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넬
삼하 3장 6-39절
주요내용 = 마음 다스림
오늘 말씀은 '아브넬'이란 제목입니다.
본문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아브넬이 전쟁이 있는 동안에 사울의 집에서 권세를 잡아 사울의 첩까지 범하는 등 방자하게 행하다가 이스보셋의 책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듣자 반성은 커녕 화가 나서 섬기던 왕을 돌이켜 다윗왕을 섬기기로 언약하지만 결국은 요압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입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자기 동생을 죽인 개인적인 감정과 또 그 막강한 아브넬이 오면 자기의 위치가 약화될까봐 질투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장군을 통해서 마음과 생각의 원리라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이 마음과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본문이 가르쳐 주는 마음 다스림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1.이 두 사람은 각자의 왕들에게 일등공신들이었습니다.
즉 요압은 다윗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일등공신이었고, 아브넬도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일등공신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떤 면에 치중하느냐에 다라 신앙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즉 마음을 잘 사용하면 신령한 신앙생활에 일등공신이 되고, 그러나 반대로 신앙생활을 머리 위주로만 하면 육신과 불신앙을 이루는데 한 몫 단단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로만 신앙생활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구원도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2.이 두사람은 각자의 왕들과 가까운 친족들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누이의 아들이었고, 아브넬은 사울의 숙부니까 이스보셋에게는 당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가까운 친족들입니다. 그런데 사울과 다윗이 남입니까? 장인과 사위 관계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두가 다 사돈지간 이상이지 남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심령 한 통속의 여러 구조들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다윗과 가깝고, 아브넬은 이스보셋과 가까웠듯 마음은 영혼 쪽에 가깝고, 머리의 생각은 육신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육신의 용례는 단지 몸만 아니라 육신과 그 생각까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중심으로 행하면 대부분 영적인 것이 되고, 반면에 머리로 행하다 보면 대부분 불신앙과 육신적이기 쉽습니다. 바로 이들이 이런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이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할 때 가장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브넬과 언약하고 새 왕국 건설의 역군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두 군장이 협력하게 되면 이스라엘 12지파는 하나되어 온전한 통일왕국을 이룹니다. 그런데 요압이 질투해서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참으로 안타까워 하고 애통하며 요압 때문에 힘들어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영혼을 대표한 마음과 육체를 대표한 생각이 서로 합하여 한 인격이 되어 협력만 한다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마음과 생각은 마음이라는 한 범주에 묶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혼과 육체는 둘 다 한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두 성향이 서로 갈등하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마음과 뜻과 정성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4.아브넬은 알면서도 이스보셋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9절과 18절을 보면 그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시골 여인 아비가일까지도 알만큼 당시의 보편적인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윗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생각의 이율배반성을 예표합니다. 우리가 알지만 생각대로 안되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체로 육체는 생각의 지배를 받지만 영적인 것은 육신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신령한 것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성취되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브넬처럼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걷게 됩니다.
5.아브넬은 방자하여 리스바를 통간했습니다.
이 리스바는 사울의 첩이요 이스보셋의 계모입니다. 그것은 자신은 사울 왕가 존속을 위해 할 만큼 한 공로자이기 때문에 그 만큼의 부정한 일 정도는 용납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는 생각의 무법초월성을 상징합니다. 이와 같이 생각은 모든 시공간과 법과 질서와 도덕을 초월하여 행동하려고 합니다. 생각에 무슨 한계가 있고 국경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비용이 듭니까? 그래서 생각은 온갖 범주를 막론하고 초월하여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은 자유일지라도 그 결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생각으로 범한 죄도 역시 죄이며 이 죄는 심령을 까맣게 불태워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넬이 범한 사울의 첩 리스바의 이름의 뜻이 '불타는 석탄'입니다. 즉 잘못된 생각을 품으면 그 생각이 자기를 불태우는 무서운 재앙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보다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즉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됩니다.
6.아브넬은 이를 책망하는 이스보셋을 위협했습니다.
8-1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래도 이스보셋은 한 말도 대답지 못했습니다. 그 만큼 아브넬의 세력은 강했습니다.
이는 생각의 육신지배력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동쪽을 생각하면 몸은 자연히 동족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가게 되어 있고 세상을 생각하면 세상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은 육신을 지배하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육체의 영성을 원하시면 나의 생각을 통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거기에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7.아브넬은 미갈을 다윗에게로 데려왔습니다.
13-16절 내용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뻬앗겨 발디에게 시집간 미갈을 아브넬에게 부탁하자 아브넬은 자기 왕 이스보셋을 압박하여 미갈을 발디엘에게서 빼앗아 다윗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사실 미갈은 다윗이 사랑한 첫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다윗이 목숨을 걸고 블레셋과 싸워 양피로 얻은 아내요, 다윗이 어려운 때 다윗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고,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갈라져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생각의 강력한 진행성을 보여줍니다. 아마 미갈이 발디엘에게 시집간지 10여년이니까 자식을 몇 낳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은 생각하는 방향을 향하여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결과를 산출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특히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큰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이제 미갈은 그 생활을 마감하고 다윗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생각하기 나름이란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생각하면 한 없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고, 긍정적인 것을 생각하면 한 없이 긍정적이게 됩니다. 이것이 생각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브넬에게 미갈을 데려오지 않으면 너와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생각 속에 긍정적인 주의 사랑과 말씀과 은혜로 채워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생각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8.그런데 미갈의 남편이 바후림까지 울며 따라왔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아브넬의 방해자인 셈입니다. 여기 베냐민 지파의 끝 바후림까지 울며 따라온 남편은 세상과 육체의 정욕을 상징합니다. 그는 유다지파의 경계까지 울며 따라와서 미갈에게서 떨어지지 않을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의 생각을 끝까지 붙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도 이스라엘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에 세상 것이 있습니까? 권서방이 있습니까? 명서방이 있습니까? 금서방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지금 무엇이 사로잡고 있습니까?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발디엘이 유다지파의 경계를 넘지는 못한 것처럼 성령의 권세 앞에는 세상도 꼼짝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아브넬이 발디엘에게 돌아가라 말한 것처럼 이 시간 예수의 이름으로 지금 돌아가라고 명령하십시다.
9.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가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아브넬은 다윗에게 돌아와 다윗을 보필할 귀한 사람이었으나 요압은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를 진심으로 슬퍼하며 애가를 지어 부르며 나아가 요압을 저주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아름다운 생각이 없다면 슬퍼해야 합니다. 좋은 사람이란 그 생각이 좋다는 뜻이요, 훌륭한 사람이란 그 생각이 훌륭하다는 것이요, 역시 나쁜 사람이란 그 생각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생각의 부재는 곧 육체의 영성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육체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영성의 부재는 곧 영혼과 함께 하나님을 보필할 육체영성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다윗을 보필할 아브넬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복음화 되지 못한 사람들은 애통하며 구해야 합니다. 롬12:1-2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이를 가능하게 할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마음인데 호크마 주석에서는 여기 마음을 이해력과 사고력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생각은 넓고 깊고 풍부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늘 기도하고 묵상하여서 좋은 생각들을 하나님께 많이 받으십시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각종 은사를 주셔서 우리의 낡은 가치관과 사고를 바꾸어 육체의 영성을 입혀주고 계십니다.
마지막. 요압은 다윗을 자꾸만 월권하였습니다.
그래서 39절에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은 영혼 쪽에 가깝고 영성확립에 큰 공헌을 하지만 잘못하면 마음이 무서운 자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도 생각도 잘 지켜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 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그러므로 이 시간 감사 기도의 생활로 영육 간의 갈등 없이 하나 되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