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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창 19:23-29
오늘의 본문에는 아브라함과 롯이 나타납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롯의 아버지는 하란이었는데, 롯이 어릴 때 죽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아브라함의 손에서 키워 졌습니다. 같이 갈대아우르를 떠났고, 같이 가나안 땅에 옵니다. 한 가족으로,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살았다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는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런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원수가 된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같이 고향을 떠났고, 같이 가나안 땅에서 살았고, 그런데도 롯은 아브라함의 신앙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본문 29절을 같이 읽지요.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죄악이 가득찬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해 주셨다 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영어로는 “God remembered Abraham"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롯을 구원해 주셨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아브라함과 롯의 믿음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이지요.
롯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에 롯을 구원해 주셨다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남의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요? 어느 분은 4000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 누구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든 그것이 무슨 관계이냐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합니다. 롯의 모습이 우리와 그렇게 닮았는지 모릅니다. 4000년 전에 산 롯이지만, 현재를 사는 저나 여러분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롯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롯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롯은 여러가지 욕심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과 롯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가축을 가졌기 때문에 같이 살 수 없었습니다. 소나 양의 먹이가 부족해지고, 목자들끼리 싸우는 일도 생깁니다. 그래서 서로 헤어지기로 합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롯은 살펴본 다음 요단 들을 택하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남습니다. 요단들은 물이 풍족하고 좋아서, 오죽하면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비도 잘 오지 않는 척박한 땅입니다. 참으로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자신을 아들과 같이 길러준 아브라함에게 우선권을 양보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롯은 그 도리를 져 버리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해 버립니다. 한마디로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라는 뜻이지요. 세상에서 제일 손가락질 받을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사람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보다는 무엇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를 판단해서 행하는 사람,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바로 롯이 우리와 똑같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에게 손해가 되면 의리도 버립니다. 나에게 손해가 되면 신의도 팽개칩니다. 나에게 손해가 되면 신앙도 버립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얼마나 그런 사람이 많습니까? 몇불 때문에 거짓말을 밥먹듯하고, 약간의 마음 상함으로 굳게 믿던 신의도 져 버립니다. 오죽 하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신있게 나는 롯과는 다른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분 있으세요?
롯은 세상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롯은 소돔성에서 편하게 살아 갑니다. 자신의 쾌락을 ?아 살아 갑니다. 그 성에 죄악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멸하려 하십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 롯과 가족은 피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15절에 “동틀 때에 천사가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성이 멸망당한다는데 당장 피해야 하지요. 그런데 롯의 태도를 보세요. 16절에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라고 말씀합니다. 요즘 말로 밍기적밍기적 했다 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것을 확신했다면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당장 피해야 하지요. 그런데 가지고 갈 짐을 챙기느라고 지체했나요? 아니면 누구 만나고 가야 할 사람이 있었나요? 자신의 목숨을 잃느냐 마느냐 하는 판인데 왜 지체를 합니까? 무엇을 위하여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내 개인적인 종말이 오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이 오든 종말은 곧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체합니다. 나중에 하지, 조금 지나고 하지 라고 모든 일을 뒤로 미루어 버립니다. 도적과 같이 오는 종말을 어떻게 맞이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는 재개발이 지금도 진행됩니다. 오래된 집이나 아파트를 다 헐어 버리고, 새롭게 짖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곧 재개발이 있을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집안이 엉망이었습니다. 창문 유리는 깨어져서 테이프로 붙었고, 벽지도 너덜너덜 하고, 분위기가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재개발을 하기 위해 다 헐어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금방 헐어버릴 집에 왜 유리를 다시 끼우고, 벽지를 다시 바르겠습니까? 다 소용없는 일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삶을 곧 마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 대해 그렇게 미련이 많습니까? 왜 지체하려 합니까? 왜 머뭇거립니까? 우리와 롯이 너무나 비슷하지요.
또한 롯은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몰랐습니다. 천사가 빨리 저 보이는 산으로 피하라고 합니다. 그때 롯이 하는 말을 보세요. “미리 알려 주어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뒤를 잴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롯은 산까지 도망가기가 힘드니, 저기 보이는 작은 성에 피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 성이 소알성입니다. 롯, 답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구헤 주시는데, 뭐 그렇게 말이 많은가요? 자신의 처지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지요. 어떻게 보면 뻔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롯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뻔뻔합니까? 뒤에서는 온갖 일을 다 하며 앞에서는 웃습니다. 사람들끼리야 그럴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지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는 못하면서, 하나님 이럴 수가 있느냐고 제일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하면서 말은 제일 많습니다. 일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죽음을 앞둔 사도 바울이 남긴 말을 기억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이 죄를 지었다고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자신이 죄인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고개를 뻣뻣하게 세웁니다. 믿음도 별로이고, 하나님의 일도 별로 하지 못했으면서요. 그러면서 세상의 복은 다 받으려고 합니다. 얼마나 뻔뻔한 일인가요? 얼마나 분수를 모르는 일인가요? 우리의 모습과 롯, 너무나 닮았지요.
그렇습니다. 롯은 자신의 욕심만 채운 사람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몰랐습니다. 아브라함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달랐을까요? 아브라함과 롯은 근본이 다른 사람이었나요? 분명 그들은 같은 가족이었고, 같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오랜 세월 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과 신앙이 어떻게 그렇게 달라졌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창세기 12장 4절을 찾아 읽지요. “이에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세였더라”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으나,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간 것입니다. 분명 같이 간 것은 맞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간 것이고, 롯은 사람을 따라 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지만, 롯은 세상, 사람을 따라 간 것이며, 그 결과가 그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같이 있더라고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나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 가족을 따라 나온 것이냐에 따라 여러분에게 임하는 은혜가 달라집니다. 진정 하나님을 뵙기 위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만, 사람을 만나기 위해,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나왔다면 여러분에게 임하는 은혜는 하나도 없게 됩니다.
주위에 있는 어느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교회가 많이 부흥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부흥하는 과정이 조금은 이상합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던 분들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교회로 옮겨 갔습니다. 물론 신앙생활 하다가 교회를 옮길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 교회로 옮긴 다음 먼저 다니던 교회에 사람들을 다 빼어 갑니다. 인간적인 친분을 이용해서 교인들을 빼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교회는 부흥이 되었다 라고 합니다. 교회를 옮긴 것이 문제가 아니고, 왜 교회를 옮겼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교회를 옮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사람을 따라 교회를 옮긴 꼴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 아브라함이 아니고, 사람을 따라간 롯과 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롯은 4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와 너무나 닮은 사람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나는 롯하고 다르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분 있으세요? 아마도 우리는 롯보다 더 욕심이 많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롯보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더 많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롯보다 더 자신의 분수, 처지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나요?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까? 아니면 저주하셨습니까? 불쌍히 여기셨습니까? 아니면 멸망시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은혜 베푸셨고,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무슨 은혜를 주셨느냐고 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롯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봅시다.
롯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요단을 택했습니다. 자신의 도리를 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도 올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롯을 싹 망하게 하셨나요? 그렇지 않지요.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셨습니다. 여러 나라의 왕들이 소돔을 쳐 들어와서 롯의 재산을 다 빼앗고, 롯도 포로로 붙잡아 가는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아브라함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해 주기도 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옳지 못하고, 세상 신의를 져 버린 사람을 왜 구해 주나요? 그냥 싹 망하게 놔두는 것이 옳을 것 같지 않나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롯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자신의 욕심에 치우쳐 어리석게 살아가는 우리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여러분의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보세요. 오직 나를 위해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나, 내 자식, 내 일이 언제나 먼저 였습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살아 왔습니다.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쳐 같이 남을 위해 산 사람이 누구인가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잘 살아 왔습니다. 제일 풍요한 미국 땅에까지 와서 살아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롯은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지체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제 나는 너에게 일어날 일을 가르쳐 주었다, 지금까지 기다렸으니 이제는 네 책임이다” 라고 하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6절에 나타난 말씀입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들의 손을 이끌어 주셨다 라는 말씀입니다. 망설이고, 지체하는 롯의 가족을 잡이 이끄시고, 구원하셨습니다. 또다른 은혜입니다. 나는 너에게 이미 경고했으니 성을 빠져 나가든가 말던가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해라 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에 빠져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습니다. 당장 순종해야 하는데, 지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장 멸하시지 않으십니다. 자비하심으로 길이 참으십니다. 롯에게 인자를 더하신 것같이 우리에게 인자를 더하셔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까지 주십니다.
또한 롯은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작은 성으로 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너 해도 너무 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21절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 하리니” 라고 그의 소원대로 들어 주십니다. 롯을 소알 성으로 피하게 해 주시고, 소알 성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롯이 자격이 있어서 그의 소원을 들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뭐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지요. 믿음도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고, 눈에 보이는 번듯한 일을 해 놓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뢰는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생을 살아 왔습니다. 믿었다고 했지만, 믿음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다녔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과 달리 살아간 롯과 똑같이 살아 왔습니다. 언제나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게으름을 피우며 살았습니다. 또한 자기 분수도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모든 면에서 롯과 같습니다. 롯과 같이 사람을 따라, 세상을 따르며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롯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구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닫고, 누려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요? 롯에게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롯을 구해 주셨다 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찾아 읽지요. 베드로후서 2장 7, 8절입니다. 신약 385면입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은 상하더라” 참으로 놀랄 말씀입니다. 롯을 의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 롯이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요? 자신의 욕심만 ?은 사람, 하나님 말씀에 지체한 사람, 분수도 모르는 사람인데 어찌 성경 말씀은 그를 의인이라고 하신다 라는 말인가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악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의인입니까, 아니면 악인입니까? 세상적으로 악인이지요. 말할 것도 없지요. 롯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할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의인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찾아 읽지요. 로마서 3장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 되었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롯을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의인으로 삼으시고 구원하신 것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기억하사”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영생의 구원을 주신 것이지요. 이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롯도 저나 여러분도 그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올바르게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롯은 달랐습니다. 롯의 이야기는 창세기 19장 이후에 사라집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단지 19장 말미에 롯의 두 딸과의 동침하여 암몬과 모압이라는 아들을 낳은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들의 후손은 이스라엘와 원수가 되어 이스라엘을 끝임없이 괴롭힙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멸망을 받아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롯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라는 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생명을 구원해 주셨다면 그 생명으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오히려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분명 롯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촌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 신앙을 본받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 챙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지체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유황불의 심판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은혜를 헛되이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 주시는 삶으로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지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욕심만 채우려고 합니다. 세상의 것에 미련이 많습니다.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교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우리를 의인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영생의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롯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은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구속을 받았다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롯과 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립시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버립시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겸손해 집시다. 절대로 사람을 따라, 세상을 따라 살지 맙시다. 그때 우리에게 더욱 풍성하신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말씀을 찾아 읽지요. 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이십니다.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신문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엄마와 아들 둘이 살았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겨우 모빌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어느날 집에서 놀던 아들이 총기사고로 총에 맞습니다. 뇌사에 빠졌고, 다시 소생할 수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장기기증을 말합니다.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한 엄마는 아들의 장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기증하기로 합니다. 아들도 엄마의 결정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간, 신장, 각막 등등 모든 장기는 다른 병자들에게 이식됩니다. 그리고 이식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스노우보드 선수였습니다. 원래 유능한 선수였으나, 몸이 아파서 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선수는 건강을 되찾았고, 다시 국가대표 선수가 됩니다. 그 선수가 달리는 경기장에 엄마가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선수를 힘차게 응원했습니다. 엄마의 응원을 받아서였는지 그 선수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땁니다. 이 선수의 모습을 보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마치 자신의 아들이 살아온 것 같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선수는 엄마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입니다. 그러나 그 선수의 몸에는 바로 아들의 장기가 살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엄마는 그 선수가 바로 자신의 아들과 같다 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한사람한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억하사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억하사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베풀어 주시고 계시며, 앞으로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더욱 풍성한 은혜 속에 사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