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만나는 황홀 3
차 은 량
길이 전하는 메시지
며칠 여행을 할 시간이 생겼다. 새해가 가까운 12월 하순의 초입이었다. 깜짝 선물처럼 느닷없이 주어진 시간이어서 어딜 갈까 잠시 허둥거렸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상처럼 떠나는 알뜰한 여행에 대해 알고 있었고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짬짬이 정보를 수집해두고 있었다.
도법스님, 수경스님과 함께 생명평화탁발순례단(2004~2008)에 참여했던 지리산의 이원규 시인이 “사람이 다니는 지리산 길을 만들자”고 제의해 시작되었다는 지리산길. 언제든 그 길을 걸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2004년 3월 1일, 노고단에서 순례 첫 발을 내딛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을 배웅하며 나는 또 얼마나 거기 합류해 걷고 싶었던가. 순례 첫날 일정을 마치고 천은사에 도착한 도법스님은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그러셨단다. “길이 없어. 차만 다니지, 사람이 다닐 길이 없더라고.” 지상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도보순례를 시작한 첫날, 도법스님의 소감에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지리산길의 태동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생명평화탁발순례에 잠시라도 참여하고 싶었던 소망은 3년 만에 이루어졌다. 충북환경련으로부터 청주에 도착한 순례단의 하루 일정을 안내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약속한 날 아침에 오송성당에 묵고 있는 순례단과 합류해 미호천변을 걸었다. 미호천이 걷기에 좋은 길이었다거나 특별히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인근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광활한 하천부지는 온통 쓰레기장이었다. 밭에서 나온 폐비닐과 농약병들, 페트병들이 타다만 채 뒹굴고 있고 여기저기 헌 냉장고며 망가진 소파 같은 가재도구들이 버려져있었다. 물가의 버드나무들은 더 흉측했다. 큰물이 지나갈 때 떠내려 온 폐비닐들이 나뭇가지마다 목을 매달고 꼬리를 흔들며 아우성을 하는 지옥의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었다. 도법스님과 함께 우리는 모두 속울음을 삼키며 쓰레기 강변을 걸어 나왔다.

36번 국도를 지나 594번 지방도로부터는 인도가 없었다. 면사무소 앞과 교원대학교 앞에, 그리고 강내초등학교 앞에 잠깐 인도가 있을 뿐 왕복 이차선 도로변은 한 사람 지날 폭도 되지 않았다. 큰 차들이 지나가면 멈춰 서서 차가 뿜어내는 바람을 피해야 하는 길을 순례단과 함께 걸어 궁현리 은적산을 올랐다. 은적산 오르는 길도 시멘트 포장길이었다. 산 정상에 단군성전이 있어 단군과 관련한 지역행사의 편리를 위해 포장된 길이었다. 그날 저녁 숙소에서 순례단과 함께 절 명상을 하며 ‘사람이 다니는 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산 같은 무게로 내 가슴에 얹혀졌다.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길, 지리산길은 많은 경비를 들여 새롭게 만든 길이 아니다. 전남과 전북, 경남의 3도에 걸쳐 지리산을 안고 있는 마을과 강, 산과 들을 잇고 있었던 옛길과 수렛길을 찾아내어 연결한 길이다. 수십 년 전 마을 주민들이 재 너머 오일장을 오가던 길이며 땔감을 하러, 혹은 고사리를 뜯으러 다니던 길이었다. 중장비를 쓰지 않고 곡괭이와 삽으로 다져놓은 그 어여쁜 길들은 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사찰과 과수원과 다랑논, 텃밭을 지날 수 있도록 인근 주민들이 살 같고 피 같은 자신의 땅을 내 준 길이었다. 지리산을 십여 차례 종주하면서 내심 지리산의 속 갈피를 보고 싶었던 내 오랜 바람은 사람이 다니는 길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생각을 먼저 실천한 이들의 그렇게 많은 헌신과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지리산 둘레 800리를 잇는 지리산길. 현재까지 이어진 다섯 구간을 닷새에 걸쳐 걷기로 하고 꾸린 배낭은 의외로 단출했다. 현지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박집이나 마을식당에서 식사와 숙박을 해결하기로 한 공정여행이다 보니 짐이 많을 이유가 없었다.
새벽열차를 타고 남원으로 가는 길의 흥분은 조치원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양한 행색의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서 풍기는 고단한 삶의 냄새들이 새벽 어시장의 싱싱한 생선비린내를 닮아있었다.
남원역에서 내려 외평마을부터 걷기 시작했다. 외평마을을 지나 내송마을로 들어서면서 산길이 시작되었다. 때맞춰 함박눈이 내렸다. 서어나무 고목이 숲을 이룬 개미정지는 지리산길의 시작을 알리는 환영의 메시지 같았다.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태백산, 소백산… 큰 산만이 산인 줄 알고 걸었던 오만과 편견은 내송마을 뒷산의 이름도 생소한 개미정지에서 한 순간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오래 전 소꿉동무들과 손잡고 걷다가 불쑥 들어서게 된 낯선 숲 같았다. 평평 눈이 내리는 서어나무 숲 한가운데 서서 휘둥그레 주변을 살피는데 묵지근한 흥분과 두려움이 어깨를 감싸며 달려들었다.

인근 주민들이 오일장을 가기 위해 지나다녔다는 구룡치에는 안개가 진을 치고 있었다. 게다가 사무락다무락이라니. 어떤 일을 바란다는 사망(事望)과 다무락(담벼락의 사투리)이 합쳐진 말, 사무락다무락은 이곳 사람들의 기원과 소망이 담긴 돌탑이다. 거기 돌 하나를 얹어놓고 잠시 합장했다. 차를 타고 무심히 지나가는 길이 아니라 짐을 지고 땀 흘리며 두 발로 걸어가는 길, 그 길은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모아 소망을 빌며 지나가는 길이었다.
폭설이었다. 발목에 휘감기는 눈과 안개를 헤치고 덕치리로 나왔을 때는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는 산중마을, 불빛이 새어나오는 농가 창고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하룻밤 재워주세요.” 꿈속에서도 해 본 적이 없는 말이 내 입에서 새어나갔고 창고 안의 여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 마당을 지나 안채로 안내한 여자는 다시 창고로 돌아갔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몸을 씻고 다탁 위에 놓인 고구마와 귤을 먹었다. 날이 저물어 돌아온 주인여자를 도와 저녁상을 차리고 전라도 김장김치와 동치미, 고추장아찌와 돼지내장찌개로 저녁을 먹는 산중의 밤, 창밖엔 소설처럼 눈이 내려쌓였다.
간밤 무슨 일이 있었나 싶게 날이 갰다. 푸짐한 아침밥상을 물리고 설거지를 마친 후 사례를 하고 배낭을 꾸려 현관을 나오는데 주인내외가 따라 나왔다. 가는 길에 차나 한 잔 하라며 지폐 한 장을 꺼내 주머니에 넣어주는 주인여자의 등 뒤로 흰 눈을 뒤집어 쓴 산등성이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노치마을 솔숲을 지나 만난 덕산저수지. 겨울풍경의 절정을 거기서 보았다. 아니, 길은 내내 풍경의 절정이었고 내내 눈물겨웠다.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지상에 이렇게 남아있다는 것을 눈으로, 가슴으로 확인하는 길이었다. 푸드득 새들이 날고 노루가 뛰었다. 태고의 물빛이 시퍼렇게 살아 억새와 바위 사이를 흐르는 시내, 냇둑을 걸을 때 함께 걸어주던 마을 아주머니들. 정신지체로 시집갔다 소박맞고 돌아온 딸을 아기처럼 어르고 달래며 민박을 치는 노부부와 수성대 앞에서 움막 같은 매점을 차려놓고 컵라면을 팔고 있는 노부부의 선한 눈빛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혼자 걷나 부네. 멋지네. 그려, 여자도 그렇게 강단이 있어야 하는 것이여. 조심해서 잘 가시오.” 운서마을 야산에서 나무하던 아주머니는 두 손으로 나발을 만들어 응원을 보내왔다. 동강마을의 강가 민박집은 식당을 겸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는데 중년의 남녀 한 쌍이 들어왔다. 숙박을 하겠다고 방을 정한 이들이 식사 후에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주인여자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던가. 그들의 불륜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칼날 같은 서릿발이 허연 입김을 불어대고 있는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 방곡마을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을 지날 땐 이른 아침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책임을 맡은 한 부대가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명으로 수백 명 양민을 학살한 현장이었다. 시대를 잘못 만나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이 돌림자 순으로 나란히 누워있는 묘역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한 남자가 저만치 붙박인 듯 서서 움직일 줄 모른다. 그도 울고 있는가. 생면부지의 그 남자와 보온병의 커피를 나누어 마셨다. 남자도 지리산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들을 지나 그렇게 닷새를 걸었다. 기계인간이 마법에서 풀려나 사람으로 회생하는 시간이었다.
여행을 다니기 전, 두려움과 정보의 부족으로 쉽게 길을 나서지 못하던 나날이 있었다. 삼십대 중반이었다. 집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누군가 나를 길 위로 이끌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나는 꿈같은 풍경 속에 서 있었다. 강원도 44번 국도변의 냇가였다. 억새와 너럭바위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 앉아 버너에 물을 끓여 커피를 끓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길을 나선 스스로가 대견하고 장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튿날은 치악산을 올라갔다. 자연 속을 혼자 걷는 황홀함에 진저리를 치며 산길을 걸었다. 정상에서 만난 느닷없는 우박도 나를 위한 신의 은총 같았고 산을 내려오다 넘어져 커다란 돌 위에 개구리처럼 납작 엎어진 일조차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신의 특별한 메시지만 같았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번번이 확인한다. 길이 내 손에 쥐어준 이야기들을. 자연이 내게 건넨 말들을. 그것은 느리게, 천천히 걸어야만 들을 수 있는 아름답고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2010. 3. 21
첫댓글 진짜 산꾼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로 가슴을 데워서 일하러 나갑니다 돌아와서 다시 읽어보렵니다
님의 글을 보면서, 걸으며 음미하신 맛을 흠쳐 나도 같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가치를 가져 행복해 보입니다.
제주 올레길을 걷고, 이번 강릉 바우길을 걸으며 나는 산티아고 길을 접었다. 마음만 갖고는 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함께.
예전에는 육체적인 것들을 하대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그것이 한 때의 객기였음을, 나이 들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 중 하나였음 이었다. 나는 나의 몸이 내게 하는 말에 귀기울이고 들으려고 한다.
저도 지금 고민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하니까 " 그거 나도 한번 해 볼까" 였거든요, 좀 더 자신에 대한 반성과 객기(?)를 잠재울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주여,자연이 들려주는 말들과 길이 내손에 쥐어 주는 메시지들을 담을 수 있는 열린 귀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