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중독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 간증 : 박준서
간증문을 시작하려는 지금에 와서도, 지금 이 간증문을 쓰는 것에 내 자신의 의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봅니다. 이 두려움을 넘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당신이 제 삶가운데 하신 놀라우신일을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나타내실 것을 바라봅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으셨지만, 아버지는 확고한 ‘출석교인’ 이셨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기억할수 있는 거의 모든 일요일에 교회를 갔고, 그 누구에게도 못지 않을 많은 독서량과 독서력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방대한 독서량과 풍부한 지식을 갖고,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교회의 종교살해나, 성직자들의 부패함들을 보며 자란 저에게 교회는 세상에서 반드시 없어져야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1이 끝난 겨울수련회에서 저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부정하기를 원하고, 악독하기 짝이 없는 교회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던 그 하나님이, 실재하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신속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그렇게도 교회를 싫어했다는 사실은 저에게 이제 전혀 중요한 사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살아야 했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었던지, 그가 내 죄를 사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직접 죽으심으로 제 죄를 갚으셨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었던지…
그렇게 저는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었고, 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던중 미국에 도착했고, 저의 그런 신앙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유스 찬양팀, 대예배 찬양팀을 섬기고, 뒤에서 음향 엔지니어 일도 하고, VBS팀에도 참여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내가 이런 일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제 유티에 오게되고, 어떤 성도님의 소개로, 어스틴 한인 침례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침례교회에 처음 왔더니, 설문지를 나줘주셨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있는 그 공포의 설문지… 당신은 오늘 밤에 죽어도 천국에 갈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는데, 아… 전 당당하게, 네 천국에 갈수 있습니다. 라고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어쩌면 단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히려 나는 ‘하나님을 미워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저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진리를 한큐에 박아 넣으셨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실재하시고 살아계시다는 것, 그리고 저를 그토록 사랑하셨기에 만으로 16년을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저주하고 거부하던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저에게 큰 믿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에게는 ‘십자가’가 믿음의 근거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던 중, 폴 워셔 선교사님의 설교가 제게 들려왔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제 마음을 엄중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너, 지금 그리스도인이라고 살고있는 너,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양팀에서 마이크를 들고 찬양하고, 유년부에서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양육한다고 말하는 너, 너는 네 삶에서 너의 죄를 조금도 끄집어낼 생각 없이, 지금도, 아직도, 끊임없이 죄를 지어가면서, 나를 섬긴다고 말하는 이 가증한 자야!!! 라고 소리치시는데 제 심령은 놀라 덜컥 주저앉았습니다.
아, 나는 내 생각, 내 주관에 따라, 하나님을 멋대로 섬겨왔구나. 하는 생각이 저를 강하게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때부터는 게임중독, 중학교 때부터는 포르노에 중독된 삶을 살아왔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사역을 한다고 말하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교회가방을 방안에 벗어놓음과 함께 내안에 있는 하나님도 벗어놓았고, 그렇게 하나님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삶으로 부터 회개하고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과 함께 하나님이 저에게 부어주신 것이 하나있었는데, 그것은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수도없는 훌륭한 설교자들과 그 설교들에 대해 눈을 뜨게해 주시고, 이 설교들을 듣는데 너무나도 적합한 mp3 기기도 하나 허락해 주셨습니다. 512MB짜리에 불과한 작은 기기였지만, 그래도 설교는 열시간이 넘게 들어갔습니다. 하루종일 설교를 들으면서 생활하고, 집에오면 아침에 다운로드를 걸어놓고 나간 설교들을 다시 집어넣고, 그렇게 하나님은 제 삶을 변화시켜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게임중독도 제안에서 사라졌고, 포르노 중독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안에 부어주시는 이 삶속의 증거들로, 다시 제 믿음을 확증했습니다. 저에게 수많은 말씀들을 부어주셨고, 그 말씀들이 실제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기도를 하면 이루셨고, 이루시지 않은 것도, 이미 기도를 통해 이루신 놀라운 것들을 보았기에, 믿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제 삶가운데에,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가 되고 그 말씀이 역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허락하시려고 하셨구나, 내가 내 삶을 통해서, 어떤 교회에서만 있는 삶이 아니고, 실제로 살아가는 이 중에서도 그 것을 허락하시는 것이구나. 내 죄를 사하시고, 그 삶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저에게는 이제 새로운 믿음의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삶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으되, 단지 세상적인 삶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나날이 변화해가는 모습. 교회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닌, 세상 속에서도 드러나는 모습. 그것은 실제로 이루어져가는듯 했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제 삶은 믿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에게는 ‘십자가’가 믿음의 근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가 근거가 되지 못한 믿음은, 모래위에 지는 집처럼 무너져 내렸습니다.
제안에 게임 중독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포르노 중독도 다시 생겨났습니다. 이런 것들은, 제가 어리기 때문에, 제 나이 또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만 가지고 신앙을 판단 한다거나 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대학부에, 어떤 형제가, 자신의 포르노 중독 문제를 고민하면서, 이것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을때, 그것은 하나님이 어쩌다가, ‘자신이 살아계심’을 나타내시려고, 특별히 몇몇 형제들에게는 허락하시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거짓임을 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시작한다면, 이 성욕이 가라앉는 중년의 나이에 가서는, 가족들의 부양 책임에 매여 하나님을 외면할 것이고, 자녀들이 독립한 노년에 가서는, 이제는 정말 실재가 되어버린 죽음의 가능성이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포르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저 자신이 반드시 이것을 극복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아는 저의 지식은 저를 조금도 이 중독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게임 중독의 깊이는 날이 갈수록 더해갔고, 포르노 중독도 심해졌습니다. 이제는 TV에도 중독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들을 주로 예능 프로그램 계열이고, 드라마는 안좋아합니다. 거의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마음은 ‘나는 그래도 그토록 폭력적이라는 게임들은 안하니까’, ‘나는 그래도 직접적인 간음은 하지 않으니까’, ‘나는 그래도 드라마는 하나도 안보니까’.
물론, 저는 저의 이 생각들이 틀렸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지식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야 한다는 저의 지식보다는 이런 저의 생각들이 저의 실제가 되어갔고,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이 죄들의, 말그대로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는 ‘단한가지도’ 순종할수 없었고, ‘죄’가 시키는 것에는 문자 그대로, 정말 문자 그대로 100% 순종과 헌신을 바쳤습니다.
히브리서 6장은 한번 하나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되고, 그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음이니,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7장은 전에 내가 법을 모를 때에는, 살았었던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이르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나를 생명에 이르게 할 율법이, 도리어 나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9장에서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은 완전히 결합하여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릇을 만들어, 하나는 은혜의 그릇으로,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쓰실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너를 진노의 그릇으로 쓰려고 작정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너에게 그 하나님의 은사를 맛보게 하시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었던 너를 다시 타락하게 허락하시고, 너로 다시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셨다. 웬만해서는 다들 구원받고 하나님과 함께할법한데, 너는 참 지독도 하더구나. 그토록 하나님의 율법을 네게 주고, 그 은사를 너에게 허락했는데도 너는 그토록 그 죄가 좋고 사랑스럽더냐? 너는 하나님의 율법이 네 삶에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인줄 알았겠지만, 그것이 결국은 너에게 영원한 죽음을, 선사했다. 이것이 주님이 너에게 바라신 것이다 라고, 저에게 말씀은 이것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절망만이 남았습니다.
로마서 7장은 저에게 반만 현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7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앞부분만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구절에서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6장은 저에게 반만 현실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6장의 나머지 반은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신실하시기에 우리에게 이런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 나머지 반은 저에게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나는 구원도 받지 못할텐데, 교회는 와서 뭘할수 있을까? 그냥 세상으로 가서 세상이 주는 성적에나 목매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시민권이라도 잘 얻어서,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저 세상에 정말로 소망이 없는데, 그 성공, 그 성적, 그 직장, 그 시민권… 결국 다 썩어 없어질 것들인데, 나는 이제 그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나? 나… 정말 그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나? 그것외에는 방법이 없나? 그래도 천국에 갈 소망은 없어졌는데, 주님은 내게 그런것들이라도 허락해 주시는 건 아닐까? 그나마 육신이라도 편하게 살다가 죽게 하시려나보다…
제 목장의 목자이신 다애누나를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끝내 주님이 내게 소망을 잃으셨다고는, 말할수 없었습니다. 교회에 오는 것이 힘들다고, 그렇게 포장해서 말할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대학부 수련회에 참석해서도 목사님께도 짧게 말씀을 드렸을때, 목사님은 저에게 예수님을, 그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서 예수님께 나아가야한다고 말하셨습니다. 너 전도훈련도 받지 않았느냐고, 다 알고있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잠시 힘이나서, 예수님께 기도해 보기도 했지만, 그 힘은 채 일분도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탄은 제게 ‘그렇지, 전도훈련까지 받아서, 전도까지 나간다는 네녀석이었지. 꼴 좋구나. 너 그동안 내가 이런 생각들을 넣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명하지 않았었냐? 어디 지금도 한번 해보거라’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머리속으로는 명확하게 알고 있는 그 결박기도문조차,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으로라도, 입술로라도, 그 기도문을 읊을수조차 없었습니다.
복음학교에 가는 전날에도, 많은 지체들에게 기도제목을 보내면서도, 끝내 이것들은 말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죽는 사람이라고… 나는 지금 이 기도제목을 적어보낸다고 하는 이 순간에도 이 기도제목들이 현실이 되어서, 나를 구원할것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다고는 차마 적어보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를 복음앞에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죄는 죄의 열매들이 죄가 아니었습니다. 제 안에 있었던 그 많은 중독들, 그것들이 저의 죄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중독들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저 자신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죽음을 당연히 당해야할 죄 그 자체였습니다. 주님은 저의 죄, 저의 죄된 열매들을 못박기를 원하신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저를 못박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저를 사랑하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 피투성이 같은 자아. 주님이 이 피투성이가된 갓난 아기와 같은 고아인 저를 건지시고 옷입히시고 자라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셨는데도,
저는 그 주님을 버리고 세상가운데로 나아가고, 세상과 간음하고, 결국은 세상에 의해 벌거벗겨진채로. 처음 저를 보셨던, 그 피투성이와 같은 그 처음 모습이 되어서, 거리에 버려졌는데.
주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데…
아니야… 아니야… 너는 그모습이 아니다… 나는 너를 그런 모습으로 창조한 적이 없다… 나는 너를 나의 모습을 따라 만들었다… 너는 그 죄에 찌들어 있지만, 너는 그 죄 자체이지만… 나는 너를 한번도 그런 모습으로 창조하지 않았어… 내가, 창세전부터 너를 창조하려고 마음먹었을 그때부터 나는 단 한번도 너를 그런 모습으로 창조하지 않았어…
이제. 준서야. 믿음으로 내 아들인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그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죽일수 없었던 그 자아. 항상 티비, 포르노, 게임에 중독되어 있던 너, 항상 남을 질투하고 미워해왔던 너, 남을 정죄해왔던 너, 니가 그토록 힘들고, 어렵고, 괴롭게, 죽이려고 했던 그 자아. 나는 너의 중독을 십자가에서 못박지 않았어. 나는 너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은 적이없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너를 십자가에서 못박았다.
그렇게 저는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렇게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이 육신을 가지고 제가 사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박준서는 이제, 죽었습니다. 1986년에 태어나서, 24년간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살아왔던 박준서는 A.D. 33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이제 제가 사는 것은, 제가 사는 것이 아닌, 죽음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저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저는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16년간 그토록 가기 싫어하는 교회를 억지로라도 밀어넣으신 제 어머니의 공로도 아니고, 기쁨에 싸여서 교회일에 열심히 충성한 저의 공로도 아니고, 제 삶을 정결케 하겠다고 바득바득 저 자신을 재촉하던 공로도 아니고, 복음학교에 가는 사람들에게 교통비를 지원해주신 집사회의 공로도, 저를 복음학교에 가게 하시려고 모진 말씀들을 해주신 어떤 자매님의 공로도 아닙니다.
저는 물론 이것들 중 단 하나로 없었다면 도저히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그 진리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누구의 공로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참여한 관계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도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이 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두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 홀로 찬양을 받으소서. 아멘.
그렇게 복음앞에 전심으로 부딪혀 온전히 십자가에 저를 못박히도록 내어드린 뒤 그는 저를 여러가지 것들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또 내일 하루를 살아가고 뒤를 돌아볼때면, 주님은 언제나 저에게 많은 것들로 인도하시고 그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TV, 포르노, 게임중독은 더 이상 저를 묶어두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그것들에 매이고, 내가 하고 싶지 않아도 멈출수 없었던 것들. 오히려 나의 이 중독을 이기려는 의지마저도 점차 약하여 지고 사라져만가던 강하게 저를 옭아매던 중독들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것들을 향한 유혹은 지금도 계속 존재하고 계속 싸우는 중입니다. 그 싸움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항상 이기고 승리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이 내 힘이 되실 때, 끊임없이 그 사슬을 끊으시고 저를 해방시키시는 그 주님은 저를 또 그 중독들로부터 지키시고 돌보시는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전 묵상훈련을 받을 때도 일주일에 네번 이상을 묵상을 해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나마도 일주일에 네번 이상 해오지 않으면 짜른다고 하셔서 겨우 채워간 묵상입니다. 그것도, 일주일에 나흘을 묵상해서 해간 것이 아니고, 묵상이 많이 밀린 뒤에야 하루에 이틀분, 사흘분씩 채워서 나흘분을 만들어가는 묵상 훈련기간을 가졌었습니다. 그것은 숙제이고, 무언가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물이었지만, 지금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말씀을 사모하고 그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시므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혹 못하고 넘어가는 날이 있으면 여지없이, 어느새 제가 이 것을 저의 의로 삼고 다시 제 의를 세우려 하셨음을 드러내시고 오로지 십자가앞에서 저 자신을 부정하고 그 앞에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인도하시고 돌보십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라는 말씀이 진리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부끄러운 복음이었고, 나에게 숨기고 싶었던 복음.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굳이 그걸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는 제 속 생각이 무너지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 진리가 결론이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났을 때도 그와 복음을 나누기를 소망하고, 그 누구에게도 주님은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또 당신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게 하셨습니다. 끊임없이 그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시고 그 자신을 증거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은 말과 말이 마주치는 곳에 그 뛰어나심과 위대하심, 그리고 저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심을 지금 이 순간에도 증거하고 계십니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구원의 권능을 가지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진리가 결론이 되는 삶을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