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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1)(마23:13-22)
지난 주에는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배우고 깨우쳤지만 십자가의 현장에서 무력하게 실패하고 절망했습니다. 다 알지만 실제로 십자가에 담겨진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성령강림후에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배웠던 모든 가르침이 실제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을 정말 제자로 만들었습니다. 성도들 성도답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알지만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그것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왕국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같은 사람은 모두가 예수님을 대적할 때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령론의 입장에서 보면 저들은 성령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만이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거기에 순복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외식에 분노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3장 13절부터 마지막절까지 보면 7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화있을진저!”라는 말씀입니다. “화”라는 말은 본래 “진노” “재앙” “저주”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비애”라는 뜻도 있어서 번역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강퍅한 사람들에 대한 상한 심정에서 나오는 분노라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들을 향해서 분노하고, 저주하고, 재앙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욕을 퍼붓지만 사실은 자식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지만 그 마음 속에 회개하지 않는 그들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7개의 “화있을진저!” 라는 말 뒤에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겉을 꾸민다”는 뜻입니다.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만 그런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외식이라는 말 대신 위선이라는 말을 더 많이 씁니다. “선으로 가장한다”는 뜻입니다. “위선자”라고 하면 “선으로 가장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에서 이 말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로서, 가장 거룩하고, 존경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의 삶에는 진실이 없다! 연기를 집어 치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말은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해도 기분이 나쁜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으니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외식하는 위선적인 신앙에 대해 예수님이 얼마나 크게 분노하고 계신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신 신앙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왜 예수님이 이처럼 격렬한 비난과 분노의 말씀을 하셨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예수님은 저주하기 위해서 저주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의 축복을 주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저주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은 축복합니다. 비록 자식이 잘못 되었을지라도 축복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축복을 거부해 버린 경우에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기 전에 마태복음 5장에서 이미 '축복이 있을지어다' 라고 여덟번을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 저는 이 사실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만약 예수님이 '축복을 받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없이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만 했다면 우리는 정말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오시자마자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국의 축복을 의도적으로, 인위적으로 거부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저주를 선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의 성격이나 생각, 사고방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거부하여 스스로 저주를 자처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주가 임합니다. 천국가지 못한다면 그것대로 괜찮은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가 8,90년만 지나면 어디로든 가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대학입시와 같습니다. 합격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낙방입니다. 괜찮은 어떤 중간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 학교에 가서 시험을 쳤어도 그 학교하고 자기하고 아무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밤새도록 과외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답고 축복된 사건입니까? 예수님께서 오늘 저주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 것은 저주 때문이 아니라 축복 때문이었습니다.
2)'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분명하고도 확고한 의지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우맹, 맹인, 독사의 새끼들, 회칠한 무덤, 지옥의 판결' 등 격렬한 언어를 쓰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와 진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죄를 털끝만큼도 용납 못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용납하시지만 죄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이사야 59:1-2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셨고 그의 보혈을 믿는 자는 죄가 깨끗이 씻겨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얻고 그분의 거룩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3)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이 비록 격렬한 언어로 말씀하셨지만 그 마음에는 저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의 '화 있을진저'가 다 끝난 37절에 보면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37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누가복음 19:41에는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그토록 내가 너를 구원하고 싶었는데!"라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하시며 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화있을진저' '저주받을지어다'라는 말씀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막히게 뜨거운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공의는 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속에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하는 아픔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 눈물이 있었습니까? 만약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고 애통하면서 하는 비판이 아니라면 그 비판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분들은 예수님도 불의에 대해 채찍을 들고 성전의 상을 뒤엎고 분노를 하셨으니 우리도 거룩한 분노를 세상에 터뜨려야 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온통 예수 이름으로 비판하고 정죄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일을 맡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정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 자신이 죄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정죄할 수 있고 회초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으며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상황에서는 우리도 똑같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정죄하신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일곱 가지 가운데 오늘은 세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천국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하셨습니다(13절).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 자요 지키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의 열쇠를 맡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천국 문의 열쇠를 담당한 축복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천국 문을 닫아두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천국 문을 닫아 놓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들 앞에 본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어 ! 저 사람을 보니까 예수 믿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합니다. 이런 것이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 가게 막는 것입니다.
세례도 받고 교회 직책은 다 갖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빛된 생활을 하지 않을 때, 이것이 바로 천국 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 있습니다. 자기가 먹기는 싫고 그렇다고 남 주기도 싫고, 그래서 그걸 땅에 던져 발로 밟아 버리는 사람 말입니다. 이 얼마나 고약하고 삐뚤어진 마음입니까? 삐뚤어진 마음에는 저주가 임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마음입니다. 자기가 돈이나 가문, 인기, 미모, 학벌 등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면 주장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아무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은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 나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주님이 하십시오. 나는 내 인생을 이끌어 갈 힘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끌어 가십시오. 나는 사업을 내가 이끌어 가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이끌어 가 주십시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2. 어렵게 전도해서 교회에 등록시켜 놓고 지옥자식으로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15절).
15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 사람이 첫 번째 사람보다 한층 더 악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천국 열쇠를 가지고 문을 잠궈 두고 들어오려는 사람을 막고 있는 사람인데, 두 번째 사람은 산을 건너, 육지를 건너 자기 젊음을 다 바쳐 사람을 찾아서 드디어 만나면 자기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정열로 가득 찼었습니다. 남자고 여자고 예수믿는 자는 다 잡아다가 감옥에 처넣으려고 다메섹으로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열정을 보는 것입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가정이 파괴되고 인격이 파괴될 정도로 그들은 몸과 마음과 돈과 인생을 다 바쳐서 헌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헌신은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얼마나 열심을 내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한 두번 찾아가서 문을 열어주지 않거나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러다 지옥가지"라든가 "쯧쯧 인생이 불쌍하다"라고 말하면서 뒤돌아 서 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찾아갑니다. 한 사람을 얻기 위해 기울이는 그들의 노력은 너무도 헌신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들의 '두 배의 헌신'이 '두 배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잘못 배운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잘못 가르친 사람이 문제이지 잘못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 가르치는 자도 지옥에 가지만 잘못 가르침을 받아 분별함이 없는 사람도 지옥에 가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자는 지옥에 갑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 믿은 자도 지옥에 갑니다.
누가 지옥에 갑니까? 성경을 믿지 않는 자도 지옥 가지만 성경을 잘못 믿는 자도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에 아주 정확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교회도 섬기고, 능력도 행하여 귀신도 쫓아냈고, 병도 고쳤고,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날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열심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된 삶을 살지 않고 자기가 주인되어서 자기 맘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판단의 기준입니다.그래서 잘못된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은 여러분, 여러분처럼 교회생활하면 우리 교회가 괜찮은 교회가 되겠습니까? 괜찮은 신자가 되겠습니까? 이대로 죽 가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의 빛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예숴 그리스도가 세상에 보여집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앞에 부끄러움없이 충성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배생활에 부끄러움을 없습니까? 나 때문에 잘못된 모범을 보여서 천국백성이 되어야 할 사람이 지옥자식이 되면 여러분은 그 책임을 어떻게 질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을 보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 주고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눈먼 인도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16-22절).
16절,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신앙적 위선, 허위, 돈과 현실적 이해에 얽매인 신앙에 대해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신앙보다 금이 더 중요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것보다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박수를 받고 자기 유익을 얻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리켜 “앞을 보지 못하는 인도자”라고 하셨습니다. 지도자가 앞을 보지 못하고 헤메고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돈과 현실의 노예가 된 사람이 어찌 신앙과 영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 자신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 건물이나 숫자나 헌금이나 외형적인 성공에 얼마나 민감합니까?
한 사람이 구원받는 기쁨, 선교사를 파송해서 타국의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눈앞에 있는 편안함과 즐거움에 안주해 버리는 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여기에 저주를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앞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영적 맹인이 앞장서서 이끌면 모두가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앞을 보는 사람이 인도를 해야 백성이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돈에 탐욕이 있는 사람, 명예에 탐욕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너희가 성전으로 맹세한 것은 안 지켜도 되고 금으로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태도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가난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할 때 그는 가슴을 치며 애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애통에서 참으로 온유와 겸손의 모습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천국이 주어지며, 하늘의 위로가 나타나며,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17-19절에서 위선적인 신앙의 실체를 드러내십니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헌금드릴 때 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중심의 태도입니다. 적은 돈이라 할지라도 마음 중심을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천국의 보화처럼 받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많이 내어도 그 안에 정성이 없고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가 나쁘면 가인의 제사처럼 하나님이 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헌금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돈으로 기도하면 지키고, 제단으로 기도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이런 엉터리신앙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예배속에 중심을 드려야 합니다. 찬송을 해도 가사를 나의 신앙고백으로 생각하면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다른 분이 대표기도해도 그 기도를 잘 듣고 이 기도가 바로 내 기도입니다. 라는 마음으로 ‘아멘’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그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헌금을 드려도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고 중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하는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지으셨습니다. (20-22절)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식해야합니다. 이 모든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 오늘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지켜보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시선을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오늘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겠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도 습관을 따라 적당하게 신앙생활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바리새인의 외식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않게 깨어있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건한 신앙을 지켜 나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은 여러분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견고하게 서서 믿음으로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하나님의앞에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