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
첫번째 계단: 내 양심 속에서 한 조그만 음성이 들려 왔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이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부르실 때에 사용하시는 한가지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자를 살리실 뜻이 있었다면,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세워 놓으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아내를 살리셨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불신자는 치료와 회복의 여부를 의약의 효과로 돌리고 의사의 기술력으로 돌리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모든 것을 의뢰한다.
두번째 계단: 악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기도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것에 따라서 비를 내리시고 눈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데, 왜 기도해야 하는가?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자굴과 핍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건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참기 어려운 환난을 허락하셨고 생명을 취하셨다. 기도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차라리 처음부터 기도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닌가? 도데체 기도할 필요가 어디있단 말인가?
아내를 잃고 나서 나는 몇 달 동안 기도하지 않았다. 기도 없이는 수저를 들지 않았던 내가, 기도 없이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 내가, 아내를 잃을 후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 원한으로 밥상을 대하고 눈물로 잠자리에 들어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그 당시 고통 중에 내가 하나님께 드렸던 하소연이었다. “아! 하나님, 나의 이런 말을 용서하십시요. 당신은 당신 자녀의 믿음을 꺽고 상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영혼의 아픔 때문에 당신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께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버리시지는 않으시겠죠? 아니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보다도, 도무지 기도할 수 없는 지금 당신은 내게 더 큰 사랑과 위로를 주시겠죠? 내가 당신께 기도할 수 있는 때에는 당신의 특별한 은혜와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는 때야말로 당신의 돌보심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아이가 심히 병들어서 몸이 쇠약해져서 엄마에게 짜증내고 함부로 말을 할 때에, 엄마는 그 아이의 깊은 속을 알고 한층 더 깊은 사랑으로 앓는 아이를 간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나를 그렇게 취급해 주시고 계시죠? 내가 아내를 잃고 우주의 표류자가 된 지금이야말로, 제가 극도의 실망에 빠져서 하나님을 버리려고 하는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제 뒤를 쫓아와서 제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막으시겠죠?”
“그렇습니다! 나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십년을 하루같이 하나님께 기도해 왔기에 아내의 죽음 이후에 나는 뜻하지 않은 기쁨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육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영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혹시 육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어 기도할 때에는 항상 “만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시면”이라는 말을 덧붙혔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믿고, 들어주지 않으면 원망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를 사람들의 신앙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기도를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오늘 밤부터 전보다 더욱 열심히 당신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세번째 계단: 이 때 악마가 다시 내게 속삭였다. “너는 뜨거운 기도로서 불치의 병자를 낫게 한 예를 모르느냐? 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네 열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내를 죽인 것은 내 열성의 부족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아내를 죽게 한 죄는 내게 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이다. 만일 열심이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열심을 가지지 못한 자야말로 가련한 존재이다. 죽을 각오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바꾸시어, 죽은 자를 살리시고 또한 산 자를 죽이신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각 인생들의 최선을 아신다. 그분의 선한 지혜에 따라서 일의 결국이 이루어지게 된다.
나는 내 믿음의 부족을 안다. 그러나 나는 내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나 내 아내는 결국 죽었다. 누군가 내 열심이 부족했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나의 모든 정성을 다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내게 있는 열심을 다하여 기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데려가셨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믿습니다. 나는 압니다. 만일 당신께 대한 나의 신앙이 아내의 죽음으로 인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당신은 반드시 제 기도를 들어주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의 죽음을 허락하신 것은 나를 믿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이 시련을 능히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아내의 죽음을 허용하셨던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진 저의 열심과 믿음이 족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외칠 수 있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 주신다는 사실이 저를 너무나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네번째 계단: 악마는 다시 이렇게 속삭였다. “네가 믿는 정녕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너에게 이런 고통과 슬픔을 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악마에게 응답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내게 주셨다. “악마여,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기 위하여 고통을 주신다는 어떤 목사들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성경에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형벌”이 없다. 형벌이란 말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는 낱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형벌은 ‘어둡게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형벌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지옥불도 악인과 의인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선과 의를 싫어하는 악인을 영원히 살게 한들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살인과 강간과 도박과 미움과 증오 속에서 악인들끼리 영원히 살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는가? 지옥불로 악인의 생명을 거두심으로써, 우주에서 악이 근절됨으로써, 온 우주가 안전하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지혜이다. 나는 지옥불에 조차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하나님은 정녕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다섯번째 계단: 악마는 마지막으로 한가지 의혹을 내 마음에 심고자 하였다. “네 아내는 왜 그렇게도 단명했어야만 하니? 그녀는 순결한 마음을 가졌으며, 자기를 잊어버리고 너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으며,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가난과 싸우며 성경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심한 고통을 당했다. 왜 그녀는 단 한번의 안락한 삶을 살지 못한채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 가혹한 분이 아닐까?”
참으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의혹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속에 도데체 무슨 깊은 뜻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성경은 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위하여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다(욥 15:19).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던 아내가 이 세상을 즐기지 못한채 갈 수 있단 말인가? 아마존의 숲속에 숨겨져 있는 금광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아프리카의 산에 파뭍혀 있는 다이아몬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방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과 팔에는 금과 다이아몬드가 걸려 있는데, 일평생 충성과 희생의 삶을 산 내 아내의 몸에는 다 떨어진 천이 걸쳐져 있을 뿐이다. 이 땅은 악마의 뒤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지어졌단 말인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도움을 청하는 환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시중을 들었던 아내는 단 한번의 낙도 누리지 못한채 일찍 가버렸는데, 악마의 자식들은 여전히 살아 남아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지구의 환경을 즐기고 있다. 정녕 이 지구는 악마와 그의 자식들에게 주어졌단 말인가?
이 심원한 의문에는 두가지 대답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 현재의 지구보다 나은 세계가 의인들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대답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다면 진리도 없을 것이고, 진리가 없다면, 우주를 지탱케 하는 법칙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법칙이 없다면, 우리 자신도, 우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한, 하늘과 땅이 내 눈 앞에 존재하는 한,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두번째 대답 속에 나를 만족시키는 진리가 있다. 그렇다! 성경은 예수께서 재림하신 다음 천년 이후에는 이 지구(땅) 위에 의인들만을 위한 새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지구는 의인들의 손에 주어진다. 그 날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한 주인이 될 의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의인들은 고통과 슬픔을 참으면서 그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 세상에는 두가지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는 금과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정직과 진실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이다. 악인들은 페르시아의 진주를 구하고, 오를로의 보석을 구하지만, 의인들은 온유와 겸손으로 짜여진 의의 옷을 구한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 벧전 3:3,4.
지구의 이곳 저곳에 뭍혀 있는 금과 은은 얻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그것을 얻고자 하는 자는 지옥불을 맞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버리는 자는 결국 그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늘 예루살렘의 진주 문으로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하늘 도성의 금으로 된 거리를 걷기 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진주와 금을 버리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아름다운 진주와 금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시련의 장소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 속 깊은 동기까지 금과 은에 의하여 시험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시련의 장소이다.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린 사람만이 이 세상을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며, 그 결과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설적 진리이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겪은 고통과 시련 역시 이 진리의 공식에 의하여 이해될 수 있다.
나를 회복시키신 하나님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늘 창자가 끊어질듯한 아픔과 후회가 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그녀의 미소에 불쾌한 얼굴로 대답하였고, 그녀의 희생에 충분한 감사의 표시를 하지 못했던 사실이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심지어는 그녀가 병자들을 간호하다가 몹시 지쳐서 내게 위로를 청했을 때에도 나는 그녀의 연약함을 나무라면서 거친 말로 대꾸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유순하고 충성스러웠지만, 나는 이따금 냉정하고 성실치 못했다. 이것을 생각하면, 나는 땅에 부끄럽고 하늘에 부끄럽다. 보답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미 사라졌다. 용서를 빌어도 받을 사람이 없으며, 가슴을 치며 뉘우쳐도 소용없게 되었다. 요즘도 이러한 회한이 밀려오는 밤마다 나를 지옥불 속에서 매질한다.
어느날 나는 그녀의 무덤에 찾아가서 한송이 꽃을 꽂는데, 어디선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왜 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우느냐? 너는 지금도 아내에게 보답할 기회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너를 위하여 충성하였던 것은 어떤 보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에게 바치는 자신의 희생과 충성을 통하여 네가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이 진보되기를 원해서 였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진정으로 아내의 희생과 사랑에 보답하고 나의 일을 하기 원한다면, 네 이웃과 국민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봉사하라. 집이 없어 거리를 헤메는 노파는 네 아내이고 또한 나이다. 가난에 쫓겨 몸을 치욕과 돈에 파는 소년는 네 아내이고 또한 나이다. 네가 그들을 위로한다면 바로 네 아내와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 비탄과 후회에 잠겨 있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빨리 네 집으로 돌아가 네 아내와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라!”
나는 아내의 무덤을 제비꽃이나 장미꽃으로 장식함으로써, 내 자신이 위로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의 무덤에 선하고, 진실되며, 진리로 거룩하게 된 나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아내의 죽음 때문에 나는 이전보다 더욱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하여 믿음도 잃었고, 하나님도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회복시키셨다. 시인 쉴러가 말한 “진정한 용사는 홀로 있을 때에 더욱 강해진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메리 모파드 여사의 죽음 이후에 탐험가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의 암흑대륙에 더욱 깊숙히 뛰어들었던 것처럼, 나 역시 아내의 죽음 이후에 진리의 조화를 좀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 이 눈물의 세상을 떠나 아내와 다시 만나는 그 날이 될 때까지, 나는 아내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하늘 집을 향한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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