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은 이렇게 과격하게 반대파를 죽이거나 전쟁 속으로 내모는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끌어안아 가족으로 삼는 유화책을 택합니다. 일단 지방 호족들 중에 딸이 있는 경우
그 딸과 결혼합니다. 이러면 딸이 서울에 올라와 있으니 인질이 되는 셈이고, 장인과 사위
관계에서는 반란을 일으키기가 그만큼 어려워지죠. 그런 명분으로 후고구려 쪽에서 대여섯 명,
후백제 쪽에서 서너 명, 신라 경순왕쪽에서 한두 명 식으로 부인의 수를 늘려가게 됩니다.
말년에 헤아려보니 왕건의 아내는 무려 스물아홉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왕건이 정략결혼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에게도 아름다운 청춘의 사랑 이야기가
있답니다. 왕건이 장군이었던 시절에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면서 나주 지방을 공략하던
때였어요. 배를 이용해 나주에 상륙해 작전을 펴던 중, 목이 말라 우물가로 갔더니 빨래하는
처자가 한 명 있더래요. 그래서 물을 한잔 달라고 했더니, 이 처자가 바가지에 물을 떠주면서
버들잎 하나를 띄워줍니다.
왕건이 왜 버들잎을 넣었냐고 물어보니까, 엄청 목이 말라 보이는데 급하게 마시다 체할까봐
그랬다고 대답했다죠. 마음 씀씀이가 참 예쁘지요? 이에 감동한 왕건이 나주 호족의 딸이었던
그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략적 선택이 아니라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여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겠죠. 이가 바로 둘째 부인 장화 왕후 오씨, 나주 다련 군의 딸입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고려 2대왕 혜종입니다.
어쨌든 왕건이 거느렸던 많은 부인들의 존재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실은 그가 호색한
이어서가 아니라 왕권을 안정시키고 지방 호족을 다스리기 위해 선택했던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딸을 시집보내기 어려운 상황의 호족들은 어떻게 했냐고요?
그들은 동생이나 조카들을 유학 명분으로 불러들여 돌보아주거나 기인제도, 아예 왕씨 성을
내려 가족처럼 끌어안았습니
다시 설정. 이제 왕건이 어떤 스타일의 지도자였는지 조금은 더 분명해지셨나요?
- 설민석의 '무도 한국사 특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