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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16절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돕는 선교사 사역 – 왜 그렇게 목숨 걸고 하겠는가?
더 편하고 자기 안위와 가족의 행복을 사는 길이 얼마나 많은데
중국의 공안과 북한의 공안의 위협의 불안감에서 늘 떨어야 하고 그것도 본인 혼자가 아닌 가족들까지
희생시키는 것같다 – 그리고 피살당하는 경우도 있다. –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나도 이해할 수 없다 – 왜 그런지
그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누가 알겠는가?
한국 최초 교회는 소래 교회다 그리고 서울의 최초 교회는 정동 교회다.
인삼장수 형제가 황해도에 소래교회 세워
"이곳 사업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척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9월 27일) 저녁에 14명의 교인으로 한국 땅에서는 첫 번째 그리스도교회 조직을 완료했으며…."(1887년 언더우드의
보고서)
"우리는 사방 8자 되는 방에 모여 한국식으로 앉았다. 내가 영어로 기도하고
시작했으며 우리는 마가복음 1장부터
읽었다."(1887년 10월 아펜젤러의 일기)
19세기 후반 미국 북장로회와 북감리회가 각각 조선에 파견한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7년 가을 조선에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했음을 알리는 기록을 남겼다. 이들이 교회 설립이라는 감격을 맛보기까지는 조선에 도착한 후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두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이었다. 조선의 쇄국정책이 풀리면서 의료와 교육 분야에 선교사의 입국이 허용되자 조선 선교를 자원한 것이다. 각기 다른 교단에
속했지만 일본에서 만난 이들은 그해 3월 31일 나가사키항을
출발한 상선 미쓰비시호를 함께 타고 부산을 거쳐 이날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다. 당시 아펜젤러는 26살, 언더우드는 25살이었다. 한 살 차이였던
이들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키며 선교의 씨앗을 뿌리고 교육·의료사업에 앞장섰다.
조선 정부의 전교(傳敎) 금지 방침이 느슨해지자 두 선교사는 서울 정동에 나란히 교회를 설립했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가 정동
선교사 사택에서 14명의 신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현재의 새문안교회를 창립했고, 아펜젤러 역시 그해 9월에 정동에 벧엘예배당(현재의 정동제일교회)을 마련하고 10월 9일에 첫 공개예배를
드렸다. 이 두 교회는 신자 수에서 한국 개신교계의 80%를 넘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모(母)교회'로 불린다.
한편, 이들 외국인 선교사들이 도착하기 전 조선에는 조선인들이 설립한 개신교 공동체가 있었다.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1883년 5월 세워진 '소래교회'였다. 소래교회 설립의
주역은 중국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하던 서상륜·서경조 형제였다. 서씨 형제는 1880년대초 만주에 와 있던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통해 개신교를 접했다. 1882년 한글 성경 등 개신교 서적을 숨겨 들어오던 이들은 검문에 걸려 투옥됐다 탈출한 후 친척이
살던 황해도 장연으로 옮겨와 소래교회를 설립했다.
서씨 형제의 열정은 이 마을을 중심으로 서북지방에 개신교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 1886년 무렵에는 약 70여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도 있다. 서상륜은 언더 우스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
1887년초 언더우드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본격화할 때 그를 찾아와 세례를 받고 새문안교회 설립 후 주축이 된 것도 소래교회 교인들이었다. 또 서경조는 1901년 문을 연 평양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해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 중 한 명이 됐다. 경기도 양지에 있는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정에는 1896년 증축된 소래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이 복원돼 있다.
1866년 9월 2일 – 토마스 선교사 평양 대동강에서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다 순교함
1872년 만주에서 선교한 존 로스 –John Ross- 그코틀랜드 성서공회 윌리엄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만주와 인전한 조선인 선교 계획했고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조선어로 성경을 간행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 심양 동관 교회 – 1889년 10월 22일 설립
그래서 만주 심양 봉황성의 고려문에서 이응찬과 서상윤과 백홍준, 이성하를 만나 한국어을 익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매제 매킨타이어과 함께 1879년 4명의 한국인에게 최초로 세례를 주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서상륜 / 서경조 형제
서상륜 -1848-1926 –은 만주에서 홍삼 장사하던 상인이었다. 그런데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뻔 했는데 만주 선교사 매킨타이어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존 로스는 이들과 함께 3년간 1882년 누가 복음과 요한 복음 / 1883년 사도행전 / 1884년 마가 복음과 마태복음을 각각 한글로 번역 출간했다.
그리고 번역한지 5년만에 1887년 최초의 한극 신약 성경인 - 예수 셩교 젼서 –가 탄생했다.
-존 로스 선교사는 중국 생활 중 아내 –M.A스튜어트-와 자녀를 잃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사명을 내려 놓지 않았다.
그리고 존 로스 선교사와 성경 번역한 서상윤과 서경조 형제에 의해서 한국 최초 교회 – 소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응찬 – 그는 조선과 중국을 오고가며 장사는 무역상이었다. 압록강에 배를 띄우고 물건을 중국에 팔러 가는 중에 풍랑은 만나 모든 재산을 압록강에서 잃어 버리고 목숨만 간신히 구한 채 중국 땅에 들어갔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과 허탈감으로 땅만 보며 오락 가락 하고 있었다.
이때 론 로스 선교사가 고려문에서 무역상들이 드나드는 곳에서 어깨를 꾸부정하게 하고 땅만 쳐다보고 걷고 있는 이응찬을 발견하고 자신의 한국 과외 선생님으로 모셨다.
이응찬은 위험 부담이 큰 이 직업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존 로스의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 아니라 미래 선교사들을 위한 한국 기초 교재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 교재 이름은 Corea Primier 였다. 그 다음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돈 때문에 선교사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나중에는 한국 기초 교제와 성경 번역과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믿음이 생기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1978년 로마서와 히브리서 마저 번역하고 번역한지 11년만에 1887년 최초의 한글 번역 성서인
-예수 셩교 젼서 –가 완간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응찬은 이 성경이 완간 된 것을 볼 수 없었다. – 이 작업이 끝나기 5년전에 콜레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응찬의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 번역한 성경을 어떻게 조선에 가지고 들어갈까 고민 고민하고 있었다
=조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이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다 거리게 되면 총살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꾀를 낸 것이다. 한글로 번역한 성경을 한장 한장 다 뜯어서 그것으로 여자 아니 머리 땋듯이 새끼줄을 꽈서 자기 봇짐의 가방 끈으로 만들어 조선에 가져갔다고 한다. 이렇게 생명 걸고 조선에 성경을 뿌렸고 그 덕분에 북한 의주에 교히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사도행전 1장 8절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최초의 한글 성경이 번역되었던 계기는 – 조선인 이응찬이 사업이 쫄딱 망하고 낙심하여 중국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존 로스 선교사님을 만나는 은혜 – 그리고 선교사님의 한글 선생이 되겠다는 것도 오직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미 성령님의 계획하심이 있었다.
이때 존 로스 선교사님은 아내의 죽음으로 가슴이 무너져 무기력했던 때였다고 한다.
이렇게 두 볼품없는 사람을 골라 성령님은 선교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 할렐루야 -
이런 일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의 사역입니다.
백홍준 – 호는 북산 – 1874년 새로운 문명을 배우고 체험하기 위해서 만주 고려문을 방문하다 영국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 타이어를 만난 계기가 되어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1876년 이응찬과 이성화와 김긴기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최초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은 한문 성경을 한글 성경으로 번역하였다. – 심양의 문광 서원에서 최초로 간행하였다.
1887년 –예수 셩교 젼서 – 로스 번역 성서 – Ross Version – 이라고 불린다.
만주 서간도의 한인촌에 전도 75명의 신자가 생겼다.
1883년 조선 의주 / 삭주 / 강계 등에서 전도한 끝에 10여면 신자를 얻고 최초의 개식교 집회가 만들어졌다.
1887년 9월 언더우드가 14명과 새문안 교회를 창립할 때 서상륜과 함께 최초의 장로로 추대되었다.
1889년 의주에 언더우드와 함께 압록강에서 33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베루는 일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리고 1890년 의주에서 신앙을 지도하였고 그 다음해 1891년 마팻 선교사 순회 전도를 주선하는 등 외국인 선교사들의 선교 동역자이며 길잡이 역활을 하였다.
1892년 평안 감사 민병석의 적개심을 받아 체포 투옥되어 목에 칼을 쓰고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몸이 쇠약해져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이성하 –
평안북도 의주 출신 – 최초 세례 교인 – 1874년 만주 고려문 시장을 찾앗다가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어 친구인 백홍준 , 이응찬 , 김진기 등과 함게 우장으로 가서 매킨타이어 선교사와 교제하였다.
4청년은 1876년 신앙 고백과 최초 세례 교인이 되었고 존 로스 목사님과 한글 성서를 번역하게 되었다.
1879녕 요한복음과 누가복음 1882년 가을에 출판하였다.
1887년 신약 성서 –예수 셩교 젼셔 –를 출간하였다.
1888년 봄 출간된 복음서를 조선으로 반입하여 전도 사업을 펴고자 시도하였으나 도중에 압록강 대인인 구련성의 어느 여관에 투속하였을 때 주인의 신고로 공안에게 복음서를 빼앗기고 성경을 불때워 압록강에 뿌렸다고 한다.
이 사실을 들은 존 로수 목사님은 – 성서가 던져진 강물을 마시는 조선인들은 생명수을 얻을 것이며 불에 탄 성서의 재는 조선 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될 것이라 – 라는 말을 남겼다.
이성하는 다시 마태복음 요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 등 5권의 복음서 100부를 가지고 조선에 입국하여 의주와 서울 등지에 비밀리에 순회하면서 전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정부의 외교 고문격으로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존 로스 목사의 서신을 전달해 인천 세관에 압류된 6,000부의 한글 성서를 찾아내 전도 사업을 하게 된 공을 세웠다.
또 그의 부인은 1889년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서 거행된 압록강 33인 세례식에 참여하여 백홍준의 부인과 한국 교회 최초의 여성 세례 교인이 되었다.
###- 롬 9장 12-13절 –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결론 - 마5장 16절 –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다.
로마서 9장 6-8절 – 약속의 자녀
어떤 뜻인가? – 이것을 예정 교리에 이용하는데
창25장 23절 – 두 민족이 나뉠지라 – 하나님은 사랑이라는데 편애하셨나요?
창27장 26-28절 – 복을 뺏어서 받을 수 있나요?
에서가 사용한 말이다. – 뺏어 갔다.
그럼 에서는 어떤 복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나?
-에서가 빼앗겼다고 하는 복은 어떤 복인가?
히브리스 12장 16절 –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이렇게 볼때 – 에서가 생각하는 복이 무엇인가 - 대충 이해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 – 좋은 대학 / 좋은 직장 / 사업 잘 되고 / 돈 잘 벌고 건장하고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것 – 에서가 원하는 복은 이런 복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거절했다는 것은 세상 복을 원했다는 뜻이다.
세상 복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다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하나님의 겻을 나눠주는 복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뭐예요? – 영생을 양식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이다.
그것이 뭘까요? =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복이다.
-모든 것을 덮어 줄 수있는 폭 넓은 사랑 – 바나바의 마가를 사랑으로 기회를 주는 마음 / 누가의 겸손
-이것이 복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겠다는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