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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참봉은 똥줄이 탄다. 보름이 지나면 거름을 내고 우수 경칩을 넘기면 쟁기질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동네방네 소문을 내놨건만 머슴 하겠다고 찾아오는 놈이 한놈도 없는 것이다. 그날도 민 참봉은 농사 걱정에 오금이 저려 뒷짐을 지고 주막으로 향했다.
“주모, 여기 탁배기 한대포 올리고, 무슨 소식 없어?”
“누구 하나 참봉어른댁에 가겠다는 사람은 없구먼요.”
상달에 가을걷이를 하고 나면 주인이 머슴에게 새경을 주고 그해를 끝내는데 인심 후한 집은 새경을 더 얹어주고 옷도 한벌, 버선·신발까지 챙겨준다. 그런데 민 참봉네는 나가는 머슴마다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누가 민 참봉네 집 머슴을 살겠다고 하겠는가! 민 참봉이 타는 오장육부를 식히려고 탁배기 한사발을 더 마시고 빈 술잔을 깨져라 툇마루에 박아놓고 주막을 나섰다.
한 장 터울이 지났을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머슴들이 민 참봉네 대문을 두드렸다. 서로 오겠다고 난리를 쳤다. 노회한 민 참봉이 농사일이 급하다고 아무놈이나 한놈을 덥석 물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삼년 전에 시집갔던 민 참봉네 무남독녀가 시집에서 쫓겨나 친정으로 왔다는 것이다. 동네 우물가에서 떠돌던 소문이 날개를 달고 주막으로 저잣거리로 날아다녔다. 머슴들의 심보는 뻔했다. 옛말에 홀아비는 혼자 살 수 있어도 과부는 혼자 살 수 없다 했겠다. 삼년 동안 남자 맛을 본 새파란 여자가 친정으로 돌아와 독수공방을 지킬 수 있을까? 뒤꼍 별당에 처박혀 있다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다. 타오르는 무남독녀의 정염을 식혀주다 가시버시가 되면 장차 참봉네 전 재산이 자신의 품에 들어올 것이다. 머슴들의 흑심은 바로 이것이다.
지난해 동짓달에 민 참봉과 대판 싸우고 나간 대근이가 명태 한축을 들고 민 참봉을 찾아왔다.
“참봉어른, 설날 세배도 못 오고 죄송합니다. 만수무강하십시오.”
넙죽 큰절을 올렸다. 삐딱하게 보료에 기대어 앉은 민 참봉이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자네 어쩐 일인가?” 하며 눈을 내리깔고 바짝 마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대근이는 “이집저집 알아봤지만, 참봉어른 집만 한 곳이 없어요. 정도 들었고…”라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말끝을 흐렸다.
머슴들이 서로 오겠다고 아우성이니 자연히 새경이 내려갔다. 대근이가 선수를 쳤다.
“참봉어른, 나락 두섬만 받겠습니다요.”
민 참봉이 사랑방 문을 열고 “지필묵을 가져오고 간단한 술상도 차려오너라” 하고 외쳤다.
시집에서 쫓겨왔다는 무남독녀가 허리끈을 잘록하게 동여매고 수밀도 엉덩이를 흔들며 개다리소반에 술과 안주를 들고 와 대근이를 보더니 “오라버니, 오랜만이에요”라며 눈웃음을 쳤다.
새경 약정서를 쓰고나서 덕담을 나누며 술잔이 오갔다. 이튿날부터 대근이는 뼈가 부서져라 일했다. 논밭에 거름을 내고 춘분이 되자 쟁기질을 했다. 틈틈이 뒤꼍의 별당을 기웃거리다가 어느 날 밤, 부엌에서 목간하는 외동딸의 발가벗은 몸을 보고 대근이는 숨이 넘어갈 듯 용두질을 했다. 석달이 지나 봄이 기울어질 무렵 젊은 남자가 오더니 외동딸을 데려갔다. 그 이후로 민 참봉의 외동딸은 두번 다시 보이지 않았다. 시집에서 쫓겨났다는 헛소문을 내고 석달 동안 친정살이시킨 게 떡밥이라는 것을 대근이 알아차리고 주막에 가서 땅을 치며 술을 퍼마셨지만, 약정서를 어기면 곤장에 옥살이라 한숨으로 머슴살이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집 안에만 박혀 있는 뒷집 청상과부가 민 참봉을 찾아왔다. 빚이 쌓여 집이 넘어가게 됐다며 눈물로 하소연하는 청상과부에게 민 참봉은 집문서를 받고 보증을 서줬다. 석달 후 돈놀이 사채업자에게 민 참봉이 돈을 갚아주고 열두칸 기와집을 차지하게 됐다. 오년 전에 상처하고 홀아비로 지내온 민 참봉은 뒷집 집문서를 청상과부에게 돌려주고, 집을 되찾은 청상과부는 결국 수절을 허물고 치마를 벗었다. 정염의 봇물이 터진 청상과부를 민 참봉의 나이는 감당할 수 없었다. 온갖 보약을 지어먹고 매일 씨암탉을 고아먹어도 청상과부는 한숨뿐이다.
어느 날 밤, 청상과부가 집값을 다 갚았노라고 선언을 했다. 그다음부터는 뒷집에 갈 때마다 돈을 싸들고 갔다. 그렇게 봄·여름·가을이 지나고 가을걷이를 한 후 대근이는 새경을 받아 떠나고 민 참봉이 어느 날 밤 오랜만에 돈을 싸들고 뒷집 대문을 두드리자 초롱을 들고나와 대문을 연 사람은, “허억” 민 참봉은 자신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비단 마고자를 입은 대근이 빙긋이 웃으며 삐거덕 대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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