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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섭불 시대에 흥림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나라의 연호는 묘장이었고,국왕의 성은 파요 이름은 가, 드거운 피가 펄펄 끓는 스무살 때부터 왕위를 이어왔다.백성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높고 귀하다는 인존으로 믿었으며 전지전능한 왕으로 받들었다.
흥림국은 십만 팔천 리나 되는 드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었다.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은 둘레가 삼천 리나 되었고,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성문도 열두 개나 되었다. 아침이 되면 심장처럼 붉은 해가 성 한가운데서 치솟아 올랐는데, 크고 작은 금붙이로 치장한 왕궁은 흥림국의 영화를 드러내듯 찬란하게 금빛을 뿌리었다.
대신들은 국왕의 명을 한치 오차 없이 순종하고 펼치었으며,주변의 여러 나라들에게는 막강한 힘을 앞세워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이웃 나라의 백성들도 흥림 국왕을 하늘처럼 받드니 이 세상의 땅 끝 바다 끝의 만만백성이 고개를 숙이어 복종하였다.
흥림 국왕은 맹수 사냥을 즐기었다. 사냥을 나갈 때면 반드시 왕비와 더불어 궁녀들을 거느리고 초원으로 나갔는데,수레와 준마들이 어우러진 그 환락스러운 모습이란 실로 세상에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이런 국왕에게도 한 가지 시름이 있었다. 그 시름은 슬하에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다.태자를 점지해달라고 대소 신하들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왕비의 명호는 보덕,나이는 국왕과 동갑이었고,용모는 보름달같이 환하게 빛이 났고, 두 귀는 어깨에 닿아 있고,두 눈은 호수처럼 맑았다. 또한 몸매는 단아했고, 누구에게나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자비를 베풀었고,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아량이 넓었다.
마침내 왕비는 묘장 8년에 딸을 낳았다.아들은 아니었지만 국왕은 기쁨에 차 왕비에게 말하였다. "연호의 첫 자를 따고 태어난 사연을 살피어 이름을 지으리라.짐이 책을 보는 중에 자식을 보았으니 책 서(書)자를 붙여 묘서(妙書)라 하리라." 이후 5년 후인 묘장 13년에 또 딸을 보았을 때도 국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짐이 동천궁에서 거문고 소리를 듣는 중에 딸을 보았으니 묘음(妙音)이라 부르리라."
두 번째도 딸을 낳은 왕비는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날마다 하늘에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그러니까 묘음을 낳은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왕비는 상서로운 꿈 하나를 선명하게 꾸었다. 태화궁에서 잠을 자다 꾼 꿈이었는데, 키가 큰 하늘여자가 (天女)가 그녀를 향해서 내려왔다. 하늘여자는 머리에 구슬관을 쓰고 몸에는 오색 영롱한 구슬과 보석의 장식을 하고 있었다. 하늘여자가 왕비의 침상까지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말하였다.
"옥황상제께옵서 삼십삼 천상의 선법당으로 오셔서 부처님을 뵈옵고 설법을 들으시라 하더이다." 하늘여자들의 말에 왕비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태화궁으로 나섰다. 하늘에서 그녀를 맞으러 보낸 가마는 벌써 왕궁 정원에 대기하고 있었다. 앞과 좌우에 주렴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화려한 가마였다.
왕비를 태운 가마는 눈 깜짝하 사이에 삼천문에 이르렀다. 가마에서 내린 왕비는 하늘의 빛살에 눈이 부시어 앞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때 하늘사람 하나가 왕비에게 일러주었다. "어서 미륵부처님을 세 번 부르십시오." "그래야만 눈을 뜨고 하늘세계를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왕비는 천천히 미륵부처님을 세 번 불렀다. "미륵부처님,미륵부처님,미륵부처님."
과연,하늘사람이 일러준 대로 하자 비로소 하늘세계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세계는 실로 인간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엄했다. 웅장한 천궁과 큰 건물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고, 고운 무지개가 걸린 허공에는 부드러운 선율의 하늘음악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범천왕도 하늘사람들과 더불어 선법당으로 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다. 부처님은 잠시 선정에 들었다가 깨어나와 맑디 맑은 음성으로 무진의 보살에게 천천히 말하였다. "선남자여,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모든 괴로움을 받을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곧 그 음성을 관찰하시고 해탈케 하느니라.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니는 이는 설사 큰 불에 들어가도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하나니 이는 보살의 위신력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큰 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기 이름을 염하면 곧 얕은 곳을 얻게 되며, 만일 백천만억 중생이 금,은,유리,자거,마노,산호,호박,진주 등 보배를 구하려고 큰 바다에 들어갔다가 가령 폭풍에 밀려 그 배가 나찰들의 나라에 잡혔을 때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하는 이가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나찰의 난을 벗어나게 되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하느니라. 또 어떤 사람이 해를 입게 되었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하면 그들이 가진 칼과 무기가 조각조각 부서져서 벗어나게 되느니라."
이때 선법당에 나와 앉아 있던 대범천왕과 하늘사람들은 부처님의 설법에 감동하여 환희심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동안에도 부처님의 설법은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떤 중생이 음욕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음욕을 여의게 되고 만일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성내는 마음이 없어지며, 만일 어리석은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어리석음이 없어지게 되느니라."
드디어 설법이 끝날 무렵에는 어느새 삼천 명의 자금인과 만명의 하늘선녀들이 금빛 연꽃을 타고 사뿐사뿐 선법당으로 내려와 모였다. 부처님의 설법을 직접 듣지는 못하였지만 부처님의 눈부신 자태라도 보기 위해서 모여든 것이었다. 그들 중에 한 명이 왕비에게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사옵니까."
하늘선녀 하나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고는 나비처럼 사뿐 물러나 왕비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왕비마마, 저희는 다시 천궁으로 돌아가겠사옵니다. 만 명의 하늘선녀 중에 하나를 남기고 가오니 부디 잘 보살피시어 반야의 지혜를 선양하소서."
왕비는 하늘선녀가 하늘궁전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야 꿈에서 깨어났다. 왕비는 잠에서 깨어나서도 꿈속의 정경이 눈앞에 선하였다. 잠간 동안의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오히려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왜 이러한 꿈을 꾸었을까.꿈은 현실과 반대라던가. 하늘이 무슨 재앙이라도 내리려는 것일까. 외적이 침입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조짐일까.'
왕비는 침상에서 이 생각 저 생각에 몸을 뒤척이며 긴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날이 밝아지자 그녀는 국왕에게 다가가 간밤의 꿈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기이합니다.예사롭지 않은 꿈이나이다." "무슨 꿈이길래 그러하오." "설법은 무슨 설법,누구의 설법이란 말이오." 국왕은 퉁명스럽게 물었으나 사실은 궁금하였다.
"성스러운 경치에 몸 담으니 걸음걸음 빛살이 찬란했나이다. 자색 구름이 가득했으며 하늘음악 소리도 울려 퍼지고 있었사옵니다. 그때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나이다." "아니옵니다, 마마, 길흉을 판단할 수 없사와 이렇게 말씀드리나이다." "그거야 도인을 찾아서 물으면 될 일이니 그리 걱정 마시오."
국왕은 곧 방문을 내걸어 해몽을 잘하는 수행자를 구했다. 그러자 호호백발에 얼굴은 주름투성이요,용모는 대삿갓에 누더기를 걸치고 지팡이를 짚은 수행자가 방문을 한 장 떼어 들고 왕궁으로 들어왔다.
늙은 수행자는 신하를 따라와 국왕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지팡이를 소리나지 않게 발 앞에 놓으며 이마가 지팡이에 닿을 때까지 고개를 숙여 절하였다. 국왕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어 말하였다. "그대는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소승은 낙안방에 사는 수행자이나이다." "성은 무엇인가." "미가 이옵니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가." "소승은 조실부모하여 생년월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출가한 지는 몇 해나 되었는가." "어려서 출가하여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떠돌며 이르는 곳마다 해봉을 하여왔나이다. 그러므로 소승은 제 나이가 얼마인지,출가한 지 몇해가 흘렀는지 모르고 있나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그건 그렇고,그대의 해몽서는 어디에 있는가." "소승은 그런 책이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해몽을 한다는 말인가."
국왕은 늙은 수행자의 눈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그러나 늙은 수행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소승은 책이 필요 없나이다. 꿈 내용을 듣기만 하면 알 도리가 있나이다." 조급해진 국왕이 단숨에 꿈 내용을 말하였다.
늙은 수행자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느릿느릿 말하였다. "소승이 자세히 풀이해 올리겠나이다. 왕비마마께서 하늘나라에 오르시어 부처님 설법을 들으신 것은 더없이 좋은 일로서 천수를 더하고 앞으로 부처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뜻이옵니다." "왕비가 부처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인가." "그 도리를 차근차근 말씀드리겠나이다. 삼천 자금인은 삼세의 삼천 부처님이옵고," "어서 말하시오." :일만 선녀는 일만 보살이옵나이다." "그자들이 부처이고 보살이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그리고 선녀를 하나 주고 난 후 천궁으로 돌아갔다 함은 인왕가(人王家)를 법왕가(法王家)로 변화시킨다는 뜻이나이다."
국왕은 황당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법왕가,법왕가로 변화시킨다고?" "왕비에게 선녀를 하나 주고 간 것이 태몽이란 말인가.그 선녀가 장차 태어날 육신보살이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육신보살은 장차 중생들을 제도하는 부처님으로 나투실 것인즉 왕비마마께서는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이나이다."
이때 늙은 수행자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조렸는데,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국왕께서 소승더러 어디 사느냐 묻거늘 소승은 원래 낙안방에 살았다네
삼생에 행운 있어 밝은 임금 만나게 되었거늘 왕비마마의 꿈 풀이하니 먼지만큼도 깍아 내리지 못하리
이 몸 세상에 무용지물로 태어난 주 알았으나 꿈 풀이하며 세월을 살아가누나.
늙은 수행자는 국왕에게 사례를 바라지 않고 그저 물 한 그릇만 청하였다. "물 한 그릇만 주시겠나이까." "짐이 약속하지 않았더냐.해몽을 한 자에게는 상을 내리겠다고.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하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물 한 그릇이면 족하옵나이다." "허허.대가를 바라느냐,명예를 원하느냐. 명예를 원한다면 짐이 드대를 가까이 두고 관직을 하사하리라."
"대왕마마.부처님께서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사옵니다. 비록 소승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이지만 부처님의 설법인즉, 잘 들으시옵소서. 이렇게 사는 자가 보살이라 하였사옵니다. '보살은 평등한 마음으로 자기가 지닌 물건을 남김없이 모든 중생에게 널리 베푼다. 베풀고 나서 뉘우치거나 아까워하거나 대가를 바라거나 명예를 구하거나 자기 이익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이롭게 할 뿐이다. 모든 성인들이 쌓은 행을 배우고 생각하고 좋아하며 몸소 실천하고 남에게 말하여, 중생에게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마음이옵나이다.그러니 소승은 부처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알겠느니라. 그대의 고집을 꺽을 수 없노라." 내관이 흰 사발에 물을 가져오자, 늙은 수행자는 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가 확 내뿜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놓여 있던 지팡이가 저절로 일어서더니 살아 꿈틀거리는 금룡으로 변하였다.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바람이 그름을 몰아오고,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크르릉 크르릉 울렸다. 벽력 소리에 왕궁이 흔들리는 가운데 늙은 수행자는 빛나는 금룡을 타고 빛깔 구름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다.
이날부터 왕비는 일신이 안락해졌다.눈에 보이는 것은 우담발화 꽃밭 같았고, 귀에 들리는 것은 하늘음악 소리 같았다. 뿐만 아니라 향기가 늘 코로 스며드는 것 같았고, 영롱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 것 같았고,입안에는 언제나 신선한 우유죽을 머금은 듯 하였다. 이처럼 상서로운 기운이 열 달 동안 지속되는 가운데 묘장 18년 2월 19일이 되었다. 이날 국왕은 왕족들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3일 동안 꽃놀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궁중 정원에는 꽃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복도식 주랑이 여든 개나 있었는데, 기둥들은 모두 옥이었고 난간은 순금으로 둘러 있었다. 그리고 서른두 곳의 상화정은 푸른 기와를 얹었고, 기둥은 금과 옥이었으며,바닥은 칠보를 박은 은 벽돌이 깔려 있었다.이러한 궁전 안은 연회상이 벌써 준비되어 있었고, 거문고 소리와 노랫소리가 구성지게 흘러 넘쳤다.
국왕은 궁녀들과 꽃을 구경하며 성천전 뒤에 있는 천화루에 올랐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때는 사시라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에서는 꽃이파리들이 비처럼 흩날리고, 땅에서는 온갖 보물들이 빛을 내쏘며 천화루 주위에는 향기가 진동하였다.
이때 공주가 태어났다.국왕은 공주가 태어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묘장왕의 마음이 게송으로 남겨 전해지고 있다.
꽃구경하러 천화루에 오르니 꾀꼬리 우짖고 온갖 꽃 만발하네 2월 19일이라 봄빛 기이하기도 한데 천화루 경치 좋네 한 점 티끌 없이 맑아라
옥 난간에 기대어 정궁 바라보니 고고지성 울리며 공주가 태어나도다.
왕비는 공주를 금 대야에 목욕시키라고 궁녀에게 분부하였다. 공주를 본 궁녀들은 하나같이 보통 아기가 아니라고 찬탄하였다. 얼굴은 둥근 달처럼 맑고,해처럼 빛났으며,살색은 금덩이처럼 귀해 보였다. 손은 천륜상(千輪相)이요,눈은 마니 보주 같았으며, 푸른 눈썹과 검은 머리에 손발은 백옥 같고 유리처럼 투명하였다.거룩한 용모가 잘 갖추어야 할 32상과 80종호가 있어 세상에 가희 비교할 이가 없었다.
왕비는 공주를 국왕에게 보여드리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공주는 비단보에 곱게 싸여 금 요람 속에 눕혀졌다. 한 궁녀가 금요람을 정히 받쳐들고 그 뒤에 궁녀들이 늘어서서 왕궁으로 향하였다.
왕궁에 이르자 국왕이 공주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왕비가 좋은 꿈을 꾸어 얻은 아이다. 이름을 묘선(妙善)이라 하라. 내일 조회 때 신하들과 의논한 후 천하에 조서를 내어 알리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