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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하루동안 K리그 와 컨페더레이션 경기를 봤다.
먼저, 최강희가 복귀한 전북과 경남의 경기에서 이동국이 골을 넣었을 때 해설자의 잣대.
멋진골이라는 말 이후에
"대표팀에만 가면 상대가 이상하게 수준이 조금 높잖아요.
거기서 또 이동국 선수가 안 통한단 말이예요.”
두번째 경기는
국제 대회에서의 평범한 플레이로 ‘국내용’이라는 평가를 받던
브라질의 네이마르가 맹활약한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전이다.
네이마르는 이날 상대팀의 명수문장 이케르 카시야스를 정면에서 무너뜨리는
호쾌한 추가골을 비롯해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볐다.
당연히 대회 MVP도 그의 몫이었다.
대회 이전까지 ‘거품’ 논란에 휩싸였던 선수에게는 매우 통쾌한 결말인 셈이다.
이동국은 과연 국내용인가.
네이마르를 국내용이라 폄하하던 시각은 무조건 잘못인가.
그리고, 과연 국내용과 해외용이라는 구분은 유의미한 것인가.
축구에도 국내용과 해외용이 따로 있는 것인가.
있다면 어떻게 구분이 되는 것이며,
없다면 그건 누가 만든 말에 우리가 놀아나는 것인가.
2004년 대한민국이 독일을 꺾던 날, 올리버 칸을 울린 이동국의 발리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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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적잖은 축구 팬들이 공감하는 정서의 반영이기도 하다.
2010년 월드컵 우루과이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미들즈브러 시절의 기억,
그리고 최근의 월드컵 최종예선 경기들.
이러한 팩트는
많은 사람들이 이동국을 ‘국내용’이라는 단어와 연관지어 폄하하는 나름의 근거가 된다.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상대가 이상하게 수준이 높아 ‘이동국 선수가 안 통한다’는 주장이 일리 있어 보인다.
하지만, 곱씹어 보자.
이동국은 2004년 12월 독일 대표팀 정예 멤버와의 맞대결에서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골을 터뜨려 대한민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2006년 2월 LA에서는 멕시코를 상대로 골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 밖에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호주, 일본 등
앞서 언급된 ‘대표팀에만 가면 상대가 이상하게 수준이 조금 높다'고 할만한 팀들을 상대로
꽤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2000년 아시안컵 득점왕과
2011년 AFC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의 성과는 또 어떤가.
월드컵과 관련된 성과에서 이동국이 여러 이유로 빗겨나 있기는 하지만
– 이동국은 역대 월드컵 본선이나 최종예선에서 선발로 뛴 적이 별로 없다 -
그렇다고 그 외 국제경기/대회에서 거둔 성과를 모른 체 하며
그를 ‘국내용’이라는 한 단어에 가두는 것은 온당한 것인가.
또한, 앞선 논리대로라면 이동국이 이번에 골을 넣는 데에 실패한 상대들,
즉 이란, 우즈베키스탄, 레바논, 카타르 등은 (K리그 클래식보다) 수준이 높은 팀들인가.
또한, 그 말 뒤에 숨어있는 K리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과연 합당한가.
어떤 선수의 기량이 국내용과 해외용으로 나뉘는 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이 없다.
K리그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브라질 공격수가
독일 분데스리가 득점왕이 되는 경우(그라피테)도 있고,
K리그 주전 선수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로 건너가자마자 곧장 팀 내 에이스로 활약하는 경우(이청용)도 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버림받은 공격수가
스페인 리그 득점왕이 되는 경우(디에고 포를란)도 존재한다.
어떤 선수의 경기력을
단순히 국내용, 해외용으로 영화 등급 나누듯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결과론에 근거한 '그럴듯한' 평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미 모든 게 정해져 있던 것처럼,
해당 선수의 한계를 구분짓는 선언처럼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론, 이러한 단순 논리는 국내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앞서 거론한 네이마르의 경우
유럽 언론들에 의해 끊임없이 ‘거품’ 혹은 ‘국내용’이라는 식의 비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것은 네이마르가
10대 후반에 브라질을 떠나 유럽 빅 리그에 자리를 잡던 선배들의 궤적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불공정한 비판이자 도발이었다.
브라질에 남아 있다는 사실,
간헐적 국제 대회에서의 크게 인상적이지 않은 모습 등으로
‘국내용’의 딱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거품론에 휩싸였던 네이마르는 전경기 연속 공격포인트의 화려한 성과로 팀에 우승을, 자신에겐 골든볼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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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국가색이 흐릿해지고 세계 축구가 서로 유행을 주고 받는 상황에서,
특정 국가, 특정 리그에만 어울리는
혹은 익숙한 스타일에 머물러 있는 선수를 찾기란 오히려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 전체의 커리어를
인상 깊은 몇 장면만으로 재단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행동일지 모른다.
55경기 연속 안타를 친 선수의 56번째 경기를 본 사람에게는
그 선수는 무 안타에 그친 평범한 타자로 기억될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나설 정도로 인정받는 선수를
‘국내용’이라 폄하하는 것은 결국 ‘결과’를 먼저 두고 ‘과정’을 짜맞춘 엉터리 평가는 아닐까.
이것은 단지 이동국을 변호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국내용과 해외용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혀
축구를 보는 것의 위험성 내지는 무료함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실제로 축구를 하는 것과 보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를 몇 가지 단어로 메우려는 시도는 무모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쟤는 공격형미들이고 쟤는 수비형미들',
'4-2-3-1이냐 4-3-3이냐'와 같은 문장도 마찬가지다.
선수는 게임 속 캐릭터나 장기판 위의 말이 아니다.
특정 환경에서만 반응하고, 특정한 행동만 가능한 존재가 아닌,
환경에 반응해 적응하고 또 발전과 퇴보를 반복하는 변화무쌍한 존재다.
그들이 22명 모여 만들어가는 축구,
또 그 뒤에 가려진 수 많은 시간들을
부적합한 단어 하나에 가두는 일은
선수들에겐 폭력적이고, 관전자들에겐 지루한 행위다.
축구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한 구분과 용어들에 집착하거나,
축구를 게임기 속 혹은 보드판 위에 올려놓기 위해 변환된 것들에 치중하는 것은
실제 축구를 즐기는 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지금은 수 많은 과거의 총합이다.
그걸 어느 순간의 기억만을 끄집어내 한 단어로 규정하는 것보다는
보다 많은 순간을 접하고 그 안의 여러 결들을 가다듬어 음미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