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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하느님이 내 기도와 생활에 함께하고 계십니까?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도할 때에는 먼저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러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존 안에 머무는 것은 예수님 한 분만을 모시고, 나머지 다른 것들은 다 내려놓는 일일 겁니다. 예전에 선배 신부님에게 한 달 피정 기도 경험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게를 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지게 위에는 스펀지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그 스펀지는 길을 가면서 많은 것들을 빨아들입니다. 돈과 지식과 소유하고 싶은 물건을 빨아들입니다. 또 자식과 남의 일에 과도한 관심과 집착을 보이며, 그들의 짐을 빨아들입니다. 스펀지의 무게는 더해가고 그 무게는 점점 나를 힘들고 지치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힘들어하는 사람의 짐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바로 예수님을 지게에 지고 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그 스펀지 위에 올라서면, 내가 그동안 빨아들였던 계획이나 일이나 욕심의 물이 빠지고 지게는 가벼워집니다. 더 이상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 한 분만을 모시고 나머지는 모두 내려놓을 수 있을 때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기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배실에 들어갈 때나 성당에 들어갈 때 다른 짐들은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른 계획들, 일들, 걱정거리들은 다 내려놓고 예수님하고만 그 자리와 시간에 함께하는 겁니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예전에 <트랜스포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요. 어떤 자동차 로봇이 주인공과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자동차 로봇들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는데, 그 로봇은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나 말이나 광고 등을 써서 대답을 합니다. 신기했는데요. 그러한 일을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시골 본당에 있을 때 제가 아는 청년들이 놀러왔습니다. 베란다에서 같이 고기를 구워 먹는데, 문득 그 모습이 몇 달 전에 제가 부러워하던 모습이었음을 생각했습니다. 그 몇 달 전에 동기 신부가 청년 몇 명을 데리고 본당에 왔었습니다. 잔잔한 노래를 틀어놓고,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에서 달빛을 보며 술을 한잔했는데요.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마음속으로 ‘나도 진작 이런 걸 할 걸’ 하고 생각했는데요. 몇 달 후에 제가 아는 청년들이 놀러와서 비슷한 분위기에서 고기를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본 겁니다. 그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작은 바람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 두셨다가 보여주시는구나.’ 그렇게 주님의 현존을 아주 가까이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도 보면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고기 잡는 제자들이 일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곁에 계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기를 잡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배 오른쪽에다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많은 고기를 잡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선물을 체험했을 때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현존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일상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말씀하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함께하시는 주님을 깊이 알아보며 일상을 살아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빛과 소금] 나의 기도가 응답 받고 있습니까?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본당에 있을 때 신자 몇 분과 공구 상가에 갔었습니다. 수리할 것을 맡기고 필요한 것들을 샀습니다. 그리고 근처에 아는 신자 분이 하시는 가게가 있어서 들렀습니다. 폐업한 식당 같은 데서 물건을 사다가 파시는 분이었는데요. 물건을 구경하다 보니, 신자 분들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수납장, 탁자같이 구매하기에 적당한 것들이 보입니다. 그러면 사다가 필요한 곳에 두곤 했는데요. 만약 신자 분들이 저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말을 듣고 난 뒤에는 일종의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하고, 언젠가 필요로 하는 사람과 그 해결 방법을 만났을 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그와 같은 일이 성경에도 나와 있었습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두 자매는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즉시 그에게로 가시지 않죠. 칠일이 지난 뒤에야 그를 찾아가 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소식을 듣고 칠일 뒤에 움직이셨지만, 들은 그 순간부터 타이머는 작동을 시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전해 들은 그 일을 해결해 주십니다. 만약 예수님께 말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살았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말을 전했다면 일단은 안심해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타이머가 작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그 말씀의 성취를 볼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뢰고 청한다면 언젠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시기와 장소에서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리라 생각합니다.
응답이 없다면 다음의 네 가지를 점검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나는 기도하고 있는가’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매일 꾸준히 기도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루카 복음 18장을 보면 어떻습니까? 줄곧 졸라대던 과부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이죠. 우리도 하느님을 믿고 끈질기게 밤낮으로 기도한다면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세 번째로 이기적인 기도를 바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만약 하느님이 나의 이기적인 기도에 모두 응답해 주셨다면, 나는 ‘나 중심적이고 근시안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겠죠. 아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영적인 성숙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느님은 나를 위해 나의 이기적인 기도를 드물게 또는 들어주지 않으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번째로 죄를 씻고 관계를 회복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빌리러 가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매일 시끄럽게 짖어대는 그 집 강아지가 보입니다. 그래서 홧김에 그 강아지를 발로 걷어찼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강아지 주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순간 빌리려던 물건을 계속 빌려야 할까요? 아니면 그와의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할까요? 강아지를 왜 발로 찼는지 해명하는 게 먼저겠죠.
마찬가지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면, 무언가를 청하기 전에 먼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사야서 59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가 너희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가리어 그분께서 듣지 않으신 것이다.”
말씀대로 우리 죄가 기도의 응답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죄를 씻을 수 있는 참회와 고해성사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빛과 소금] 아버지의 뜻 vs 나의 뜻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좋고 나쁨을 따질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자유와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이 판단을 합니다.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창세 3,6)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들은 사람의 가늠이 개입되면서 더 좋은 것과 그보다 못한 것으로 나뉘게 되고, 거기서 인간은 더 좋은 것을 취하고자 하는 욕망에 눈뜹니다. 탐욕 곧 죄의 뿌리입니다. 이후 사람은 이전까지는 몰랐던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느님의 시선을 피해 숨었으며 서로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책임 회피에 이르게 됩니다. 죄가 번져가는 과정입니다. 주신 그대로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되었을 것을, 인간이 가려내면서 가지려다가 오히려 고통을 끌어안고 자유는 잃게 되었습니다.
탐욕이라는 말에 대해 보통 무엇인가를 욕심내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이지만, 성경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인간의 미숙한 판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류의 지혜가 위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주의 광대함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인간이 어찌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어찌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알고 있다고 하지만 실은 알고 있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솔한 지성은 본질을 놓치고 사소한 것에 한눈을 팔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판단으로 모든 좋은 것들을 제쳐두고 하나에만 갇혀 버리면서 자유를 잃게 된 것도 그러한 모습입니다. 오늘의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자기 판단에 대한 의심 없이 상대를 구별하고, 결국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려 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이어서 미움과 시기, 질투가 시작됩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평화로울 텐데 그러질 못하고 온갖 구차한 감정에 휘말려 자유를 빼앗깁니다.
신앙인들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옳은 지향의 기도와 그렇지 못한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청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이뤄주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좋아하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이뤄달라고 기도하고 있는가?’라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믿음은 있으나 자신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채우려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시는 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실망할 일이 없지만, 원하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이뤄지지 않을 때마다 고개를 떨구고 하느님을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탐욕이 고개를 들며 불평과 원망으로 번지는 죄의 과정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누구나 본능적으로 건강해지고 싶고 풍요로워지고 싶고 명예롭고 싶은 원의(原意)가 있습니다. 여기서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좋고 나쁘고의 여부는 인간인 우리 편에서 구분 지어 저것이 아니면 안 된다며 자유로움을 포기한 채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니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자식들과 재산을 모두 잃고 병까지 걸린 욥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내가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이미 다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드리며 살고 계십니까? 모든 것을 이뤄주시는 놀라우신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내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고 계십니까?
[빛과 소금] 성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과 자주 면담하시는 편인가요? 이번 주에는 여러분과 ‘예수님과의 면담’이라고 할 수 있는 ‘성찰’(省察, examination of conscience)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분들 가운데 자신의 영신적인 사정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영적 지도자를 찾아가 영적 상담이나 영적 지도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를 통하여 면담자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자신의 방향성과 현 위치를 인식하게 되고, 다시금 주님을 향하여 방향성을 고정할 결심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보통 기도 시간 안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기도하는 영혼은 주님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어(객관화), 보다 투명하고 명확한 시선을 갖게 됨으로써, 자칫 우리의 생각이 ‘인간적’(흔히 권태, 불평, 한숨, 한탄,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흐르게 되는 것에서 보호받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항상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마태 24,42-43; 마르 13,34-37; 루카 12,37; 1코린 16,13; 콜로 4,2 참조).
그런데 이렇게 정기적인 면담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인생’이라는 ‘긴 피정 기간’ 중에 영적 지도를 해 주시는 분인 ‘성령’과의 개인 면담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루를 마치며 맞이하는 ‘성찰 시간’입니다. 이러한 성찰의 순서와 형식은 우리가 매일 드리는 『가톨릭 기도서』의 ‘저녁기도’의 기도문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저녁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자세히 살피고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하소서.”겉으로만 보면 단순히 오늘 하루의 잘못과 죄만을 살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죄’라는 기준을 통해 오늘 하루 전체를 주님께 솔직히 열어 보여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다시 말해, 우리의 하루를 온전히 주님의 빛에 비추어 봄으로써 오늘 하루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나 조언을 ‘듣는 시간’(1열왕 3,9; 루카 1,29; 2,19; 사도 10,19)인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랑의 삼중 관계’(하느님-나, 나-세상, 나-나)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하루, 하느님 사랑을 거스른 점이나 의당(宜當) 계셔야 할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것(애착)은 있지 않았는지, 우리 하루의 화살표 방향은 하느님과 나 둘 중에 어디였는지 등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오늘 하루 이웃 사랑을 거스른 점은 없었는지,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았는지, 죄보다 더 큰 사랑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행위인 ‘용서’하는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가끔 오히려 소홀히 대하기 쉬운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에 대한 사랑은 어떠했는지 등을 살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약함도 ‘나’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는지, 자기 비하나 경멸은 없었는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찰을 마치면서 “주님, 이러한 저에게 마지막으로 해주실 말씀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잠시(2~3분) 고요 속에 머무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주님과의 면담 방식인 ‘의식 성찰’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죄와 더불어 우리의 ‘의식의 흐름’도 함께 점검해 보는 방식입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는 가운데(시간·사건·만남 순으로), ‘마음의 움직임’이 컸던 시간(위로나 불안의 자리)을 한두 개씩 뽑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의 위로(평화, 감동, 환희, 따스함)와 불안(두려움, 걱정, 당황, 슬픔, 짜증, 분노)이 유달리 컸었던 장면 안에 머무시면서 주님께 그 의미를 고요히 여쭙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과의 면담인 ‘성찰’이 여러분에게 매일의 ‘개인 피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빛과 소금] 묵주기도 드릴 때에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과 묵주기도를 다양하게 바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나눠보고 싶습니다. 우선 묵주기도는 ‘염경(소리)기도’적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바치는 방법에 따라 ‘묵상기도’도 될 수 있고 ‘관상기도’도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교황님들은 묵주기도를 ‘관상기도’로 소개하셨습니다.
“묵주기도는, 구원에 도움이 되는 관상기도입니다.”(교황 바오로 6세)
“묵주기도는 성모님이라는 ‘학교’에서 그리스도를 읽고 그분을 깨닫고 그분을 배우는(바라보는) 기도입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 염경기도적 측면
우선, 묵주기도를 통해 ‘힘 있는 전구자’이신 성모님께 우리의 청원과 간구를 드리는 일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천 년 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은 성모님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었고, 실제로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모님의 전구의 도움을 받았으며, 또 받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지상에서의 역할은 승천 이후에도 변함없고, 한번 ‘어머니’는 하늘에 올라가셔도, 그대로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마리아 공경』 56항 참조) 그래서 그리스도교 초대 교회 때와 우리나라 박해 시대 때에도, 성모님을 어머니로 공경하며 의탁하는 기도의 물결은 쉼 없이 이어졌고, 지금도 우리 신앙의 큰 맥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2. 묵상기도적 측면
묵주기도의 각 단(신비)의 의미를 곱씹고 묵상해보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기도문을 외우면서도, 묵상기도의 본래 의미대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신의 세 가지 능력’(기억·지성·의지)을 활용하여, 현재 바치고 있는 신비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환희의 신비 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를 바치고 있다면 이런 질문들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성모님은 당신도 임신 중이신데, 어떻게 그 먼 길(나자렛에서 아인카림까지)을 홀로 가실 생각을 하셨지?”, “가시는 길도 위험했을 텐데, 왜 혼자 가셨을까?”, “기쁨에 넘치신 성모님, 주님의 일은 우리 모두(성모님, 엘리사벳, 요한 세례자, 예수님)를 기쁘게 하나 보다!”, “예수님은 태중에서도 선교를 하시는구나! 기뻐 뛴 세례자 요한!”, “나는 어떤가? 나도 성모님처럼 사랑의 여행을 떠나는가?” 이렇게 곱씹으시면서 마음이 건드려지는 부분이 있다면 잠시 거기에 머물러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3. 관상기도적 측면
각 신비의 장면을 마음의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기도문을 외우거나, 각 신비 안에 직접 ‘나 자신’으로서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같은 공간에 머무는 상상을 하며 바치는 것입니다. 위의 예로 다시 든다면, 엘리사벳의 아인카림 집에서 벌어진 기쁨의 순간에 우리도 들어가서 그 기쁨을 함께 느껴봐도 좋고, 먼 길을 떠나시는 성모님의 벗이 되어 동행해 드리는 상상을 하며 바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관상기도의 의미는 ‘함께 있기’, ‘눈길을 고정하기’, 그리하여 점차 ‘그분으로 물들어가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묵주기도는 우리를 오직 단 한 분, ‘예수님’이라는 분과의 만남으로 초대해 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회는 온통 ‘예수님’입니다. 미사도 ‘예수님’이고, 교회의 모든 학문도 결국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진정 ‘길’, ‘진리’, ‘생명’이십니다. 세상의 많은 지식들 가운데 어떤 지식이 가장 고귀할까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필리 3,8)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닐까요. 묵주기도는 예수님 ‘일생’의 주요 장면을 축약적으로 잘 보여주기에 ‘복음서의 요약’이라 불립니다. 이 아름다운 묵주기도를 매일 드림으로써 우리의 하루하루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빛과 소금] 영의 식별
여러분, 여러분은 ‘악한 영’의 존재를 인정하시나요? 하느님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가려고 하는 영혼에게 악한 영은 어떻게 다가와서 방해하고 장애물을 놓을까요? 오늘은 지난주(식별)에 이어 ‘영들의 식별’에 대해 나눠보고 싶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다소 긴 피정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하느님 사랑과 고마움으로 가득 찬, 마치 꿈결과도 같은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없이 달콤했던 ‘천국’이 어느 한순간에 ‘지옥’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고, 불현듯 저의 생각 속에서 일어난 하느님 말씀의 진실성에 관해 의심을 품게 하는 ‘엉뚱한’ 한두 가지 질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답을 찾지 못해 생각 속을 헤매기 시작했고 점차 기분이 더 언짢아지고 불안해지면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아예 혼란과 불안감과 불신으로 가득찬 어둠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속에서 ‘선한 영’(성령 하느님)만 활동하실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악한 영’(악령)이 우리의 ‘이성(理性)’이라는 통로를 통해 장애물을 놓는 일은 자주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입니다. 즉, 선한 영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이 더 하느님께로 잘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힘, 위로와 눈물, 좋은 영감 등을 주어 ‘믿음·희망·사랑’을 자라게 해주고(이것을 ‘영적 위로’라고 함), 반면 악한 영은 그 사람이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거짓 이유’로 슬픔에 빠져 애타게 하고, 생각을 불안하게 만들고 두렵고 무섭고 당혹스러운 사태를 조장하는 등 선한 영과 반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이것을 ‘영적 실망’이라고 함). 이 위로와 실망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계속 교차하면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영의 교차 체험’은 피정 시간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 안에서도 그대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실망의 시기’를 겪게 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러한 어둠의 시기를 잘 ‘참고’, ‘견뎌내야’ 합니다. 어두울 때에는 마치 이 상태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조만간 다시 ‘위로의 때’가 올 것이기에, 이전 위로 때에 가졌던 생각과 결심(의도)을 변경하지 말고 그대로 지켜나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어둠 앞에서 겁을 먹거나 약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홀로 남겨진 듯 위축되기 쉬운데, 그럴수록 오히려 ‘역으로’ 기도와 묵상, 성찰을 하는 것이 다시 위로의 시기를 앞당기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이 ‘개방성’입니다. 마음이 어두울수록 이것을 비밀리에 혼자서 해결하고 싶어지는데, 이것을 있는 그대로 영적 지도자나 믿을 수 있는 이에게 개방해야 합니다. 그러면 의외로 쉽게 해결책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의 흐름이 어느 시점부터 혼란스럽게 되었는지 그 ‘진행 경과’(처음-중간-끝)를 살펴보는 것, 자신을 잘 아는 것(강·약점), 하느님의 현존과 은총을 믿는 것 등이 도움이 됩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악한 영은 우리의 생각을 부정적으로 바꿔 놓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과의 관계(기도)와 이웃과의 관계(사랑)를 멀어지게 하고, 그래서 마치 그동안 우리에게 고마운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한탄하며 슬퍼하게 만듭니다. 실망 시기의 특징은 ‘망각’인 것입니다. 그러니 실망할 때에는 ‘억지로’라도 고마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억하고 견뎌내면 조만간, 얼마 후, 다시 ‘위로의 시기’가 올 것입니다.
[빛과 소금] 식별이란?
여러분, 지난 주까지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로서의 기도에 대해 바라보았다면, 오늘은 그것의 응용 및 적용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기도’라고 할 수 있는 ‘식별(識別)’에 대해 나눠보고 싶습니다.
‘식별’은 개인에서부터 공동체(가족, 단체, 성당, 수도회, 교구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해당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식별은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이 가능한 여러 선택지들 중에서 가장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을 발견하고 선택하려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별을 하려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 개월이나 몇 년에 이르는 기간을 이 식별에 할애하기도 합니다.(2021년 10월부터 2023년 10월까지 진행되는 제16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식별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식별의 범위는 비단 교회 관련 사안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소소한 일상의 모든 영역까지도 두루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까?”, “오늘 저녁에는 뭘 먹지?”, “나와 틀어져 있는 동료에게 어떻게 다시 다가가지?” 등에서부터, “결혼식 날짜는 언제로 하면 좋을까?”, “현재의 직업을 바꾸는 것이 나을까?”, “재산을 처분하는 것이 맞을까?” 등처럼 다소 큰 사안들까지 모두 식별의 범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식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기 위해서 식별의 ‘일반적인 기준들’을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고 해 보면 우선 이 둘이 선(善)과 악(惡)으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둘 중에서 나 자신과 이웃과 공동체에 해를 입히는 것은 없는지.’ 만약 구별될 수 있다면, 당연히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은 식별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식별의 추가적인 기준들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 중에 다음의 ‘가치들’을 더 키워주는 방향이 어디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하느님 나라의 핵심 가치), ‘신·망·애’(향주삼덕), ‘공동선’, ‘자비와 성실’, ‘진실과 용기’, ‘관대함’ 등이 더 커지는 방향이 어디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중요한 기준이 또 하나 있는데요.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활 모습 즉, ‘그리스도의 생애 신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복음서에 나타난 2000년 전 예수님 모습에서 그분의 감각과 판단을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라면 현재 이 문제를 어떻게 결정하고 판단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왠지 그분이 하셨을 것 같은 판단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 부분이 있는데요. 그것은 ‘마음의 평화’가 더 큰 쪽이 어디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우리 마음의 ‘진동’이 같기 때문에, 하느님 뜻에 맞는 선택을 할 때, 반드시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이외에 더 나은 식별을 위한 몇몇 ‘준비 사항’도 있습니다. 기도 생활과 성찰의 일상화, 영성 서적 읽기와 선의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많은 대화, 다양한 정보 수집, 하느님 이미지의 정화(단죄가 아니라 사랑하시는 분), 내적 움직임에 대한 인식, 일정 수준의 내적 자유와 겸손, 형제적 사랑과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용기,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픈 열망 등입니다.
여러분, 위의 과정을 다 거친다 해도 식별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심오한 하느님의 뜻은 어떤 법칙에 대입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최상의 것으로 드러나는 것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원의를 보시고, 우리를 당신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 주실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빛과 소금] 성경 인물들의 기도
여러분, 성경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하느님과의 관계 맺음’을 기도라고 보았을 때, 성경 속 인물들은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을까요? 『가톨릭교회교리서』 2568-2649항은 이들의 기도 생활에 대해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님과 성모님에 대해서만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브라함
구약성경에서 기도가 계시된 것은 아브라함부터입니다. 아브라함의 특징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라는 말씀에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창세 12,4) 곧바로 순종합니다. 그는 말없이 행동합니다(마리아의 남편 요셉처럼). 또한 그는 하느님의 성실성을 과연 믿어야 하느냐는 믿음의 시련과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눈물겨운 정화의 시간도 겪지만, 그러한 시간을 통해서 점차 하느님을 알아가고 그분과 ‘닮아’ 갔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비는 장면에서는 훗날 예수님의 모습이, 그가 자기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는 장면에서는 성자를 세상을 위한 제물로 보내며 겪은 성부 하느님의 눈물 어린 고뇌의 모습이 비칩니다.
2. 모세
하느님이 모세를 불타는 떨기 가운데에서 부르시어 점차 그와 관계를 맺어가는 이야기는 기도의 흐름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만남은 점차 친밀해져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탈출 33,11)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주 보며 하나 되게 하는 기도가 바로 ‘관상기도’입니다. 모세는 이 관상 기도를 평생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온갖 시련과 혼돈 중에도 자신의 백성을 주님 뜻대로 올바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렇듯 주님과의 내밀한 사랑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숨은 나자렛 생활에 기초했던 것처럼, ‘사생활’이 ‘공생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잘 나오지 않는 모세의 ‘사생활’(내밀한 기도생활)이 있었기에 그의 ‘공생활’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공생활도, 주님과의 사생활에서 힘을 받아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셨지만 ‘참 사람’이셨기에,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기도를 알아 가시고 배워나가셨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곰곰이’ 간직하고 생각하는 묵상 기도를 배우셨고, 회당과 성전에서는 소리 기도도 배우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에는 기존의 기도에는 없는 새로운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평생, 자주, 고독 속에서 은밀히 행하셨습니다. 특히 ‘십자가’ 위에서는 이 기도가 비로소 큰 소리로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4. 동정 마리아
나자렛과(루카 1,38 참조) 카나에서(요한 2,5 참조)하신 성모님의 육성을 통해 우리는 성모님 인생의 유일한 지향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종(“Fiat 이루어지소서.”)으로 살기를, 자기 아들의 ‘첫 번째 신자’로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추종(追從)은 끝을 모르고, 두려움과 죽음의 장소인 ‘십자가 밑’에서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기도를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닮아 가게 하고, 일치하게 하며, 자녀가 되게 하고, 따르게 합니다.
[빛과 소금] 분심과 메마름
지난주에 저희는 기도의 흐름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인 ‘분심’과 ‘메마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29항~2741항 참조)
우선, 분심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분심은 요즘 나의 ‘현재 상태’(나의 요즘 이슈, 관심사, 매여 있는 부분 등)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매우 중요한 표지입니다. 기도 중 분심은 왜 생길까요?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히면, 평소에 잘 감지될 수 없었던 마음 밑부분의 영역과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분심이 생길 때에는, 그것을 없애려 너무 애쓰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께 현 상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보여드리는 편이 더 좋습니다. 즉 ‘분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요즘 이렇습니다.”
“주님, 제가 요즘 이런 부분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솔직히 고백하며 머무른다면, 어느새 이러한 분심들은 잦아들고 다시 평안함이 찾아올 것입니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기도할 때의 메마름과 무미건조함입니다. 그동안 기도할 때마다 늘 뜨거워졌던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정말이지, 생각도 기억도 느낌도 의욕도 없고, 영적인 감흥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메마름’에는 아주 중요한 영성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마음의 메마름은 우리에게, ‘기도는 감정 그 이상’임을 가르쳐 줍니다. 감격스럽고 마음이 뜨거울 때에는 누구나 기도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식었을 때에는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때에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기도의 더 깊은 단계로 초대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부부들의 사랑이, 연애 때처럼 늘 뜨겁게 끝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언젠가 식게 되지만, 이 순간부터 부부는, 감정을 넘는 사랑, 더 깊은 사랑, 진정한 부부로 거듭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사랑이 ‘감정’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둘째로, 메마름은 우리에게, ‘기도는 선물 그 이상’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선, 주님께 기도 안에서 선물(위로, 감격, 마음의 평화, 깨달음, 소원 성취 등)을 청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로써 우리와 주님과의 깊은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아무런 선물이 없어도 주님을 여전히 사랑해 드릴 수 있는가?’‘나는 선물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저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 자체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가?’
이렇게 보면, 마음의 메마름은 우리를 마음의 정화와 순수함으로 초대해 주는 은총의 초대 시간이 됩니다.(2740항)
글을 마치며, 이와 관련된 몇 가지 권고들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기도하는 동안에는 맛과 위로를 찾지 말고 오직 그것을 주시는 분을 찾아야 합니다.”(대大 데레사 성녀)
“정말로 가치 있는 기도는, 메마를 때, 오로지 주님 사랑 때문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사막을 사랑하고 이것을 오아시스보다 더 좋아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향한 길을 제대로 걷게 됩니다.”
“저는 성당에 갈 때 이러한 마음으로 가요. ‘주님,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 왔어요. 다른 것은 없어요. 그것뿐이에요.’”(동료 사제와의 대화)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대大 데레사 성녀, 기도 시 「인내」)
[빛과 소금] 기도의 흐름 (1)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도 흐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는 기도에도 흐름이 있을까요? 기도에도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의 대화가 진행되어 가는 방식을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초면인 어떤 두 분이 서로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들 사이에는 서먹함이 있기 때문에, 보통 날씨나 뉴스 등의 가벼운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서먹함이 좀 가셔지면, 그때부터는 대화하기가 훨씬 쉬워지고 힘도 덜 들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평상시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기도의 여정도 이와 같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려 할 때에는 기도에 깊이 들어가기가 어렵지만, 점차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가 편해지고 수월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에서 나와 기도하러 성당 좌석에 처음 앉았다고 생각해 보면, 곧바로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과 ‘싸워야’ 합니다. 왠지 집에 전등이나 히터 등을 켜놓고 와서 다시 가야만 할 것 같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중요한 일과나 할 일이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며, 지금 가만히 앉아 기도하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들이 올라오더라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것들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하며 계속해서 머무르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러한 지루함이 사라질 때가 오고, 기도하기가 훨씬 쉬워지고 힘도 덜 들게 됩니다. 이제는 처음에 기도하기 위해 썼던 힘을 덜 사용해도 되며, 아주 작은 힘을 들이더라도 기도에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이처럼, 기도의 여정은, ‘처음에는 내 힘’으로, ‘점점 주님의 힘’으로 즉, ‘능동(우리 노력이 들어감)’에서 ‘수동(하느님이 이끌어주심)’으로 나아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능동’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길을 준비하는 과정이고, ‘수동’은 그 길 위로 주님이 걸어오시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능동’이 없으면(우리의 노력이 없으면) 주님이 ‘수동’해 주실 수가(주님이 끌어주실 수가) 없고, 우리가 ‘능동’ 하기에 주님이 ‘수동’ 하실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능동’과 ‘수동’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기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잘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도하는 과정 중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노력이 따르더라도 기도하기를 중단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림시기의 의미도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기다리면 응답해 주신다.”
“그분은 때가 차면 오신다.”
“그분은 ‘능동’ 하면 ‘수동’해 주신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기도 중에 아직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있습니까? 아울러, 혹시 여러분은 요즘 기도하기가 여러 가지 이유로 힘이 들어 지쳐있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기도하시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 즉 인내와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가 어려워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반드시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기도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언제든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됩니다.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자체로,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최고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기도에 다시 힘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2021년 12월 19일 대림 제4주일 인천주보 3면, 송기철 이사악 신부(인천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지도)]
[빛과 소금] 기도의 흐름 (2)
지난주에 저희는 기도의 흐름이 ‘처음에는 내 힘’에서 ‘점점 주님의 힘’으로 나아간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기가 어려울 때에도 기도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그것의 연장으로서, 이러한 기도의 흐름을 교회 신비가들은 어떻게 풀이하고 설명하려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기도가 ‘능동’에서 ‘수동’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설명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예를 드는 비유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아빌라의 대大 데레사: 1515~1582)의 비유입니다. 성녀는 우리의 영혼을 궁전과 성(城)에 비유하면서 기도의 흐름은 일곱 겹으로 이루어진 성의 가장 내밀한 중심에 밖에서부터 안으로 서서히 도달하는 길로 보았습니다. 가장 밖에 있는 첫 번째 문은 1궁방이고 하느님이 거하시는 가장 깊은 속에 있는 마지막 일곱 번째 문은 7궁방인데, 3궁방까지는 인간의 노력(수덕)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라 ‘능동적 단계’에 해당하고, 4궁방부터는 오직 하느님이 허락해 주셔야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서 ‘수동적(신비적) 단계’에 해당합니다. 영혼(보통 인간 전체를 총칭하는 표현)은 1궁방에서 7궁방으로 나아가면서 ‘정화’와 ‘조명’의 길을 걸으며 결국 하느님과의 합일(영적 결혼, 일치)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녀는, 자신의 자서전 『천주 자비의 글』에서 이러한 흐름을 정원지기가 자기 ‘영혼의 정원’에 물을 주는 모습으로 설명했습니다(11-22장). 정원지기는 자기 주인(하느님)이 언제라도 정원에서 편안히 거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정원까지 물을 대는 방식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그는 우물에 직접 두레박을 내려 그 물을 정원까지 나르는 방식을 씁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다소 느릴뿐더러, 인간의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손으로 두레박을 내리지 않고 도르래를 설치해서 내리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 방식은 이전 방식보다 훨씬 힘이 덜 들었지만, 도르래를 돌려야 하는 등 여전히 적잖은 수고로움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용한 세 번째 방식은 저 멀리 강가에서 정원으로 직접 수로를 설치하여 강의 물을 끌어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제는 손으로 살짝 스위치만 돌리면 강의 수문이 열려 전혀 힘들이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물을 정원에 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방식은 정원지기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늘에서 아예 비가 내린 것입니다. 하늘이 알아서 비를 내려주었기 때문에 정원지기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요즘 무엇을 바라시며, 그 바람을 주님께서 얼마나 이루어 주셨습니까? 그 정도가 현재 어떠하든 언젠가 하느님은 우리의 바람과 소원을 당신 섭리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도 흡족히, 우리가 전혀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을 만큼 ‘비처럼’ 내려주실 것입니다. 언젠가, 분명히 다가올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만큼 오늘도 주님을 향한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본 비유들 속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한결같이 했던 행위는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다림 끝에 주님이 서 계셨습니다. 우리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연약한 나를, 가족을, 형제자매를, 공동체를, 이웃을, 세상을. 그러면 그 끝에 주님이 서 계실 것입니다.
[빛과 소금] 아쉬울 것이 없어지면
이번 주에는, 기도의 여정에서 세 가지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소리 기도, 묵상(默想) 기도, 관상(觀想) 기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차원은 각각 개별적이고 고유한 의미가 있지만, 소리 기도에서 관상 기도까지의 여정을 기도가 깊어지는 여정으로 보기도 합니다.
우선 소리 기도는, 입으로 소리 내어 바치는 기도(염경念經. 즉, ‘생각하다’, ‘외다’의 의미)로서 일정하게 틀이 정해진 기도를 말합니다(주님의 기도, 시편, 찬미가, 호칭기도 등). 이 기도는 전례 때에 바치는 ‘전례 기도’(최고의 기도인 미사, 성사, 준성사, 성무일도 등)와 전례 때가 아닌 시간에 바치는 ‘비전례 기도’(아침·저녁 기도,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여러 호칭기도, 화살기도, 자유기도 등)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초대 교회 때에는 외우지 않는 기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회당에서 전례 기도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환희에 차서 아버지를 찬양하신 것, 게쎄마니 동산에서 비탄의 개인 기도를 하신 것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리 기도는 외적이고 인간적인, 첫 단계 기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소리 기도가 심화될수록 점차 관상적 색채를 띠게 되기에, 소리 기도는 관상 기도의 첫 번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상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정신의 세 가지 선물(능력)’을 활용하는 기도입니다. 성경, 복음서, 성화상, 전례 시기 전례문, 영성 서적 속의 의미를 지금 우리 자신의 삶에 비추어서(현재화) 적용해 보는 기도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을 때, 수천 년 전의 글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이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희로애락, 이슈, 고민 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묵상이라는 어원이 신약성서에 처음 나오는 대목 중 성모님께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51)라고 보았을 때, 묵상은 성모님처럼, 우리가 품고 있는 말씀(사건)이 우리 안에서 다시 ‘말씀’해 주실 때까지 고요히 기다리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관상 기도는, 우리의 정신 능력을 활용해야 했던 묵상 기도와 달리, 이제는 하느님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주시는 기도이기에,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우리를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묵상과 관상을 이렇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묵상은 우리가 하는 것, 관상은 하느님이 하시는 것. 묵상은 머리로 하는 것, 관상은 가슴으로 하는 것. 묵상은 ‘하는’ 기도, 관상은 ‘되는’ 기도. 묵상은 능동(우리 노력이 필요함), 관상은 수동(하느님이 주도권을 가지심). 관상 기도는 마치 ‘아가서’에서 여인이 사랑하는 이를 애타게 찾다가 만난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니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세상에서 아쉬울 것이 없고 부러울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처럼, 또 베드로 사도처럼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태 17,4)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요? 혹시 항상 불충분하다 느껴져서, 타인과 자주 비교하게 되고 늘 무언가 채워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는 않은가요? 그런데 만일 우리 마음이 채워지면, ‘아쉬울 것이 없어지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그동안 나를 채워주기 위해 존재했던 세상이 이제는 내가 봉사하고 다가가야 할 곳으로 보일 것입니다.
[빛과 소금] 가장 좋은 기도는?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 교구장님께서는 2022년 사목교서의 주제를 “기도하는 가정의 해”로 발표하시면서, ‘기도’와 ‘가정’, 이 두 가지 주제를 통해 성화(聖化)되어 가는 한 해를 보내자고 우리 모두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다음의 세 가지 방향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자고 제시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기도 방법을 찾아 보고, 항상 기도하여 보고, 가정과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서 기도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여러 개월에 걸쳐 이 ‘기도’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나눔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기도에 관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주제들에 대해, 저희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신부님들이 그동안 각자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기도 나눔들을 여러분과 나누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싶습니다.
우선, 기도에 대한 개념과 정의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기도는 하느님과 나와의 대화이다.”입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기도에 대한 정의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의식적’으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기가 하느님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하느님과 단둘이서 자주 이야기하며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입니다.”(아빌라의 데레사)
“기도는 나에 대한 하느님의 목마름과 하느님께 대한 나의 목마름이 만나는 우물가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60항)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마주 보는 사랑의 눈빛 교환입니다. 저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저를 보십니다.”(아르스의 비안네 성인의 일화 中)
“기도는 숨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형식에 따라 ‘화살기도, 소리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 내용에 따라 ‘묵주기도, 성무일도, 성체조배, 삼종기도, 심령기도’, 지향에 따라 ‘찬미와 흠숭 기도, 청원기도, 전구, 감사기도, 찬양기도’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하나가 듭니다. “그러면, 이 중에서 가장 좋은 기도는 무엇일까?” “가장 훌륭한 기도는 여기서 어떤 기도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기도에는 우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기도는, 자기 자신이 하느님과 가장 친밀하게 만날 수 있게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의식할 수 있고, 내면으로 느낄 수 있으며, 가장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기도 즉,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잘 체험하게 하는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화살기도로, 어떤 분은 관상기도로, 어떤 분은 청원기도로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의 일상에서 가장 잘 체험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기도가 됩니다. 즉, 어떠한 기도이든 그것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만약 우열이 있을 수 있다면, 그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현존을 ‘잘 체험하는가 그렇지 못한가?’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에게 맞는 고유한 기도 방법이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마르티니 추기경)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할 때 가장 좋으십니까? 바로 그 기도를 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에게 맞는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그 기도를 꾸준히 계속함으로써 결국 하느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