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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5) 신앙의 서사가 있는 삶
내 삶과 신앙의 서사가 무엇인지 자주 묻고 찾으며 살아야
서사적 주체
사람은 하나의 이야기다.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지만 동시에 이야기를 읽고 듣고 배우고 체험하면서 자란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형성하고 성장한다. 이야기를 통해 주체로 선다는 뜻이다. 살아오면서 듣고 몸에 밴 이야기들, 그 숱한 이야기들이 자기 자신을 만들었다. 삶의 여정에서 내가 어떤 이야기들에 끌렸는지 점검하면, 자기 모습이 얼추 나온다.
나의 삶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내가 읽고 듣고 끌렸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나를 사로잡고 긴 충격을 준 역사적 사건들의 이야기가 있다. 조성만 이야기, 김장하 선생 이야기, 1980년의 광주 이야기, 세월호 이야기 등등.
숱한 신앙 이야기들이 있다. 성경 이야기, 교회 역사 속의 순교자들 이야기, 신앙적 모범을 보여 준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데 왜 나는 신앙의 서사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이야기들에 더 많이 끌릴까. 성경 이야기들 가운데 왜 코헬렛 이야기가,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코린토 서간의 이야기가 더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내가 목격한 교황들 가운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내가 공부한 숱한 신학자들 가운데서 토마시 할리크의 신학 이야기와 로완 윌리암스의 신학 이야기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아마도 내가 끌리고 좋아하는 신앙의 이야기가 내 신앙의 모습일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신앙의 서사가 곧 자기 신앙 서사이며 자신의 신앙적 삶의 모습일 것이다. 물론 생각과 삶의 일치가 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서사적 삶
우리의 삶은 하나의 이야기다. 사람은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의 생각과 관점과 시선과 신념, 그의 말과 글, 그의 행위와 자세와 태도의 여정을 통해 엮어진다.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제임스 R. 해거티)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는 자신의 시선과 타자의 시선과 하느님의 시선으로 구성된다.
모든 삶은 하나의 이야기지만, 이야기가 되는 삶이 있고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삶이 있다. 이야기에 대한 가치 평가 기준은 시대와 사람마다 다르다. 이야기는 언제나 해석과 평가가 따른다. 신앙의 행위 안에도 해석의 행위가 포함된다. 교회 역시 신앙 이야기의 해석 공동체다.(토마시 할리크)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 꼭 역동적이고 스펙터클한 삶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한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만이 중요하다는 뜻도 아니다. 오늘날은 가공되고 화려한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소박하고 진실한 이야기가 중요하다. 진정한 공감과 연대의 아름다움을 제공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욱 필요한 시대라는 의미다. 신앙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에 어떤 신앙 이야기가 절실히 요청되는가? 신앙의 좋은 이야기를 식별하고 해석할 수 있는 참된 신앙의 시선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절이다.
사제 삶의 서사
지난달에 어느 교구 사제 연피정 강의를 했다. 신앙의 서사가 있는 삶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 사제들이 그리는 삶의 서사가 어떠한지 점검하고 성찰해보자고 했다. 사제들의 생각(시선과 신념)과 말과 행위(자세와 태도)에 대해 같이 반성해보는 시간이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우리 사제들의 이야기는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경우가 많다. 우리 삶의 서사가 빈약하다는 뜻이다. 구석진 자리에서 묵묵히 신앙적 삶의 서사를 쓰는 훌륭한 사제들이 있지만 말이다.
바쁜 사목 생활 탓인지 사제의 삶에서 사유와 성찰의 시간이 줄어든다. 생각하지 않고 규범과 관습 속에서 관행적으로 산다. 공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다양한 관점과 섬세한 시선으로 사람과 세상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사제의 말들은 너무 당위적이고 전형적이다. 살아있는 말, 적합한 말들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전통의 말, 전해진 당위와 규범의 말들을 영혼 없이 반복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글도 잘 쓰지 않는다. 말과 글은 다르다. 글은 사유에서 나오고, 손으로 하는 노동이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하다. 글을 쓰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과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고, 즉 자신의 시선과 관점을 드러내고, 감정을 표현하고, 즉 공감과 연대를 드러내고, 의지와 다짐을 표현하고, 즉 실천과 결부된 자세와 태도를 드러내는 도구다. 사제들의 말과 언어가 창의적이고 살아있는 것인지. 또한 사제들의 행위는 주로 전통적으로 부과된 행위다. 전례의 제관으로서 행위, 사목의 자리에서 통치와 운영의 행위다. 사실, 중요한 것은 외적 행위 속에 들어있는 내적 자세와 태도다. 사제들이 보여주는 신앙과 삶의 자세와 태도가 어떤 모습인지.
이 시대 우리 사제들의 삶이 과연 어떤 이야기로 서술될 것인지. 우리 사제의 삶이 정말 서사가 있는 삶인지.
아름다운 신앙의 서사가 되기 위하여
이야기가 우리 자신과 삶을 구성한다. 당연히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저마다 이끌리는 삶의 서사와 신앙의 서사가 다르다. 어떤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가? 사람들의 진실된 이야기, 삶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정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의 이야기, 참된 신앙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성장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모든 서사는 결국 죽음이라는 지점에서,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다 만난다. 저마다의 서사는 일종의 강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서사와 우여곡절을 경험하지만, 종국에는 바다에서 만난다. 신앙적 관점에서도 우리의 서사는 하느님이라는 바다로 흘러가는 강 같은 것이다. 다양한 형태를 지니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느님에게로 이른다. 아름다운 섬진강, 유장한 낙동강, 서울이라는 도시를 품은 한강 등 세상의 숱한 강들이 있지만, 모든 강의 근원적이고 보편적 속성은 생명과 흐름의 물이라는 점이다. 물의 결들과 그 물길이 빚어내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말이다.
듣고, 배우고, 읽고, 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질문을 던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과 지향이 무엇인지, 삶과 신앙의 문맥에서, 자주 물으며 살아가야 한다. 아니면 그저 주어진 것들에 사로잡혀 그냥 살아갈 위험이 많다. 순명과 질서 속에서, 관습과 전통이라는 주어진 것에 충실한 삶을 살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신앙의 질문을 던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 신앙의 서사가 무엇인지. 하느님과 자신이 그려내는 서사가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이 그려내는 서사가 무엇인지. 묻고 찾아갈 때,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서사를 써 나갈 것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3) 사목자로 산다는 것은
오늘의 사목자들, 사랑과 자비 베풀며 변화와 쇄신 지향하는가
호칭과 정체성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었지만, 서품 30주년이다. 물론 나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사제로 살아온 선배들도 많다. 고작 30년을 사제로 살아와 놓고 사제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죽는 날까지도 사제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늙은 나이에 이르러보니, 자주 묻게 된다. 나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 속에서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제품을 받은 날 신자들이 나에게 ‘신부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 사람들이 이제 나를 신부라고 부르는구나. 이제 나의 호칭적 정체성은 신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그 당시의 느낌은 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신부(神父), 과연 나는 사람들의 영적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가. 가부장적 생각일 수도 있지만, 건강한 의미에서 세상의 아버지들처럼, 나는 교회 안에서 책임과 자기희생의 삶을 살고 있는가. 과연 나는 신부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는가.
직무적 맥락에서 우리는 성직자, 사제, 사목자로 불린다.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 성사와 전례에서 제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이 신자들을 돌보는 사람. 호칭은 흔히 정체성을 드러낸다. 성직자라는 말은 종교적 직무를 총칭하는 것이다. 신부라는 호칭은 일종의 지위와 태도를 드러내는 개념이다. 직무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호칭은 아마도 사제와 사목자일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 신부는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제관이며, 신자들을 돌보는 사목자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 사제라는 명칭은 신부의 존재적 정체성을, 사목자라는 명칭은 신부의 직무적 정체성을 표현한다.
신부, 사제, 사목자. 어떤 호칭으로 불리든, 그 호칭이 품고 있는 무게와 책임이 엄청나다는 것을 요즘 가끔 느낀다. 과연 우리는, 아니 나는 그 호칭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삼중직 수행으로서 사목
신부는 교회 공동체에서 사목자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사목이란 무엇일까? 사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에 ‘직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성직자의 사목 직무 수행은 권위를 갖고 복음을 선포하고, “정규적이고 효과적인 분배를 규정한 성사들을 통하여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고, “조언과 권고와 모범으로 또한 권위와 거룩한 권력으로 다스리는” 일이다.(「교회헌장」 25~27항)
「교회헌장」의 이러한 정의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현 교황청 복음화부)에서 발간한 「교구 사제 사목 지침」에서 상세하게 설명된다.
사목은 먼저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예언직 수행으로서 사목은 세례받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복음 메시지의 선포, 설교와 강론을 통한 말씀의 봉사, 교리교육에 참여,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다. 사제직 수행으로서 사목은 전례 거행과 성사 집전을 통해 드러난다. 왕직 수행으로서 사목은 다양한 차원을 포함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선택하는 것, 세상에 복음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적용하고 실천하는 신자들을 도와주는 것, 신자들 사이의 협력을 조정하고 공동체의 일치와 친교를 이루는 것, 문화의 복음화에 헌신하는 것, 젊은이들의 벗이요 인도자가 되는 것, 성소의 증진자가 되는 것, 신자들을 배려하는 것, 가정 사도직을 활성화하는 것, 병자와 노인들을 돌보는 것, 일치 운동의 촉진자가 되는 것, 비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목자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과 임무는 다양하고 막중하다.
사목에 대한 확장된 이해
교회의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무와 연결된다. 직무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은 참여 방식의 다양성과 차이를 뜻할 뿐이다. 물론, 사목은 직무 사제직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사제에게만 고유하고 단일한 의미에서 ‘사목자’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실제로 ‘사목’의 속성은 주교 직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사제의 직무와 생활 지침」 28항) 하지만 오늘날 사목이라는 개념을 그리스도의 삼중직 수행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보편 사제직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단순히 사목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사목은 성직자와 신자의 상호 작용 속에서 발생한다. 사목은 성직자와 신자의 소통과 상호 협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사목은 그 시작부터 시노달리타스적이라는 뜻이다.
사목 행위 안에는 통치와 관리와 운영의 측면과 봉사와 헌신과 섬김의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사목하다’는 동사의 의미는 ‘돌보다’, ‘보살피다’, ‘안내하다’, ‘봉사하다’, ‘헌신하다’, ‘섬기다’는 뉘앙스에 더 가깝다. 하지만 교회 현실에서 ‘다스리다’, ‘통치하다’, ‘관리하다’, ‘운영하다’는 권위적 맥락으로 더 많이 작동된다. 왕직에 대한 오해가 낳은 편견이다. 왕은 종말론적 의미다. 실제 삶에서는 언제나 종의 모습이다. 사목자의 권위는 통치와 지배에서가 아니라 봉사와 헌신에서 나온다.
‘사목적’이 된다는 것은 완고한 이념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열린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목적’이라는 말은 판단하고 규정하고 심판하는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과 자비의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사목적’이라는 형용사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라는 의미이며, 변화와 쇄신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의 사목자들은 과연 ‘사목적’인가?
반성과 성찰
혹시 오늘의 성직자들이 종교적 제관의 역할 수행과 통치와 운영으로서의 사목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는 않은지. 즉, 사제직과 좁은 의미의 왕직 수행만 하는 것이 아닌지. 예언직 수행과 진정한 사목직(왕직) 수행에 소홀한 것은 아닌지.
예언자로서 사제를 생각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예언자는 교육자에 가까울 것이다. 사제는 신자들의 영적 양성과 신앙 교육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사람이다. 물론 사제가 살아가는 자리의 핵심은 성체성사, 즉 전례의 공간이다. 하지만 신앙 교육과 양성의 영역,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 역시 중요하다. 사제는 말 그대로 제관이지만 동시에 교육자이며 사목자다. 사제는 전례와 성사에서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목의 현장에서도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 시대에 교육자와 사목자로 살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의 사제들은 과연 얼마나 공부하며 살고 있는가. 솔직히 고백하면, 사제들의 세계에서 상상력의 부재를 자주 느낀다. 공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투적이고 관행적 사유와 실천에 머무는 경우가 너무 많다. 교회와 신앙의 현실을 직시하며 사목 현장을 섬세하게 읽고 신앙 교육의 방식과 태도에 관해 성찰하고 공부하는 사제들이 많아지길 희망한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0) 이 시대의 종교와 신앙
시노달리타스 향한 구조적 변화와 성숙한 신앙 형성 절실
세속화
세속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날 세속화는 단순히 종교의 쇠퇴를 의미하기보다는 종교와 신앙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로 이해되고 있다. 종교와 신앙이 작동되는 조건과 환경이 변하고 있다. 종교의 미래는 변화된 환경에 어떤 방식으로 적응하는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응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적응 능력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탁월했다. “그리스도교는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바꾸는 대단한 힘이 있음”(필립 젠킨스 「신의 미래」)을 우리는 믿는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종교가 처해 있는 환경은 그리스도교 중심주의의 약화, 종교 행위의 탈제도적 성향, 종교에 대한 비판적 경향의 증가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교적 실천에 대한 이해가 서구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벗어나 다양해지고 있다. 성스러운 것과 영성적인 것에 관한 관심과 갈망은 여전하지만, 종교 행위들이 제도적 종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지식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종교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종교 실천 형식의 변화와 신앙 수행 방식의 재구성을 요청한다.
종교의 기능적 역할
세속화 과정의 숱한 도전 속에서도 종교가, 비록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형태를 변형하기도 하지만, 살아남고 부흥되기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사회학자들은 그 원인을 사회 안에서 수행되는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두고 설명한다. 종교가 사회 속에 끊임없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종교와 종교성은 인간 실존의 안전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실존적 불안을 느끼는 상황이 되면 종교는 늘 새롭게 등장한다. 경제적 위기, 정치적 불안정, 사회 복지 체제의 붕괴 등 인간 실존의 안전성을 위협하는 사회적 불안 요소들이 등장할 때, 종교에 대한 요청이 더 높아진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자기 삶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사람은 자기 존재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즉 자기 삶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자기 행위들을 추동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오늘날은 소위 세속적 이데올로기들이 다 사라진 시대다.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 한 시절을 풍미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사람들을 혁명적 열정으로 몰고 갔던 사회주의 이념, 그 세속적 신념과 이념이 사라진 곳에 종교적 신념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인정해주는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기를 원한다.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화되고 세속의 공동체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의 정체성과 인정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고 그 어떤 소속감을 제공해줄 수 있는 무엇을 필요로 한다. 특히 세계화의 과정 안에서 민족적·인종적·계층적 연대와 정체성이 약화됨에 따라 종교적 소속감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인정을 경험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국가적·민족적 소속감보다 종교적 소속감이 사람의 정체성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일종의 문화적 사유체계로서 종교는 개인과 사회적 삶의 전방위적 영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치와 윤리의 영역뿐만 아니라 예술과 미학의 영역에서도 종교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또한 종교의 심리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종교의 심리적 기능을 인지적 측면에서 보면, 종교는 인간에게 하나의 세계관을 제공한다. 감성적 측면에서 보면, 종교는 가치와 판단의 기준을 제공한다. 실용적 측면에서 보면, 종교는 삶의 형식을 정당화하는 기능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종교는 개인의 사회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또 집단과 계층의 갈등을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모든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에 종교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이라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위기의 시대
교회와 신앙인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시대의 문화사조는 크게 세 가지로 규정해 볼 수 있다. 물질적 쾌락과 향유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 무신론적·탈종교적 세속주의 문화,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과학적 사유체계다. 물론 이 셋은 서로 맞물려 있다. 종교와 신앙의 모습은 결국 이 세 특성들이 빚어내는 콘텍스트 속에서 표현되고 결정되어 간다. 현대 문화는 사람들을 물질적 욕망 지향의 인간으로, 이기적이고 지독한 현세주의자로, 기능성과 유용성만을 강조하는 기계적 인간으로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감정과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문화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종교가 자본주의화 되고 있다. 종교가 성장주의, 상업주의, 소비주의라는 자본주의 이념에 물들어 가고 있다. 종교와 신앙의 브랜드화가 가속되고, 사람들은 신앙과 영성을 살아내기보다 소비하고 있다. 또한 종교가 세속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다. 종교적 가치와 비전이 아니라 세속의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종교와 신앙이 친밀성과 소통과 환대의 모습이 아니라 혐오와 배제와 집단적 이기성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천체물리학과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통해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과학적 세계관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종교의 전통적 설명들이 설득력을 잃고 있다.
건강한 교회, 성숙한 신앙을 위하여
코로나 시절 사람들은 격리의 시간을 경험했다. 코로나 사태는 종교와 신앙의 미래에 관한 전망을 압축적으로 미리 보여준 사건이다. “나는 코로나바이러스 시기에 문을 닫은 텅 빈 교회들을 예언적 경고 신호로 받아들였다. 교회가 변화를 이뤄내지 않는다면, 교회도 곧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다.”(토마시 할리크 「그리스도교의 오후」) 시노달리타스를 향한 구조적 변화와 성숙한 신앙과 영성의 형성이 오늘의 교회에 절실히 요청된다.
교리와 신학과 전례의 변화와 쇄신이 절실히 필요하다. 교리와 신학은 오늘의 세상에서 하느님을 이해하고 체험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 체험과 신앙 실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례를 쇄신해야 한다. 사람들의 신앙적 마음과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본당의 프레임을 구축해야 한다.
생각도 많고 마음도 간절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의 교회 모습이다. 탓만 하고 있기 때문일까. 자기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성찰하며 그것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것만이 변화와 쇄신의 첫걸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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