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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깜부기
信天함석헌
선악의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는 마태복음 13장 24〜30절에 있는 예수님의 깜부기 비유를 주의해 읽을 필요가 있다. 거기는 여러 가지 깊은 교훈이 들어있다. 〔우리 지금 쓰는 번역에는 가라지라 되어 있으나, 가라지 보다는 깜부기라 하여야 옳다. 영어 번역에도 tare 라 한데도 있고 그저 weed(잡초)라 한데도 있으나 뉴잉글리쉬 바이블에는 darnel이라 했는데 그것이 옳다. 일본 번역에는 독맥(毒麥)이라 되어 있는데 독맥(毒麥)은 우리말로는 깜부기라는 번역이 옳다. 콘사이스 英韓辭典에 darnel을 독보리라 했지만 그것은 아마 일본말의 독맥(毒麥)을 직역한 것 아닌가 한다. 우리말에 훌륭히 깜부기란 말이 있다. 가라지는 보리가 아니라 조밭에 나는 것인데 제법 조 비슷하나 잘 보면 구별할 수 있고, 보리밭에는 가라지란 것은 없고, 깜부기가 있다. 깜부기는 대는 같은 대여서 이삭이 팰 때까지는 조금도 다름이 없으나 일단 이삭이 나오면 그것은 결실을 하지 못하고 새까만 가루로 되어 날아가 버린다. 그 깜부기 가루에 균이 있어서 그것이 금년 보리알에 가 붙으면 눈에는 뵈지 않으나 그 알을 다음 해에 종자로 뿌려서 나면 자랄 때까지는 다름없는 보리나 밀인데 이삭이 패면 깜부기가 돼버린다. 깜부기는 보리 밀 종류만 아니라 수수 옥수수에도 있다.〕
첫째 사람의 본 바탈은 선하다는 것이다. 性善이냐,性惡이냐 하는 토론은 맹자 이래 오늘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벌써 시비는 판명이 된 것이다.
악은 우리말로는 모딘 것, 된것, 미운 것인데, 그것은 어딘 것, 된 것, 좋은 것, 고운 것이 있고서야 나오는 말이다. 첨부터 모딜고, 안됐고, 나쁘고, 미운 것이었다면 거기서 어딜다, 됐다, 좋다, 곱다는 나올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씨를 뿌린 것에 비할 수 있다” 할 때의 씨는 하나님의 씨, 곧 하나님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선하자고 악에 대해서 싸우는 싸움인데, 그 싸움에서 우선 먼저 할 것은 본래 사람은 어질었는데, 잘못되어서 악이란 것이 있게 됐다 생각하는 일이다. 그래야 이긴다. 싸워가지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첨부터 이겨 놓고, 이긴 것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동서고금의 모든 어진이들의 말이 다 일치한다. 다만 거기 반대하는 것은 남을 지배하자는 욕심에 눈이 번한 사람들이다. 사람은 첨부터 정치를 한 것은 아니다.
惡이란 글자의 뜻이 그것을 증명 한다. 惡은 亞로 본래 썼는데 그것은 사람의 등뼈가 꼬부라진 것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곧은 것이 근본이고 꼬부라진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말의 “모딜 악”하는 것은 못됐다는 말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亞는 처음에는 보기 싫은 것 흉한 것, 미운 것을 가리키는 글자였는데 후에 그것을 전수히 도덕에 부쳐서만 쓰게 되면서 心을 더했다. 그것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히브리 말에도 악은 본래는 병이라 는 뜻의 말이었다고 한다. 사람의 사람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곧곧이 일어서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서는 등뼈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등뼈가 꼬부라진 것이 무엇보다도 더 흉칙하게 밉게 못되게 보인다. 그러면 그것을 정신의 등뼈에 적용하면 惡으로 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정신적으로 등뼈가 굽은 것이 무엇일까? 제가 하늘의 아들인 것을 잊고 허리를 꼬부려 누구에게 절을 하는 일이다. 惡은 지배 피지배에서 시작됐다. 그러기 때문에 그 모든 惡의 근본인 그 병을 고치려면 “나는 본래 곧곧했느니라”하는 생각을 가지는 일이다.
둘째는 악과 싸우려면 마음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라고 했다. 몸에는 잠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정신은 자는 때가 있을 수 없다. 안식일의 근본 뜻은 놀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깨자는 데 있다. 그것은 놀고 쉬기 위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 예수는 “내 아버지는 지금까지 일하시고 계시다”했다. 항상 깸은 스스로 하는 자만이 할 수 있다. 몸은 자는 것이고 그 잠을 틈타 잘못이 생긴다.
셋째 악의 씨는 우주의 처음부터 있었다. 知彼知己 戰百勝이라, 이기려면 내 원수가 누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생명이 있던 첨부터 생명의 원수는 있었다. 이것은 말로는 설명 못하는 것이다. 말은 본래 우리끼리의 일을 처리해 나가기 위한 것이지,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진리를 다루기에는 말은 너무도 부족하다. 그래서 “입씨름” 이라 하지 않던가? 입씨름으로는 악을 못 이긴다. 생명의 원수는 말을 하기 전부터 있었고, 말이 다 끊어진 후에도 있다. 우리도 참을 말하려 할 때는 입은 저절로 닫긴다.
하여간 이것은 영원한 싸움인 것을 아는 것이 처음부터 필요하다. 그래서 많이 겪어본 바울은 “우리가 대항해서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의 악신들과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했다. 우리가 옳은 줄 알면서도 우리가 흔히 맥이 빠져 버리는 것은 대적을 우리 같은 유한한 사람으로 착각하는데 있다. 처음부터 그것은 우주적인 세력이란 것을 알고 들어가야 한다. 좀더 깊이 말한다면 내가 싸우는 대적은 하나의 인간으로 알았을 때 나는 나 자신을 모른 것이었다. 나는 결코 썩어질 것만으로 된 존재는 아닌데, 불쌍한 인간을 건져주려고 주피터의 불씨를 도둑해 내려 왔다가 주피터의 횡포의 손에 걸려 코카서스 산의 바위에 매여 있으면서 영원의 고통을 당하는 프로메테우스가 그 폭군을 향해서 이 세계에는 “너와 나뿐”이라고 한 것은 인간으로서는 가장 큰 말이라 할 것이다. 스스로 하는 것만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싸워서 무슨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가 목적이요 이김이다.
넷째 악은 사이비(似而非)한 것, 비슷하면서도 아닌 것이다. 철저하게 말하면 생명에 대하여는 모든 것이다 원수지만, 그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나와 비슷해서 긴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것이 정말 나를 망하게 하는 원수다. 그러므로 공자가 향원을 극력 배척했고 예수께서 누구보다도 바리새파를 싫어하였다. 악은 깜부기다. 나서 이삭이 나올 때까지 꼭 같은 밀인데 정작 알이 들 무렵에 가서는 깜부기로 나타난다. 그 목적은 나의 모든 후손을 다 썩혀버리자는 데 있다. 그것을 위해 이 순간까지 眞인듯,美인듯, 善인듯 가장을 하고 나의 진영 속에 파고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 승냥이가 문제 아니라 사람이 문제요 적국이 아니라 내 민족이 문제요, 종교 반대자가 문제 아니라 열심 있는 신자가 문제다. 싹이 날 때도 보리요, 잎이 피고 줄기가 설 때도 보리요, 나오는 이삭까지도 보리인 데, 알이 들 때 가서는 돌변해서 깜부기다. 깜부기면 그 한 이삭 속에 나의 전 선의 족속을 다 썩혀버릴 균을 가지고 있다. 폭탄은 한번 터지면 그만이지만 이 깜부기의 균은 영원 무한히 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기 때문에 “밭에 뿌린 것은 좋은 씨가 아닙니까? 그런데 깜부기는 어디서 생겼습니까?”했다. 벌써 늦은 것이다. 지금이 아니고 지난해 초 겨울 씨를 뿌릴 때에 알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주인이 “원수가 그렇게 했구나”한 것은 실패한 가운데 서 건져내 주기 위해 하는 말이다. 사람이 딴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다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원수가 거기 병균을 뿌려서 된 일이다. 그렇게 알아야 살아난다. 실패의 원인을 아는 것이 다음에 이기는 힘이다. 여기서 사람은 대개 실수한다. 악을 행한 것이 바로 내 앞에서는 그 사람으로 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을 없애버리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요 선이요, 나라 사랑이요 의라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그래서 이를 악에 대한 싸움은 사람에 대한 파쟁으로 변질된다. 그것이 바로 원수의 겨눈 것이다. 악의 근원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을 잘못 알았기 때문에 악에게 져 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사회투쟁은 사탄의 간첩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가장 열렬한 나의 동지로 알았던 자가 나를 잡아 사탄의 진영으로 넘긴다.
다섯째 우리 분수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종들은 “원수가 그랬구나”하는 말을 듣자마자 팔을 걷어들고 벌떡 일어난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버릴까요?”했다. 풋내기 열심이다. 대번에 무찔러 버려야지. 그러나 역사는 이 풋내기 열심, 무지한 애국심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만보산 사건 때 간교한 일본 군부의 선전에 넘어가서 “되놈”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어리석은 동족애를 발휘하지 않았던들 해방 후 만주에 있던 수백만 동포가 중국공산당에 그렇게 참혹한 복수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천황폐하 숭배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들 2차 대전에 그런 참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넓게 봐야하고 나라는 멀리 내다봐야 하는데 언제나 그것을 잘못 만드는 것은 풋내기 열심, 얕은 애국심이다.
여섯째 악의 뿌리는 못 뽑는다는 것이다. 흥분하는 종들과는 반대로 주인은, 차분히 나즈므라한 목소리로 “가만 두어라”했다, 주인답지 않은 말이다. 패배주의같다. 그렇지만 다음 말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들었던 주먹이 내려오고 고개를 숙여 기도하게 된다. “가라지 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주인이 말리는 것은 깜부기인 줄 몰라서도, 그것을 제해버릴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다, 다만 종들의 실력이 그것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제 분수를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분수가 무슨 분수냐? 인간이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악의 뿌리를 뽑겠다는 열심은 좋다. 그러나 그것은 저를 모르는 데서 나는 어리석은 열심이다. 인간으로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악의 근원이 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근원은 모든 것을 지은 그이만 알 수 있을 뿐이지 우리는 모른다. 노자는 여기 대해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한다. “악한 놈을 잡아 없애는 것은 하는 이가 있다. 죽임을 차지하는 그이가 한다. 그런데 그것을 제가 하겠습니다 자부하고 나선다면 그것은 마치 대목을 젖혀놓고 자귀질을 제가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대목이 할 자귀질 제가 하다가는 손 아니 다칠 놈 없지.” 세상의 종교가 치고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나서지 않은 것이 몇이나 되며 고금의 정치가 치고 나쁜 놈은 제가 다 없애버리겠습니다 하고 나서지 않은 것이 몇이나 될까? 사탄 곧 이 우주의 권세 잡은 자는, 바로 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조금 재주 있고 의분심 있는 놈에게 “네가 할 수 있지 않으냐”하는 깜부기 가루 같은 속삭임을 한다. 그래서 씨알이 먹을 것까지 당당히 가로채 먹으며 내가 대적을 단번에 무찌르고 이 나라를 악이 없는 이상적인 나라로 만들어주겠다 하면서 하나님도, 역사 법칙도, 세계 대세도 젖혀 놓고 나서는 것인데, 또 다른 놈이 그 꼴을 보고 젊은 용기에 저놈을 내가 단번에 없애버린다고 혁명 기치 들고 나서면 그것은 마치 깜부기 대를 대번에 뽑겠다고 만용을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깜부기는 두려워 하기는 커녕 잘됐다 하고 받아들인다. 왜, 깜부기는 그 억억만만의 균을 퍼쳐 명년의 밀밭을 왼통 깜부기 밭으로 만들잔 것이 원인데 이제 자기를 뽑는다고 건드리기만 하면 소원대로 그 가루가 온 밭에 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없애기 위해 보다 더 큰 폭력을 들고 나오는 것은 폭력의 근원인 악에게는 바로 원하는 바다.
일곱째 선과 악의 뿌리는 한데 얽혀있다는 것이다. 주인이 깜부기가 나쁜 줄을 알면서도 가만 두라 하는 것은 밀과 깜부기의 뿌리가 한데 얽혀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곡식을 상하지 않으면서 깜부기를 뽑을 수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 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저들이 제 하는 일을 모릅니다”한다. 예수를 죽이는 제 사파 바리새파만 아니라, 베드로, 요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 우주의 어쩔 수 없는 법칙이다. 병과 아이가 하나다. 병을 내 몰려다가 아기 생명을 상해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나님이 깊이 참는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을 사람의 말로하면 “셈든 아재비가 진다”는 것이다. 지혜를 얻은 사람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신다는 것도 이 때문이요, “사랑은 길이 참으며”하는 것도 이 뜻이다. 여기 지혜가 있고 신비가 있다. 그래서 간디도 악의 뿌리는 못 뽑는다. 그러나 우리는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임은 안다. 그러므로 우리 할 의무는 악을 이기고 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에 “선으로써 악을 이기라”한 말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말이다. 악을 이긴다 해서 사람 죽이는 방법으로 그것을 하면 그때에 이긴 것은 이김이 아니고 진 것이다. 아주 참패다. 홑으로 싸움에 진 것이 아니다. 나를 왼통 들어 악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다시 거듭 말하지만 뿌리 뽑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라 악과 싸우는 것이 우리 일이다. 이 세상이라는 밭에 양심을 가진 인간을 두어 정신의 농사를 짓게 하고는 거기 선의 곡식도 나지만 악의 깜부기도 나도록 두어서 영원히 밭을 갈며 농사하는 동안 우리 바탈이 다듬기워져서 하나님의 모습을 들어내는데 이르게 한다. 신앙이 아니고 학문적으로도 이미 유토피아주의가 잘못인 것은 지적이 된지 오래다. 만일 악 없는 시대가 온다면 그때는 역사의 마지막이다. 그때는 있을 수 없다. 배가 나가는 동안 물결을 일으키고 그 반동으로 더 빨리 나가듯이 선을 믿는 자는 처처 때때에서 악을 만난다. 만들어내기 때문에 있다. 그리고 그 악과 싸움으로 선을 실현한 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자유는 자유함에 의해서만 얻어지고 선은 선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악의 뿌리가 뽑혀지지는 않는다. 그것을 내 재주 내 힘으로 뽑으려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요 선이다. 그러므로 악이 아무리 사나워도 악을 없애 버리려 해서는 잘못이다. 악한 방법이 뭔가? 생명에 반대되는 행동 곧 폭력이다. 그러므로 가만 두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해결은 영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해결 될 것을 믿으니 우리게 의미가 생긴다. 다만 그 해결은 우리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 손에, 다른 말로 해서 우주 전체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지 현실의 일이 아니다. 또 일이라 해도 좋다. 믿는 것이 일로 나타나지만 나타나는 때는 그이만이 결정하지 사람이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겼다 하면서도 그때만은 하나님 자기 권한에 두셨지 아들도 모른다 했다. 모든 혁명가는 여기서 실패한다. 그들은 때를 자기가 아는 것처럼 말하고 그것으로 씨알을 속인다. 속이는 줄도 모르게 저도 속고 있다.
해결은 때에 있고 때는 믿어서만 안다. 때를 믿는 것이 아들의 아들 된 자격이다. 하늘나라의 아들 자격 가진 사람이야만 뜻을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실현할 수 있다. 이점에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직접하시는 일이 없고 반드시 사람(사람의 아들)을 시켜서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을 공경하기를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하게 하기 위하여서라고 한다. 이것은 선악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의 아들로서 반드시 명심하여야 하는 의무요 긍지다. (요한 5장 22〜230
우리는 하나님의 동산의 농부다. 우리는 선의 씨를 가꾸기 위해 끝없이 돋아나는 미운 풀과 싸워야 한다. 게으르지도 말고 자지도 말고 항상 깬 눈으로 하여야 한다. 그것은 땅에서 하는 농사같이 일하며 걸과를 얻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바위가 흐린 물속에 버티는 동안 제 자신을 하나의 형상으로 다듬어내듯이, 우리도 시키신 일을 하는 동안 우리 자신이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 그 열매는 너 따로 나 따로가 있는 것 아니다. 악을 아주 처분하는 방법은 따로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 손에 있는 것 아니고 전체의 하나 됨이 이루어지는 날에 가서야 알 것이다.
이제 우리 하는 싸움이 인권문제에 집중이 되게 됐다는 것은 우리 하는 운동이 촛점에 접근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악의 뿌리 못 뽑는다는 것은 선악이 서로 따로가 아니란 말이다. 선악이 따로가 아닌 것은 너와 내가 따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격에 둘은 없다. 네 인격, 내 인격하는 것은 아직 낮은 단계에서 하는 말이지 꼭대기에 이르는 날 우리는 서로 뚫어볼 것이요 뚫어보면 너도 나 도 없고 그저 한몸이 있을 뿐이다. 보기는 그날 가서야 보겠지만, 그날 가서 보려면 이제 산 아래서 싸우는 이 싸움에서부터 네 인격 내 인격, 선한 놈, 악한 놈이 따로 있지 않음을 믿어야 한다. 믿음으로만 봄에 이른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이는 늘 잘 사람을 건짐으로 사람 버림이 없고, 늘 잘 몬(物)을 건짐으로 몬 버림이 없다. 착한 사람은 못착한 사람의 스승이요. 못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의 감(資)이다. 그 스승 귀이 여길 줄 모르고 그 감 사랑 할줄 모른다면 지혜 있다 해도 크게 해맬I 것이다. 이것을 일러 일짬 묘한 것이라 한다.」(老子)
씨알의소리 1978년 6월 74호
저작집30; 16- 243
전집20; 5- 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