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 한국 문단 처방전 있나… 김규나 소설가
이념·역사·문화전쟁 어떻게 이길 것인가
21일 오후 2시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제2회 미디어 리터러시 세미나 주제 발표 전문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책에서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글을 쓰는 동기를 네 가지(순전한 이기심·미학적 열정·역사적 충동·정치적 목적)로 나누었다. 그중, 우리나라 모든 예술 문화 부문, 특히 한국 문단에서 가장 큰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의도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정치적 목적에 있다.
현재 한국 문단의 이념적 뿌리는 마르크스 공산주의에서 시작한 정치적 올바름이라 불리는 정치적 PC이고 가깝게는 반대한민국·북한 추종·친북 정서다. 북한과 김일성에 대해 호의를 갖지 않은 작가가 없고,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에게 적의를 갖지 않은 작가도 본 적 없다.
한국 문단, 즉 작가단체 ‘한국작가회의’를 움직이는 실천적 뿌리는 사르트르의 ‘참여문학’ 정신이다. 사상가이자 소설가이며 프랑스 최고 지성으로 알려진 사르트르는 맹렬한 공산주의자였다. 그의 사상적 스승으로 알려진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마르크스 추종자로서 ‘진보적 폭력’, 즉 미래 건설을 위해 필요한 폭력은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의 폭력 시위 모의한 ‘작가회의’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의 사상을 더 강력하게 계승하며 ‘문학이란 사회의 변혁을 가져오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참여문학을 주창했다. 사르트르의 참여문학, 이것이 바로 한국 문단을 광장으로 뛰어나가게 한 힘의 원천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많은 폭력 시위를 모의하고 참여한 것도 ‘작가회의’다. 사르트르는 또한 ‘6·25 전쟁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한국의 도발로 벌어진 전쟁’이라고 주장했는데 한국 문단은 그의 이러한 주장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문단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한국 출판계 최고 권력을 가진 창비(창작과비평)의 실소유주, 좌파 원탁회의의 두뇌라고 알려진 백낙청이다. 창비에서 출간되는 ‘세계문학’ 발간사에는 ‘물질만능과 승자독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면서 현대사회는 더 황폐해지고 삶의 질은 크게 훼손되었다’며 자유시장경제와 현대 문명을 퇴치해야 할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창비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출판사는 창비와 백낙청이 추구하는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들은 세계적인 고전문학을 좌파적 시각·사회주의적 세계관으로 번역한다.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조차 독재정권을 비판한 작품이라는 해설서를 붙여 공산주의 사회를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 ‘배급’이라고 옮겨야 할 단어를 ‘분배’라고 번역해 독자에게 혼란을 준 민음사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뒤에는 사회주의 혁명은 이상적이지만 권력자가 부패해서 실패했을 뿐이라는 식의 해석이 붙어 있다.
실패의 원인은 타락한 독재욕이라는 것인데 ‘독재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한국인의 머리에는 독재자는 곧 이승만·박정희로 연결되도록 세뇌되어 왔다. 그렇게 얼마나 자주 독재정권을 운운하며 스탈린 공산주의 비판 문학들이 독재자 비판으로 둔갑, 유명인들의 신문 사설마다, 지성인들 칼럼마다 인용되어 왔던가.
최인훈 ‘광장’부터 정유정 ‘7년의 밤’까지
더 큰 문제는 한국문학의 흐름이 대중 독자의 사고를 어떻게 움직여 왔느냐 하는 것이다. 1960년 최인훈 ‘광장’이 발표되었다.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받고 연좌제로 미래가 막혀버린 이명준은 새로운 희망을 찾아 월북하게 되고 은혜를 만나 사랑도 하지만 결국 더 큰 환멸을 느끼다가 6·25를 맞이한다. 공산당 장교였다가 포로가 된 그는 남한에서 살래, 북한에서 살래,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그는 중립국 행을 택한다. 그러나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몸을 던진다.
이 소설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북한도 문제가 있지만 남한이 더 나쁘잖아, 남한에 동조하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겠다며 남북 분단 문제를 본격적으로 왜곡하기 시작한 초창기 대표적인 소설이다. 최인훈은 2018년에 사망하기 전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재의 판결문이 ‘우리 현대사 최고의 명문장’이라고 평가했다.
1978년에 나온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산업화·자본주의는 악이라고 문학적으로 규정하는 데 성공한 소설이다. 국민 모두가 도시로 나와 공장에서 가발 만들고 신발 만들고 남의 나라 전쟁터와 사막과 광산을 뛰어다닐 때였다. 그러니 오죽 고생이 많았을까.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에 의한 빈부 차, 그로 인해 소외된 빈민층에 대한 연민을 확대시키고 자본주의는 악이다, 물질주의는 혐오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을 지른 소설이 바로 난쏘공이다.
1986년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12·12 그리고 5·18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가 독재정권 프레임을 넘어 민주화 투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던 때였다. 그 가운데 ‘태백산맥’은 반공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던 대한민국의 사고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공산당은 나빠’에서 ‘전쟁이 나쁜 거야’로, ‘공산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형제끼리 싸워야 하는 전쟁이 슬픈 거야’라고 사고의 방향을 바꿔 놓은 것이다. 같은 민족이라는 주장으로 친북 정서를 확장시키고 한 핏줄을 갈라놓았다며 반미감정을 보편화시켰으며, 반공에서 반전으로 사고 체계를 바꿔놓으며 반공사상을 낡고 부끄러운 것으로 폐기 처분 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작가는 ‘아리랑’으로 반일 감정을, ‘한강’으로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지성인의 상식이라는 틀을 탄탄히 구축했다.
1990년대 한국소설은 과거는 무자비한 독재 시대, 현재는 민주화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대한민국을 집요하게 부정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였다고 끌어내린다. 산업화에 소외된 개인과 피해의식을 키우는 동시에 은희경·전경린·신경숙·공지영 등 여성 작가의 소설들이 나오면서 △가부장제 비판 △전통 가정 파괴 △페미니즘이 본격 태동한다.
2000년대는 황병승 시인의 ‘여장 남자 시쿠코’가 상징하듯 신선하다는 풍조 위에 기존의 전통을 본격적으로 파괴하는 시기였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처음부터 대놓고 들여온 건 아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기본 정·기존 문·보편적 개념·긍정적 가치관 등을 천천히 파괴해 갔다. 그즈음부터 소설 문법의 해체 작업도 본격화되었다. 서사가 있고 문법이 맞고 논리 정연한 인과를 통해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소설은 한물간 구시대적 작법이라고 문단에서 철저히 배척되었다.
인과와 기승전결을 가진 스토리를 배제하고, 문법과 서사를 파괴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 거짓과 진실을 뒤섞어 놓은 상태에서 오직 부정적 감성만을 채워 넣은 한국문학이 가져온 가장 큰 해악害惡은 개인의 사고思考 능력 상실이다. 문법이 없으니 술술 읽히지 않고, 인과因果나 기승전결이 없으니 추리할 수 없으며, 스토리가 없으니 재미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소설이나마 읽었던 독자의 수를 현저히 감소시켰고, 책을 읽는다 하는 독자들조차 자기 생각 없이 작가의 주장과 평단의 해설을 따라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2010년대에는 철거민의 고통을 그린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정유정의 ‘7년의 밤’이나 ‘28’처럼 사회 불안·공포·분노를 집요하게 이야기하는 소설들이 주목받았다. ‘너, 무섭지? 화나지? 널 그렇게 만든 게 자본주의야. 독재 보수정권이야. 그러니 분노해. 우리 함께 부숴버리자!’ 라며 피해자의 분노 정서를 키웠고 세월호·촛불 집회의 불씨를 지폈다.
분노와 불안에 장악된 한국소설
분노와 불안으로 장악된 한국소설을 꾸준히 읽어왔든 읽지 않게 되었든, 그 결과는 참담하다. 독자는 소설 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삶에 대한 이해와 사고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 결과 문학을 통해 개인이 저마다 세울 수 있었던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졌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포용, 사회적 규범의 중요성과 거짓을 혐오하고 진실을 존중하는 마인드를 모두 상실했다.
‘김일성이 을지문덕·세종대왕보다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한 황석영은 1989년부터 1991년 사이에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