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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규 목사
본문에 의하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지녀야 할 기쁨과 소망이 늦가을 낙엽처럼 몽땅 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른 땅의 생수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사야였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하나님은 구속자시다!""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지명하여 부르셨다!""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것이다!""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시다!" 이 외침은 이 시간 전할 메시지의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게 여기시느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보배롭게 여기일까요? 세 가지의 큰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보배로운 보혈 때문입니다.
우리는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무엇으로 구속을 받았는지요?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이 아니라 벧전 1장 1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역사에서 가장 귀하고 없어서는 안 될 보배입니다. 그래서 그 피를 '보혈'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는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몸속에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김집사님 몸에서도 박집사님 몸에서도 피가 흐릅니다. 만일 우리의 몸속에 피가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해서도 피가 있어야하는데 그 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인 것입니다. 성경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보혈의 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속에는 예수님의 보혈이 강같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피가 보혈인가요?
그 피가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엡1:7절을 보면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인생은 너나 할것없이 죄인들입니다.
그 죄의 색깔은 주홍같이 붉고 먹장같이 검습니다. 주홍같이 붉고 먹장같이 검은 죄를 무엇으로 씻을 수 있을까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바로 예수님의 피인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의 복음이 엡2장 13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꿈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터가 평생토록 저지른 죄를 기록해 놓은 책이 있는데 그 곁에 앉아서 한장 한장 넘기면서 그 루터를 호통하고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였습니다. 루터 자신도 그 책을 드려다 보면서 깨알같이 적혀있는 자기의 모든 죄를 보면서 스스로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놈이 종교개혁을 하다니..." 그런데 바로 그 순간입니다.
예수의 피묻은 손이 나타나서는 그 책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으로 적셔나갔습니다. 마침내 책에 적힌 루터의 모든 죄가 깨끗하게 도말 되더라는 꿈 이야기였습니다.
루터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잠에서 깬 루터는 "예수의 피!""예수의 피!"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고, 우리 모두는 함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고 찬송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심장에서는 피를 마구 펌프질하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혈구가 달음박질을 하면서 그 피를 생명이 될 것을 운반하고 썩을 것은 제거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 심령 속에서 더러운 죄를 씻고 있다는 말입니다. 논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병아리 떼를 훔치려는 순간입니다. 암탉이 재빨리 달려가 병아리 떼를 품에 안았습니다.
결국 그 암탉이 병아리 떼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죄인들을 품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를 쏟으시고 병아리 떼 대신 죽은 암탉과 같이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
예수님의 피를 생각하면 감사할 줄 모르는 감격을 잃은 성도입니다. 피를 불러도 슬퍼할 줄 모르는 성도입니다.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묵상하며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우리 모두를 보배롭게 여기셨을 까요?
둘째, 보배로운 믿음 때문입니다.
벧후 1장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
여기에서 보배로운 믿음을 기억하십시다. 성경에 보면 보배로운 인물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 다윗, 엘리아, 사무엘 등입니다. 요한, 바울, 베드로, 정말로 보배로운 자들입니다.
교회사에서도 보면 보배로운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칼빈, 루터, 존낙스, 주기철, 손양훈, 조만식 등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보배로운 인물일까요? 그것은 보배로운 믿음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 보배로운 믿음을 빼고서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찌 이들만이 보배로운 존재이겠습니까? 한 사람 한사람 예수 믿는 성도된 우리 모두가 보배로운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우리 모두가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생이 무엇인가요?
죄이며, 허물이며, 혈기이며, 위선인 것입니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오만한 인생들 인 것입니다.
런데도 스스로 의롭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이며, 나 외에 모두를 죄 많은 세리라고 정죄하는 서기관들 아닙니까?
왜 우리들이 성도인가요?
왜 나 같은 죄인이 보배로운가요?
예수를 믿는 믿음이 보배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사야도 이사야 33장 6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내 놓을 것이 없으며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믿음이 너에게 보배니라.. 우리 모두는 다 보배를 가졌습니다. 보배를 가진 보배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 되도다∼♬
성도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참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믿음으로만 될 수 있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고 믿음으로 축복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믿음이 어디 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베드로는 그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말하길 이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가 받았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받았다"는 말은 믿음은 돈을 주고 사는 것도 아니요, 믿음은 지식처럼 배워서 얻는 것도 아니요, 싸워서 쟁취하는 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은 위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믿음에도 특징이 있습니다.
"성장하는 것" "자라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라는 씨앗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도 나고 줄기도 생기고 잎이 나고 꽃도 피고 열매를 맺도록 되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믿음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면 어찌 된 일이겠습니까?
그 믿음은 아직도 미숙한 믿음이요 그 믿음은 어딘가 모르게 병들었다든지 그 믿음자체가 죽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믿음이 좀더 성숙하였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성도가 있는지요?
내 믿음이 2002년 보다 2003년에는 보다 진실 되고 정직하며 짜증대신 감사하며 적극적인 믿음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성도가 있는지요?
그렇다면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나하면 믿음은 들으면서 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내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내 믿음이 성숙되는 믿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두 번째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세 제자를 거느리고 변화산에 올라갔던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할만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산 아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 때문에 제자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아들을 고쳐달라고 찾아왔으나 그들은 고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길"믿음이 적은 자들아... 기도 외에는 이러한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의 삶이 건전한 삶이 되기를 원합니까?
기도로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나같은 죄인,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의 성도가 보배로운 것일까요?
세 번째, 보배로운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보배로운 그릇 사명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그릇인지라 우리 모두가 다 보배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4장 7절을 보면 “우리가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이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함이니라...
똑같은 그릇이라도 그 그릇에 무엇을 담았느냐에 따라 그릇의 이름이 달라지게 됩니다. 된장을 담으면 된장 그릇, 간장을 담으면 간장그릇, 밥을 담으면 밥그릇, 국을 담으면 국그릇입니다.
찬가지로 보배를 담으면 비록 질그릇일지라도 보배로운 그릇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큰그릇도 있고 작은 그릇도 있으며 귀하게 쓰는 그릇이 있고, 천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게 됩니다. 큰그릇만 밥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접시도 밥상에 오르는 것입니다. 작은 옹기라도 임금님 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위해서 쓰임 받고 있는 성도는 다 쓸모 있는 귀한 그릇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가 다 보배로운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너무 과소 평가 할 것 없습니다.
나는 주의 보배로운 그릇이라고 생각할 때에 잠시도 누워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하는 쓰임 받는 그릇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선 자리에서 앉은 자리에서 자기 일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보잘 것 없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나는 연약한 질그릇과 같으나 이 연약한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나이다...."
이 보배가 무엇입니까?
복음, 곧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사는 바울의 간증이 무엇입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쓸모 없는 들풀과도 같습니다. 꾹꾹 찌르기만 하는 찔레요, 가시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 모두를 주님께서 세워주시고, 자리를 정해주셨으며, 각각의 구역에서 남 전도회에서 여전도회에서 각부 주일학교에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쓰임 받고 있는 보배로운 그릇이라고 생각할 때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를 감사하면서 우리함께 박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예레미야 18장에 보면 토기장이 비유가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자기 손 안에 있는 진흙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큰그릇 만들고 싶으면 큰 그릇, 작은 그릇 만들고 싶으면 작은 그릇 만드는 사람이 토기장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6절에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 있음과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고 인생은 진흙과 같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인생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진흙인생인 것입니다. 토기장이 하나님이 그 진흙으로 항아리를 만들 수도 있고, 접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백인종을 만드실 수도 있고 흑인종을 만들 수도 있고, 황인종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남자로 만드실 수도 있고, 여자로 만드실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9장 20절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하겠느뇨...
우리는 불평해선 안됩니다.
하나님께 항의해선 안됩니다.
주님께서 주신대로 다섯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사명감을 감당하면 됩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뽐낼 것 없으며, 찬양대원 못된 것도 짜증낼 것 없으며, 장로인 것을 훈장처럼 여길 것이 없으며, 회장이 되지 못한 것도 낙망할 것이 없습니다.
나 맡은 본분은 구주를 높이고 뭇 영혼 구원 얻도록 잘 인도함이라 하면서 사명을 잘 감당하면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 하시며 칭찬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토기장이가 하는 일을 보면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었을지라도 찌그러진 것이 있을 수 있고, 쪼개진 것 금간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천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완성품이 됩니까?
쭈그러들 수 있고, 찌그러들수도 있으면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토기장이가 어떻게 하던가요?
그것을 다시 짓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아름답고도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보배로운 그릇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면 일곱 귀신이 들려서 쓸모 없게 되었으나 예수님을 만난 뒤 현모양처가 되지 않았습니까?
삭게오를 보더라도 주님만나기 전엔 손가락질만 받는 인생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는 우리 모두들 생각하면 한사람 예외 없이 신사이며 숙녀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토로해 보십시다. 그 속에는 추한 것들이 들어있을수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깨진 그릇은 보배에 속하지 않습니다. 깨진 그릇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깨진 그릇으로는 귀한 손님을 접대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이 깨진 성도는 없는지요?
사랑이 깨진 성도는 없는지요?
열심이 깨진 성도는 없는지요?
그러나 낙망할 것 없습니다.
토기장이 되신 예수님께서 내게 오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빈손 들고 예수께로 나아가야 할것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 죄많은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물동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셔도 목마를 물을 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생수의 복음을 들은 예수님을 만난 뒤 이 여인은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군중을 향하여 달려가 외쳤습니다.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 아니냐!"
변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물동이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깨져버릴 것이요, 목마를 것을 담는 물동이입니다. 보다도 귀한 생수의 귀한 복음을 만난 여인인지라 이 물동이를 버려두고라도 예수님을 증거 하였던 이 여인...
우리는 본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자신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보배로운 존재라고 긍지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보배로운 믿음 때문에 보배로운 그릇 사명을 잘 감당하여 우리의 남은 생애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귀한 축복을 충만히 충만히 누리시는 모두가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