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0월이 지나고 11월에 접어들었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자전거 페달을 밟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세월의 흐름이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순간처럼 탄지지간(彈指之間)의 말이 새삼 실감난다. 이번 라이딩은 경강선 개통 이후 처음으로 여주를 찾아가는 길이다. 단순히 강변길을 달리는 라이딩에서 벗어나 여주 곳곳에 자리한 역사와 문화유적을 찾아보고 그 속에 깃든 이야기를 음미해 보기로 했다. 아침 8시, 이매역에 일곱 명의 대원들이 모였다. 8시 36분 경강선 열차에 몸을 싣고 여주를 향해 출발했다.
오랜만에 모델한(한영성)이 5개월 만에 다시 합류했고, 기상관계로 지난번 함께하지 못했던 오벨로도 동행해 모처럼 일행의 분위기가 한층 밝았다. 열차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농촌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평화로웠다. 산자락 아래 옹기종기 자리한 마을과 가을걷이를 끝낸 들녘은 고요했지만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는 농촌 풍경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농촌의 아름다움을 지켜가는 일은 건축가와 마을 사람들의 몫이겠지만, 농촌에서 자란 탓인지 나는 언제나 흙냄새 나는 옛 농촌 풍경이 그립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은 스산하고 황량했고
산자락의 푸르던 초목도 계절의 순리를 거스르지 못한 채 누렇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여주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 25분경이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바람마저 제법 쌀쌀했다. 첫 목적지는 세종대왕릉이었다. 소양천을 따라 페달을 밟다가 해장국집에 들러 아침 공복을 채운 뒤 영릉로를 달려 세종대왕릉에 도착했다.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소현왕후가 잠든 곳이다. 세종의 능은 원래 광주 헌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1469년 예종 때 지금의 여주로 이장되었다. 세종대왕이 다스린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손꼽히는 문화의 황금기였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냈고, 국가의 의례와 제도를 정비했으며, 과학.의학.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국토를 개척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종대왕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백성을 위한 글자인 훈민정음의 창제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종의 애민정신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에 자리한 영릉을 바라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역사의 숨결처럼 느껴젔다. 세종대왕릉에서 비포장 송림길을 따라 약 700m를 달리면 효종대왕릉이 나온다. 이곳에는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왕비 인선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자리하고 있다. 세종대왕릉에는 수많은 탐방객이 찾아왔지만 효종대왕릉은 비교적 한산했다. 병자호란 당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봉림대군은 8년만에 귀국했지만 형 소현세자는 세상을 떠났고 결국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었다.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추진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1659년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능 앞에 서니 한 인간의 삶뿐 아니라 한 시대의 아픔과 국가의 운명이 함께 떠오르는 듯했다. 오전 11시 45분경 효종대왕릉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입암에서 남한강변 자전거길로 접어들자 풍경이 완전 달라졌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위에는 오리떼가 무리를 지어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모델한이 새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 이름이 뭐냐?" 엉뚱하면서도 천진난만한 한마디에 일행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함께한 벗의 농담하나가 차가운 가을 공기 마저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U자형 나무데크 자전거길을 빠져나오자 영월근린공원이 나타났다. 영월루에 올라 잠시 쉬면서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남한강을 굽어보는 영월루에서 바라본 강물은 잔잔했고 강 건너 풍경은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머금고 있었다. 영월근린공원 남한강변에는 여주 8경 가운데 하나인 마암(馬巖)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바위에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솟아났다고 하여 마암이라 불렀으며, 이로부터 여주의 옛 지명인 황려(黃驢)가 유래했다고 한다. 여주의 지명은 골내근현에서 황효, 황려, 여흥을 거쳐 오늘날의 여주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암은 여주라는 지명의 역사적 뿌리를 간직한 장소인 셈이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도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시로 남겼으며, 이색, 서거정, 정약용 등 당대의 문인과 묵객들도 이곳을 찾아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강변의 작은 바위 하나가 수백 년의 문학과 풍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여주대교를 건너 우회전 한 뒤 남한강변길을 따라 달렸다. 여주박물관과 황포돛배 나루터를 지나 신륵사 입구에 들어서자 형형색색의 단풍이 우리를 맞았다. 붉고 노란 단풍이 절집과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자전거를 잠시 세워놓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연이 만들어낸 색채 앞에서는 아무리 좋은 카메라도 그 아름다움을 완전히 담아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신륵사는 여주시 봉미산 자락에 자리한 고찰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확실한 근거는 고려 말에는 나옹헤근이 머물렀던 사찰로 유명했고, 한때 200여 칸에 이르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에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기도 했다. 신륵사에는 용마에 얽힌 전설도 전해진다.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았고 말이 순순히 제압되었다고 한다.
이때 대사의 신통력으로 말을 다스렸단느 의미에서 신륵사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강월헌에 올라서니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강물 위에는 백조 유람선이 한가롭게 떠있었고, 가족과 연인들이 배를 타고 강변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고즈넉한 산사와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그리고 가을빛이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평화로웠다. 신륵사 후문을 빠져나와 신륵로를 달리고 금당교를 건넜다. 이어 강문로와 강천로를 지나 가야리에서 남한강변 샛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오늘 라이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간 가운데 하나를 만났다.
나무턱으로 이루어진 시멘트 급경사 오르막길이었다. 경사가 20도 이상은 될 만큼 가팔랐다. 그런데 쉐도우수는 힘 하나 들이지 않는 듯 거뜬하게 언덕을 올라갔다. 10년 넘게 자전거 실력을 갈고 닦은 결과라고 한다. 그 모습을 본 바이크 손대장은 곧바로 한마디 했다. "따라하지마." 단호했다. 웃음이 나왔지만 그 말에는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무리한 오르막 도전은 심장에 부담을 줄 수 있으니 괜한 경쟁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함께 오래 라이딩을 해온 벗이기에 할 수 있는 진심어린 충고였다. 마침내 강천보에 도착했다.
황포돛배의 모습을 형상화한 강천보는 남한강의 풍경과 어우러져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주변에는 강천섬과 수변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어 여주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강천보를 뒤로하고 마지막 목적지인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를 향해 다시 페달을 밟았다. 명성황후 생가는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전통 한옥의 기와지붕과 마당, 그리고 주변의 작은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져 한층 운치가 있었다. 기념관에는 명성황후의 생애를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명성황후는 16세의 나이에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이후 대원군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고종의 친정체제를 강화하고 국정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등 외세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정치적 격변이 이어졌고, 왕실을 둘러싼 갈등과 위협도 끊이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이용해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려 했지만 결국 일본의 강한 반감을 사게 되었고,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에게 참혹하게 시해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황후는 황후로 추존되었고, 장레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생가를 둘러보며 한 시대를 살다간 한 인간의 삶과 조선 말기의 격동적인 역사를 되새겨 보았다. 명성황후 생가를 나와 여주역으로 향하는 길에 맛고을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돼지갈비살에 소주와 맥주를 곁들이며 권커니 잣거니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고 역사유적지를 돌아다닌 뒤라 그런지 음식 맛이 더욱 좋았다. 부드러운 돼지갈비살이 입안에서 살살 녹자 대원들은 하나같이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날 모델한이 한턱을 내어 더욱 즐거운 식사자리가 되었다. 여주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50분경, 경강선 열차에 몸을 싣고 이매역으로 돌아왔다.
이매역에 도착하자 모델한이 맥주 한 잔 더하고 가자며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지만, 각자의 발길이 바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정겨운 벗들과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서면 세상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견권지정(繾綣之情)의 벗들과 함께 페달을 밟으며 자연을 만나고, 유적지를 찾아 역사를 배우고, 느끼며 견문각지(見聞覺知)한 하루였기에 마음은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