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6. 연중 제1주간 토요일 강론>
<마르2,13-17>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소련 공산당을 무너지게 한 것이 묵주기도라면, 폴란드 공산당을 무너뜨린 것은 “진리를 수호하시오, 선으로 악을 이기시오” 라고 한 신부의 외침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제르지포페일루스코” 라는 35세 폴라드 신부로 몇 년 후에 공산당에 의해 처참히 죽어갔지만, 사람들은 그의 정신을 따라 “우리는 당신을 용서한다. 우리는 당신을 용서한다” 라고 공산당 중앙 당사 앞을 지나갈 때마다 시위대가 외쳤던 것이지요. 그가 죽은 후에도 신도들은 그의 말에 끝까지 순종했으며 결국 공산당 정부의 몰락을 가져온 것도 바로 그 은총의 정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다교에서는 제자들이 스승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제자들을 뽑으시고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직접 뽑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신앙이 우리 인간 이성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전적인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지요. 주어지지 않으면 신앙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태6,17) 라고 밝히신 것처럼 신앙은 내 힘이 아니라 위에서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신앙은 구원에 필요한 초자연적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초대가 먼저 있고, 그에 따른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와 지성으로의 이해와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보증해주시니,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야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메야 할 낙하산을 준비한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가장 전문가이며 동시에 가장 친한 친구이면 다른 사람보다 더 안전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에 대한 증명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완전 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땅과 하늘 사이를 막고 있는 인간의 무지를 뚫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에고와 반대로 사랑은 밖을 향하기에 하느님을 닮아 있습니다.
신앙이 성장하려면, 복음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도와 정화를 통해 그분과 살아있는 관계에 머물러야 합니다.
신앙이 자라면서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천국의 큰 기쁨을 미리 맛보게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 지상에서 순례해 가는 목표인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의 기쁨과 빛을 미리 맛보게 됨으로 인해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1코린13,12), “그분을 있는 그대로”(1요한3,2)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됩니다.
이러한 신앙의 성장과 체험을 위해서는 기도와 정화를 해야하는데,
1)기도
(1)의식 차원
신뇌로 매일 복음을 2~10번 읽고,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하며 성령께 의탁하여 등장 인물이나 제 3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질문을 하며,
(2)무의식 차원
30초~1분동안 의식마저 내려놓고 침묵(기도),
2)정화
(1)무의식 차원
30초~1분 침묵하는 동안 무의식이 갑자기 올라오면,
(2)의식차원
깨어서 의식차원에서 그 무의식에서 올라온 형상을 예수성심께 봉헌.
무의식 차원이 아직 작업이 안 된상태로 1분이나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갔다면,
게의치 말고 기도중에 있었던 모든 것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3)생활속 기도와 정화
(1)정화
생활 안에서 기도중에 만난 예수님을 모시고 같이 생활하며 묻기도하고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2)기도
생활 안에서 나를 객관화 시켜서 기도중에 나를 바라보듯이 생활 안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나를 바라봅니다.
수시로 감사의 마음이 올라올 것입니다.
(3)감사한 마음으로 순간 순간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이 때 예수성심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뽑히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됨은 진리를 위하여 몸바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가야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때로은 아직 다 정화되지 않아 불완전한 나의 죄성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바오로 사도처럼 살을 찌르는 고통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악이란 은총의 부재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적 겸손이 결국 예수님께 끝까지 가게 하는 에너지이기에, 주님은 우리 부족함을 우리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로 지고가며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도록 허락해 주십니다.
당시에 죄인으로 불리운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이것 때문에 당신이 왔으며, 당신의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Mark2,13-17>
13 Once again he went out along the sea. All the crowd came to him and he taught them.
14 As he passed by, he saw Levi, son of Alphaeus, sitting at the customs post. He said to him,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15 While he was at table in his house,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sat with Jesus and his disciples; for there were many who followed him.
16 Some scribes who were Pharisees saw that he was eating with sinners and tax collectors and said to his disciples, "Why does he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17 Jesus heard this and said to them,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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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행복 가이드
관계 치유에서 중심이 되는 내용은 ‘용서’이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먼저 자신을 속박에서 해방시켜 준다. 용서는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분노와 미움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사실 용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할 일이 필요 없도록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I can do it
1.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서둘러 용서하자. 내가 먼저 치유 받을 것이다.
2.상대방이 실수를 하면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도록 노력하자. 그러면 용서할 일이 없어질 것이다.
3.남을 판단하지 말자.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란 이 세상에 없다.(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46)/
*폴란드의 기적
1983년 교황 바오로 2세는 아직 철의 장막이 건재하고 계엄령 기간 중이던 폴란드를 방문해서 거대한 옥외 미사를 집전했다. 교구별로 질서 있게 늘어선 구름떼 같은 인파가 포니아토프스키 다리로 행진해 운동장 쪽으로 세차게 나아갔다. 다리 바로 앞에서 길은 공산당 중앙당사 앞을 정면으로 통과하게 돼 있었다. 건물을 지나는 동안 행진하는 무리는 몇 시간이고 계속 한목소리로 제창했다.
“우리는 당신들을 용서한다. 우리는 당신들을 용서한다.”
몇 년 후, 설교를 통해 폴란드에 경종을 울려 왔던 35세의 신부 제르지포페일루스코가 시신이 되어 두 눈이 뽑히고 손톱이 뜯긴 채 비스톨라 강에 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번에도 천주교 신도들은 거리로 나가 “우리는 용서한다. 우리는 용서한다”고 쓴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다. 포페일루스코는 성당 앞 광장에 가득 모인 무리를 향해 주일마다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곤 했었다.
“진리를 수호하시오. 선으로 악을 이기시오.”
그가 죽은 후에도 신도들은 그의 말에 끝까지 순종했으며 결국 공산당 정부의 몰락을 가져온 것도 바로 그 은총의 정신이었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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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신앙이란 무엇인가요?
“신앙이란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생 동안 견뎌 내는 일입니다.” 카를 라너(1904~1984년), 독일의 신학자
“믿음을 갖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1224/1225~1274년), 도미니코회 수사, 이탈리아 신학자)
신앙은 알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다음과 같은 일곱 특징을 지닙니다.
1)신앙은 순전히 하느님의 전적인 선물이며, 우리가 진심으로 그것을 청할 때 얻게 됩니다.
2)신앙은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3)인간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할 때, 신앙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명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4)예수님이 신앙을 보증하시기 때문에 신앙은 전적으로 확신할 만합니다.
5)신앙이 사랑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불완전합니다.
6)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주의 깊게 경청하고 기도를 통해 그분과 살아 있는 관계에 머문다면 신앙은 성장합니다.
7)신앙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여줍니다.[153-165, 179-180, 183-184]
많은 사람들은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알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말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41)/
면 어떤 스카이다이버가 비행장 직원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낙하산은 확실하게 접어 놓으셨나요?”. 이에 대해 비행장 직원이 “아마 그럴 걸요.” 라고 성의 없이 대답한다면, 스카이다이버는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친구에게 낙하산을 접어 달라고 부탁한다면, 같은 질문에 친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물론이지. 내가 직접 접었으니까, 믿어도 돼!” 그러면 스카이다이버는 “그래, 널 믿어.” 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앎을 훨씬 뛰어넘는 확신을 뜻합니다.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아브라함을 약속된 땅으로 이주하게 한 믿음이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지탱해 주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인간 전체를 사로잡는 믿음이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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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신앙의 특성
신앙은 은총이다
->15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태16,17)라고 밝히신다.(갈라1,15-16; 마태11,25 참조).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으려면 먼저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도와 주셔야 하고, 또한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느님께로 회개시키시며,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진리에 동의하고 믿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계시 헌장, 5항)
신앙은 인간 행위이다
->154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과 내적인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믿는 것이 참으로 인간적 행위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자유나 지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관계에서조차 우리가 상호 일치를 위해 타인이나 그 의향을 믿고,(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혼인할 때처럼) 그 약속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 품위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신앙을 통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0)/
여 드러내고”,(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08)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일은 결코 우리의 품위를 해치는 것이 아니다.
->155 신앙 안에서, 인간의 지성과 의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협력한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움직여진 의지의 명령에따라,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2, a. 9, c: Ed. Leon.8, 37.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10 참조)
신앙과 지성
->156 계시된 진리들이 우리의 자연적 이성에 비추어 참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 신앙의 동기는 아니다. “스스로 그르칠 수 없고 우리를 그르치게 하지도 않으시는, 계시하시는 하느님 바로 그분의 권위 때문에”(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08) 우리는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적 동의가 이성에도 부합하도록,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내적 도움이 당신 계시의 외적 증거들과 함께 주어지도록 하셨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09). 예를 들어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기적(마르16,20: 히브2,4 참조), 예언, 교회의 확산과 그 거룩함, 그 풍요로움과 확고함은, “모든 이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계시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이며”(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09), 신앙의 동의가 “결코 정신의 맹목적인 작용이 아니라는 것”(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10) 을 보여 주는 믿음의 동기들이다.
->157 신앙은 확실한 것이며, 그것이 거짓 없으신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인식보다 더 확실하다. 물론 계시된 진리들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에 비추어 모(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1)/
호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자연적 이성의 빛이 주는 확실성보다 하느님의 빛이 주는 확실성이 더 크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171, a. 5,3um: Ed. Leon. 10, 373) “만 가지 어려움도 하나의 의심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존 헨리 뉴먼, ‘자기 생애를 위한 변호’(Apologia pro vita sua), c. 5, M.J. Svaglic 편 (옥스퍼드 1967), 210면)
->158 “신앙은 이해를 요구한다.”(성 안셀모, ‘프로슬로기온’, 서문: Opera omnia, F.S. Schmitt 편, 1권(에딘부르그 1946), 94면).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는 분을 더 잘 알고자 하며 그분의 계시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 한편 더 깊은 이해는 다시금 더 강하고 점점 더 사랑에 불타는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신앙의 은총은 “마음의 눈”(에페1,18)을 열어 줌으로써 계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한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계획 전체, 신앙의 신비, 신비들의 상호 관계, 계시된 신비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와 이루는 관계에 대한 이해가 포함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계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도록 당신의 은총으로 항구히 신앙을 완성시켜주신다.”(계시 헌장, 5항).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금언대로 “믿기 위하여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43, 7, 9: CCL 41, 512(PL 38, 258))
->159 신앙과 과학.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기는 하지만, 신앙과 이성 사이에 진정한 불일치는 있을 수 없다. 신비를 계시하고 신앙을 주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정신에 이성의 빛을 비춰 주시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시거나 진리가 진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4: DS 3017). “그러므로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도덕 규범에(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2)/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만물을 보존하시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사목 헌장, 36항)
신앙의 자유
->160 신앙이 인간적인 응답이 되려면, “인간이 하느님을 자유로이 믿고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억지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사실 신앙 행위는 그 본질상 자유로운 것이다.”(종교 자유 선언, 10항. 교회법 제748조 2항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시므로 인간은 이에 양심으로 메이지만 강제당하지는 않는다......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종교 자유 선언, 11항).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회개로 초대하시지만 결코 이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진리를 증언해 주셨지만, 반대자들에게 그 진리를 힘으로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의 나라는....진리를 증언하고 들음으로써 굳건해지며 사랑으로 넓혀진다.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으로 인간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신다.”(종교 자유 선언, 11항)
신앙의 필요성
->161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구원을 위하여 그분을 보내신 분을 믿는 신앙이 필요하다.(마르16,16; 요한3,36; 6,40 등 참조). “‘믿음 없이(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3)/
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고’(히브11,6), 하느님 자녀의 신분을 얻지 못하며, ‘끝까지 신앙을 간직하지’(마태10,22; 24,13)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12. 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c. 8: DS 1532 참조)
신앙의 항구함
->162 신앙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이 선물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훌륭한 싸움을 싸우시오. 믿음과 맑은 양심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파선을 당했습니다.”(1디모1,18-19). 신앙 안에서 살고, 성장하고 마지막까지 항구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신앙을 키워야 하며, 주님께 신앙을 키워 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마르9,24; 루카17,5; 22,32 참조). 이 신앙은 “사랑으로 표현”(갈라5,6) 되고(야고2,14-26 참조), 희망으로 지탱되며(로마15,13 참조), 교회의 신앙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신앙-영원한 생명의 시작
->163 신앙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순례해 가는 목표인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의 기쁨과 빛을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그때에 우리는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1코린13,12), “그분을 있는 그대로”(1요한3,2)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신앙의 축복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바라보지만, 그것은 장차 누리도록 신앙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는 놀라운(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4)/
것들을 이미 소유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성 대 바실리오, ‘성령론’, 15, 36: SC 17bis, 370(PG 32, 132).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4, a. 1, c: Ed. Leon. 8,44 참조)
->164 한편 지금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며”(2코린5,7),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1코린13,12) 하느님을 알 뿐이다. 우리가 믿는 그분께서 신앙을 비춰 주신다 해도 우리의 신앙은 종종 어두움 속을 지나기도 한다. 신앙은 시련에 처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흔히, 신앙이 우리에게 보장해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한다. 악과 고통, 불의와 죽음의 경험은 ‘기쁜 소식’ 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며, 때로 신앙을 흔들기도 하고, 유혹이 될 수도 있다.
->165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증인들, 곧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로마4,18) 믿은 아브라함, “신앙의 순례길에서”(교회 헌장, 58항)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그 무덤의 어두움을 함께함으로써(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 18항: AAS 79(1987), 382-383 면 참조) “신앙의 어두운 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 17항: AAS 79(1987), 381면) 에 까지 도달하였던 동정 마리아와 그 외의 많은 신앙의 증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봅시다”(히브12,1-2).(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5)/
->179 ‘신앙’ 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믿기(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9)/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180 ‘믿는다는 것’ 은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인간 행위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한다.
->183 신앙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주님께서 몸소 이렇게 확언하신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16,16).
->184 “신앙은 미래에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앎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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