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로. 우리땅 우리길-140620
광화문 세종로 세종대로 광화문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
KBS 라디오 방송
(전.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서울경기신문 `황토마루 `육조거리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육조거리와 황토마루
- 서울 종로구 광화문 근처 -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서울 광화문 바로 앞에서 서울역 사거리(서울 중구)의 길이 세종대로이다. 전에는 광화문 바로 앞에서 세종로 네거리까지를 세종로라 했고, 그 남쪽부터 남대문까지는 태평로, 남대문에서 서울역까지는 남대문로였는데, 새주소를 매길 때 이 길을 모두 아울러 세종대로(길이 2.1km)라 하였다.
광화문과 세종로 네거리 사이의 넓은 길은 일제 때에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 했다.
세종로 네거리 바로 남쪽이면서 지금의 덕수궁 북쪽 언덕, 즉 조선일보사 사옥 뒤편으로는 누런 흙 빛깔의 등성이가 있었는데, 여기를 황토마루(황토현.黃土峴)'라 했다. 이곳의 서쪽 마을을 동령골(동령동.銅嶺洞)이라 하였는데, 이는 황토가 구리빛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자하문 터널 앞쪽에서 흘러오는 청계천도 이 황토마루 때문에 물줄기의 방향이 바뀌었다. 북악산과 청운동의 한 골짜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청계천은 남쪽으로 계속 흘러내리다가 이 황토마루를 만나 동쪽으로 방향으로 돌려 동대문 남쪽으로 빠져 나간다. 다시 말해서, 황토마루 언덕은 청계천의 남행(南行)을 동행(東行)으로 바꾸어 놓았다.
황토마루 북쪽 지금의 세종로는 조선이 건국된 후 양쪽으로 들어선 큰 관청들로 인해 한성의 심장부가 되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남쪽 양편으로 의정부, 육조, 중추원, 사헌부, 한성부 등의 관아 건물들이 있어 이를 '육조거리'라 했다.
육조거리는 정치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의 시위 현장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민심의 공감이 분출되는 장소로, 개인의 억울함이 목소리로 달래지는 한풀이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도학정치를 펴던 조광조(趙光朝)가 모함으로 옥에 갇혔을 때 성균관을 비롯한 장안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대궐문(광화문)을 밀치고 쳐들어가 대궐의 병사들과 큰 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가면서 광화문을 향해 한없이 눈물을 뿌리기도 했다.
육조의 벼슬아치들이 왕래하던 거리여서 시골의 현감이나 군수들이 올라와 행렬을 하기도 했다. 큰 양산에 자신들의 치적을 적은 베헝겊을 주렁주렁 메어달고, 삼현육각을 앞세우고 '○○고을 ○○○의 만인산 나들이요!' 하며 이 거리를 수십 차례 왕래하곤 했었다. 이를 '만인산(萬人傘) 행렬'이라 했는데, 자신들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쇼'였다.
8.15 광복 때는 많은 시민들이 이곳에 몰려나와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그 후에 4.19나 6.3 학생 데모도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날이 오면 / 육조(六朝) 앞 넓은 길을 / 울며 뛰며 뒹굴어도 / 그래도 넘치는 기쁨을 못 참겠거든 /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추어 메고 / 행렬에 앞장서겠노라. <시인 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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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라디오 방송
2012년 2월 28일 배우리 회장 출연
(진행자 김홍성 아나운서) 120228
1. 오늘은 어느 길 어느 동네 이야기를 해 주실까요?
광화문과 세종로의 황토마루 이야기를 해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약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라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
2. 도로명으로는 세종대로라고 하죠? 세종대로는 어디서 어디까지 이르는 길인가요?
광화문 삼거리(서울 종로)에서 서울역 사거리(서울 중구)를 말하는데, 총거리는 2.1km가 된다. 전에는 광화문 바로 앞에서 세종로네거리까지만 세종로라 했고, 그 남쪽에서부터 남대문까지는 태평로, 남재문에서 서울역까지는 남대문로였는데, 새주소가 생기면서 이 길을 모두 아울러 세종대로라 하게 되었다.
3. 세종대로 중에도 광화문과 세종로 네거리 사이가 매우 넓은 길인데, 옛날에는 이렇게 넓은 길이 아니었을 텐데---
일제 때에 이곳을 지나는 길이름을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 한 후부터 '광화문(光化門)'이란 이름으로 불러오더니 지금가지도 이 일대의 통용 지명으로 굳어져 있다. 단지 하나의 문(門)에 불과하던 이름이 광역 지명처럼 돼 버렸다. 이름으로 친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문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곳의 정식 길이름은 '광화문 사거리'가 아닌 '세종로 사거리'이다. 서울시에서 붙여 놓은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 이 네거리를 지나는 버스들도 모두 '세종로'가 아닌 '광화문'이란 이름을 달고 지난다. 엄밀히 말해서 광화문으로 가자거나 지난다고 한다면 경복궁으로 가자거나 아니면 그 문을 통과한다는 뜻일 텐데.
택시 손님들도 이 일대를 거의 모두 '광화문'이라고 한다던데, 이 근처에 와서 다시 광화문 어디냐고 물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물음을 던져 주어야 하지 않을지?
"광화문 어디냐고 하셨는데, 광화문이라는 문(門)의 대들보냐 주춧돌이냐 그걸 묻는 겁니까?"
4. 세종로 네거리는 서울의 가장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근처 땅이름이 뭐였을까요?
세종로 사거리 일대는 조선시대엔 토박이 땅이름으로 '황토마루'라고 불렀다. 지금의 덕수궁 북쪽 언덕, 조선일보사 사옥 뒤편이 누런 흙 빛깔의 등성이로 이루어졌기 때문인데, 그 아래쪽에 큰길이 나고 서울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으면서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 일대까지 '황토마루'라 하게 되었고, 한자로는 '황토현(黃土峴)'이라고 하였다. 황토마루의 고개 서쪽을 동령골, 한자로는 동령동(銅嶺洞)이라 하였는데, 이는 황토가 구리빛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서울 도성 안의 중심 냇줄기인 청계천도 이 황토마루 때문에 크게 휘었다.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지금의 자하문터널 근처인 청운동의 한 골짜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청계천은 남쪽으로 계속 흘러내리다가 큰 언덕인 이 황토마루에 막혀 동쪽으로 방향으로 돌려 동대문 남쪽으로 빠져 나간다. 다시 말해서, 청계천은 황토마루의 안내(?)를 받아 성 안의 중심 지역에서 남행(南行)하다가 동행(東行)으로 바뀌게 되었다.
5. 듣기로는 세종로의 양쪽으로는 옛날에 관청들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육조거리'란 이름도 그래서 나왔다죠?
조선이 건국되면서 지금이 세종로는 한성의 심장부가 되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남쪽 양편으로 의정부 · 육조 · 중추원 · 사헌부 · 한성부 등의 관아 건물들이 있어 여기를 '육조거리'라 하였다. 이 육조거리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동서로 난 간선도로와 만나는 지점까지를 이르는 이름이다. 이 육조거리의 남쪽이 바로 황토마루였다.
조선시대엔 광화문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한성부(漢城府), 호조(戶曹)가, 서쪽으로는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가 차례로 있었다. 이들 관청은 지금의 국무총리실, 내무부, 서울시청, 재정경제원, 외무-교육부, 국방부, 법무부, 건설교통부에 해당하여, 나라의 모든 정치가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육조거리의 첫머리인 의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내부(內部), 경기도청(京畿道廳), 치안국(治安局) 등으로 쓰이다가 헐리어 최근까지 빈 터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 그 자리에 육조거리를 본뜬 시민공원이 조성되고 있다.
6. 최근에 와서는 여기서 시위도 자주 하곤 하는데, 옛날에도 시위나 집회 같은 것이 있었나요?
예부터 중요한 관청들이 몰려 있던 육조거리는 정치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의 시위 현장으로 곧잘 활용되기도 했다. 때로는 민심의 공감이 분출되는 장소로, 개인의 억울함이 목소리로 달래지는 한풀이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도학정치를 펴던 조광조(趙光朝)가 모함으로 옥에 갇혔을 때 성균관을 비롯한 장안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대궐문(광화문)을 밀치고 쳐들어가 대궐의 병사들과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고,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가면서 광화문을 향해 한없이 눈물을 뿌리기도 했다.
육조의 벼슬아치들이 왕래하던 거리여서 시골의 현감이나 군수들이 올라와 행렬을 하기도 했다. 이를 '만인산(萬人傘)행렬'이라 했는데, 큰 양산에 자신들의 치적을 적은 베헝겊을 주렁주렁 메어달고, 삼현육각을 앞세우고 '○○고을 ○○○의 만인산 나들이요!' 하며 이 거리를 수십 차례 왕래하곤 했었다. 자신들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쇼'였다.
개화기에는 침략의 야욕을 품은 일본과 러시아가 이 거리에 귀족과 대관의 자제들을 모아 자기네 군복을 입히고, 자기네 구령으로 자기 나라 훈련을 경쟁적으로 시킴으로써 자기들의 세력을 과시하기도 했었다.
이 훈련 모습을 보고, 당시의 시인 이건창은 '육조거리에 미로랑의 발자국이 낭자하다'고 한탄을 했다. '미로랑'이란 서양 오랑캐를 이름이다.
8.15 광복 때는 많은 시민들이 서울역과 함께 이곳에 몰려나와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기도 했고, 그 후에 4.19나 6.3 학생 데모도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
그 날이 오면
육조(六朝)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을 못 참겠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추어 메고
행렬에 앞장서겠노라.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
(전.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