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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댄 동산같이
성경본문 : 계시록 22:1-7
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창2:10, 겔47:1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겔47:12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 속히 오실 그리스도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사야서 58장 11절 말씀을 읽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 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에덴이라는 아름다운 동산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람을 살게 하셨습니다.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에덴동산에는 보기에도 아름답 고, 먹기에도 좋은 나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덴동산에는 물 근원이 있어서 온 동산을 적시고, 그 물의 근원이 강이 되어서 네 갈래로 나뉘 어져 사방으로 흘러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 좋고, 너무 아름답고, 모든 것이 너무 풍성 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들은, 요한 밀턴이 「실낙원」에서 묘사한 것처럼 낙원을 잃는 비극을 연출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인간들은 이 아름다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
그렇지만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인, 오늘 읽은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있을 하나님의 나라를 역시 아름다운 동산으로 묘사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 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잃었던 낙원을 다시 찾는 복락원의 기록인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잃었던 동산을 다시 찾게 하는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내세에 이 동산을 다시 회복하기 전이라도,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도 영적인 의미에서 이 동산에 축복을 주십니다.
이사야는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로 하여금 물댄 동산처럼 만들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12절에 보아도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와 예레미야 선지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 심령 속에 에덴동산을 회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심령의 동산이 어떻습니까?
여호와의 동산 에덴과 같습니까?
과연 우리의 심령이 물 댄 동산과 같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심령이 황폐한 거친 들과 같습니까?
왜 광야가 생깁니까?
물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러므로 나무도 거의 자라지 못합니다. 풀도 거의 없습니다. 그저 있다면 바위와 돌들이 있고, 풀도 아주 조잡한 풀만 자랄 뿐입니다.
미국의 서부 같은 데가 바로 그렇습니다. 워싱턴 주나 오레건 주를 제외하고, 캘리포니아주는 거의가 광야입니다. 광야는 보기만 해도 삭막합니다. 광야에는 꽃이 없습니다. 광야에 자라는 나무는 물이 없는 데서 자라다 보니 가시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는 대개 선인장 종류의 나무가 자랍니다. 가시가 많기 때문에 손과 발이 닿으면 피가 나고 아프게 합니다. 광야에서 자라다 보니 자연히 거친 나무가 되고, 그런 나무라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말하자면 광야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마음이 광야 같이 삭막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지난 한 주간 동안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상한 심령을 부둥켜안고, 지치고 아픈 형편에서 나오신 분 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메마른 광야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겪는지 모릅니다.
갑자기 불어닥치는 폭풍 때문에 모래흙이 날려 눈을 뜨기도 힘들고,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있던 길도 모래가 덮어버려 길을 찾기도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길을 잃어버리고 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의 생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의 심령을 살펴보아도 갈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의 목표를 찾지 못한 심령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볼 때는 아무리 안정 되고 부족함이 없어 보여도 실상은 마음에 평화도, 만족도, 기쁨도 없이 초조와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는 신기루 현상이 나타납니다. 저 멀리 시원한 물이 가득한 호수가 보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그 물이 보이는 곳을 향해 찾아가지만 물은 없고 저 멀리 보이기만 합니다. 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이 세상이 바로 그렇습니다.
저기에 만족이 있어 보이고 기쁨이 있어 보여 찾아가지만, 거기에 우리가 바라던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과 한숨과 탄식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심령이 황폐하고 거친 광야와 같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 심령의 동산을 살펴서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물 댄 동산 이란 말은 영어로 a watered garden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산(garden) 은 공원(park)과는 다릅니다.
동산은 우리말로 하면 창경원, 비원 같은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동산에는 울타리가 있습니다. 동산은 그냥 빈들이 아닙니다. 동산에는 꽃만 심겨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산은 일정한 목적 하에 다른 곳과 분리가 되고, 경계가 있고 울타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울타리, 경계가 있어야 동산을 바로 지킬 수가 있고 소나 나귀나 그밖의 짐승들 그리고 난잡한 사람들을 막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심령의 동산에도 울타리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분리되는 경계선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 심령의 동산에 들어올 것이 있고 들어와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사상이라고 아무런 것이나 들어와서도 안 됩니다. 사상도 우리 심령의 동산에 들어올 것이 있고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애정의 꽃도 우리 심령의 동산에 심을 것이 있고 뽑아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도 그렇습니다.
품을 것이 있고 품어서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의 동산에도 이 성별의 울타리가 꼭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 성별의 원리에 대해서 이렇게 직접 교훈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 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 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 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 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고후 6:14∼16).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가 무엇입니까?
글자대로 하면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아직도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많은 사람 가운데서 거룩하게 구별해서 불러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불완전한데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께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다 거룩한 무리라고, 성도라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귀한 성도의 이름을 받았으면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구별된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산 물고기는 짠 바닷물에 살지만 그 살에 짠물이 배지 아니합니다.
참 성도는 더러운 세상에 살지만 더러운 물이 그 심령에 배어들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 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고 했습니다.
세상의 속된 것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옛날 수도사처럼 이 사회를 떠나서 깊은 산 속에 가서 묵상만 하고, 독경하면서 따로 은밀한 생활을 하는, 도피 생활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 삽니다.
예수님도 죄인들과 교제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각과 생활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자기에게로 이끈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나 생활이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된 데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구별되게 살아야 이 부패한 사회를 건질 수가 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성전 동문 밖 문지방에서 샘물이 나오더니 그 샘물이 점점 커져서는 광야로 흘러가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바다 사해까지 흘러가서 사해가 소생 하고 물고기가 많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은 사해처럼 썩었습니다. 썩어진 사회에 생수 가 흘러 들어가야 이 사회가 살겠습니다.
저는 어제 새 성전에서 이런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산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동산에는 아름다운 조화(調和)가 있습니다.
꽃도 아름다운 꽂을 심습니다.
풀도 아름다운 풀을 심습니다.
돌이나 바위도 아름다운 돌과 바위를 갖다 놓습니다.
풀이나 나무나 꽃이나 돌이 다 조화를 이루어 알맞고 적당하게 동산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캐나다 뱅쿠버 옆에 있는 빅토리아섬의 꽃동산에 가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꽃동산인데, 얼마나 아름답게 꾸며 놓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계 의 관광객들이 이 꽃동산을 구경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모여듭니다.
동산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지 못하면 동산이 아닙니다.
조화가 없으면 동산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의 동산도 아름다워야 되고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고 하셨고,
또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심령은 아름답습니다.
강퍅한 심령은 추합니다.
맑은 심령은 아름답습니다.
흐린 심령은 더럽습니다.
정직한 심령은 아름답습니다.
거짓된 심령은 추합니다.
충성된 심령은 아름답습니다.
간사한 혀는 가증한 것입니다.
인자한 심령은 아름답습니다.
잔인한 심령은 추합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심령은 꽃향기가 풍기는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심령은 더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 심령의 동산은 아름답고 조화가 있어야겠습니다.
평안한 심령이 아름답습니다.
화목한 가정이 아름답습니다.
시편 133편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심령의 동산이 평안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우리 심령의 동산은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로 화해 버리고 맙니다.
무엇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까?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고, 그 순간부터 불안과 공포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두려움에 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평화를 회복 하게 하십니다.
성경에 죄의 사함을 받을 때 하늘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과도 화평해야 심령의 동산이 아름답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형제 간의 화평을 가르쳐 주셨 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 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형제 사이에 화평을 지킬 것을 우리에 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2장 18절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하셨고,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고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화평을 만드는 자, 그러니까 peace-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베드로가 말씀한 것처럼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대하여 착함을 좇아야 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 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 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고” 했습니다.
동산이 아름다우려면 그 아름다움,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아름다운 동산도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잡초가 우거지고 조화가 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조화, 이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싸움을 붙이지 않으려고 말조심 을 합니다. 잠언에도 말쟁이가 있으면 다툼이 그치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조화를 위해 힘쓰는 사람은 속담대로 불붙는 집에 키질하지 아니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화평의 매인 줄을 끊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끊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언제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시간을 씁니다.
어디 가나 화평의 말을 합니다.
화평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화평한 마음, 화평한 가정, 화평한 교회, 화평한 사회는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도 미용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만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도 아름답게 만드는 화장을 합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사람의 마음, 심령을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외모는 아름답게 꾸미는데 그 심령이 아름답지 못해서, 오늘 우리 사회에 갖은 추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먼저 심령이 더러운 가운데서 경험하고 계획되어서 추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동산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심령이 아름다워야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동산은 자연히 자라납니다.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랍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습니다. 동산을 만드는데 한 가지 즐거움은 아침에 나가 보면 꽃봉오리가 맺혔고, 그 다음날에 꽃이 피고, 그 다음엔 꽃이 하나, 둘, 셋 많이 피고, 그리고 그 꽃이 지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심령의 동산에도 이렇게 장성이 있어야겠습니다.
마음의 동산에도 새로움이 있어야겠습니다.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겠습니다.
심령의 동산에도 열매가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모든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편지할 때 “너희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고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시작해서 점점 장성하라고 우리에게 교훈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 고 권면했 습니다. 좀더 내려가 보면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 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서 그리스도 에게까지 이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너희 심령이 물 댄 동산 같겠다했습니다.
물 없이는 동산이 되지 못합니다.
물이 없이 나무가 자랄 수 없고,
물이 없이 풀이 자랄 수 없습니다.
물 없이 꽃이 필 수 없습니다.
물은 동산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심령의 동산에도 물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마음속에 영생토록 솟아나는 이 샘물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심령은 문자 그대로 물 댄 동 산같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생명수,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수,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
주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
주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
주님께서 주시는 그 평화가 마음 가운데 언제나 충만하십니까?
그러면 우리의 심령은 물 댄 동산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 신 것은 광야같이 쓸쓸하고 메마른 심령이라도 아름다운 동산, 물 댄 동산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될 때 우리의 심령은 물 댄 동산같이 되는 것입니 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광야같이 메마른 땅에 물을 대면 그 광야가 보통 땅보다 더 기름진 옥토 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주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물이 별로 없는 광야요 사막지대입니다. 그런데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투자해서 거기에 물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랬더 니 놀랍게도 그 땅이 완전히 옥토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좋은 과일의 생산지가 되고 곡창지대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 같은 메마른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물 을 대게 되면 이 심령이 옥토로 변해서 아름다운 사랑과 기쁨 그리고 화평 그리고 모든 아름다 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심령은 그리스도의 동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보혈로 값을 주시고 이 동 산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의 동산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의 심령을 언제나 아름답게 간직하고, 깨끗하게 보전해서 주님이 언제나 우리 심령의 동산에 머 무시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심령이 물 댄 동산 같고 모든 근심이 없으리로다. 오늘 여러 분이 이 예배당에 들어오실 때는 어떤 심령 상태로 오셨던든 간에 나가실 때는 물 댄 동산같이, 하나님의 동산같이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고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르며 돌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