지고 함흥에서 온 남녀 노유가 떼떼이 그리로 향함은 일요일을 이용하는 무슨 놀이가 거기 벌어진 모양이다.


함경도를 들어서면서 연로의 집들이 짚으로 이었을망정 남방보다도 헌걸찬 맛이 있고, 지붕과 추녀를 기와집처럼 쳐들어서 보기에 생기있음이 심히 든든하다.


서호로부터는 선로가 산을 피하여 힘써 해안을 끼도 북진하는데, 그대로 다투어 바다로 와서 담그는 산과 산들의 꼬리를 비킬 수 없어서 작고 큰 수도(터널)가 고대고대 연속하여 있다. 뚫고 나가면 반가운 바다 빛이요, 긴 모래톱, 굽은 만이 각각 제 맵시를 발보이매, 마치 활동사진에 가끔 자막이 끼는 것처럼 수도로 드나듦이 조금도 괴롭지 아니하다.


활 모양의 긴 모래톱을 낀 여호에서는 뒤에 순릉의 울창한 숲을 동아다보고, 톱날 같은 곱은 개가 깊이 휘어들어온 퇴조에서는 여진 방어의 옛 성을 더듬어보고, 멀리서 돌아오는 돛 편 배를 좌우로 부르는 운룡에서는 괴상한 바위의 무더기롤 이루어진 문 바위의 기어한 경승에 눈을 크게 떳다. 이리하는 중에 이 시중의 공명 무대이던 함흥 큰 들을 다 지나고 흥원에 이르렀다. 산물이 많이 경제적 사정이 윤택한 까닭이겠지마는, 서울에서 귀향하는 유학생 무리가 많이 내린다. 흥원서부터는 산천의 웅장한 맛이 갈수록 더해져서 과연 함관령 북쪽의 값이 있으며, 신포, 경포의 얌전한 경치도 그런 대로 훤한 뜻을 띠었고, 마양도는 외양부터 부유해보이며, 바닷가에 즐비한 생선 말 리는 시렁의 비린내가 그대로 주민의 향내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외편으로 용연,금호의 한 쌍 맑은 호수를 물 위에 되돌아보고, 오른편으로 괘도, 작암의 기이한 모양을 바다 가운데 가리키면서, 기차가 이쪽 함경선 아직까지의 종점인 속후에 도착하였다.


역에 나서매 자동차 10여 대가 양쪽에 정렬하여 손을 부르에 바쁘고, 또 잠시 동안에 그것이 다 만원을 이룸에는 놀라지 아니치 못하였다. 이렇게 북청으로 실어다가, 한 끝은 도로 자동차로 해산진으로 옮기고, 한 끝은 단천의 함경선 제2구로 연락시키는 것이었다.



열다섯 고을의 중심지


   하천황 저쪽으로 발해국의 옛 성이란 것을 쳐다보고 자동차는 문성천, 남대천을 가로질러서 쏜살같이 바로 북청으로 달려든다. 장항리를 지나면 동덕산 아래에 이백사 등을 모신 노덕서원을 본다. 철령 높은 고개에 쉬어 넘는 구름을 붙들고 외로운 신하의 서러운 눈물을 비삼아 가져다가 임 계신 구중 궁궐에 뿌려주기를 회원하던 그때 그사람의 고충을 생각하매, 눈물이 그렁거림을 금할 수 없다. 그가 여기 와서 죽고 여기 있어 제자를 받음이 반드시 그의 본의가 아니라 못한다 할지라도, 늙은 그를 몰아다가 기어이 천 리 먼 두메에 죽게 한뒤에만은 그 심사가 너무도 인정에 가깝지 아니치 아니할까?


옛부터 이름있던 남대교는 신작로에서 꽤 장관임을 잃지 않는데, 이를 건너서 5리면 이쪽 15고을의 요충이라 하던 북청읍에 당도한다. 남문은 헐어서 돌 홍예만 남고, 장화루는 지붕이 반이나 벗겨서, 당년 남병사의 위풍을 짐작할 만한 것은 변변히 남은 것이 없다.


행장을 주막에 던지기 무섭게 시가 구경을 나섰다. 함경도라 할 함경도 군읍의 구경은 이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집은 목재가 흔한 탓도 있겠지마는, 대체로 남쪽보다 크고 번 듯한 데다가 초가가 적으므로 비교적 부유한 기운이 돌며, 이것은 촌으로 나가도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번 듯한 기와집 또 기와지반의 덩어리는 도리어 외촌에 더 많음을 뒤에 알았다. 지붕은 화피로 많이 잇고 화피가 귀하면 그저 널빤지로 엇매겨 덮고는 그 위에 뭉우리돌을 귀맞추어 깔았는데, 이것을 '봇돌'이라 한다.


집의 내부는 대개 일 자로 넓적하게 짓고, 부엌을 중심으로 하여 간사리를 차렸으며, 부엌 바닥을 '바당'이라고 하고, 부뚜막을 '벅게'라 하고, 부뚜막이 널따랗게 그대로 살림방, 안방이 되어서, 세간과 금칭을 그 위에 놓고, 주부의 음식 장만과 잠자리가 다 여기서 행해지는데, 여기를 '정주'라 하고, 정주에 연접한 방을 '고방'이라 하고, 또 그 다음을 '웃방'이라 하며, 부엌 건너에는 흔히 마소의 외양간이 있고, 만일 거기 방을 만들었을 때에는 외양간은 그 방에서 직각으로 꺽어서 베풀되, 물론 부엌의 한쪽에 대어 짓는 것이었다. 마소와 마주 보면서 밥도 먹고, 간을 한가지하여 잠도 자서, 미상불 가축을 완전히 가족화한 것도 일종의 정다움을 느끼게 함이 있다.


부엌은 물론 끔찍이 깨끗하게 다스리고, 부뚜막에는 솥이 느런히 걸렸는데, 솥 모양이 남쪽과 달라서 솥 어귀가 주발 아가리처럼 민틋하게 벌어졌으며, 부뚜막 한옆에는 서울 쇠화로 같고 어마어머하게 큰 물독이 삼발이 위에 놓여 있는데, 대개 기름을 발라 닦아서 광이 번쩍번쩍하게 나도록 하였다.


물 긷는 그릇은 이름은 동이로되 모양은 서울과 같지 아니하여, 부리가 갸름하고 배가 불룩하고 키가 얌바틈하고, 좌우에 손잡이를 단 바탱이 모양의 것이니, 아낙네가 이것으로써 물을 떠서 고개로 이고 나르는 양은, 마치 유대 인은 풍속도 중에서 보는 그것과 같고, 그릇의 모양이 그저없이 예스럽고 우아하여, 깊은 운치가 물방울과 한가지로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거기에 앉아서 목판의 물건을 파는 이는 다 부인네들인데, 과일 두부 등속 외에 도라지를 불러 찢어서 산같이 놓고 파는 것이 눈에 띄며, 자두 비슷하고 좀 잔 것을 팔기에 무엇이냐 한즉"붕늬라 하오 앞(남쪽 지방)에서는 농리라 합니다" 하는데, 대개 오얏의 이곳 발음이었다. 가끔 '갈비집'이라고 붙인 음식집이 잇음은, 서울의 전골집 처럼 갈비를 쟁여놓고 파는 곳이니데, 1인분으로 넉 대에 이십 전을 받는다 한다. 관청 자리를 돌아다니며 보매, 읍의 크기의 분수로는 심히 좁고 누추하였고, 미상불 병영은 배포가 좀 크나 대개 퇴락하여 보잘 것 없이 되었다.



꼬불꼬불 50리 厚峙嶺(후치령)


   26일 아침 8시 반에 자동차로 풍산을 향하였다. 길은 영덕산 기슭으로 하여 남대천의 상류를 끼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는데, 장산의 가장자리를 끊어 길을 내고, 길 만드느라고 쌓은 둑 밑에는 큰 내가 기운차게 흘러서, 산과 길과 물이 셋붙이 개피떡처럼 붙들고 놓지 아니하는 속으로 골짜기 안 큰 길이 탄탄하게 뻗어 나간다. 이러한 길이 사오십 리를 연하여 끊임이 없으니, 대개 대덕산의 서쪽 산기슭을 껴안고 더듬더듬 올라감이었다.


집들은 대개 기와집이 많은데, 집의 제도가 만에 박은 듯하게 열이면 열이 다 같다. 굴뚝은 여러 길 되는 통나무의 속을 태워 뚫어서 길고 곧게 만든 것을 몸채에서 좀 떨어뜨려 꽂았는데, 그 값이 촌에서는 50전 내지 1원이요, 읍에서는 사오 원이나 한다 한다.


들창과 미닫이는 퍽 드물고 대개는 짝문을 칸마다 한가운데에 박았으며, 집밖에 울타리나 담을 베풀지 않은 것도 이 지방의 특이한 풍습이다.


길에 다니는 이는 열이면 아홉 반이 부인이며, 머리에 짐을 커다랗게 이고, 꽃 같은 색시도 줄달음질을 친다. 이 지방에서 아낙네를 '치마 띤 이'라고 부르는 방언이 있는데, 우리 보기에는 이 지방 아낙네가 띤 것이 다만 치마뿐 아니라, 생산 작업의 모든 필요한 것을 온통 몰아서 띠어 가진 듯하고, 사나이는 반이나 그 치마꼬리에 싸여 지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북청에서 1백 리를 달려와서 뾰족한 남산이라는 한 봉우리를 접어들면 직동(곧은 골)이란 꽤 큰 시가지가 나서고, 예서부터 유명한 후치령 길로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버쩍 달구어진 기관(엔진)을 훨씬 식혀가지고 상직동으로 하여 이리 꼬불 저리 꼬불한 큰 고갯길을 새겨 올라가는데, 원체 급한 경사를 휘엄휘엄 둘러낸 길이라, 뺑뺑 돌아서 상적동을 도로 와보게 됨이 몇 번인지, 높이는 오르겠지마는 나아가기는 도무 붇지 아니하며, 지도를 펴서 보메 학질 앓는 이의 체온표와 같이 길의 곡선의 표시가 버릇없는 갈치 자의 연쇄를 이루었다. 이렇게 근 50리르 ㄹ더위잡아 오르는데, 한 굽이를 오르는 족족 산의 형세는 웅대를 더하고 산의 모양은 수더분함을 늘린다.


구로로는 10리 남짓한 것을 5배나 늘여놓았으니, 그 험함을 짐작할 것인데, 자동차가 속력을 다하되 오히려 2시간 이상을 소비하여, 자동차를 신작로로 보내고 구로로 걸어올라는 편이 더 빠르다고 한다. 보행하는 이는 신작로로 말미암는 이가 없으며 우마차가 이리로 다니는데, 고개 아래에서 고개 위까지 대개 하루 길을 삼으며, 이르기를, 고개 아래에서 올라가는 이와 고개 위에서 내려온느 이가 종일 마주보고 이야기하면서 한쪽은 올라가고 한쪽은 내려온다고 한다.


간신히 마루턱에를 오르니 4천 4백 5척이라 한 표목이 서 있고, 채색으로 그린 신선의 상을 모셔놓고 국사당 이라고 일컫는 사당이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나다니는 차부의 숭앙이 대단하다. 서늘한 바람이 이마를 스쳐갈 때에 후유 하는 한숨이 저절로 목구멍을 넘어 나온다.


후치령은 오름뿐이요 내려감은 거의 없다. 할 만큼 마루턱에 올라서 서는 밋밋하게 약간 내려가는 듯하다가 그만저만 둔다. 영 이쪽은 풍산군인데, 풍산 경계는 시방에서 다 이렇듯 올라가게 되는 약 4천 척의 고지다. 이렇게 고원 지대이므로 기후 같은 아래 지대와는 판이하여, 봄에 아랫녘에서는 백화가 만발한 것을 보고 올라와도 이 이곳에서는 눈도 녹을 생각을 아니하며, 가을에 윗녘에서 단풍이 우거진 것을 보고 내려가도 저 아래에서는 나뭇잎이 아직 싱싱하다 한다. 또 여름이 극히 짧아서 배옷 입을 더위는 복중 수십 일 동안에 지나지 않고, 그도 낮뿐이요 아침 저녁으로는 매우 서늘하며, 시리도 일 년 중에 두어 달쯤만 오지 아니하고 5월까지도 무서리라 내린다 한다. 기후가 이러하므로 농작물이란 것이 거의 보잘 것이 없으며, 귀리와 감자가 이곳 사람들의 주식이라 한다. 군민이 1만 호(약 7만 명)인데 대부분이 산간벽지에 흩어져 있어서 두 집만 모이면 한 동리라고 일컫는 형편이요, 골을 사이하여 사는 집이 건너다보고 이야기는 하되 서로 찾으려하면 곧 건너가는 동안이 10리 이상 되기는 다반사라 한다. 이러한 집들은 한 사람 1년의 생활비가 5원이면 족하다고 하는데 그것마저 없어서 기근에 우는 이가 적지 아니하다 한다. 놀면서 쌀밥에 고기찌개 해먹고 생활고 생환난을 흥얼거리는 사람들에게 한 번 보이고 싶은 일이다.


고원의 하늘바람이 이마를 스치는 가운데 자동차를 몰아서 바로 풍산읍으로 향하는데, 파발 이라는 꽤 큰 주막거리를 지나서 황수원강과 대원봉 사이에 벌어진 '배상개덕이'의 가운데를 타서 나간다. 이곳은 음료수로 근래에 갑자기 저명하게 된 들쭉의 숲이다. 둘쭉이란 것은, 나무는 화양목 비슷하고 열음(열매)은 까마중이와 흡사한데, 익으면 짙고 붉은빛에 약간 신맛을 띤 일종의 산과일이다. '덕이'란 것은 이 지방에서 고원의 평지를 일컫는 말이다.


들쭉의 사이사이에는 고산성 백합, 그 밖의 어여쁜 꽃이 보는 이 없어도 억울해하지 않은 고운 빛을 스스로 자랑하며, 낙엽송 숲이 군데 군데 있어 짤막한 나무들 틈에서 키 자랑을 하고 있음을 본다. 다리 하나를 건너면 황수원의 거리가 되니, 황수원강은 동북으로 감산을 거쳐 압록강 상유도 합하는 허천강의 상류요, 황수원은 예전에 삼수 갑산으로 통하는 중요한 역참의 하나이던 곳이다. 여기서 1천 3백 66미터의 허화령을 넘어서 지경천을 끼고 25리쯤 하여 근래에 새로 설치된 풍산읍으로 들어가는 때는 정히 오후 2시 반이다. 북청에서 여기까지 옛 길로는 1백 80리, 신작로로는 2백 50리, 대개 북청, 해산진의 중턱이 된다.



조선에서 가장 높은 豊山


  군청의 안백석 군과 조선일보의 분국을 맡아보는 박근후 군은 여러 가지로 설명과 주선에 힘써주며, 기타 두 교의 수뇌와 관민 여러분이 환영회를 연다, 강연회를 꾸민다 함이 무비 나의 이번 행적을 번 듯하게 하여 주는 지극한 정인 양하여 못내 감시하였다. 환영회에서 특히 감격한 것은 여러 가지 모양의 과자가 다 이 땅 우리네가 만든 것이라 하는데, 품종과 풍미가 다 족히 칭찬할 만함이 있는 것이다. 만나 뵙는 여러분에게 힘써 각 방면의 민속을 물어서, 여러 가지 귀중한 소득이 있는 중, 원시 신앙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도 적지 아니하였다.


27일, 아침은 어찌 선선하지, 두꺼운 무명 적삼이 오히려 부족하며, 건너편 산봉우리 사이에 오락가락하는 검은 구름이 더욱 몸에 으스스한 기운을 일으킨다. 마침 장날이라 하기로 낮부터 장구경을 나갔다. 장 보는 이의 3분의 2이상이 아낙네들이며, 북포(삼베) 짜는 '베실토리' 밖엔 이렇다 할 특산물을 볼 수 없으며, 다만 장의 반 이상을 차지한 음식물 중에 감자로 만든 엿과 국수와 조과와, 귀리로 만든 소주와 감주와 절편과 버무리 등은 진하게 지방색을 나타낸 것으로 눈에 띄는 것이며, 고지대의 한 명물인 임산, 모물을 볼 수 없음은, 지나는 손으로 퍽 섭섭한 일이었다.


어저께 배상개덕이에는 아직 과래서 침만 삼키고 먹지 못하던 명물 들쭉이 장에 났기로, 반가워서 5전어치만 달라 하였더니, 어떻게 많은지 들고 가기가 불편하므로, 물건은 3전어치만 달래가지고 와서, 이곳 풍속으로 그것을 쥐어 짜서 사탕을 타서 먹으매, 달콤쌉쌀한 것이 포도물도 아니요 딸기물도 아니며, 일종의 시원한 풍미를 가져서 청량제로도 좋을 것임을 깨달았다. 한옆으로 있는 우시장에는 백 마리 가까운 소가 나서 성황을 이루는 것이 자주 볼 만하였다.


저녁때에는 보통학교에서 열 리는 백두산 탐검대와 고지대 박물 강습호원의 환영회에 임하니, 귀리와 감자 등 토산물로만 만든 식품이건마는, 노란 귀리 소주와 빨간 들쭉 음료를 합하여 탁상이 질번질번하고, 입 속에 맛깔스러움이 어떠한 연회에도 내리지 않으며, 더욱 귀리 절편의 매끄럽고 맛남에는 입맛이 저절로 다시어짐을 누를 수 없었다. 저녁에는 예수교회당에서 열 리는 강연회에 가서(조선심)이란 제로 함경도 중신의 조선 정신을 말하였는데, 가습회에 모인 각처 교원들이 참석한 관계도 있겠지마는, 벽지에서는  의외의 성황이었다.



하늘까지 닿는 鷹德嶺(응덕령)


  28일, 밤내 오던 비가 어느덧 그치고 새벽 들면서 고원지대 특유의 맑은 맛을 띤 달이 여관마다의 창을 비칠 때에, 암심의 물결이 모두의 머리말에 넘치었따. 일행을 나르기 위하여 각처에서 징집된 자동차는 행여 중도에 고장이 있을까 해서 밝기 전부터 야단스러운 폭움을 내면서 정비에 골몰하고, 단원들도 일찍부터 일어나서 모든 준비에 하루하지 아니하려 하여, 탐검의 지은 기분이 새벽의 풍산을 몇 겹으로 에 둘렀다.


오전 8시에는 1부터 10까지의 기를 단 자동차가 이미 일자로 긴 전을 이루었다. 많은 관민들의 열심스러운 전송을 받으면서, 길게 부는 호각 소리를 군호로 하여 한 차에 7인 흑 8인을 실은 자동차가 용장한 첫길을 트니, 대덕산도 우리를 위하여 구름의 깊은 보를 걷는 듯한다. 자동차는 기쁨의 자국을 힘있게 땅바닥에 남기면서 이내 매덕령으로 달려든다. 길고 느리게 두른 커브라, 후치렁처럼 숨이 턱에 닿지 아니하되, 긴 소매에 잘 추은 춤처럼 이리로 번쩍 이 고비를, 저리로 얼른 저 휘임을 하나하나 더위잡아 오름의 시원한 기미가 춘향이 집가는 방자의 걸음을 크게 한 것 같다 하겠다. 그윽한 계곡이 배를 보이는 듯 덜미를 내어놓고, 팔을 벌 리는 듯 꼬리를 내어짓는 중에, 특수한 색체, 형태, 맛을 가지 낱낱이 그윽한 골짜기의 난초처럼 고상한 정취를 지닌 하다한 고산식물이 말할 수 없는 깊고 우아한 정을 자아낸다.


그 중에도 나무가 좀 크기도 하고 잎새도 매우 휘워지고, 산호 구슬 잔 것 같은 발간 열매가 다닥다닥 뭉텅이져서 달린 '닭의 밥'이라 하는 일종은, 보는 이에게 어떻게 새 정신을 내게 하든지, 무심히 보다가는 깜짝깜짝 놀라 지경이었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높아진다, 높아진다. 하늘이 한 뻠씩쯤 가까워질 때에 내다보는 안계는 몇 세계씩을 더해온다. 심상해도 장부의 체격을 가진 저 허다한 봉우리, 깊은 줄 모르게 언틀먼틀한 저 골짜기, 군데군데 내닫는 이곳 산악의 한 특색인 '덕이', 윤곽에는 이깔나무의 기치 창검을 삼엄하게 둘러꽂고 그 안에는 진정한 의미의 하늘이 향기나라의 빛을 발보이는 무수한 꽃들도 하여금 갖은 잔재주를 다 꾸며놓으신 조화의 색다른 한 배포,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지금의 나를 위하여 벌써부터 준비하셨던 향응인가 하면 "하느님 고맙습니다. "도 아니 나올 수 없으며, 백두산 할머니 찾아가는 덕인가 하면 "백두산 고맙습니다."하는 청송도 아니 부르짖을 수 없다. 감격에 눌려서 높이 5천 82척의 표목 서 있는 고개를 올랐다. 매덕령이 높고 깊은 줄은 이쪽에서보다 저쪽을 내려다보고 더욱 많이 느끼겠다. 깊게도 들어고고 어수선하게도 겹드려 있는 계곡이거니와, 내려갈 길을 구부려보니 높이도 과연 엄청나구나, 짙고 엷고 다양한 구름이 여기저기 한동안씩 서려 있는 것은 신선의 옥수레를 엄호함인 듯, 골에서 골로 달려가는 바람은 옥녀의 차사인 듯, 덤부렁 듬쑥한 저 밀림 속에는 어떠한 비밀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없이 돌고 꺽인 길이 이 틈을 타서 나고, 화초로 휘장된 그 속으로 우리의 자동차가 스르르스르르 내려간다.


이 영에만 와도 풍물이 좀 틀 리는 것은, 첫째, 집에 반드시 목책을 두름이니, 긴 장대 서넛을 날로 하고, 기다린 판자를 씨로 하여, 돗자리 짜듯 얽어 세움이 통례이었따. 생각건대 산이 높고 골이 깊으매 맹수를 방비하기 위함인 것 같다. 또 지붕은 대개 귀리 짚으로 이었는데, 한 가지 특색은 집마다 부엌 위의 지붕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하늘을 통하였음이니, 까닭을 들은즉, 나오자마자 얼어붙으므로, 그것을 얼기 전에 밖으로 내어보내는 필요로 만든 것이요, 또 원체 추워서 밤에도 군불을 두어 번씩 넣어야 하는데, 으레 가마에 물을 붓고 장작을 지퍼 증기도 또한 엄청나게 나오므로 그것을 처리하는 설비를 고치지 아니할 수 엇는 연고라 한다. 과연 추운 곳이로군, 하였다. 또 가며가며 귀틀집, 큰 마루르 통으로 우물 정자로 귀 맞추어 얹고 그 틈서리만 흘그오 메워 지은 집이 많아짐을 주의할지니, 나무가 흔하거나 짓기 쉽기 때문으로만 이런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짓고 주야에 수없이 불을 때지 아니하고는 견디어낼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겨울에 밖으로 나오면 숨이 금시 안개가 되어 앞을 뜻본다 하매, 추위의 정도를 짐작할 것이다.


옛날에는 손톱으로 물을 튀기고 부귀를 누리던 이가, 이런 삼수 갑산으로 귀양오던 일을 생각하고, 그네에 대하여 큰 동정이 더럭더럭 이는 것은, 그때즘 도끼 한 번 들어가보지 못한 천고의 밀림이 해를 보지 못하게 하는 한없이 높고 한없이 긴 큰 영광, 겨울에는 불더미에 들어앉아도 웃바람이 손을 불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이 지방이 그네들에게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함이니, 거의 상상 이상이었으리라.



虛川江(허천강) 건너 甲山을 지나


  산골 아이들이 달려나와서 "에그. 오늘은 집이 많이 떠간다." 하는 말을 여러 번 들으면서 우리의 자동차대는 어느덧 관평리에서 평지를 얻고, 늪평이라는 큰 거리에를 들렀다. 겨울에는 매덕령 넘어오는 이를 위하여 길거리에 화톳불을 질러놓고 일반 행인을 녹여 보내는 곳이라 한다. 경관 주재소(지서)가 있어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가만히 본즉, 옆에 참호를 베풀어 방어 진지를 삼는 동시에, 속으로 굴을 뚫어 여차하면 지하로 달아날 길을 마련하였으니, 여기만 하더라도 국경이 가까워서 무장단(독립군) 침입을 방비해놓은 것이라 한다.


呼麟嶺(호린령) 커브를 자동차가 어뻑저뻑 넘어서매 갑산 지경이 되고 상리라는 큰 마을을 지나니 사립 학교가 있으며, 2백 리 이쪽에 오래간만에 다시 논을 보매 다 그지없이 반가웠다.


석우리 지나서 웅이강이 나오고, 포처리 지나서 황수원강을 합하여 압록강 상류의 한 지류인 허천강에 당도하니, 이 부근은 요즈음 비가 많이 왔던 모양으로 수량이 꽤 많다. 장평리에서 철사를 붙들고 배를 건너는 나룻배로 강을 건너가는데, 자동차 한 대에 왕복 20분씩나 걸려 2시간 이상 지체되는 통에, 석벽이 웅장하고 험한 상류 방변을 마음대로 한참 거닐 수 있었음에 또한 의외의 소득이었다.


또 가게 늙은이와 더불어 한담을 하다가, 허천강은 이 부군에서 '용갈이'로 유명한 곳이니, 3월쯤 해방될 머리에 여러 자 두께로 열었던 얼음이 하룻밤 동안에 산산조각으로 갈라져, 일부는 양쪽 기슭으로 올라 쌓이고, 일변 유빙이 되어 내려감을 용이 곡식을 심는 것이라 한는 것이요, 이날 밤엔느 부근의 소들의 흔을 빼어다가 쓰므로, 이튿날은 소들이 기운이 없다고 믿는다 함을 들었다. 풍산읍에서 여기가 1백 20리요, 혜산진까지가 또한 1백 20리라 한다.


작은 언덕 하나를 넘어 절벽을 끼고 돌아, 남문으로 하여 갑산읍으로 들어가니, 여기도 관민 다수가 마중을 하고 보통학교에서 환영회가 있어 대접이 대단하며, 읍 동쪽 약 70리에 있는 유명한 구리 관산에서는 광석과 구리로 만든 서진을 기념으로 보내왔다. 삼수 갑산이라 하면 제비나 오는 곳으로 생각하도록 깊고 멀레 아는 곳이요 두메니만치, 가보는 이가 따로 있는 줄 알도록 딴 세계로 여기던 곳이거늘, 무섭게 여기를 이렇게 발바닥에 흙 한 점이 아니 묻히고 오게 됨이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鎭東川(진동천)을 건너 왜성같이 생긴 한 덕이를 앞으로 바라면서 북으로 달리는데 허천강이 멀고 가까이 陪從(배종)하여 떨어질 줄을 모르다가, 교항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애틋하게 나위어간다. 그 대신 큰골내를 갈아잡고 1천 7백여 미터의 백조봉과 1천 5백 미터 가까운 백마산의 두틈으로 하여 함정포리에 당도하니, 혜산진에서 70리인데 오륙 년 이래로 세 번이나 무장단의 습격을 당하여 젖기 않은 희생을 내었으므로 방어 방법이 더욱 엄밀하여, 주재소에는 한 길 반쯤 되는 성벽을 두르고 돌아가면서 총구멍을 박았으며, 경찰이 사는 집도 그 속에 지었는데, 그것도 견고한 이중벽으로 둘렀다.


함정포를 지나서는 길이 곧 대덕산 건너쪽으로 일대 커브를 기어오르니 안깐령이요, 영을 내려서면 운룡강이 나오고, 이것을 건너서면 다시 차차 오름길이 되는데, 나지막하게 기다란 커브를 휘어 돌아 올까가면, 웅대한 기분이 그득히 서려 있는 큰 덕이 나서고 그 꼭대기는 몇 해 전까지도 백두산을 제지내는 집이 있던 마상령이 되니 구름에 싸인 백두산이 잠시 아래 옷자락을 보여주심이 크게 감격하여 우선 공경스러운 예를 드렀다.


차를 잠시 고개 위에 머무르게 하고 한 번 사방을 둘러보매, 국경의 산과 강이 한 눈에 다 들어와, 까닭없는 호기가 아랫배에서 솟아 오른다. 어허, 여기가 어찌 된 지역이지, 하는 감회도 바뀌어 차면서 마음을 요란스럽게 한다. 반쯤 흐린 구름 틈으로 새어나오는 석양의 엷은 빛이 이 일대의 산하에 얼마나 많은 황량의 빛을 더하고, 이것이 얼마나 많이 지나는 이 마음을 상하게 한 거리가 되었는가는 바쁜 이 자리에 갖춰 적을 겨를이 없음을 섭섭히 알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모른 체 못 할 것은 건너쪽 만주 산과 들의 평평하고 무연함에 비형, 이쪽 조선 산천의 웅장하고 험함이요, 더욱 삼수 저쪽 개마 연산의 검은 구름과 저녁 햇빛의 엇갈림에 인하는 구름이 변화가 기이하고 괴이하다.


영에서 조금 내려서면 강변에 한 취락이 있어 갑산읍의 서너 곱이나 되어보이니, 강은 압록강이요, 취락은 곧 혜산진이라 한다. 십 오륙분에 예나 이제나 한가지로 국경의 중요한 곳인 혜산진에 다다랐다. 길가에는 구경나온 민중이 담을 이루고, 학교 생도들까지 정렬하였음에는 애오라지 놀라지 아니치 못하였다.  곧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저것이 공연히 심사를 도와서 밤에는 늦도록 압록강 흐름을 눈으로 어루만지면서 가슴속의 억울을 조금이라도 펄까 하였다.



혜산진 출발


  7월 29일. 아침 8시 정각을 기하여 소학교 집합 장소로 모였다. 운집한 사람과 산더미처럼 쌓인 짐, 이 짐을 나를 인부와 말, 언뜻 보아도 큰 행차임을 앙탈하지 못하겠따. 식료품만 하여도 쌀은 물론이요, 고기, 생선, 두부, 김치, 장아찌, 무, 파, 간장, 사탕, 조미료 등 자질구레한 것까지를. 어느 것은 어느 날 아침, 어느 날 점심, 어느날 저녁이라고 쪽지를 붙여놓았고, 대야, 양철통, 식도, 병마개뽑이 등까지 생활 필수품이란 것은 모두 한 패마다 한 벌씩 준비하였고, 이밖에 노영할 천막이다, 용왕담(천지)에 띄울 함석배다, 이것저것 하여 기구가 장하다면 장하다 하려니와, 글공부하는 이들의 등산으로는 과람한 편이라 하겠다. 한옆에서는 단원에 대한 인솔자의 주의 사하으이 지시가 있다. 독사에 물리지 않도록, 함정(짐승 잡는)에 빠지지 말도록 하라는 외에, 땅이 국경 지대에 속하여 마적의 염려도 없지 아니하니, 아무쪼록 대에서 떨어져 단독으로 놀리  않게 하라 함은 미상불 백두산 등지에서나 들을 말이었다.


총 단원 58명, 대부분은 교직에 있는 이로, 동식물과 광물 채집을 주목적으로 하는 이요, 또 신문기자, 화가, 사진사와 활동사진(영화) 촬영반 내지 실업가도 섞였고, 특히 5세 소년과 10세 소녀가 끼었음은 이채로운 것이었다. 단원은 5반으로 나위어 12연씩 한 반을 짓고, 반에 반장이 있어 단장과의 연락을 취하게 하고, 반마다 높은 기를 세워 따르기 편하게 하였다.


준비가 끝나매 다시 수비대로 가서 대의 인솔 병사 40명과 기년 촬영을 하였다. 대개 행군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단원을 보호하게 한 것이었다. 이럭저럭 9시나 되어 거대한 체구가 구름에 닿는 듯한 우리 순사(순경) 한 사람과 몸이 작아 땅에 기는 듯한 일본인 순사 한 명을 앞잡이로 세우고, 군대와 짐이 앞을 서고, 단원이 차례로 뒤따르고, 혜산진 체육회란 명목으로 희망자 20여 명 일대가 따르고, 또 개인으로 따라나서는 이 육칠 명을 합하여 2백에 가까운 사람과 50에 가까운 말이 어깨로 바람을 내면서 나서매, 큰 원정이나 탐험을 나서는 듯도하여 미상불 의기가 충천하는 기세가 없지도 아니하였다. 길 양쪽에 늘어선 사람들 사이를 행진해 나가니, 학생들은 군중의 맨 끝에 정렬하여 만세를 뒤집어씌운다.


만세의 쓰임도 여러 가지인 양하여 등산 축복으로도 쓰이는 것이 우습다.



압록강 밖의 異國情調(이국정조)


  길은 압록강을 끼고 북으로 뚫렸으니, 압록강이라 해도 상류인 여기쯤은 실개천이다. 이것이 국경이라 하여 표면으로는 서로 범할 수 없고, 또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옷 입은 빛, 집 지은 꼴, 밭 가꾼 모양이 둘이 서로 온통 딴판이요, 산천으로 말하여도 저쪽의 것은 그네 얼굴 가죽이 느즈러진 것처럼 지질펀펀하여 긴장한 맛이 없는데, 이쪽 것은 광대뼈가 불쑥 나온 것처럼 울퉁불퉁하여 기복이 심하며, 따라서 저네는 땅이면 흙인데, 우리는 돌이 흙노릇을 하며, 따라서 농사 이익의 많고 적음과 민생의 편리하고 불편함이 몹시 틀리니, 그 아니 당연할 듯 이상한 일 아닌가.


압록강이 분명한 국경 노릇을 하기는 실로 3백 년 이짝의 일이다. 우리 민족의 요람지요, 어떠한 의미로는 도저히 남의 손에 버려두지 모살 저 땅이거니 하면, 하염없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기도 한다.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남의 땅이라고 할 수 없건마는, 우리 땅이 아니다.


위연리 주재소(경찰서 지소)에서 잠시 쉬었다. 봇밭이니 샘물이니 하는 10리 안팎의 참마다 하나씩 있는 주재소는 그 축조가 압록강 기슭일수록 견고하여 완연히 한 조그만 성과 같다. 문명이니 발달이니 하는 것이 많은 고물의 생명을 빼앗는 중에 성곽이 또 한 그 하나요, 그리하여 잊지 못할 역사를 가졌거니, 성이란 것은 모조리 헐리지 아니치 못하는 이 판에, 홀로 국경 경비만은 고대의 폐물을 새삼스럽게 부활시켰음이 다만 우스울 뿐만 아니라, 어느 편으로는 지금의 경찰 그것의 좋은 표상인 양도 하여, 그 의미의 깊음을 깨닫게 함이 있다. 더우기 그것이 윤관의 9성이란다든지, 김종서의 6진 처럼 방어의 대상이 이민족인 여진족인 것이 아닐, 실상은 조선 땅에서 대상이 이민족인 여진족인 것이 아니라, 실상은 조선 땅에서 조선 사람(독립운동가)을 방어함이 목점임에는 말할 수 없는 느꺼움이 없을 수 없었다.


이쯤에서부터는 압록강의 명물인 뗏목 내려오는 것이 점점 번번이 눈에 띈다. 험한 물골을 찾아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데 프로펠러는 우습다 할 만큼 살같이 빠르게 쑥쑥 내려가고 홱홱 지나가는 거싱 과연 시원하다. 하나를 보내기 전에 또 하나가 뒤를 대어 내려와서 꼬리가 꼬리를 물었음이 옛날 이야기의 쥐와 같다.


보천교라는 다리를 건너 한 5리쯤이나 들어가매, 목재작업의 한 중심지인 보천보에 닿는데, 산중으로는 제법한 시가요, 주재소에 병사에 영림창에 반 듯반듯한 집도 이것저것 적기 아니함이 모두 재목에서 나온 것이었다. 처음으로 군대의 반합으로 서투른 자취를 하느라고 한참 법석을 하고, 선 밥과 간 맞지 아니하는 것일망정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인 탓에 그대로 맛난 듯이 먹는 것이 우스웠다. 오늘 행정 50리.



普天堡(보천보)에서寶泰里(보태리)까지


  30일, 보천보만 하여도 기온이 아랫녘과 매우 틀림은 지난 저녁에도 뜨뜻한 방이 좋음로써 짐작하였던 것이거니와, 새벽에 깨매 몸이 으스스하고, 창을 열매 찬 바람이 뼈에 스밀 듯함에는 놀라지 아니치 못하였다. 오늘이 중복이거니 하면, 아무리 산중 새?녘이지마는 문을 꼭꼭 닫고 앉아서 겹옷을 부둥켜 입음이 열쩍었다.


8시 지나서 떠나는데, 수일 내로 마적의 소문이 빈번하다 하여, 여기서부터는 보호병을 두 패로 나누어, 일행의 맨 앞과 맨 뒤에 배치하매, 사정에 서투른 나그네의 마음이 부질없이 긴장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구름 그림자에 봉우리는  높음을 더하고, 벌레 소리에 골은 그 그윽함을 더하여 깊은 산주의 맛이 점점 더 짙어가는데 한참만큼씩 한번나는 꾀꼬리 소리만이 고요하던 산꼴짜기를 가끔 들레게 하는 반역 운동이었다. 꾀꼬리로 보아서 다른 곳의 5월쯤 되는 풍수이었다.


청림동을 거쳐 통남동을 지나서부터는 길이 민틋이 오르기 시작하고, 이깔과 봇과 버들이 합쳐진 수풀이 좌우에 빽빽하여, 이른 바 백두산대 식물의 세 가지 특색이 한 곳에 모여 생존경쟁을 노골적으로 실연하는 재미있는 국면을 싫도록 구경하게 된다.


올라가는 언덕이나, 골짜기 건너로 뻗쳐 올라간 산등성이나, 멀리 보이는 장군봉이나, 가까이 보이는 곽사봉이나 다 한가지로 높되, 높드라고 벌떡 일어서거나 얼른 빼어나는 일이 없고, 슬그머니 흐리멍덩하게 우무 기척도 없이 남모르는 동안에 한참 가다가 보면 얼마만큼 시야가 넓어진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까맣게 쳐다보고 오던 높은 곳이 어느 사이엔지 발 아래 눌리고, 돌아다보면 처음 떠나던 곳이 아득히 백 길 천 길 아래로 굽어보인다. 이렇게 하여 한 정덤을 이룬 곳에 한 판의 고원이 나서고 거기 한 촌락이 들어 있으니 이것이 보태리였다. 학교도 있고 주재소도 있어 산중의 한 요소다. 이곳에서 중화(점심)를 하기로 하였다.



백두산 아래 첫동네


  동네 가운데를 흐르는 보태천을 끼고 동구를 벗어나면 곧 오름길이 되어, 한 3리 동안이나 숨이 턱에 닿게 되고, 물줄기가 차차  가늘어가다가 마침내 어느 바위틈에서 나오는 작은 샘이 되는 곳에서 등성마루에 올라선다. 밀림을 뚫고 나가는데 가도 가도 그 턱이요 다 할 줄 모르고 5리가 10리 되고, 10리가 20리가 되어도 끝날 생각을 아니하더니, 다시 30리나 나아가매 앞에 분지가 나서면서 비로소 내림길이 된다. 30리나 되는 이 고갯길을 곤장덕이라고 하는데, 거의 이깔나무 밀림으로, 빽빽한 곳에서 햇빛을 보지 못할 지경이요, 온도도 밖과는 매우 틀려서, 한나절 보태리에서는 31도이던 것이, 오후 3시쯤의 숲속에서는 22도를 보이며, 저녁때가 될수록 찬 기운이 살에 스민다. 길가의 샘물을 떠서 마시매, 이가 시리고 손이 저리면 그릇에 성애가 하얗게 슨다.


고개를 다 내려가닌 아리땁게 붉은 쇠채꽃과 야단스럽게 허연 구리대가 벌써 쓸쓸한 뻔한 깊은 골짜기를 겨우 생기있게 만드는데, 새빨갛게 다닥다닥한 닭의밤 열매는, 내가 있거는 어디를 쓸쓸히 가려오, 하고 고함질러 어르는 듯하다. 감자 잠 지고 가는 이의 뒤를 따라서 해동갑하여 포태산리를 다다르니, 혜산진에서 1백 30리, 백두산 가는 길에서 마지막 사람 사는 곳이라, 이르기를 백두산 아래 첫 동네라는 곳이다.


민가는 예닐곱 호에 지나지 않는데 주재소의 성은 역시 크고 견고하다. 그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이 작은 산촌에 오히려 학교 부럽지 않니한 커다란 글방이 있음인데,  건축역사가 8분(80%)이나 되어, 이덕에 그 마룻바닥을 빌려서, 서울서 떠날 때에는 여기서부터는 노숙 할 줄 알았던 것이 의외로 하루를 더 지붕 밑에서 이슬을 가리게 되었다. 주민과 경찰관의 환영과 대접이 지극하고, 밤엔느 자위단이 총동원되어 숙소를 철야 수호함에는 도리어 송구러웠다.


포대산 아래 두 골 물을 어울러 받아서 급속히 발달하여 수십 호가 제죽의 힘이 무엇인 줄을 모르고 아무 근심 없이 지내던 이 마을이, 주재소가 들어오고부터는 액운의 신의 발동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국경 밖에서 침입하는 무장단과 주재소원과의 충돌로 인하여 격심한 불안이 밀어닥쳤다. 백두산 이 속까지에 그네의 사벨을 붙일 줄 아느냐 하는 듯한 독립단의 강습이 뻔하게 행해져 주재소원의 피살이 한두 차례 한두 명에 그치지 아니하는데, 이때마다 독 틈에 끼인 탕건인 동민의 난처한 사정은 무성이 비길 수 없었다. 지금부터 5년전(1922년) 7월 28일, 수십 명이 교모히 침입하여 격전 한 시간에 순사 부장 이하 수명을 죽이고 물러간 이후로는 아직 잠잠하지마는, 위치가 위치이므로 안심하고 지내지는 못한다고 한다..



평지길 40리 허항령(虛項嶺)


  31일, 밤중부터 시작한 비가 아침에 걸쳐서 더욱 심해지고, 산 전면을 휩싼 물안개가 더구 짙어져서, 얼른 개기를 바랄 수 없으매, 우장을 차리고 9시나 되어 출발하였다. 흑은 천막, 혹은 담요, 닥치는 데로 뒤집어쓰고 나서매, 마치 온갖 귀신이 백주에 날뛰는 듯하다.


길은 동리의 등 뒤로부터 별안간 가파른 고갯길이 되어, 벼들과 단풍이 번갈아 우거진 사이로 한참 동안을 절벅절벅 올라갔다. 이제는 오름길이 시작인가 하여 얼마만큼 겁을 집어삼켰더니, 1리 좀 남짓하여서는 다시 평지 길이 되어, 가고 가도 쥐양(마냥) 그턱인데, 실상은 이것이 이미 허항령 마루턱에를 올라선 것이라 한다. 허항령은 백두산 정맥의 한 고지로, 올라가자면 하루 이틀 해라도 지우리라고 하던 것인데, 벌써 마루턱에를 올라섰다함이 정말이라도 거짓말 같다. 여기서부터는 도끼자루 한 번 들어가보지 못했다고 할 만한 밀림지대가 시작된다.


땅은 높아지지 않아도 숲은 걸음걸음 배어져서 왕왕 햇빛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데가 있고, 헌칠민틋한 낙엽송 숲이 여기저기 내딛고, 또 바다 가?데 섬처럼 여러 가지 신나무가 총총 들어선 숲이 침엽수 바다에 떠 있어, ? 제주도 분수되는 곳도 있고, 흑 울릉도 분수되는 곳도 있고, 흑 강화도 분수된는 곳도 있어, 엄청나게 큰 딴 세계를 이루고 있음이 신신하다. 지나는 사람의 얼굴은 새로워, 뼛속 마음속까지를 비취옥 이상으로 파랗게 물들여준다.


원체 숲이 배고 볕발이 엷고, 게다가 땅이 무르고 그 위에 비까지 오매, 숲 사이 길이 질척거림이 여간 거북살스럽지 아니하며 얕은 물웅덩이조차 여기저기 있고, 그런 데마다 이깔나무를 데같이 매어서 교량 비슷하게 길이로 깔았는데, 성한 곳은 좋지만 썩고 부서진 데도 적지 아니하여 활개춤을 추고 건너가면서도 자칫하면 흙두루마기를 할 곳이 경성드뭇하며, 이러한 다리를 무릇 일고여덟 곳이나 지나서 야 비로소 밀림을 벗어나니, 그 지리함을 생각할 것이다.


밀림의 오전은 또 그대로 밀림의 오후로 계속되어가고 또 가도 수풀 또 수풀이다. 적막의 터널과 같은 이 기나긴 숲이 단순한 숲으로만 볼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으니, 얼마만큼씩 동안을 두고 현란한 장식을 시설한 숲 사이의 빈 터가 내닫는다. 비바람 천 년을 기승스럼게 정복한 수십 길 큰 나무들이, 아래서는 뿌리로 손을 잡고, 위에서는 가지로 어깨를 걸어, 신비로운 숭엄을 그 중간에 그득히 포옹하였는데, 명주 실보다 곱게 뽑힌 엷은 푸른빛 소나무 겨우살이가 굴고 가늘고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타래와 매듭을 짓고, 길고 짧은 온갖 솥을 만들어서 나무나무와 가지가지에, 없는 듯 질서도 있고 안 된 듯 안배도 되어서, 잘 생기고 보기 좋게 주렁주렁 늘어지고 축축 드리워 있는 현혹정인 광경은, 실로 전에 아무 데서도 보지 못하고 언제도 상상해보지 못한 이곳 독특한 미관, 장관, 대관이다. 우리의 무딘 붓 끝은 어떻더라는 이야기를 하려 함이 이미 더할 수 없는 외람됨을 느낄 뿐인 구경이다. 청초한 대로 풍염하고 분명한 대로 황홀한 그로 인해 온느 느낌은, 굳디 이름을 짓자면 성스러운 취함이라고나 일컬을 것이었다. 도대체 조화의 이 장식은 누구를 위해서 베푼 것이며, 언제 무엇에 쓰려고 준배해놓은 것일까?


눈이 모자라게 끝이 없는 이 밀림, 그놈이 그놈 같은 이깔나무밖에는 바윗돌 하나 없는 나무만의 세계인 밀림을 뚫고 나가, 이럭저럭 50리를 걸어 해동갑 비동무하여 허항령 복판 사당집 있는 곳에 다다랐다. 좀더 가려진 예정이었지마는, 비도 오고 땅도 절철거리므로, 그만 여기서 숙소를 마련키로 하였다.



비를 맞으며 路營의 첫날밤


  수백 사람과 말의 야영 준비가, 산비 부슬거리는 가운데 천왕당을 중심으로 하여 야단법석으로 벌어졌다. 말에 실었던 짐이 산같이 쌓이고 이 구석 저 구석 도끼 소리가 탕탕 하는 곳에는 대부등 나무가 우쩍우쩍 넘어간다. 우선 화톳불을 질러 야습한 땅을 말리고, 또 그 불에 물도 끓이고 밥도 짓고, 기둥과 들보를 장만하여 천막을 치고, 그 밑에는 마른 솔잎을 깔아야 집도 들여놓고 사람도 들어앉을 수 있을 터이매, 야영지점에 닿기가 무섭게 설두하는 것은 나무 장만이다.


한참 떠들석 분주한 가운데 비에 젖은 무거운 연기가 뭉게뭉게 오르는 듯 서린 곳마다 각반이 제각기 얽는 천막이 우뚝우뚝 일어서서, 별안간 사람없는 깊은 산중 숲속에서는, 우스운 이야기 반 음식 반으로 반합을 기울이며 입맛들을 다시는 것이, 분명 현실인 채 꿈 속 광경같다. 언제쯤인지 모르거니와, 한 사오쳔 년 전쯤(단군 시절) 조상의 꿈자취를 다시 나타낸 것 같아서 일종의 이상한 감회가 울연히 생겨난다. 어두운 빛이 어느덧 모든 것을 캄캄한 어둠의 입 속으로 집어삼키고, 군데군데 붉은 결이 활활거리는 화톳불만이 밤의 신의 눈빛처럼 번쩍인다.


천막마다 "비가 새어서 어쩌나!" 하는 소리 속에 야영 첫날 밤은 차차로 깊어가고, 변이 무서워 숨었떤 우위는 이제야 내 세월이란 듯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나는 홑옷과 홑두루마기를 입고 노루 가죽을 깔고, 두꺼운 담요를 덮고, 그 이ㅜ에 방수포까지 얹고서, 그래도 이밤을 달 게 지낼 생각을 하였다.


추운 밤이었다. 아랫 인간에서는 모기장에 선풍기에 얼음을 덥다하고 삿자리를 텁텁하게 알 때에, 통나무 화톳불을 앞뒤로 질러놓고 털솜에 말려서도 다리를 곱송그리게 되는 밤이다. 선뜻하여 잠이 깨매, 아린 바람은 이마를 스쳐가고, 덮개 밖으로 내어놓았던 어깨에는 솜옷에 베어들어온 비가 살을 한참 얼렸다. 의복가 짐이 반이나 젖었으므로, 한 가지 한 가지 살을  한참 얼렀다. 의복과 짐이 반이나 젖었으므로, 한가지 한 자기 불 가고 나가서 말 리는 동아나에, 번한 기운이 동녘으로부터 부시시 일어나기 시작하고, 닭 대신이라는 듯이 말의 울음소리가 새벽을 알리노라고 잠잠하던 숲을 여기저기서 뒤집어 흔들기 시작한다.


빗물에 말아서 바람으로 반찬하는 밥이나 되기에 요렇게 맛나지 하는 소리는, 옹송그리고 앉아서 아침밥 먹는 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감탄성이었다. 함께 고생하던 이들이나 알 일이지마는, 연전 경석 감옥에서 강마른 흰콩 버무리만을 퇴내게 먹다가, 흐물흐물 삶아진 검정콩밥을 먹을 때에 밥맛이란 것을 처음 안 듯도 하고, 이렇게 맛난 밥을 다시는 못 먹겠다고도 하였떠니, 시루에 찐 감옥 검정콩밥 아니라도 뜻밖에 여기서 유달리 별미나는 밥을 또 한 번 얻어먹는구나 하였다.


빗발이 동쪽 햇빛의 반비례로 주릭 비롯하여, 아득한 수풀 끝 너머로 뚜렷한 해가 넘겨다보일 때에는, 기약한 일없이 환호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난다. 해를 평생에 처음 보는 것 같다. 어저께 하루를 밀림 속에서 절벅거리고, 밤잠이나 편히 잘까 하다가 꿈마처 축축한 꿈을 꾸지 아니치 못하고서, 또 하루 찬비 세례를 받으면 어쩔까 하여, 아닌데 아니라 간을 졸이던 우리에게는 동천의 붉은 해가 어느 것보다 큰 메시아닌 것이다.


오늘도 깨끗한 백두산 길을 걷는다 함이 용기의 원천이 되어, 발이 부르텄다. 오금이 시다 하던 이들의 찌푸렸던 이맛살도 다리미질한 듯 펴지고, 춤추듯이 행장을 수숩하여 8시가 되자마자, 신호 나팔 소리와 함께 어컴컴한 사이을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세계적인 장관의 三池의 아름다움


가고 가도 여전한 밀림 지대이다. 끌밋한 맵시와 싱싱한 빛의 이깔 나무가 빽빽하니 들어선 숲이 끝이 없다. 그러다가 하마 싫증이 날뻔한 대목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숲이 좀 설핏해지는 듯하여 야릇이 생각하자마자, 길 오른쪽 숲속에서 문득 훤한 기운이 와짝 내달아오는 것은, 허여멀거니 수더분하게 생긴 미인에 비할 만한 한 조그만 호수였따. 푸른 숲으로 울타리를 하고 으슥히 또 그윽히 혼자 드러누워서 영원한 무슨 깊은 슬픔을 품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도 일으키지 못하는 듯한 고뇌에 누린 한 여신을 보는 듯한 쓸씀한 호수였다. 반가우니마니, 삼림의 위력에 숨구멍이 거의 막히게 되었떤 사람의 입에서 후유! 하는 한숨 소리가 기약한 일없이 일제히 나온다.


"저기 가 쉬어 가자!"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지마는, 조금 가면 더 좋은 데가 있다고, 길 안내인은 듣지 아니한다. 글세! 하고 좀더 가노리까, 어마어마한 광경이 앞으로 내닫는다. "나왔다,나왔다!" 조화의 구상이 어떻게 갸륵하고 조화의 솜씨가 어떻게 엄청 난 것인가를 나타내보이는 것이 여기 나왔따. 하늘 궁전의 파란 유리 한 장이 무슨 사품에 이리로 내려와서, 제가 제 아름다움에 흘려 지내 느라고 가만히 드러누어 있는 것 같다. 이 속에 들어와서 저런 경치가 생기다니! 조화가 이니 짓궂은신가!


여기는 삼지라 하여 옛날부터 이름이 높이 들인 곳이니, 크고 작은 여러 늪이 느런히 놓인 가운데 셋이 가장 뚜렷한고로 삼지라 일컫는 것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더 많았을 것이 분명하니, 혹 칠성지라는 이름이 있음은 필시 일곱으로 보이던 시절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세 호수 중에서 크리로나 아름다운으로난 으뜸이 되는 것은 가운데 있는 것이니, 둘레가 칠팔 리에, 파란 물이 잠자는 것처럼 고요한데, 동쪽과 북쪽에는 속돌 부스러진 무게없는 모래가 백사장을 이룬 밖으로 나직나직한 이낄 숲이 병풍처럼 에두르고, 서쪽으로 들어가면서 얽은 구멍 숭숭한 돌들이 운치있게 꾸민 정원처럼 목장이가 되고, 동글 우뚝한 조그만 섬 하나가 바로 소담스럽게 호수 가운데 솟아, 나무가 우거지고 돌 모양이 운치있다.


그러나 삼지의 아름다움은 삼지만의 흩겹 아름다움이 아니다. 일면으로는 백두산 이하 간백, 소백, 포태, 장군 등 칠판천 척의 높고 험함 산들이 멀리서 둘러싸고, 일면으로는 천 리 천평(백두산 중턱의 엄청나게 넓은 들)이라고 하는 큰 들의 깊은 수풀이 끝없이 터져 나가서, 웅장하고 호쾌한 갖은 요소를 다 드러내보였으니, 이러한 것은 어쩌다가 한 번 있을 일이요, 어쩌다가 한 군데 생긴 것인 만큼, 그 신기하고 소중함이 여간일 수 없다. 삼지를 초점으로 하여 나타남 미의 한 서클은 백두산 아름다움의 클라이맥스인 동시에 실로 조화의 가장 자신있는 대걸작이요, 인류의 가장 의의있는 한 재산일 것이다.


삼지의 물은 보기에 찬 것과는 달리 따스하다. 평균 20도(섭씨)가량의 온도를 가졌고 최고 온도는 22도 반까지를 보이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한 쪽에서 찬물이 들어가 섞인 결과요, 만약 온수의 근원을 찾아 찬물은 막으면 온천으로의 소용이 넉넉할 것이다. 백두산의 북쪽 기슭에는 지금 온천으로 쓰이는 곳이 있으니, 남쪽 기슭인 이곳에도 온천이 온천장으로 되어 삼지의 세계적 실질이 세계적인 큰 이름을 누릴 것이라 한다. 삼지는 세계적 절경이요, 또 두드러진 특색과 특별한 맛을 가졌기 때문이다.



밀림의 바다, 千里天坪


  허항령에 와서 백두산이 수풀 끝으로 약간 보여왔지마는 삼지 가에 와서야 비로소 전신이 환하게 보이는데, 비교적 우뚝하고 가파른 뜻을 띤 소백산과 약간 울퉁불퉁한 맛을 가진 간백산에 비하여, 어디까지든지 둥싯 뭉수레하여 조금도 모양내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이 백두산이다. 허옇게 두리두리하여, 높은 지 큰 지조차 모르게 평범하고 수더분하기만 한 것이 백두산이었다.


허항령 올라가면서부터 시작된 평야가 가고 가도 그지없다. 그러께 종일토록 걸어나온 밀림도 요컨대 그 어귀일 따름이며, 오늘 하루 옥신각신할 길이 또한 그 서북쪽으로 치우친 한 자락 모퉁이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백두산이 오지랖을 벌리고, 포태산이 오른쪽 깃이 되고, 증산이 왼쪽 깃이 된 둘레 몇백 몇천 리가 실상 커다란 한 벌판을 이루어, 백두산으로 하여금 높음과 한가지로 크고 넓음의 임자가 되게 하니, 이것이 예로부터 천평이라 하여 신비로운 곳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어떤 책에 말한 대로 백두산 둘레늬 기슭을 다 천평이라 한다면, 이것이 옛날 뜻의 천평이라 한다면, 지금 서간도 북간도도 다 여기 들 것이니, 그 넓이를 이루 헤알릴 수 없을 것이다.


언제인지 이 넓은 들에 큰 불이 났다. 어떤 학자의 짐작과 같이 한 3백 년 전에 났던 것만은 대개 의심없다. 삼지에서 20리쯤 나가서 간백산을 서쪽으로 보게 되는 무렵부터 이 불탄 자리가 시작되어가지고, 가지와 잎은 타서 없어지고, 껍질은 썩어 떨어지고, 줄기만 우뚝하게 남은 것들이 마치 전신주로 못자리를 부어놓은 듯하며, 그 아래는 밑두잉 부러져 넘어진 나무들이 어지럽게 얽혀져 누었다. 열에 일곱은 불탄 자리, 셋은 어린 나무를 사이로 옅은 골짜기 낮은 언덕을 수 없이 오르내려 약 25리쯤 와서 중화를 하였다. 나무가 많기는 많은 데 타 버린 나무라 잎새가 없고 따라서 그늘이 없고, 따라서 밥 먹는 동안도 작은 샘  하나 없어서, 땅은 밖에서 볶고 목은 안에서 타서, 오늘이야말로 삼복 중에 산길을 가는 성싶다. 어려움과 부족함을 견디어냄이 도리어 등산의 한 즐거움이라고도 하거니와, 반날 이상 물구경을 못 하고 밥을 먹고도 목을 축이지 못하는 어려움에는, 과연 일적천금이란 말이 공연한 말이 아니다. 누가 이 빽빽한 숲 한가운데서 사람이 낙타 아님을 한하게 될 줄을 뜻하였으랴. 이러한 변화도 바다 같은 백두산 속이기에 얻어보는 것이지 하면, 그지없이 거룩하 심을 이것으로도 다시 한 번 느끼겠다.


불탄 자리! 하나도 옛 생명과 호흡을 지니는 것이 없고, 나무나무의 겯코틀던, 가지가지의 시새고 다투던, 잎새잎새의 누르고 떠림던 허다한 파란 곡절이 불길 한입으로 들어가서 찬 재 한 줌으로 화해 버린 이 자취는, 들에 홍수가 있는 것처럼 삼림에서 산불이라는 것이 있어, 필요할 때마다 한 바탕 숙청하고 또다시 되돌아가는 윤회를 가장 실감나게 깨닫게 하는 산 교과서와 같다.


천지 개벽이 된 이래로 이 땅  위에 몇 번이나 파랗게 덮였던 삼림을 빨갛게 태워 버리고, 하얗게 벗어졌던 땅에 파란 삼림이 다시 나서, 자라서, 우거져서, 그리하여 배게 덮였다가는 도로 타 없어졌던가? 얼마나 많은 웃음과 노래와 슬픔과 한숨이 이 맷돌의 틈에 으스러져서 가루가 되고, 그리하여 꿈의 바람에 솰솰 날아 흩어질 터인가?


불탄 자리! 나느 거기서 차라투스트라를 보았다. 솔로몬을 보았다. 석가모니를 보았다. 더욱 부지깽이 사이에 한가하도고 만족한 듯이 피어 있는 이름없는 풀꽃들의 위에 동서 고금 어떠한 시인 역사가에게서도 듣지 못하던 인간의 그윽한 기밀을 퉁기어 받았다. 그리하여 손길을 마주잡고 고개를 숙였다.



조선나라 태어난 곳


오랜 옛날부터 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조선인문의 창건자는 실로 이 백두산을 그 최초의 무대로 삼아서 이른 바 홍익인간의 희극의 막을 열고 그 극장을 신시神市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단군의 탄생지요 조선나라의 출발점이라 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가장 기념해야 할 이 중대한 유적은 대개 어느 지점이었을까? 이는 실로 조선의 역사적 민족적 일대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지마는, 지금까지 이것을 문제로 삼은 이도 없는 만큼, 여기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다른 것보다 절실하고 뚜렷함이 모자라는 느낌이 있다.


조선 최초로 나라 세운 곳을 이 천평에 비기기는 10여 년 전에 발표한 계고차존稽古箚存으로써 시초를 삼으려니와, 이제 천평을 실지로 와서 보니, 신령스러운 산을 등에 지고, 성스러운 숲을 안고 있어, 그 그윽하고 신비롭고 편평하고 넓음이, 원시국가의 발생지로 가장 적합함은 물론이고, 큰 산들이 둘러 있고 긴 강이 땅을 적시어, 그 광대하고 웅려함이 근대국가의 생장지로도 가장 우월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음을 봄에 미쳐, 이 천평이 옛날 국가의 요람지로 비기게 됨이 과연 우연한 것 아님을 깊이 느끼지 아니치 못하였다.


보아라! 조선 1만 년의 천평이 여기에 널려 있다. 1만 년의 풍운 조화가 여기저기서 굼실굼실하고 어른어른하고 벌떡벌떡한다. 떡가루 처럼 부서진 작은 모래 한 알도 그 어른하고 벌떡벌떡한다. 떡가루 처럼 부서진 작은 모래 한 알도 그 어른의 거룩하신 경륜을 싣고 있던 나머지요, 썩어 문드러진 나무 등걸 하나도 그 어른이 부으신 이슬비의 나머지임을 생각하며, 눈앞에 보이는 하찮은 무엇엔들 어찌 경건하게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있으랴.


천평이 본디 신국의 옛터임을 느낀 이는, 이 많은 일행 중에서도 혹시 나 한 사람뿐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넓고 좋은 땅을 버려둠이 황송하여, 마치 하늘이 주신 보배를 사람이 잘못하여 천대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누구나 미안을 품기는 마찬가지인 성싶다. 나팔 소리가 났다. 대열을 동북을 향하여 꿈틀꿈틀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조금만에 구슨벌로 거칠봉을 거쳐 무산으로 통한 길을 오른쪽으로 두고 지나면, 그리도 질펀하던 산불에 탄 들고 10여 리 만에 끝이 나고, 자작나무와 낙엽송의 어린 숲으로 비슷하여, 숲이 다시 걸음을 따라 차차 더 짙어진다. 숲속의 나누 밑으로는 가는잎철쭉, 고산백합, 패랭이꽃,엉겅퀴 그 밖의 허다한 풀꽃들이 일시에 만개하여 봄이 한창인데, 고운 빛 맑은 내가 물결차듯 출렁거리날. 이 근처의 봄이 7월에 시작하여 8월 중순이면 가니, 그러므로 온갖 초목이 이동안에 일제히 꽃 피고 열매 맺기를 바빠하여 봄빛의난만함이 평야 보다 무덕짐이 있다.


조선인이 백두산을 잊어 버렸다. 생각한다 하고 안다 하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별로 낫지 못한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천평은 아주 답답하게 잊어 버렸다. 민족 생활의 근거인 여기를 이렇게 잊어 버리고, 잊어 버려도 관계없이 아는 다음에야, 그네에게 무슨 바탕있는 일과 싹수있는 일을 기대할 수 있으리로? 조선의 모든 것, 사람의 마음과 나라의 운명까지도 공중에 둥둥 떠서 어느 바람에 어떻게 나부끼는지 모르게 됨이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큰 과거도 거느리지 못하는 자에게 큰 장래를 만들어내는 역량이 있을 리 없나니, 개구리밥 같고 버들 개지같이 닿는 데와 박힌 데 없은 오늘날 좃너 사람에게 화 있을진저! 이 무서운 병의 뿌리, 화의 근원은 실로 백두산과 그 천평을 잊어 버린 때에 시작되었음을 생각할 것이다.



天坪(천평)은 향수의 바다


천평은 제 차체의 넓음에서 이미 한 바다요, 그지없는 봄빛이 거기 널려 있는 점에서 또한 한 바다요, 거기 핀 꽃이 도무지 하늘 빛, 하늘 향기인 점에서 저절로 한 향수의 바다인 것이거니와, 그것이 다시 온갖 덕을 갖추고 겹겹으로 된 점에서 변통없이 향수의 바다라 할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산 전체가 흙의 바다라고 못 할 것도 없겠지마는, 백두산에 바다를 말함은 이러한 의미도로 아니다.


여러 가지로 바다를 견주어 말한 것 가운데, 나는 여기서 식물의 경관에 관한 것만을 듣고 싶다. 백두산은 여러 가지 풍토적 특질을 가져서, 여기에 작 적응하는 식물이라야 비로소 생존하고 또 번식할 수 있으니, 이 풍토에 특히 순응성과 내구력이 우수한 것이 나타나면, 폭군적으로 다른 것들을 없애고 홀로 무성한다. 이러한 관계는 저절로 어느 한 지역으로 하여금 어느 한두 가지 식물의 독점 무대를 짓게 할밖에 없으며, 설사 몇 가지 식물이 섞여 사는 것을 볼지라도 교목(큰기나무)은 누구, 관목(좀나무)은 누구, 나무에는 무엇, 풀에는 무엇, 누구누구 무엇무엇이라는 거기거기의 특징적 주인이 있어서, 다른 것은 미미한 덧붙이로 한구석에 박혀 있을밖에 없는 형세이었따. 이래서 백두산의 식물 경관은 가장 숭연한 의미로 집중적이요, 배타적으로 따로따로 한 왕국을 형성하였따. 이 한 집단 한 왕국을 각가 그 일망 무제한 방면으로부터 보면, 무엇이라는 것보다 한 바다가 함이 가장 적적함을 깨달으며, 그네 각개가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으 저것대로 물들고 때묻지 아니한 환국(하느님 나라)대로의 무르녹은 향기와 어깨를 맞추어 간잔지러한 듯한 주엥 고요한 물결이 별밭에 높으락낮으락하는 동태를 가진 점에서 어떻다 하는 것보다 향수의 바다라 함이 유난히 적절함을 깨닫는다.


이깔나무, 전나무, 봇나무(자작나무) 등의 바다는 여기서도 다른데와 같으니 새삼스럽게 일?지 말자. 불탄 자리 바다 위의 불탄 그루 돛대가 드문드문해지면서 맨 먼저 눈을 놀라게 하는 식물의 집단을 들쭉의 바다이니, 몇십 리 몇백 리를 뻗쳤는지, 거너는 동안이 여간한참이 아니며, 지나는 길에 저절로 손끝에 거치은 열음(열매)만 따먹어도 미처 씹을 겨를리 없을 만하다.


겨우 들쭉 바다를 건넜구나 하면, 들쭉 비슷하고 들쭉은 아닌 매젓이라는 것의 바닥 나서는데, 망망히 뻗어나간 것이 들쭉 바다를 실개천으로 웃으려 들며, 그 열음은 빛과 몸과 맛이 다 들쭉 비슷하되, 모양이 들쭉이 둥근 데 반하여 매젓은 갸름함이 다르며, 맛도 들쭉보다 신맛이 더하고 수분도 좀 많은 편이다. 다시 이 한 바다를 겨우 헤치고 나가면, 이번에는 산철쭉 바다가 벌어지는데, 키는 땅딸보요 잎새는 가느다랄망정 꽃은 한 번 처절하도록 곱고, 잎새는 한 번 향기가 짙어, 신선 셰계의 요초에 저도 한몫임을 기껏 자랑한다. 철쭉바다 다음에는 백합의 바다가 나서고, 그 다음에는 금랍매의 바다가 나서서 가각 1년에 한 번임을 자랑하는데, 백합의 지극히 청초함과, 금랍매의 지극히 우아함이 다 인간 셰계의 물건이 아니다. 더욱이 금랍매란 것은 백두산을 대표할 만한 특종의 식물이니, 키는 커야 무릎에 찰락말락한 작은 관목에 호박씨만한 네 잎 푸른 잎사귀와 배꽃만한 다섯 잎 노란 꽃이 오종종하게 달려 있어, 산중의 부귀는 나에게만 있느니라 하는 양하다. 백두산의 품속에 들어설 때에 이미 달리 무엇이라고 할 수 없고 백두산 냄새라고나 할 것을 맡아오지마는, 더욱 천평 이쪽의 식물 무리에 들어서면, 무리마다의 특유한 향기에 뼛속이 번번이 바뀌어 들어옴을 깨닫는데, 그 하나하나의 향기가 제각기 묘한 뜻깊은 맛을 가져서 신선으로 화한 듯한 생각이 들며, 어느 한 식물의 분포 지경과 그 관상미에는 진실로 국한이 있으되, 오직 이 향기만은 한량없는 큰 바다를 이루어 한 번 그속에 몸을 던지면 황홀히 하늘의 맛에 취하지 아니치 못한다. 이리하여 향을 주로 하여 이를 표현하자면, 이는 향의 하늘이요, 향의 세계요, 아니 향의 바다라 함이 가장 적절함을 본다.


삼지에서 신무치까지의 하룻길 동안에는 먹을 물을 구할 길이 없으므로, 뙤약볕 땀 나는 길에 갈증이 목구멍과 가슴을 한꺼번에 쥐어뜯는데, 꼭 죽나보다 하는 이때 이 사람에게 꼭 하나 사는 길이 되는 것을 들쭉과 매젓이다. 콩알만큼씩한 열매에 수분이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으랴 하겠지마는, 한 방울 수분도 큰 바다 이상의 고마운 느낌을 줌은 물없는 천평 길을 시험해보지 못한 이로는 도저히 짐작 못 할 일이다. 오늘날 따라서 우리 조선 사람의 고통, 이것이 사람이 견딜 노릇이며 이 목마름과 주림이 한시인들 견디어낼 바이랴마는,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중에서도 태연히 또 든든히 지나가는 그 원리는, 멀리지 아니한 앞에 분명히, 근래 분명히 조선 사람의 한 신무치가 있?르 확신하는 그것임을 누가 아니라 하랴. 거기까지 다함이 우리의 큰 양식이요 큰 촛불이지.



신무치의 해돋이


  한 바다를 지날수록 숲이 점점 짙어져서 몇 번 꼬불꼬불하는 동안에 처음 보는 깊은 수림이 앞에 당한다. 그저 조밀하다든지 깊다든지 할 것이 아니, 우람스럽고 무시무시하여 미묘 그것, 신비 그것이라 할 성스러운 수림이다.


수상스러운 구름이 연방 덜미로 넘어온다. 헤질 듯하다가는 더 많이 뭉치어가는 것이 암만해도 마음이 놓이지 아니한다. 성긴 빗방울이 연방 으름장을 놓기까지 하매, "탈이오, 어서 갑시다."하는 소리가 지내봄 이의 입에서 나온다. 반은 달음박질로 길을 재촉하여 4시반에 신무치는 서에도 동으로 흐르는 두 줄기 작은 개울이 합쳐지는 목장이에 임한 곳이니, 개울 바닥이 깊다랗게 패여서 참호 비슷하매, 높은 곳은 미상불 성곽과도 같다, 개울물이 찬 것은 물론이요, 양은 많기도하여, 너도 나도 하고 다투어 다려들어서 허겁지겁 들이마신다. 신무치가 나를 살렸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다.


헤어졌던 구름이 모여들고 희던 구름이 검어지면서 작대기 휘두르는 것 같은 우악한 바람이 그리로서 불어 나와서는 사람의 볼을 에어가려 든다. 천막 치는 것이 급한 일이라 하여, 여럿이 들이덤벼서 작은 조각을 크게 얽기에 손가락이 열뿐임을 애달아하건마는 남의 사폐는 생각하려 들지 아니하고, 은하수가 그대로 쏟아지는 듯한 무서운 소나기가 쏟아진다. 쏟아진다! 함부로 마구 쏟아진다! 얽다만 천마을 그대로 뒤집어?다가 좀 긋는 듯하매 다시 나와서 남은 것을 꿰매다가는 또 한 차례, 이렇게 두세 번을 맞고 간신히 하룻밤의 호텔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는 비에 바람이 이렇게 복작복작하지마는 나무 너머로 넘여다보이는 백두산 쪽의 하늘에는 연지를 푼다, 황금을 바른다, 오늘 하루의 마지막 성찬 차비가 한참 바쁘신 모양이다. 아침에 두만강 저쪽에서 이깔나무 바다를 넘어온 삼림의 태양을 보고, 이제다시 이깔나무 바다 너머의 압록강 저쪽으로 넘어가는 저녁 해를 보낸다.


무더기 무더기 오는 소나기의 위협 밑에서도 양영 준비는 지체할 수 없이 진행되었다. 배어온 화목이 수북이 쌓이고 화톳불이 여기 저기에 일어난다. 손을 얼려가면서 씻어온 쌀과 푸성귀는 불 위에서 벌써 지글지글하는 소리를 낸다.


소나기 지나는족족 어둠의 장막이 한 겹씩 더 덮여서, 하루의 신비가 거의 다 몽환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이 다없이지는 대로 통나무 화톳불은 더욱 뚜렷하고 더욱 기세있게 활활 타오는다.


총 소리도 군도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수런수런한다. 간부로부터 기별이 왔다. 부근에 마적 집단이 머무른 형적이 있어, 군대에 비상 경계를 내리고, 일변 경관을 내보내 수사하게 하였으니 깊이 잠들지 말고, 만일의 일이 있을 때에는 호각을 길 게 불 것이니 각 반은 간부있는 곳으로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대개 여름 한철은 녹용 사냥과 산삼 채취와 아편 재배등으로 인하여 백두산에 마적 활동이 가장 활발하다 한다.


하 심심하더니 이제야 국겨 기분을 톡톡히 맛보나 보다 하여, 일종의 든든한 기대가 생긴다. 적어도 탄환방이나 터뜨릴 사건이 생겼으면 하느 객쩍은 생각이 간절히 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여차하면 고깃값이라도 한다 하여 식물 표본 채집에 쓰는 조그만 칼을 뽑아드는 등, 바로 비상 기분이 농후하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더니 두 번째 기별이 오는데, 경관이 나가서 사방 수색해본즉 가까운 지역에는 염려스러운 일이 보이지 않고 다만 멀지 아니한 숲속에 중국식의 새로 지은 초막이 서너 채 있은즉, 마적이 가금 왕래하는 것은 사실이리라 함이었다. 모처럼 긴장했던 극적 재미가 그만 풀어져서 도리어 입맛이 다시어진다. 화톳불만 더욱 기세있게 춤을 춘다.


새고 나니 8월 2일, 동쪽 하늘에 붉은 장막이 둘리고 해님 나오시는 기별이 각각으로 급해가매, 어둠을 제 세계로 하여 온 하늘에 자욱이 모였던 아리만의 권속들이 시각을 사방으로 달아나고, 까맣던 하늘에 차차 환하 구멍이

숭덩숭덩 뚫리고, 그 구멍에서 호박 같은 텁텁한 빛, 수정같이 맑은 빛, 마노같이 짙은 빛, 금패같이 엷은 중에는 그대로 어우러져서 눈이 어리둥절한데, 이윽고 수없는 흰 말과 한량없는 자줏빛 천개에 옹위된 천왕 해님이 엄연한 얼굴을 나타내시고, 디사 그 점잖으신 걸음으로 시간의 궤도가 잔금을 내시면서 뭉싯뭉싯 높이 오르시매, 사람으로 하여금 도취케 하고 기뻐 뛰게 하고, 마음의 소리를 다하여 빛의 신비야말로 대우주적 최고 마술사 임을 찬송치 아니치 못하게 한다. 백두산에서 해돋이 보는 곳이 물론 한둘 군데 아니지마는, 가장 장엄하고 가장 웅려한 그것을 뵈올 곳은 오직 신무치가 으뜸이다. 신무치의 해돋이만은 결코 보기에 좋다할 정도에 그치는 것 아니다. 첫째 감격케 하고, 관념케 하고 마침내 황홀 신비한 종교적 정서를 이르키게 한 뒤에 마는 것이다. 커다란 무지개가 이리저리 서서 장엄한 기분을 돕는다.



가도 가도 신화의 세계


  길은 여전히 등성이를 서쪽으로 꺾여 조그만 시내를 끼고 들어간다. 금랍매의 덤불이 더욱 짙고 꽃이 더욱 생생하여 우리의 본집은 여기로다 하는 듯하고, 그 사이사이를 수놓은 패랭이꽃, 산난 초 등 초본과, 그 바깥을 둘러싼 이깔, 문비 등 목본은 하나는 더욱 청초함으로, 큰 나무 작은 나무, 나무새 푸새가 한데 어루리져서 어떻게 배고 촘촘한지, 마치 최대의 노력으로 속된 인간의 발이 신의 영역에 들어옴을 막으려는 것 같다.


깍아지른 비탈로 하여 골짜기 하나를 가로질러 건너가 두덩을 올라서서부터는 숲의 모습이 금시에 신비 숭엄하기 이를 데 없고, 서슬은 없으되 굳센 바람이 다른 데서와 아주 달라서, 끝없는 권위로써 지상을 순찰하는 양하디, 볕맛을 모르는 듯한 이 사이의 땅은, 마치 담요 바닥을 업신여기려 하는 듯한 보드라움이며, 그 중에 백두산에서도 신무치로부터 무두봉 사이에서만 난다는 꽃이끼는 천지간의 폭신한 맛과 다보록한 맵시는 내가 혼자 차지하였다는 듯이 사람의 눈에 따스한 뜻을 퍼부어주어서, 백두산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속과 같으리라 하는 느낌을 준다. 방울은 굵어도 오기는 야단스럽지 않은 비가 이따금 한 차례씩 꽃이끼 위에 내려서는, 행여 묻었을까 하는 먼지를 훔치는 듯 씻어버림이 또한 신통하며, 나무마다의 무더기진 송략에는 수정 구슬이 별눈처럼 다닥다닥 달려서 미상불 희랍적 신화의 기분을 농후하게 한다.


가는 데가 신아라 하면서도, 높을 만큼 높고 클 만큼 큰 산이 이제는 지척에 있다 하면서도, 이제나 지제나 하건만 산이란 것은 그림자 조처 볼 수 없다. 가고 가도 숲이요, 늘고 붙는 것이 숲의 짙어짐뿐이다. 하도 큰 나무 많은 나무 좋은 나무 사이로만 가매 차차 천지가 온통 나무 하나로 녹아들고, 나중에는 내 일신마저 눈뜬 채 다리 놀 리는 채 한 나무인 양하고 말아진다.


이런 지 얼마만에 뜻밖에 천지가 한 번 개벽하고 새 정신이 번쩍 나는 것을 살펴보니, 또한 산불로 탄 자리를 만남인데, 하늘도 보고 구름도 보고 들도 보고 그립고 그리운 산, 아따, 백두산 그 어른도 구름 가려진 대로일망정 살짝 건너다보매, 그쳤던 혈관의 피가 다시 도는 듯, 한참 먹혔던 숨이 긴 한숨이 되어 한꺼번에 코로 입으로 폭발되어 나온다.천평의 밀림을 뚫고 가다가 몇 번 이러한 불탄 들을 만남은 사막 먼 길에서 오래간만에 오아시스를 만난 이상의 느낌을 준다.


다시 10리쯤 가서 지내본 중 가장 우람스러운 숲으로 들어선다. 비가 오건마는 숲속에 들어서면 옷이 젖지 아니하고 짙음을 알 것이요, 숲 밖에만 나서면 해는 위에서 찌건만 바람이 밑에서 얼려와 그 높을을 생각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짜기 하나를 또 건너서는, 신무치로부터 은근히 높아지던 지세가 차차 드러내놓고 높이를 늘려서, 백두산도 오를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나게 하는데, 땅은 높이지는 대로 나무 키는 낮아지고 가지와 잎새가 오그라짐을 재주로 알아서, 갑자기 더 고산지대의 성질을 띠어온다. 이렇게 10리쯤이나 더 들어가서는 언뜻 둥그레 우뚝한 한 봉우리가 앞으로 내닫는다. 산중에서 봉우리 구경이 기이하다고 하면 듣는 이는 우습게도 알겠지마는, 아무 예기없이 밀림가운데로만 나오던 터이라, 이러한 봉우리다. 단정하고 미묘하게 생긴 봉우리요, 빳빳한 이깔나무가 촘촘히 들어서서 모양과 털이 마치 큰 고슴도치라고 햇으면 좋을 인상또렸한 봉우리다. 혼자인 줄 알았더니, 왼쪽으로 그림 같은 또 다른 봉우리로 더불어 서로 실컷 마주보고 있는 한 쌍의 부부봉이다. 어허 신기한지고! 반가운지고!


물어보매 이것이 유명한 무두봉이란 것이다. 무두봉 덜미를 타고 올라가면서 안개가 차차 트이다가 등성이로 하여 이마빼기에 가서는 백두산의 높음과 한가지로 세계의 큰 것을 단번에 깨닫게 하는데, 천리 천평이 한눈 아패 벌어지고, 끝없는 낙엽송 숲이 검푸른 융단을 깐 것처럼 전면에 덮여 있어 이것저것이 도무 아가리 벌어질 것뿐이다.


무두봉 근처에서는 이깔을 제한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작고 꼬부라지고 옹종하여, 살도 뼛속으로 찌고 키도 뼛속으로 자랐지 겉으로는 땅바닥을 설설 기는 것뿐이며, 다만 지금을 3월쯤으로 아는 고산성 풀꽃들은 1년에 한 번이라 하여 과연 서슬있게 만발하였는데, 종 모양의 자줏빛 꽃, 깃대 술 모야으이 흰 꽃, 국화 모양의 노란 꼿, 패랭이 꽃 모양의 진홍 꽃이 한데 어우러져서, 미상불 갸륵한 비단 한 필을 짜내었다.



기도로 지새운 무두봉의 밤


  신무치로부터 무두봉까지의 40리는 백두산 길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동안이다. 변화가 많고 고산식물, 백두산적인 특종식물이 이 사이에 많이 있고 속돌 밑으로 스며 흐르는 샘소리와 바람에 이아친 나무 모양이 낱낱이 백두산의 특색을 가장 선명케 발보이고 있따. 미상불 웅장하고 신비하고 또 위엄스러운 경치요, 백두산의 냄새와 맛이 뼈의 속속까지 스며들어간 뒤에 마는 곳이었다.


무두봉의 야영지는 이 밀림 속이 아니요, 그 어깨를 넘어가서 골이 지고 나무가 성긴 곳이었다. 성긴 것도 또한 나늘을 찌르려드는 뺑대 나무들이 아니요, 작달막한 나무들도 또한 가지마다와 잎새마다에 사나운 바람과 걸코 트는 고전 약투의 자취를 잔 칼금처럼 아로새겨 가진 것들이다. 어깨 처진 가장귀와 손끝 오그라든 잎사귀와 허리통 뒤틀어진 밑둥이 모두 다 자연개에 용사임을 스스로 선전함이다. 아무리 몹쓸 바람과 무식한 비이기로, 신령스러운 산을 호휘하는 책임을 소홀히 할까보냐 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그 직무로 죽은 뒤에 말려하는 늠름한 기상의 임자들이다. 어허, 이것이 무엇이래야 옳을 성스러운 용맹의 표상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개개의 나무에 대하여 절을 올려야 할 것이건마는, 여기가 야영할 곳이라 하는 지시가 내려지기 무섭게, 맨 먼저 집짝에서 끄집어내는 도끼와 톱과 칼에 맨 먼저 고사고기가 되는 것은 다른 것 아닌 이 나무들이었다. 찍혀와서는 천막을 위하여 결박당하고, 밥 짓기 이ㅜ하여 단근질당하는 것이 이 나무들이었다. 탕탕 하는 도끼 소리를 듣는 족족 활활하는 불길을 보는 대로, 황송하여 간이 말라들어가는 이는 아무도 나뿐인 성싶다.


백두산의 분화구가 가까울수록 무더기가 점점 많고 드러나서, 시냇물 같은 것을 아무리 곱게 떠도 항상 떠 있는 속돌 가루를 없앨 수 없으므로, 고운 헝겊에 밭이지 않고는 도저히 먹을 수 없으며, 아무리 걸러내다 하여도 밥에고 숭늉에고 약간의 돌까루를 섞어 먹지 아니치 못함이 무두봉 야영의 한 특징이었다.

비가 쏟아진다. 빗발이 밤빛과 한가지 자라서, 밤중쯤 가서는 높은 산 위에서 홍수 난리를 걱정하게 되도록 퍼부어 내려온다. 이때까지 올라오면서 도중에서는 비 아니라 억수가 쏟아질지라도, 다만 하루 상봉을 오르는 날에는 쾌청이 큰 은총을 줍시사 함이 모든 사람의 공통한 기원이었따. 모든 일을 젖히고 온갖 괴로움을 사양치 아니하는 것이 무슨 일 때문이랴, 백둣나 상상봉의 밝고 깨끄솬 천지도 뵙고, 남쪽 섬 북쪽 뭍 3만 리 산하에 웅장하고 넓고 가이없는 큰 법안을 얻어보자 함이 최고요 또 유일이라 할 목적인데, 그 동안 도리어 소나기요 가는비이던 것이, 정작 여기 와서 이렇게 큰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눈코를 뜨지 못하므로 하니, 이는 실로 장가가는 길에 다리가 끊어지는 이상의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나는 반생을 벼르고 백 가지 바쁜 일을 제쳐놓고 또 남과 같이 구경차나 채집길로 온 것도 아니라, 삼계에 헤매는 외로운 버렁뱅이 아이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자애로운 어머니의 온화한 얼굴을 한 번 뵈오려 함이요, 국조, 교주, 천제의 유일하신 표상으로의 그 성스러운 모습을 한 번 우러리 절하러 온 걸음이거늘, 이번에 이 숙원을 이루지 못하면 다음 기약이 다시 언제랴 하여, 원통한 정이 곧 가슴을 메이려 한다. 위에서 빗물이 작은 폭포 같고, 옆에는 바람살이 날카로운 창끝 같은데, 홀로 우뚝 일어나 앉아서 일심불란으로 기도를 올렸다.


우리의 죄가 심히 무거워서 본래 와서 우러러볼 만한 덕이 없사올지라도, 지극히 자애롭고 지극히 어지심으로써 내일 꼭대기에서 다만 1분 동안의 갬만 허락해줍시사 하는 것이 나의 한껏 모짊을 쓰는 소훤이었다. 그러나 정성을 쓸수록 비 형세는 그대로 기승스러워간다.


새는 날은 연구할 거리도 많고 상봉까지의 길이 험하기도 하니까, 새벽 2시에 출발하겠으니 지각되지 말 게 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피곤에 못 이겨 이리저리 답치기 잠을 자던 이들도 초저녁이 지나기가 무섭게 모두 일어나서, 12시 전후하여서는 으스스한 몸들을 쭈그리고 둘러앉아서 이야기들이 난만하기 시작하였다.

화제의 중심은 물론 비요, 비가 이렇게 오면 상봉 구경은 도리가 없으리라 하는 걱정이다. 일종의 침통한 기운이 여러 사람의 이마에 서리고, 조는 듯 꿈벅거리는 뜬숯불이 더욱 쓸쓸한 기분을 부채질한다. 



뭍의 多島海(다도해)


  12시로 1시로 출발한 시간은 점점 임박하건마는 비는 이것을 아는 체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사람의 애는 타고 볶이건마는 비는 이것을 어여삐 여기들지 않는다. 2시 소리가 나매 각 반에 세 개씩 나누어 주었던 종이 초롱에는 어둠을 헤치려는 불이 일제히 커졌다. 그러나 바쁜 것은 우리들 마음뿐이요, 하느님과 하느님과 하느님의 순한 아들인 마부들은 도무자 한가롭고 느려 2시 출발이 내 알 바 아니라고 하는 듯하다. 각기 내 말은 어디가 어떠니 빼달라는 경쟁으로 승강이를 벌여 이런 것들을 정리하노라고, 50필 말에서 10여 필만 데리고 실제로 떠난 것이 동이 훨쩍 튼 4시 반이나 된 뒤였다. 길은 서쪽에서 약간 북향으로 이깔나무 밭 속을 뚫고 나간다. 금랍매와 들쭉이 밀집한 숲은 의연히 곳곳에 한 독립 지대를 만들어 가졌는데, 나무 키들은 각기 제분수대로 걸음걸음 줄어들어가, 이깔나무 같은 것도 겨우 두세 척밖에 못 되고, 그나마 가지와 잎새가 다 오그랑 갈퀴가 되고, 또 그나마 밑둥과 가지가 모두 동남으로 썰그러지다가 차차 나무가 성기기 시작하여 아주 없어지는 무렵에는, 가장자리에 서 있는 나무는 서북으로는 가지가 하나도 없어 반쯤만 생긴 나무 모양이 과연 한 기관이었다. 여름철에 서북풍이 가장 강렬하기 때문이란다. 이곳의 산이나 들에 덮인 속돌을 보아도 미상불 다 동남을 향하여 물결 모양을 지었다. 나아가면서 오르면서 하여 길은 5리쯤 오고, 높이는 2천 미터 전후쯤 해서부터는 나무란 것은 씨도 없어지고, 느린 커브의 속돌 고원이 눈앞에 벌어져서 순수한 고산지대를 이루고, 식물은 완전한 초본지대로 들어간다.


변하다. 다만 높다고 다만 시원하다고 다만 절펀하다고 하든지, 또 높고도 시원코도 질펀하다고 해서는 꼭 맞을 것 같지 않고, 억지로 형용하자면 이 모든 요소를 합쳐서 표현된 '번하다'하는 말이 어는 정도 이 고산지대에 나서는 최초의 기분을 나타낼 것이다. 앞으로는 백두산을 비롯하여 우뚝우뚝한 산봉우리가 하늘과 입맞추는 것을 보고, 왼쪽에서 소백산 기슭으로 달려나가는 시내의 낭떠러지를 기고서, 사진에서 본 서방 사막의 모래 언덕과 같은 속돌의 물결 모양의 층계를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노라면, 풀도 배겨나지 못하고 돌부러기의 비교적 보드라운 틈을 뚫고자 가녀린 껍질에 시원 생명을 싸서 가진 조촐한 풀이 듬성듬성 고개를 쳐들고, 짧은 키와 다붙은 목이 감당해내기 어려운 비교적 큰 꽃을 고개로 이었다. 비는 위에서 뿐이요, 아랫녘은 반은 개고 반은 흐리다. 천평 천리가 아득하여 바다 같고, 바깥쪽에는 단단대령 동쪽 두만강 저쪽까지의 크고 작은 산악이 큰 놈은 큰 섬이요 작은 놈은 작은 섬처럼, 흡사 다도해를 이루고, 남쪽의 포태산은 제두도의 격으로, 동쪽의 증산은 울릉도 격으로 각기 일방에 우뚝 빼어났는데, 이깔나무의 푸름이 그 일면에 아른아른 물결을 침이, 과연 큰집의 문답고 백두산의 오지랖답다.


혹은 수평선 밖에서 산기슭에서, 혹은 그저 땅바닥에서 허연 구름이 뭉게뭉게 일기도 하고, 질질 끌기도 하고, 조각조작 헤어지기도 하여, 깊은 감흥과 한가지로 여러 가지 생각을 자아낸다. 바람의 관계인 듯, 뭉치뭉치 떠놀던 구르이 산봉우리를 의지하여 일자로 쭉쭉 뻗는 것이 마치 맹령한 바람에 쫓기는 화통의 연기와 같다.



뭍눈물젖은 定界碑(정계비)


  북으로 윤곽이 단순한 대각봉을 바라보고, 남으로 흰 모래를 긁어모아 소복하게 만든 듯한 소연지봉을 건너다보면서 길이 희고 깨끗하고 단정한 원추형의 한 봉우리 밑으로 났으니 이 산이 유명한 연지봉이요, 백두산으로부터 남으로 찢겨 나온 제일봉인데, 우리가 보는 그 서북면은 속돌에 덮여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하얀 몸이, 마치 재계하고 깨끗한 옷 입고 백두 천제께 시중들고 있는 것 같다.


연지봉 밑으로부터는 높이도 갑자기 더해지거니와 풍물이 또한 일변하여 겨울 봄 뜻을 나타내던 풀꽃도 거의 없어지고, 살았는지 말라는지 모를 명색만의 풀밭이 누렇게 또한 바다를 이루었는데, 그나마 땅바닥이 아침 저녁에는 얼고 낮 동안만 잠시 풀 리는 탓으로, 쥐양 해빙하는 흙이라, 어디를 디디어도 진창에 발목을 빠뜨리어, 마치 장마통에 산골 개울바닥 길을 걷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더욱 모호하므로, 준비하였던 붉은 기를 목정이마다에 꽂아서, 돌아올 때의 목표를 삼았다.


연지봉에서 얼마를 들어가면 두두룩한 긴 등성이가 동으로 향하여 뻗었는데, 뭉우리 돌을 모은 무더기가 수십 보씩의 간격으로 그 위에 벌려 나갔음을 보니, 이르기를 우리와 청국 경계의 표지로 쌓은 것이라 하니, 돌에는 비바람의 자국이 깊고 이끼가 겹겹이 앉아서, 우리가 보기에는 단 이삽백 년 전의 물건 같지 않다.

이것이 설사 묵극동의 국경 관계가 있다할지라도, 예부터 있던 것을 표지로 이용함에 그친 것이고, 필경 고신도의 귀중한 유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돌무더기 등성이의 밑에는 깊은 골이 지고, 속돌이 한 길 내지 열길씩이나 덮이고, 그 응달진 구석과 바닥에는 묵은 눈이 크림빛으로 깍아지른 적벽을 이루어 있으니, 아직도 녹지 아니하는 이 눈이 크림빛으로 깍아지른 절벽을 이루어 있으니, 아직도 녹지 아니하는 이 눈은 필시일년 내 물 되ㅇ어 볼 기회가 없을 터인즉 또한 일종의 만년설로 볼 것이다. 이 골은 토문강의 상류에 당하는 곳이니, 이리로부터 동북으로 약 15리쯤 마른 개천으로 나가다가 양쪽 언덕이 차차 좁아져서 대각봉 부근에서 양쪽에 약 1백 미터나 되는 단애가 지고, 그모양이 마치 문과 같아 토문강의 이름이 여기서 났다. 여기서부터 하천의 모양을 이루어 밀림 속을 동북으로 40리나 나가다가 모래내가 되어서 방향을 북으로 돌리고, 다음에 가는 개울이 되어 흐르다가 방향을 다시 서로 돌려서 마침내 송화강 상류가 된다.


이 골을 건너서면 펑퍼짐한 한 고원이 내달으면서, 거울 같은 작은 늪이 별같이 헤어져 있고, 뒤에는 군데군데 눈더미를 감춘 둥싯한 봉우리들이 병풍을 이루었다. 수령 같은 땅을 절벅거리며 배꼽점에 다다라보니, 조그만 비 하나가 얼른 눈에 들어오느데, 워낙 작게 생겼으므로, 아마 길 표적인가 보다 하고 살펴본즉, 놀아울손 이것이 수백년 이래 한,청 갈들의 주인공이신 유명한 정계비 그것이요, 국경을 표시하는 소중한 물건이다.

수백 리 동안에 아무 사람이 만든 물건이란 것을 보지 못하고, 더욱문자적 인연이라고는 점 하나 동그라미 하나를 보지 못하다가, 여기와서 문득 이 글자 새긴 물건을 대하매, 그것이 무엇이요 또 얼마만한 것이든지, 덮어놓고 반갑고 탐탐하여 눈물이 다 그렁그렁하여진다. 사람의 의사를 담아가지고 또 중대한 사명을 띠고 비바람 2백 년에 백두산을 지킨 것이 저 하나뿐인가 하면, 손 바닥만한 한 조각 돌이 얼마나 진중한지 모름을 느끼겠다.

이끼를 비비고 읽어보았다. 곧 우리 숙종 38년 임진에 세운 것으로 지금까지 2백 14년 동안 조선인의 게으름과 부끄러움의 탄핵자로, 듣는 이 없는 곳에서 소리소리 지르고 있는 것임을 알겠다. 비는 청색 자연석의 한 면만 평활하게 다듬은, 높이 2자 3치, 너비 1자 8치 남짓한 것인데, 밑에도 자연석을 괴고, 뒤에도 자연석을 버틴 것이며, 글자 모양도 고루하고 속되고, 새김고 옅고 졸렬하여, 국경 표지로는 너무도 창피한 것이다.

여러 날 비에 젖은 것이겠지마는, 비석에 쪼르륵 흐른 물이 어찌 보면 기막히는 설움을 눈물로만 다 나올 수 없어 8만 4천 털구멍으로 땀이 되어 솟아나온 것 같기도 하고, 정계비에 당도하자마자 잠시 그쳤던 비가 금시에 굵게 쏟아짐도 혹시 우리를 조상은 손으로 보아 맞은 울음을 우는 눈물일지도 모를 것이다. 돌은 아는 것이 없고 사람은 살핌이 없을지라도, 하늘이 짐짓 이렇게 마음을 쓰시는 것 아님을 누가 양탈하랴?


비가 선 곳은 2천 1백 50미터의 대지요, 우편 어깨는 압록강 근원이요, 좌편 어깨는 아까의 토문강 근원이랄 마른 도랑이다. 두만강 근원은 가장 백두산 상봉에 가깝다 하는 그 석을 수라도 동남으로 70리나 되는 여러 등성이 너머에서 발원하니, 일반인 생각하는 바 압록 두만 두 강이 백두산 꼭대기의 천지로서 발원한다 함은 다 사실이 아니요, 또 이 분수령을 사이에 두고 그 두 강이 동서로 배치되는 줄 앎도 또한 실제에 맞지 않은 것이다.



국경문제와 정계비


  한,청의 국경 문제는 동방 외교사상에 있는 꽤 어수선한 쟁의로, 학자의 외교간이 여러 십 년 동안 머리를 앓던 일이니, 요컨대 이것은 간도 소속권의 문제요, 간도 문제란 것은 두만강 토문강의 이동 문제요, 이 문제의 장본은 정계비의 글 중에 '동위토문'(東爲土門)이란 구의 해석이었다. 원래 정계비라는 것이 청의 강희제가 목극등에게 멸령하여 저희 멋대로 독단적 세운 것인데, 그 토문이라는 강은 정계비 있는 데서 시작하여 북으로 서로 흘러 송화강 상류가 되는 것이 사실임에 불구하고, 저네는 토문을 곧 두만이라 하여 간도 지방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었고 우리 측은 비문도 그렇거니와 조선인의 민족의 요람이 본디 백두산의 이북에 잇어 백두산을 나라 안의 종산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간도 지방은 옛날부터 조선인이 피와 땀으로 개척하여 민족의 생활지로 삼아왔으므로 우리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간도 문제의 외교적 발단은 고종 20(1883년)에 서북 경략사로 갔던 어윤중이 경원에 갔다가 간도 주민의 호소를 듣고 사람을 시켜 두 번 백두산을 임검케 하여 정계비와 토문강의 원류를 조사해본 후, 앞서 청국 관헌이 간도의 조선인을 철거하라고 요구한 데 대해, 간돈느 당연히 조선의 소속임을 주장한데서 시작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분란을 거듭하다가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돌아감과 한가지로 간도 문제는 일,청 간의 한 현한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안봉선철도 개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융희 3년(1909년0 9월 8일에 소위 간도협약이란 것을 체결, 간도를 그 희생물로 삼았다.


간도 문제의 조선인에게 대한 관계는 홑으로 국토의 늘고 주는 데만 관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 현재로 미래로, 영우너한 나라의 운명에 미묘한 관게를 가지는 아무것만도 못하지 아니한 중대한 문제이다. 백두산 하나가 왔다갔다하는 관계만으로도 무엇하고도 바꾸기 못할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약한 조선은 믿기 어려우니까 강한 일본에게 맡기라 하여 억지로 외교권을 앗아간 강한 일본의 강한 것이 어떻게 고마움을 알 게 하는 알뜰한 선물로 약한 조선에게 처음으로 보낸 것임을 한번 생각하자. 약하다는 조선인의 손에서는 강할 수 있기까지 지지를 얻어돈 이 문제가 강하다는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약할 수 있기까지의 굴복을 나타낸 표본적 사실로, 이것을 오래도록 기억하여 보자. 이것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민족적으로, 또 정신상으로 생활상으로 조선인에게 절대선을 가지는 것인가 따위는 당연히 그네의 돌아볼 가치도 없는 것일진대, 우리가 다시 무슨 말을 하랴. 언제까지 없어질리도 없고, 아무도 빼앗갈 수 없는 우리 양시의 정계비에 지금까지의 억울함을 붙이고 나가자.



못난 아들을 환영하는 아치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비가 좀 그친다. 비만 그치면 무지개가 서고, 무지개만 서면 맑은 맛과 밝은 기운이 그 궁륭으로부터 나온다. 벌써 여러 번 우리 발 끝 향하는 앞을 쫓아가면서 이 무지개가 나타나는데, 아치의 웅대하고 색채의 짙음에서 백두산 무지개의 특색을 나타내었다. 하늘은 상을 찌푸리고, 산에는 겹겹이 배접한 듯한 디ㅍ은 구름 안개가 가리우고, 휑한 채 텁텁한 공기가 어른거리면 사람을 넘어뜨려서 무겅누 돌 밑에 눌러놓을 듯한 이때 이곳에서 반지르르한 무색 무지개가 구태여 우리 나가는 길 아을 막질러서 이리 섰다가 저리 섰다가 함은, 혹시나 이 꼴, 이 주제로 오는 이 몹쓸 자손도 찾아드는 것만을 반가이 여기사 환영하는 채색 문을 줄달아 세워주시는 것 같기도 하여, 빗나갈수록 더 당기어 생각하신다는 부모의 심정이 고마우시다. 스스로 돌아다본건대, 가지가지로 사라의 이끄심과 고임의 심부름을 거역하고, 세간이라는 세간(나라살림)은 모조리 족대겨 없애고, 문패(나라 이름)는 새로에 신주(조상)에까지 진흙물을 칠하고 그러고도 분한 줄, 원통한 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러고도 발분하기 진작하기 이를 빼물고 내것을 찾으려들지도 아니하는 이 완악하고 어리석은 몸에 그래도 나머지 사랑을 받을 만한 무슨 구석이 있을까? 다 제쳐놓고 그래도 우리를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반겨주실까?


백두산 천제 우리 어버이께서는 이 꼴을 해가지고 돌아오는 나를 과연 어떻게 아실까? 저 홍예문, 저 홍혜문! 저것이 과연 우리를 반기시는 마음의 표적일까? 아닐까? 정상으로 오르려 하는 지금의 저 무지개에 가슴이 특별히 울렁거려온다.



천 길 눈의 절벽


  정계비에 도착한 것이 7시 반인데, 비를 탁출(글자를 박아냄) 한다, 부근의 지형을 살핀다 하여 약 1시간이나 지체를 하고, 이제는 백두산 분화구의 외각을 덜미로부터 더위잡아 오르게 되었다. 여러 가지 준비 중에도 반마다 특히 징작바리를 단단히 단속함은, 상봉에서는 어느 것보다도 불 쬐는 것이 급하기 때문이요, 또 무두봉 이쪽에는 나무라고는 없고, 더욱 상봉에 가서는 마른 풀 한 줄기 볼 수 없으므로, 반마다 한 바리씩 장작과 쏘시개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예부터 백두산에 들어와서는 더러운 물건을 마구 해트리지 못하고, 또 함부로 떠듦을 크게 꺼리어 감히 어기지를 못하였는데, 일본 사람 간 곳에 피할 수 없는 것은 종이 부스러기, 상장 나부랭이 헤뜨림이라, 떠나려고 보매 정계비 일대가 거의 휴지통을 일다시피 하고, 게다가 말똥이 여기저기 무더기를 지어서, 마치 깨끗하게 쓴 정원에 거름더미를 모아놓은 것 같았다.


기들을 앞세우고 각 반이 차례로 출발하였다. 최상봉인 장군봉의 동남쪽 갈래라 하는 정계비 뒤 한 기슭을 외쪽으로 두고 천연의 계단과 같은 엇비슷한 언덕이 서북으로 뚫려 올라갔다. 비 뒤의 산은 주름살로 있고 돌부리도 있어 이미 그 위엄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골짜기마다에 한쪽씩은 사태에 무질려 나간 눈더미가 열 길 스무 길씩쌓여 있음도 일종의 위력이었다. 언덕을 발등만큼도 올라가지 못하여 바람이 냅다 분다. 지동치듯 분다는 것이 아마 이런 바람을 이름이미라. 옷이 쏠려서 몸을 지탱할 수 없고, 모래와 돌이 날려와 때려서 얼굴을 내어놓을 수 없다. 비마저 온다. 대번에 퍼부어서 눈코를 뜨지 못하게 한다. 흐들갑스럽다. 무시무시하다. 추워서도 차가워서도 게다가 무섭기도 하여서, 몸음 벌벌 떨리고 이는 딱딱 맞부딪춘다. 흔신의 기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한 발을 옮길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저 풍우가 아니다. 분명히 너희의 소행을 생각해보라 하시는 백두산 어머니의 눈물이 채찍이시다. 아니다 다를까, 기어이 징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겉에 입은 고무 우장이 걷잡을 새 없이 공중거리로 날려서, 속에 입은 솜두루마기가 물에 담가낸 것같이 되고, 양복 밑에 입었던 솜저고리까지 물이 들이배었따. 어떻게 고심을 하고 얼마나 노력을 하였는지, 엎어지면 이마가 닿읗 듯한 언덕에를 퍽이나 한참 만에 올라섰고, 정작 웅대할 안계련마는 내려다볼 생의 조차 할 겨를리 없었다.

길이란 것은 속돌과 그 부서진 모래와 화산재가 바닥이라, 물이 어찌 싹싹하게 스미는지 비는 공중에서만 오는 셈이었다. 등성이의 일단을 겨우 다 오르매 좀더 가파른 등성이가 거의 이마로 더불어 태건을 할 듯한데, 숨도 차고 지리도 하건마는 좌우 길가에 여지껏 못 보던 용암이 덩어리진 것이 온갖 모야을 하고 겅성드뭇이 흩어져 있어 일종의 정취, 아니, 희한한 하나의 미관을 지음이 퍽 탐탐하다. 워낙 올라가기가 힘들매 찬 기운에 오므라든 피부에서도 일변 땀의 분비가 쉬려들지 아니한다. 나이 좀 많은 분은 진 바닥과 뾰족한 끝을 가리지 않고 땅에고 바위에고 여기저기 털퍽털퍽 주저앉는다. 이쯤서부터 숨통에 약간 압박을 느낌은 공기가 매우 희박하여짐을 알 리는 것인 듯하다. 비는 약간 거두시어도 바람은 여전히 매운 체를 하신다. 이제는 얼마나 남았는지, 상봉까지는 아직도 한참이겠지 하고 가쁜 다리를 질질 글자니, 먼저 간 이들이 앞에 보이는 한 마루턱에 가서는 우뚝우뚝 서고, 서면 곧 "이크!"하고 소리들을 지른다. 무슨 변상이 생겼나 하고 걸음을 재촉해간즉, 우리 반원들이 미처 다른 말할 틈은 없는 듯 "어서 어서!" 하고 손짓들을 한다. 줄달음으로 올라간즉, 어쩐지 영문은 몰라도 벌어지려는 아가리와 한가지로, "이히!"하는 감탄성이  내 목구멍에서도 튀어나온다. 다시는 앞길이 끊기고, 무한량 큰 구렁인 듯한 한 세계가 구름과 안개, 아니, 혼돈 그것을 한 배가득 담아 가지고 있따. 물을 것 없이 상봉에를 다다랐고, 앞의 안개 마다 바다는 포장 닫힌 천지 그것이지마는, 보이는 것은 안개요 구름이요, 안개인지 구름인지, 큰 신령의 입김 서린 것인지 모를 부연 덩어리의 소용돌이뿐이다. "막 구름이 틔어서 거룩한 천지가 성스러운 모습을 잠깐 내려놓이시었더니, 한 걸음이 뒤져서 미처 못 보니라." 하는 말을 들으메, 앞서 못 왔던 것이 아주 큰 죄의 갚음 같아서, 평생에 느린 죄를 여기서 한꺼번에 받는 듯하였다. 성글게도 휘뿌리는 빗방울이 얼굴을 때릴 때마다. 다행히 요만큼이라도 날이 걷혔다가 또다시 큰비나 되지 않은가 하여, 마음이 그지없이 조마조마하여진다. 한발 뒤짐이 영영 천지를 뵙지 못하는 탓이 되지 말란 법도 없지 하면, 입술이 깨물리고 가슴이 곧 죄어든다.

어허, 천지에 오기는 하였느냐! 왔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만도 큰 행복이지.

아무렴 끔찍한 일이지. 천지의 외각을 밟았다 하는 것만도 물론 큰은총이지. 아무렴, 대단한 일이지. 그러나 성스러운 모습의 참오양과 덕을 생기신 대로 갖추신 대로 낱낱이 뵙지 아니하여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놓을 수가 없다. 지나간 잠시 모습을 나타내심이 어젯밤 기도에 다만 1분만 허락해줍시사 하던 그 1분이 아니시기를 고개숙여 빌었다.


바람이야말로 세다. 천지에서 나와서 천산을 불어 흔드는 것이매, 물론 글자 그대로의 하늘 바람이다.

그렇지 않아도 신령스러운 기운이 전체에 서리서리하여 심신이 한가지로 아그해지는데, 하늘과 땅을 들먹거리는 바람이 각가 제 한 몸으로만 덤비는 듯하매, 전생의 흔까지 떨리어 거의 잠시의 머무름도 얻기 어렵다. 아무리 천계에서지마는 혹시 저 인간에서와 같게 무서운 바람이 그대로 저 깊은 휘장을 좀 걷어주어서, 참모습을 우리러뵈려는 이내 지극한 희망 지극한 소원을 이루어지이다 하는 마음이 불기둥처럼 가슴을 버틴다. "어머니! 저 올시다. 괘씸하시지만 잠깐이라도 거룩하신 얼굴을 내보여주시옵소서. 온 것이 늦기는 하였습니다마는 멀기도 합니다. 제발 일분간이라도요." 하고 계속 빌기 위하여 눈을 감았다가는 응하셨나 하여 금시 다시 떴다.

섭씨 영하 5도니 6도니 하여 "추워 추워!" 하는 소리가 각 사람의 입에서 똑같이 나오고, 화톳불을 질러야 한다는 둥, 암석 채집이라도 하자는, 내 발은 심은 것 같고 내 눈은 잡아맨 것처럼 행여 터질까 하여 앞만을 내다본다.

이 순간에서는 천지가 부셔져도 이 구멍으로 빠져나갈 단단한 일념뿐이다.



펼쳐진 신비의 딴 세계


  캄캄한 속에서 빛이 나온다. 닫힌 것이기에 열린 것이다.

꼭 막힌 바에는 남은 일은 열림이 있을 분이니, 이제는 하느님도 아주 잠가두시려 하는 것이 도리어 어려운 일일 것을 생각하면, 나의 할도리는 언제까지든지 터질 때까지 지키고 서서 움직이지 아니할 따름임을 결단하였다.


가장 싹싹한 맛은 가장 딱딱한 사람에게 것처럼, 영우너한 흑막인 듯한 저 운무의 바다가 벗겨지려 하매, 엷은 깁 한 조각 날려다스 함이 그래 신통치 아니하냐? 눈동자가 굴리지 않고  내려다보고 있은 즉, 두리뭉수리 같은 저 혼돈에 문득 훤한 구멍이 하나 뚫려지면서, 그 속에서 자금광 이랄밖에 없는, 달 리는 형용할 수 없는 일종 신령스럽고 미묘한 빛의 물결이 뭉싯하게 스물거리는데, 빛이 널브러지기 때문에 창이 커지는지, 창이 커지기 때문에 빛이 널브러지는지, 여하간 빛의 물결과 창구멍이 손목을 잡고 영역을 마구 개척함이 마치 태평양 군도 천지개벽 이야기를 실지로 보는 듯하다가 남은 구름이 바람에 쫓기는 연기처럼, 이때껏 처져 있음이 몹시 무안스런 것처럼, 줄달음질해 휙 흩어져 버리매, 이에 딴 세계 하나가 거기 나오는구나! 신비만의 세계 하나가 문득 거기 널브러져 있구나!


자줏빛으로, 금빛으로, 오색으로, 일곱 가지 채색으로, 그것이 다 초인간적인 특이한 맛과 모양으로 갖은 도약과 무도를 다하다가, 홱 젖혀지고 와짝 열려지는 것은 어느 틈에 변해된지를 모르게 얼른 생겨난 새파란 늪이 둥그런히 우묵히 팬 아득한 발 아래 신비의 물결을 괴어 있음이다.


억천만 녀의 과거가 영원무궁한 미래와 손목을 잡고 커다란 동그라미를 지어서 저 늪에 가서 곤두박혔는데, 침묵의 그 9분은 묵직하게 속 깊이 잠겨 있고 이 현재의 작은 한 동강이 겨우 등을 수면으로 나타낸 위에서 미묘하고 아름다운 아지랑이와 신비의 그림자가 얼크러져 뛰노는 여기서만 보는 기절한 한 셰계이다. 구름이 흩어지는 대로 장사처럼 활개를 치고 몸부림을 하면서 최대한 우랫소리를 지른다. 푸르다 하자니 거턱치고, 누르다 하지나 까부라치고, 검다기에는 말고, 희다기에는 진한 저 빛을 무엇이라야 옳을지?


억지로 우리 어머니의 참모습이 그 극히 작은 일부분을 거기 잠깐 내어놓으신 것이라고나 하겠다 '거룩하다'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지마는, 직감으로 저기 저 늪을 형언하기 위하여 생긴 말임은 의심이 없을 것 같다.


크게 불면 크게, 작게 불면 작게, 부는 대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아니하는 저 호수의 수면을 보아라. 물결이 이는 족족 빛 이외의 빛으로만 끊임없이 변하고, 심하면 한꺼번에 일어난 물결이 천이면천, 만이면 만이 제각기 한 가지 색채씩을 갖추어 가졌음을 좀 보아라. 똑똑히 보아라 저 조화가 도무 어디서 나는지, 저 속에 무엇이 들었고 저 위에 무엇이 노는지를 좀 생각해보아라. 고인이 이르기를, 큰 못의 물은 오색이라 하고 오색 고기가 산다고도 하고, 그 속에는 선령스런 용이 들어 있다고도 함이 다 진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모든 것의 창고라 해 천지라고 일컴음도 과연 우연히 아니다. 하늘이 아니고서야 누가 저 조화를 마음대로 부릴 것이냐?


천지의 사방은 깍아지른 듯한 석벽에 둘려 있으니, 천지는 어느 옛날의 분화구요, 이 둘레는 이른바 화구벽이란 것이다. 폭발의 선후와 냉각이 늦고 빠름을 따라서 어떤 것을 검붉고 어떤 것은 검고, 붉기도 하고 누르기도 하고, 간색도 있고 잡색도 있어 그 빛과 윤택이 이미 같지 아니하고, 또 어떤 편은 깍아지른 듯하고, 어떤 편은 비스듬히 자빠지고, 어떤 부분은 칼날을 갈아 세우고, 어떤 부분은 병풍을 둘러쳐서 형상이 또한 변화가 많다. 오른쪽에는 불그레한 날카로운 모서리로 깍아지른 벽모양의 꼿꼿한 바위가 정신기었게 버쩍 솟아, 그 머리가 마치 희한한 맹호과 천지 천하를 호통치는 듯한 망천후의 기이한 경치가 있고, 왼쪽에서 새까만 돌덩이의 모진 돌이 거의 하늘과 땅을 한데 이을 듯이 높이 솟은 몸으로, 악마의 독한 바람에 혹시나 세계가 날려갈지도 몰라서 절대 안전한 지기킴들이 되겠다는 듯히 덜퍽 궁둥이를 붙인 장군봉의 높은 표적이 있으니, 앞의 것은 백두산에서 짝이 없는 위관이요, 뒤의 것은 백두산 최상의 높은 봉우리다.


이 두 끝의 둥그스름하게 삥 둘러서 실긋하고 커단 자배기 하나를 만들고 그 바닥에 물이 골싹하게 담아놓은 것이 얼은 말하면 이 천지라는 것이다. 저 바닥에 이 둘레와 이 그릇에 저 물리 담겨서 저렇게 숭엄하고 이렇게 신비한 천지다운 천지가 비로소 생긴 것이니, 접시 같을 천지를 사발같이 깊다랗게 하고, 종지같이 좀스러울 천지를 대접같이 커다랗게 한 요소는 실로 이 험준하고 깍아지른 듯이 둘러진 석벽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돌이라고는 구경하기 어렵던 백두산이 여기 이르러는 돌밖에 다른 것을 붙이기 싫어하는 듯하게, 오직 돌로만 옥방을 쌓았음도 한 번 사람의 뜻밖에 뛰어나게 마련하신 일이었다.

그런데 천제의 궁궐이요 천화의 근우너이매, 천이라 함은 진실로 마땅하거니와, 물이 괸 곳이라 해선 그만 지라도 해버림은 너무 간처롭고 손쉽게 지어던진 이름이 아닐까? 저것이 그래, 늪이 랄 것일까? 저것이 그래, 못이라 할 것일까? 보아라! 다시 보면 그것이 심상히 물을 담아 있는 한 늪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大白頭 大天池의 탄덕문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 합니다.

우리 종성의 근본이시며

우리 문화의 연원이시며

우리 국토의 초석이시며

우리 역사의 포태이시며

우리 생명의 양분이시며

우리 정신의 편책이시며

우리 운명의 효모이신

백두 대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세계의 서광인 조선국을 안으셨던 품이시며

인류의 태양이신 단군 황조를 탄육하신

어머님이시며

그만 깜깜해질 세상이거늘

맨 처음이지 가장 큰 횃불을 들었던

봉수대 이시며

휑한 벌판에 이대로 갈 지

길이 끊기고 봉향도 모를 때

우뚝이 솟으사

만인 만세의 대목표되신

백두 대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하늘의 드리우신 한 다리시며

땅의 쳐드신 한 팔이시며

시운의 끼고 도는 추축이시며

조화의 우러나오는 방맹이시며

얼른하면 짜부라지려 한는

나약한 인심의 받들쇠이시며

조금하면 와르르하려 하는

어근버근한 세계의 쐐기시며

좁쌀알 같고 유성군 같고

유성 같고 혜성 같은

어지러운 세상 만유의 초점이 되시며

구심적 기점이 되시며

모든 것의 고갱이 알갱이이신

백두 대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그 흙은 내 살이 되시고

그 물은 내 피가 되시고

그 불은 내 동력이 되시고

그 바람은 내 호흡이 되시고

비가 되어

우리의 개울을 불리고 울물을 충충하게 하고

우리의 논과 밭과 들에 윤택이 널리게 하시고

그 모래가 모여

우리의 곡식 심을 곳 담배 심을 곳 화초 모종할 곳

활 쏠 곳 말 달릴 곳 흥청거리고 돌아다닐 곳

이미네 궁둥이 따라다닐 곳 훈장 차고 번득거릴 곳

미술관 세울 곳 라디오 기둥 세울 곳들을

마련하여 주신

백두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커다란 눈이신

커다란 입이신

커다란 주먹이신

커다란 등이신

......하느님, 신의 종요로운 지체이신

백두대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가만히 계시매 색시 같으시다가도

인간의 구저붐과 지꺼붐이

더 참을 수 없으리만치 쌓이고 장였다고 보시면

하늘 사르는 사나운 불과

바위를 물 만드는 어마어마한 뜨거움으로써

남성적 위풍을 남성적으로 발휘하시고

다시 남성적으로 수렴까지 해버리시는

대남성 백두 대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조선의, 조선인의 그 일체 생육자시며

영솔자시며

지도자시며

보우자시며

그에게 '충전'의 젖을 빨리시는

'구원'의 젖꼭지이시며

신념과 용기가 지구력과

곯지도 넘치지도 아니하는

상핑력과 항여력과를

줄곧 주시어 말치 아니하신는 대능자

백두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인간의 온갖 공든 탑이 다 무너지고

구심 구에까지 양센 체를 하던 자가

백에 와서는 또 한 고삐를 떼어올리고

풀기없는 헤진 목소리로

"될대로 되라지." 하고 아주 내어던지려 할 떼에

"가려진 무리야, 왜 나를 의지하여 굳세고 억세어지기를

잊었느냐." 하시며

어푸러자면 일으키시고

어푸러지면 붙들어주시고

어푸러지면 떠버티어주시고

어푸러지면 껴안아 만져주시어

몸은 행여 다칠세라

마음은 행여 다칠세라

마음은 행여 욱을세라

기운은 행여 꺽일세라 하여

우리 경주장의 목정이목정이마다에서

갖은 두호와 부치를 다해주시는

대심자 백두 대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내가 여기 섰기까지

내 겨드랑 밑에와 무릎 아래와 발 앞에

뽐힌 백성 조선 사람 아닌 다른 아무의

궁둥이가 억지로 들어오고나

발자국이 오래도록 머물 게 할 리 만무하리니

조선아

조선인아

어떠한 사나운 비바람이 닥쳐올지라도

한때의 시련은 모를 법하되

결코 오랜 핍밥으로써

너를 능학할 리 없을 것을 믿으라

내가 여기 섰노라." 하시는

하느님 백두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내가 기둥으로 버티고 있을 동안까지

하늘이 무너질 걱정을 마라

무너져도 떨어지라라고는 걱정 마라

나를 믿으라

하늘이니 나를 믿으라

믿으면 내가 하늘이니라." 하시는

일체의 총람자이신

일체의 교정자이신

일체의 대자재자이신

일체의 최후 완성자이신

대실재 백두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완전자 백두 대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백두천왕께서 귀명은

물론 천지에의 예탄입니다.

일심으로 천지에 귀의 탄앙 함입니다.

압시사 백두천왕 대천왕

압시사 천지대신 대대신

믿습니다.

믿습니다.

압시사

압시사

백두천왕

천지대신. 



어허 한아버지


시나이 산에서 여호화의, 보탁락가산에서 관세음의, 오대산에서 문수사리의 설법을 듣던 그네의 후신인 분명 지금의 나다. 그러나 내 귀는 어이 이리 멍청이이며, 눈은 화경같이 밝아지는대로 혀는 장작개비처럼 굳어져감이 어인 일인가? 무엇인지를 보고 느끼고, 그리하여 그성을 이름짓고 그려내고 전하여 알리게 할 양으로 왔던 길이 아닌가. 그런데 보지 않을 것이 아니요, 느낌없는 것이 아니건마는, 내 마음과 그것을 울려내야 할 목청은 어찌 이리 뻣뻣하고 꺽꺽하고 딱딱하기만 한가? 온갖 것을 본디부터 턱없는 망상이었다 할지라도, 내 깜낭만큼이라도 그려볼까 했던 것도, 실상은 스스로 그만두지 못할 지성의 발현이었다. 그러나 성의뿐으로 그만들밖에 없음을 고패 떼는 나의 섭섭한 정을 어떻다 해야 할지, 다만 스스로 망연할 따름이다.


일월이 동자 되신

거룩하신 임의 저 눈

드셨다 감은 족족

대세계가 왔다갔다

섶마다 무량 대겁이

깃드린 줄 알괘라.


곱닿게 다 있는 것

잃은 줄만 여겼어라

헤매고 찾던 일이

하도 아니 웃기는가

이앞에 널리신 것이

다 '그' 실 줄 아리오.

가녀린 제 재주는

임의 앞에 떠올 뿐을

열두 겹 깊은 저 속

보고 그려 못내 오매

내 손에 단 데 없음을

화 안 낼 수 없어라.


이렇게 해보아도 시우너치 않고 저렇게 해보아도 시쁘지 않으매, 생짜증이 나지 않는 것 아니다.


한아버지!

모르는 남을 찾아온 것 아니라

기다리시거는 기다리시는 한아버지를

뵈오려 온 것입니다.

남에게 가는 것 같으면 예패라도 가지고 왔겠지요마는

집안 어른, 오는 것만은 기쁨 삼으시는 제 아버지께

귀근하는 것이매

빈손으로 왔습니다.

꾸러미 가지기를 준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아버지!

가지고 온 것이 아주 없음은 아닙니다.

제딴은 그 무엇, 아무것보다

긴한 무엇을 가지고 온 꼴입니다.

무엇인지 아시지요?

한아버지에게서 받자와 가졌던 '피'를

오랜 '선물'로 가지고 왔습니다.

또 있는 것을 아시지요?

그 '피'가 뛰노는 산 염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영통이 들어 있는 내 몸

그것이 아무것보다도 한 아버지께의

휼륭한 제물일 것을 생각하고서

이것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아버지!

제 제물을 받아줍시오.

이제부터의 제 몸과 마음과 피와 숨은

온전히 한아버지의 제사 퇴선입니다.

한아버지의 이름으로써

이것이 모든 사람의 음복거리가 됨이

물론 저의 본회입니다.


한아버지!

한아버지를 뵈온 이 눈은

다른 아무것을 다시 보지 아니하여도 섭섭할 것 없습니다.

한아버지의 품에 싸인 저는

온 세상과 온 동무들 다 잃을지라도

결코 외로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한아버지께만 총명하고 지혜로워진다 하면

저는 즐겨서 다른 모든 것에서

바보 되고 못난이 되고 멍청이 되겠습니다.

한아버지의 속에서

모든 것을 놓겠습니다

모든 것에게 버리는 바 되겠습니다.

비웃기고 놀람감 되고 욕먹고 채찍 맞는 자 됨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한아버지!

말할 줄도 글 지을 줄도

꾀부릴 줄도 죄다 모릅니다.

환하고 아름다운 축사 축문으로써

이는 마음을 포백할 재주를 저는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쯤 갑갑하고 답답하지 않은 것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을 기다려 마음을 아옵실 한아버지의 아니심을 알므로

이것을 슬퍼하지는 아니합니다.

숫인 채로 뜨거운 '숫' 채로 입 다문 마음을

더욱 가상히 여기실 한아버지이심을 짐작하고

박눌한 것이 도리어 다행일 것을 생각도 합니다.


한아버지!

한아버지!

저올시다, 이러한 저올시다.

아무것도 없는 저올시다.

아시옵소서 거두옵소서.


이때도 천지는 연방 막혔다 터졌다 한다. 마치 고개글 끄덕여주시는 것도 같고, 눈을 꿈적거려주시는 것도 같고, 입을 우물우물하시는 것도 같이.



백두산은 하늘의 대신


  백두산은 동방의 예산 백성들에게 하늘이 대신이요 하느님의 서울이라 하게 된 바이니 그 숭배하고 공경하는 정도가 심상에 초월함이 우연한 것 아니었다.그러나 부족이 번성하고 국토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따라서 그네의 열렬한 신앙은 각기 제 구역인 안에 한 백산을 요구하게 되니, 반도 안에서는 함경도 장백산, 평안도의 묘향산, 강원도의 금강산, 황해도의 구월산, 경기도의 북한산, 충청도의 속리산, 경상도의 태백산, 전라도의 지리산 등이 각각 일방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백두산은 일찌기 우리 지리학자 이중환이 말한 바와 같이, 곤륜산의 한 갈래가 동으로 동으로 뻗어 나오다가 요동의 큰 들에게 엎드려 기운을 모아가지고 동해에 닿는 곳에서 신령스럽고 숭업하게 고개를 들어서 동바으이 산의 조종이 된 것이니, 조선과 만주의 산악으로 이의 권속 아닌 것은 하나도 없는데, 특히 북선남만, 요동, 두서 일대에 엉기어 있는 것을 지리학상 장백산휘라 하고, 장백산휘 중 길림의 동남으로 하여 명천의 칠보산까지를 연결한 한 줄기 화산맥을 백두화산맥이라 하니, 백두산은 실로 장백산휘의 주축이요 백두화산맥의 대종이며, 화산맥 중의 최대 분화구가 곧 천지다.


백두산이 불을 뿜기는 여러 차례인데, 최근에는 3백 년쯤 전에도 약간 활동을 한 일이 있으니, 지금의 천지는 이 여러 번의 분화로 인하여 여러 겹의 용암에 덮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꼭대기는 백두암이란 이름을 얻게 된 특색있는 알칼리성 바위로 되어 약 1천미터의 깍아지른 벽으로 패여들었으니, 벽 위인 바깥 둘레는 무릇백여 리 주위에, 북쪽의 백암 꼭대기, 동쪽과 장군봉을 머리로 하여, 장군봉은 일명 병사봉이라 하니, 본디 엣말로 하늘을 의미하는 '당굴'이 변하여 장군이 되고, 장군이 다시 변하여 병사라 한 것인데, 봉우리 꼭대기는 동경 1백 28도 4분 37초, 북위 41도 59분 28초에 당하고, 높이는 2천 7백 44미터(9천 55철)이니, 백두산맥 내지 장백산휘에서 분 아니라, 조선 만주를 통한 전 동방의 초고 짐점이다. 그 위에 올라서면 가까베는 밀림에 싸이고 멀 리는 구름에 자민 남북 만리 백민의 옛 국토가 한눈 아래 깔렸으니, 광경의 웅대함, 감상의 신비함이 과연 뼈가 없어 흐늘거리는 자라도 피가 꿇는 인간을 만들고, 신이 없다는 자로 하여금 신의 찬가를 목청껏 부르게 한다. 장군봉은 만 리 대륙을 정리하여 자며 5천 년 역사를 감시하는 자다.


장군봉과 망천후의 사이로 하여 속돌로 포장된 한 줄기 오솔길이 통하니, 이리로 좇아 내림길 약 30분(오르길로는 두세 시간)의 길을 다 내려가서 속돌모래로 이삼 리를 나가면, 작은 식물이 빽빽이 난 속으로 천지의 가장자리에 다다르니, 푸른 유리를 깐 듯한 수명에 오색 광선이 비쳐, 얼른 성스러운 호수의 느낌을 자아냄이 있다. 호수의 주위는 약 25리(1만 1천 3백미터)랄 한다. 수심은 아직 모르며, 전에 한 번 러시아 사람이 실측하려다가 풍랑으로 인하여 성공티 못하고, 이번에는 함석으로 조그만 배를 만들어 꼭대기까지 가지고 왔으나, 센 바라밍 짙은 안개로 하여 호수의 가에까지도 내려가지 못하고 배만 내동댕이처 버렸따. "어디로 알고 측량을 한다구, 내려가만 보아라, 큰 봉변을 하리라." 함이 마부들의 예언이니, 이제는 "그러기에 누가 무어라 하더냐?" 하게 되었따 고래로 전하는 말에 물이 바다로 통하여 썰물과 밀물이 있다 하여,천지를 또 해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봉우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매, 조그만 물골이 몇 군데에서 호수를 향하여 흘러들어가는 것이 있었다.


옛날 전하는 말에는 천지가 세 곳으로 흘러나가 동은 두만강, 서는 압록강, 북은 송화강의 근원이 도니다 하였으나, 땅 속으로 스며 흐른다 하는 동,서 양쪽은 말하지 말기로 하고, 분명히 보이는 것은 오직 북쪽의 백암이 밑으로 흘러나가는 송화강 근원뿐이었다. 이것을 천상수라 하여 양쪽 단애 틈으로 흘러, 1리쯤에서 높이 7백 척넓이 2간쯤이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발해를 돌아보고, 신시를 돌아보고서, 이 천상수와 천지가 이떻게 장엄하게 장식되고 신령스럽게 숭앙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느꺼움이 천지 밑바닥을 뚫고는 남음이 있따. 그러나 천 년이고 2천 년의 긴 잠이 어느 날에든지 번쩍 깨어서, 잘못 하였다 하는 참회와 한가지로,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는 분발이 나서,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정신적 백두산이 뿌리박히고야 말 것을 생각하면, 나만 믿는 커다란 든든함이 가슴에 뿌듯하여지기도 한다.



큰짐을 벗어놓은듯


  섭씨 영하 6도라 하니까 무던도 하지마는, 감각상의 추위는 그보다도 몇 배나 더하여 솜옷을 겹겨이 입은 사람도 입ㅅ술이 파랗지 아니한 이가 없으며, 게다가 바람은 몸을 부지하지 못하게 불고, 안개는 쾌히 걷힐 가마잉 없으며, 30분이 못 되어서 큰일 나기 전에 내려가지는 말이 유력하여지고, 말 드엥 실려 오는 어린이들은 이미 말도 못 하게 되므로, 모처럼의 길이니 좀더 머무르자는 주장이 조금도 서지 아니한다. 싣고 올라간 장작으로 화톳불을 산같이 지르고 어는 몸을 계속녹여가면서, 도장감 될 만한 흑요석을 위시하여 몇 가지 암석의 채집을 하는 동안에도 모두들 어서 내려가자는 독촉이 성화와 같은데, 싸움하듯이 꼭대기에서의 기념 사진을 겨우 찍고, 혼자 있잘 길 없으므로 남을 따라서 발길을 돌렸다. 속으로 " 꼭 또 오겠습니다." 하기는 하나, 마음대로 될런지 모르며 퍽 서운한 생각이 있다. 9시 20분에 하산을 시작하여, 바람에 불리듯이 30분이 될랑말랑하여 정계비 있는 데로 돌아왔다.


무엇인지 큰 짐을 벗어놓은 것처럼 어깨가 가볍고, 다만 1분이라도 어젯밤에 축원하던 생각을 하면, 이만큼 우러려 뵙고 느낀 것이 몸시 과람도 하여 마음에 꽤 흡족하며, 날씨가 쾌청하여 두루 돌아다니고 오래 살펴보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할런지 모르되, 고요하게 있는 것, 편평한 것으로가 아니라 활동하고 신령스럽게 변화하는 천지의 영감을 얻는 것이 도리어 특별한 은총이라고 아니할 수도 없었다. 짐을 끌러서 여린 얼음 섞인 밥에 딴 입맛을 다시고, 훤한 벌판에 익은 길이라 겁날 것이 없으매, 삼삼 오오 자유 행동으로 무도봉 야영지로의 귀로에 올랐다. 그렇게도 야단스럽던 일리가 거짓마라ㅌ이 벗어지고, 쨍쨍한 볕이 한창 해토에 노력하여, 길은 대게 물이 발등을 파묻는 수렁이었다. 돌무더기를 지나고 눈언덕을 건너서 연지봉 까지 오는 동안에, 백두산 꼭대기를 돌아본 것이 무릇 몇 번이지, 모처럼 만나뵈은 어버이를 떠나는 회포가 이러한 것인가 하였다. 벌겋게 우묵한 화구, 파랗게 잔잔한 호수, 스멀거리는 안개, 몸부림하는 바람, 그 중간에서 생기는 조화의 대희극, 가고 가도 천지한 도국이 의연히 눈앞에 지런지런한다.


내려다보인다. 강 북쪽, 여 동쪽의 1천 산 1만 멧부리가 마치 크고 작은 수없는 주먹들을 쥐어 쳐든 것 같다. 저것들 하나하나가 한 화산덩어리라 하면, 대지도 부스럼을 퍽 앓은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대로 신의 노여워하시라는 직감이 든다. 신에게 대하여 경건치 아니할 때에 노하시고, 조상에 대해 효도 않고 공순치 못할 때에 노하시고, 집안끼리 띠앗(우애)사나울 때에 노하시고, 멀쩡하고자 하는 정신만 없을 때에 노하시고, 멀쩡하고자 하는 정신만 없을 때에 노하시고, 뼈다귀없는 놈노릇할 때에 노하시고, 피가 얼어붙을 듯할 때에 노하시고, 힘줄이 탄력을 잃어 버린 듯하 때에 노하시고, 염치가 밑바닥까지 빠진 듯한 때에 노하시고, 소나갈질지 건널 때에 노하시고, 진덕왕이 태평소 지을 때에 노하시고, 성충이 옥사 할 때에 노하시고, 연씨 문중에 집안 싸움 났을 때에 노하시고, 최 도퉁이 꼭뒤잡혀을 때에 노하시고, 유형원이 벼슬없이 죽을 때에 노하시고, 김정호가 평민으로 걸식할 때에 노하시어, 이런 때만큼 한 번씩 쥐시고 한 번씩 쳐드신 주먹이 저렇게 많음을 보매, 이럭저럭 초원지대가 끝나고 살림지대에를 당도하였다. 바깥 줄에 선 이깔나무들이 서쪽으로는 가지 하나 붙이지 못하여, 여기서 보기에는 마치 긴 장대를 널어세운 것 같음이 새로이 감흥을 끈다.

양여지에 다다른 것이 오후 2시 반이었다. 해가 아직도 높고 일 없는 한가한 몸이 되매, 별안간 딴 세계에 온 듯하다. 밤 동안 비바람에 수난당한 천막은 안팎이 다 참담하여 백일하에서는 보기가 차마 쓸쓸하고, 짐들이 마치 홍수르 ㄹ치른 뒤 같다. 모든 것을 다 집어내어, 햇볕을 쐬는데, 너도 나도 여기서도 저기서도 하여, 삽시간에 무두봉 아래 일대에 넝마 노저뫄 싸구려 잡화자잉 섬도 한 장관이다. 감추었던 위스키 병이 이 짐 저 짐에서 나와서, 조그만 잔치에 큰 웃음이 곳곳에 들끓고, 동물 채집하는 총소리가 이따금 활동 세계의 생각을 귀띔하여 주어서, 그만만 하여도 인간미는 각가으로 넘쳐 흐름을 보겠다.


저녁밥을 일찍 해먹고, 처음으로 비 안 오는 야영을 기뻐하면서, 어느 덧 모든 것을 휘몰아서 꿈나라로 들이밀었다.



그대로 그리운 인간세계


   8월 4일, 여러 날 비에  씻긴 하늘에 한 올 구름이 가람이 없고, 아침해가 전에 없던 기세와 반가움과 아름다움으로 굳센 빛을 무두보에 퍼붓기 시작하는 6시 30분에 사람사람이 인간에의 환상을 나타내었다. 백두 성산의 웅장한 모습을 숲 밖으로 건너다보고는 아무든지 고개를 낮추낮추 숙이지 아니차 못하였다. 일기가 어저께 좀 이러한시지 하는 불평을 말하는 이도, 고개를 돌이켜 생각하고 "오늘도 정상에 올라가면 어떠리ㅈ 아니." 하여 스스로 변명해 버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은 인간이 그리운 변명 그리운 양하여, 모든 사람의 얼굴에 새로운 광명드링 돌고, 아플 듯한 다리들이 이상타 할 만큰 거분거분 들하다. 내려가는 길이요, 채집도 다시 할 것 없으니, 필요없는 지체를 하지 말고 오늘의 길을 삼지까지로 하여 하루를 단축하자는 의논이 생겨서, 백 리가 넘건마는, 그만큼 인간 구경을 속히 한다는 맛에 이의없이 결정ㅇ 된다. 올라올 때와 달라서, 나 역시 특별한 일이 없으매, 아침부터 말 등에 올라 앉아서 두리두리번 시상, 사도요, 게다가 시인이요 가객이요 애국자시라, 계속 새 노래 새 곡을 만들어 기이한 시구를 들려주는 것도 홍을 돋구어준다. 착상이며 말이며 작곡이 갈수록 기이하고 갈수록 풍부하여, 저절로 넓적다리를 쳐줄 것이 있다.

10시 40분에는 이미 신무치 자리들을 반기면서 중화를 하였다.

언제 먹어도 이상스럽게 차고 단 것이 이곳의 물이었다. 신무치로부터 삼지까지 60여 리 도안은 물 구경이 어려우므로, 각기 수통이 터지라는 듯이 눌러 담다시피 해가지고 12시에는 분주히 출발하였다.

천평의 불탄 자리와, 오른쪽으로 백두산, 왼쪽으로 포태산의 웅대한 산 둘레에 새로운 감상을 달리면서 늦은 고삐를 툭툭 쳐 삼지에 다다르기는 침봉 너머로 오는 저녁 안개가 지상에다 회색의 엷은 면사포를 씌우려 할 때였다. 자다가 깨어서 호수를 내다보는 족족 저기 둥그런 보름달이 고요히 비치는 밤이었다가면 어떻게나 더 좋을 뻔하였을까를 못내못내 아쉽게 생각하였다. 삼지의 이것이 한 둔의 마지막 이다.


심 리베 영을 짓고 화투 질러 밤 지키네

멀리 온 이국 군마 한맘으로 시워드니

그리야 임의 댁 문전 쓸쓸하다 하리까.


임의 밤대궐에 무슨 장엄 해드릴까

불 같은 적심 모아 산호 기둥을 울어 지어

타는 듯 드거운 정성 표해 이리 봅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어둔 밖을 내다봐도

저만치 임이 아니 잠들어서 누셨을까

안 뵈도 뵈온 듯함도  이 한밤분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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