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맛은 통각이다. 맛보다는 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즐기는 것이다. 한국인은 이 고통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열광한다. 잊을 만하면 불어오는 매운 음식 열풍이 증거다. 매운맛을 내는 여러 재료들 중에 고추의 인기는 단연 최고다. 고추는 한반도에 정착한 역사는 짧지만 빠른 속도로 우리의 식탁을 점령했다. 풋고추를 생식으로 즐기며 김치, 장아찌, 절임은 기본으로 각종 찜, 국, 찌개 등 빠지는 요리가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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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맵기보다는 땡기는 맛이 있어야 인기
매운맛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맛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매운맛을 즐기는데 당연히 한국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탈리아에선 페퍼론치노를 사용한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과 어울리는 품종으로 음식을 먹었을 때 천천히 올라오는 칼칼함이 특징이다. 알리오올리오와 같은 오일 파스파를 비롯해 각종 요리에 사용되는 약방의 감초 같은 재료다. 일본의 매운맛은 고추냉이다. 고추냉이는 고추와는 달리 시니그린이란 성분이 매운맛을 구성한다. 무, 갓 등을 먹었을 때 코끝이 찡해지는데 바로 이 성분 때문이다. 음식의 대국인 중국도 빼놓을 수 없다. 마파두부로 대표되는 사천요리가 유명한데, 산초를 활용한 얼얼한 매운맛이 특징이다. 한국에선 사천요리에 비해 인지도가 밀리지만 중국 내에서 후난성 역시 매운맛 요리로 유명한 지역이다. 후난은 맵고 신 맛의 요리가 특징으로 고추를 많이 사용해 한국인 입맛엔 사천요리보다 더 잘 어울린다.
고추의 원산지인 중남미는 매운맛을 한국보다 더 사랑하는 지역이다. 칠리고추가 없는 밥상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그 종류도 다양해 200종이 넘는 고추를 사용한다. 이 지역 고추의 매운맛은 그야말로 통각이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머리가 띵해지고, 혓바닥과 목은 불에 탄 듯이 아려온다. 칠리고추를 이용한 칠리소스와 할라피뇨 고추를 이용한 피클 등이 한국인과 익숙한 음식이다.
한국에선 매운맛과 단맛·개운한맛이 동시에 나는 음식을 높게 평가한다. 닭볶음탕, 제육볶음, 매운탕 등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매운 음식의 대명사다. 매운 음식은 저마다 재료는 다르지만 단백질 성분에 고추의 매운맛, 채소의 단맛을 더해 ‘땡기는’ 매운맛을 구현한 음식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통각이 몰려오지만 이내 단맛이 돌아 입안을 정리해 자꾸만 손이 가게 만드는 음식, 한식의 매운맛을 정리할 수 있는 말이다.
땡기는 매운맛은 청양고추가 필수다. 일반 고추와는 달리 매운맛 뒤에 단맛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청양고추로 말려서 만든 태양초는 한국에서 최상품 고추로 취급받는다. 워낙 고가이며 제조 과정에서 속임수를 쓸 여지가 많은 재료기 때문에 ‘가족끼리도 거래하면 안 된다’는 농담을 할 정도다. 매운 음식을 판매하는 모 전문점 점주는 태양초는 특정 지역의 제품만 고집하는 것보단, 신뢰할 수 있는 유통업자와 거래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조언했다.
청양고추는 그 이름 덕에 충남 청양을 고향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잦다. 실은 경북 청송·강원 양양이 원산지다. 청양고추는 한국의 기후와 잘 어울려 전국적으로 재배하는 품종이다. 단, 전국 어디를 가도 같은 품종을 사용하기 때문에 맛에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청양고추의 품종 관련 특허가 다국적 기업인 ‘몬산토’ 소유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현재 청양고추는 몬산토로부터 씨앗과 모종을 사와야 재배가 가능한 신세다. 한국인의 밥상을 주름잡는 채소치고는 조금 서글픈 현실이다.
소비자는 자연스런 매운맛을 원해
캡사이신은 청양고추의 매운맛을 담당하는 성분이다. 최근엔 이 성분을 조합해 만든 소스가 외식업소에서 유행을 탔다. 청양고추에 비해 가격이 월등히 저렴하며, 소량만 사용해도 매운맛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운 음식 전문 프랜차이즈가 성행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캡사이신의 과다 사용은 긍정적 효과를 낳지 못한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인이 선호하는 땡기는 매운맛이 아닌, 그야말로 통각 그 자체기 때문이다. 캡사이신 소스를 이용해 만든 음식은 고통을 참는 과정에서 분비되는 체내 화학물질을 즐기는 것이지, 맛 때문에 먹는 음식이 아니게 된다. 호기심에 한두번 찾을 뿐 지속적인 구매로 이어지기 힘들다. 채소가 내는 깔끔한 맛이 아닌 텁텁한 맛이 나는 점도 매운 음식 마니아로부터 외면을 받게 만들었다.
건강상의 문제도 있어 캡사이신의 사용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서울아산병원 연구팀은 캡사이신을 과도하게 섭취할 경우 면역체계를 약화시켜 암의 발생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발표했다. 매운 음식 전문점이라면 캡사이신 소스가 아닌 고추의 매운맛을 사용하는 쪽이 현명하다. 그래야 맛과 마케팅 요소,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서울 구로구 <다원국수>
깔끔한 멸치국수와 감칠맛 나는 ‘고추양념장’의 조화
<다원국수>는 ‘신선한 재료로 만드는 건강한 국수’를 콘셉트로 삼은 국수 전문점이다. 이곳에선 청양고추를 잔치국수(4000원)의 육수와 고추양념장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잔치국수의 육수는 멸치를 베이스로 만든다. “멸치의 비릿한 맛을 잡아주는 데 청양고추가 제격”이라고 김재광 대표는 전했다. <다원국수>는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국수의 맛이 감칠맛은 조금 부족하지만, 굉장히 깔끔한 편이다. 허나, 간이 너무 약하다는 컴플레인이 들어와 대책을 고민했고 고추양념장을 제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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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양념장은 간장과 한라식품의 참치액을 혼합한 뒤 청양고추와 쪽파를 넣어 완성한다. 참치액은 가격 문제(1.8L당 2만원)로 일반 식당에서 사용하기 힘들지만 건강과 맛을 위한 선택이다. 참치의 감칠맛이 한국인의 입맛과 잘 어울린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 고추양념장은 짭짤하면서 진한 감칠맛이 올라와 슴슴한 맛의 잔치국수와 조화를 이룬다.
주소 서울 구로구 경인로22 전화 (02)2060-0090
서울 동작구 <고추찜닭>
닭고기 안에 배인 고추의 진한 매운맛
서울 사당2동에 위치한 <고추찜닭>은 고추찜닭(2만6000원) 한 가지만 파는 찜닭 전문점이다. 이수역(4호선, 7호선) 인근 먹자골목에서 15년이 넘도록 운영 중이며 인근에서 장수하는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다. 김영애 <고추찜닭> 대표는 찜닭과 매운 맛의 조화가 워낙 좋기 때문에 인기를 끄는 것 같다고 전했다. 간장을 베이스로 하는데 고추를 안 사용할 경우 맛이 금세 질린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고추는 모두 청양고추를 말린 태양초다. 주로 충남 청양지역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구입한다고. 한 해에만 300근 가량을 소모하며 한 번 조리할 때마다 20g 가량을 사용한다.
김 대표는 질이 좋은 태양초를 고르는 게 찜닭 요리 맛을 결정짓는 요소라고 말했다. 또한 “선홍색 빛을 띠며, 표면에 흠집이 없어야 하고, 잘랐을 때 매콤한 냄새가 퍼지는 고추가 상품”이라고 조언했다. 수입산 고추는 끓였을 때 단맛이 아닌 쓴맛이 올라오기 때문에 꼭 국산 고추를 사용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주소 서울 동작구 동작대로27가길 14 전화 (02)592-1125
서울 강남구 <슬링펍>
젊은 세대 입맛 공략한 고추파스타
<슬링펍>은 지갑이 얇은 젊은 세대가 가볍게 술자리를 가질 수 있는 콘셉트로 만든 펍이다. 이곳은 단순히 술을 마시러 오기 위한 장소 보다는,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을 지향한다. 매장 내에는 탁구대, 스튜디오, 빔프로젝트 등이 준비돼 각종 모임·회식 등을 위한 장소로 활용도도 높다.
기본적으로 저녁 매출이 강한 술집이지만 점심 메뉴는 이곳의 숨은 매력이다. 덮밥류(3500원), 파스타류(6500원) 등 가성비가 탁월한 메뉴들로 구성해 강남역 인근 학생, 직장인의 숨은 맛집으로 유명하다. 점심 메뉴로 손님의 러브콜을 많이 받는 음식은 파스타류, 그중에서도 빠네파스타와 고추파스타(두 요리 모두 점심 6500원, 저녁 9900원)다. 파스타에는 이탈리안 고추인 ‘페퍼론치노’를 적극 활용한다. 호텔 출신 셰프인 한태웅 실장은 “파스타에는 페퍼론치노가 제격이다. 청양고추보다 조금 더 매콤하면서 스파이시한 맛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빠네파스타의 경우 토마토소스의 맛을 잡아 주는 역할을, 고추파스타는 보통의 알리오올리오에 매운 맛을 강조했다. 좀 더 맵게 먹고 싶은 고객을 위해서 접시 주변에 칠리 고추 파우더를 뿌렸는데 여성 고객들의 반응이 좋다고 한 실장은 귀뜸했다.
주소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5길 36 전화 (02)6052-8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