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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경건/말(언어)
제목 : 참된 경건의 열쇠(2)
성경 : 약 3:3~8
찬송 : 264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204 낙양교회 주일 오전예배
약 3: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약 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약 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약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 3: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약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야고보가 ‘온전한 사람’의 특징 가운데 ‘말의 사용’을 결정적인 요소로 보고 이를 상세히 설명하는 대목은 흥미롭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성도의 ‘온전함’에 관해서 말의 중요성을 야고보만큼 깊이 있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루는 본문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3:3~5절에서 상대적으로 미미한 부분인 것 같은 이 ‘혀를 사용하는 문제’, 곧 말의 문제가 실제로는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를 역설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6~8절에서 좋은 예를 드는데, 이는 또한 말의 문제가 이 타락한 세상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관해 야고보 나름의 독특한 창조타락에 대한 시각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9~12절에서는 말의 사용과 창조질서, 더 넓게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말의 문제를 언급하게 됩니다. 이 대목은 말에 대한 야고보의 신학이라 할 만큼 중요한 본문들입니다. 이를 위해 야고보는 3~5절에서 당대 말에 대한 잠언들을 사용해서 나름대로 말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약 3:3 우리가 말들의 입에다 재갈을 물려서 말들이 우리 말을 듣게 하면, 우리는 말들의 온몸도 끌고 다닐 수 있습니다.
약 3:4 또 배들을 보십시오! 배들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거센 바람에 떠밀려 간다고 해도 배들은 아주 작은 키의 조종을 받습니다. 그래서 배는 키잡이가 마음먹은 곳으로 이끌려 갑니다.
약 3:5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적은 부분이지만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우쭐댑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아주 큰 숲을 불태워 버립니다.(새한글성경)
√절제 없는 혀의 파괴력
야고보는 ‘말(馬), 배(船), 불(火)’ 이렇게 세 가지 예를 들어 혀를 사용해서 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를 역설합니다.
우리의 삶을 좌우지하는 것은 진정 무엇일까요?
돈이라고 대답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돈을 쌓아놓고도 거짓말과 약속을 깨는 것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진정 행복할까요? 삶을 좌우지하는 요소가 지금 야고보다가 말하는 것처럼, ‘혀’ 하나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혀를 사용해서 말을 하는 것 때문에 달라지는 것들이 너무도 많은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1)말의 입에 물린 재갈
야고보는 먼저 혀는 말의 입에 물린 재갈과 같아서, 비록 작지만 그것 하나로 말 전체를 이지저리 이끌어갈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임을 부각시킵니다.
√약 3:3 우리가 말들의 입에다 재갈을 물려서 말들이 우리 말을 듣게 하면, 우리는 말들의 온몸도 끌고 다닐 수 있습니다.(새한글성경)
그렇습니다. 말은 내뱉으면 그뿐인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한 것은 자신이지만, 일단 그런 말을 내뱉으면 이제는 그 뱉은 말이 그 사람을 목을 쥐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도 하는 광경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처럼 미디어가 극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말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합니다. 인터넷이나 엑스(트위터) 같은 데서 말 한마디 잘못 올렸다가 순식간에 전 국민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생각을 조율하고, 감정을 조절하고, 자초지종을 다 살필 여유를 건너뛴 댓글 하나의 파괴력은 실로 놀랍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나 격분한 마음으로 내지른 한 마디 말, 급하게 써버린 한 줄의 문장, 그것 하나로 인생을 파국을 만났다는 뉴스를 종종 대하지 않습니까?
√2)배에 달린 키
배와 그 배에 달린 키의 경우는 또 다른 흥미로운 예입니다.
약 3:4 또 배들을 보십시오! 배들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거센 바람에 떠밀려 간다고 해도 배들은 아주 작은 키의 조종을 받습니다. 그래서 배는 키잡이가 마음먹은 곳으로 이끌려 갑니다.(새한글성경)
바다에 아주 거친 바람이 일었다는 것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어떤 외적 환경의 변화를 뜻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들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도 3절에서처럼, 혀는 그것으로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메트아고) 열쇠로 제시 되고 있습니다. 다만 ‘사공의 맘먹은 뜻대로’가 강조되었을 뿐입니다. 말은 결국 그 사람의 뜻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서 저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저렇게 대답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난생 처음으로 애굽 땅을 벗어나 광야를 헤매다가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정탐꾼들을 먼저 보냈고, 그들이 돌아와 한 말들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한쪽은 불신앙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인 말을 했고, 다른 쪽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백성 전체의 향방을 좌우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솔로몬의 답변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지혜를 달라고 말해서 모든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백부장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오실 필요가 없고 당신의 권세라면 그저 말씀만 하시면 된다 했던 그의 지혜로운 답변 같은 것입니다. 상황은 똑 같아도, 하는 말 때문에 그 결과는 천지 차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3)숲을 태우는 불
마지막으로 불과 숲의 비유입니다.
√약 3:5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적은 부분이지만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우쭐댑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아주 큰 숲을 불태워 버립니다.(새한글성경)
이 비유는 두드러지게 부정적입니다. 사소하게 내 뱉은 말이 삶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경우입니다. 결코 드물지 않은 모습입니다. 말 한 마디 때문에, 이웃끼리, 친척끼리 칼부림을 하고 뜻하지 않은 중대한 실수를 했다는 신문 기사를 종종 읽게 되지 않습니까? 사람이 분이 가득한 말을 쏟아내면, 이제는 그 쏟아낸 분노의 말이 마치 섬뜩한 낫이 닿은 모든 풀을 베어버리듯, 여기저기를 혼자 마구 베고 돌아다니는 날선 칼이 되고 맙니다. 얼마 되지 않아, 주변에는 그렇게 상처받고 쓰러져 누운 사람들로 가득해집니다. 이를 어쩔 것입니까? 세우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간단한 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인데, 부주의한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온 상처를 남겨, 오랜 신뢰의 관계를 부지불식간에 허물어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1)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을 적게 한다는 것은, 단지 말수가 적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만큼 중요한 것은 언제 입을 열어야 하는 지를 결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적게 말한다는 것은 그래서, 말을 해야 할 때를 알아서 말함을 의미합니다. 마땅하지 않은 때에 튀어나오는 말도 많이 있습니다. 남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잘라 말하거나, 자기 자랑을 견디지 못해 말을 참지 못합니다. 아예 마음에 담기지 않은 말들도 많습니다. 길바닥을 뒹구는 돌들처럼, 아무런 온기도 없이 내던져지는 말들은 듣는 사람을 한없이 피곤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사랑과 지혜로 품어내지 않은 말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가뭄에 타들어가는 논바닥과 같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때에 할 만큼만 하는 말은 소금으로 간을 한 것 같고, 은쟁반을 구르는 옥구슬 같다고 할 것입니다.
√2)말을 느리게 하십시오.
말을 느리게 한다는 것은, 단지 말투가 더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격하고 급한 마음, 분개하고 상처 입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뿜어내는 말들은 얼마나 무모합니까? ‘아차’하면 듣는 사람에게 너무도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관계를 쌓아 올리는 데는 오랜 신뢰의 기간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한순간의 급한 말로 충분합니다. 말을 더디한다는 것은, 그래서 뜨거운 온수가 나와 손이나 발이 델 법한 순간에 그 수도꼭지를 꼭꼭 잠그는 것과 같은 효과를 냅니다. 더 이상 그 뜨거운 물에 데지 않아도 됩니다. 혹시 이미 뎄다면 그것을 감수하더라도, 더 이상 데지 않는 편이 훨씬 현명합니다. 또한 격한 말들을 참는 동안 길어지는 침묵은, 마치 사진을 찍어 현상할 때 보이지 않던 그 형상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처럼, 그 격하고 급했던 말들이 얼마나 누추하고 비참한 것들인지를 선명하게 폭로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격한 말들 앞에서 펼쳐지는 더딘 말은 참으로 얼마나 위엄이 있습니까!
√3)말을 부드럽게 하십시오.
말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온유함을 드러냅니다. 모두가 한결 같이 격분하여 퍼붓는 대상을 향해 과연 무슨 말을 할지 숨죽이며 들을 때, 그가 하는 말은 너무도 부드럽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분의 말씀은 조용했지만, 부드러웠지만, 얼마나 온유하고 얼마나 강력한 말씀인지. 저주를 퍼부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때에 나오는 뜻밖의 부드러운 말은, 이 세상에도 아직 ‘은혜’라는 것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전달합니다. 정죄하고 복수하는 것 그 이상의 지혜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따로 있다는 아스라한 희망의 메아리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은혜의 나라가 있다는 잔잔한 소문 같은 것입니다. 이는 얼마나 귀한 말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말을 어떻게 하십니까? 말을 적게 하십시오. 느리게 하십시오. 부드럽게 하십시오.
√다스리지 못한 혀
약 3:6 혀도 불입니다! 우리 몸의 여러 부분 가운데 혀는 불의의 총합입니다. 혀는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마침내 지옥 불에 불타 버립니다.
약 3:7 온갖 종류이 짐승과 새, 길짐승과 바다 생물은 자연적으로 사람들에게 길들여지고 있으며 길들여져 왔습니다.
약 3:8 그런데 혀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마구 날뛰는 악이며, 죽음을 가져오는 독으로 꽉 차 있습니다.
√1)말, 지옥 불의 도화선
야고보는 이미 3~5절에서 삶에 끼치는 혀의 막대한 영향력뿐 아니라, 주로 그 부정적인 힘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5절에서 아주 작은 불씨 하나로도 숲 전체를 태워버릴 수 있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에 대해 말했습니다.
약 3:6 혀도 불입니다! 우리 몸의 여러 부분 가운데 혀는 불의의 총합입니다. 혀는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마침내 지옥 불에 불타 버립니다.
6절에서 ‘혀는 불’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혀는 우리 몸 안에 있어서, 우리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불의한 세계’라고. 혀 자체가 불의 세계이고, 이런 혀는 모든 피조세계 자체를 지옥 불에 의해 타오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의 눈에는 이미 이 작은 혀 하나로 온 세상이 지옥 불에 타오르는 어마어마한 광경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마치 핵폭탄 하나가 터져서 온 지구가 그 화염과 검은 구름에 뒤덮이는 것처럼, 이제 혀는 ‘온 숲’(5절) 정도가 아니라, 존재하는 세계 전체를 파괴하는 모양새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온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혀’ 곧 인간의 말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피조된 창조 질서를 뒤흔들고 파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불의의 세계’ 축소판이고,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 온 피조세계가 ‘불의의 세계’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런 상황을 야고보는 ‘지옥에 의해 불이 붙은’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원문에는 ‘게네시스(존재)’와 ‘게헨나(지옥)’가 음성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혀 때문에 온 세상이 지옥이 되어 버렸다는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합니다. 그 작은 혀 하나 때문에, 그 말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 순식간에 지옥 불에 활활 타는 지옥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2)말과 인류의 타락
흥미롭게도 실제로 창세기의 기록이 보여주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선물로 주시고 인간에게 그 세상을 다스릴 권세도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첫 사람 아담은 어떤 말로 응답했습니까? 그의 말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의심하는 말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그 의심 속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선물로 주신 그 세상을,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된 ‘두 마음’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수치요 변명이요 무책임한 말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조 세계의 질서가 혼돈에 빠지고, 사람이 저주를 받고, 땅이 저주를 받고, 정죄와 미움과 살인이 난무하는 세상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까?(창 3:16~4:24)
말하는 문제는 곧 듣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들은 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해서 삶에 지옥 불을 옮겨 붙였다는 것은, 그가 이미 그 지옥 불에 붙은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듣고 마음에 붙은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을 품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마귀의 말을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미 마귀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과 불신과 살인과 파괴의 말을 먹어버렸습니다. 그 이후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은 그가 먹었던 마귀의 말들을 그대로 토해낸 것뿐입니다. 세상에 지옥 불이 그렇게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고보의 눈에는 이 모든 비극은 처음 창조를 이렇게 망친 것이 말이었듯이, 바로 말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옥 불을 옮기는 이 말의 뿌리에 있는 ‘두 마음’을 정리해야 하며, 이 두 마음에 불을 지피고 스스로 속게 만드는 마귀에 맞서 두 마음을 성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4:7~8).
√3)‘정복하고 다스리는’ 인간, 그리고 말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야고보는 문득 이제 ‘그 혀만큼은 어떤 사람도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약 3:8 그런데 혀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마구 날뛰는 악이며, 죽음을 가져오는 독으로 꽉 차 있습니다.
여기서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시제들을 살려 해석하면, 사람이 혀를 다스렸던 적이 없었고, 그 이후로도 사람이라면 비록 짐승들을 다스릴 수 있을지라도 그 누구도 한결같이 자기 혀는 다스릴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말’로 실패한 사건을 고려한다면 너무도 잘 들어맞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물을 복종시키고 다스리게 된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귀의 말에 속아 그의 응답 곧 그의 말에 실패한 사건 말입니다. 그 이후로 말의 타락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 변명하는 말, 원망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무책임한 말들을 통해 역사는 살인과 죄악과 심판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혀’는 ‘정함이 없는 것이고 악하며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입니다(8절 후반절). ‘정함이 없다’는 표현은 이미 1:8절에서 ‘두 마음’을 가진 자로 그의 모든 길에서 ‘정함이 없는 자’라 할 때 야고보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즉 이렇게 파괴적인 역할을 하는 ‘혀’의 말들은 ‘두 마음’을 가진 자,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자의 특징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 속에서 도리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의 입, 그들의 말들은 그 ‘좋았던’ 세상에 지옥 불을 옮겨다 붙입니다. 활활 타오르는 것입니다. 여기가 지옥입니다. 두 마음으로 시작된 말들의 폭탄으로 세상은 상처와 참혹, 온갖 속임과 거짓으로 깊이깊이 앓고 있습니다.
여러분!
야고보는 인간의 비참, 곧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음 받았지만 실제로는 자기 혀 하나 다스리지 못함으로 다스려야 할 세상에 지옥 불을 옮겨 붙이는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가 하는 말에 달려 있습니다. 그는 말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실은 그의 찢어진 두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떠난 그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나뉜 마음에서 솟구쳐 나오는 흙탕물 같은 말들은 단지 그의 삶뿐 아니라 온 세상을 더럽힙니다. 말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표현 정도가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잇는 것, 그것이 생명이든 죽음이든, 그것을 온 피조세계에 전달하는 강력한 통로입니다. 생명의 향기이든 혹은 죽음의 바이러스 같은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뒤덮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처럼 우리 몸속에 침투해서 돌아다니는 독한 질병의 바이러스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적게 하십시오. 느리게 하십시오. 부드럽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