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좋은 약은 쓰다는데 / 이임순
몸살기가 있다. 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쓰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눈을 질끔 감고 삼킨다. 물 두어 모금으로 쓴맛을 던다. 떨떠름한 맛이 가라앉는다.
몸살기가 있다. - 손전화가 울린다. 카톡에 낯선 방이 뜬다. 초대된 곳으로 들어간다. 전남대 경영전문대학원 11기 원우 회장이 역대 회장들을 초대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는 모양이다 .
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 역대 회장들이 둘러앉았다. 회의를 소집한 사람의 표정이 어둡다. 서로 분위기를 살핀다. 무겁게 말문을 연다. 총동문회 차기회장이 우리 기수 차례라고 한다 . 역대 회장을 지낸 사람만 자격이 있어 모임을 주선했다고 한다. 모두 벙어리처럼 가만있다. 총동문회 회장을 지낸 원우가 추천하겠다며 나를 지명한다. 이 무슨 가당찮은 말이냐며 여자를 총알받이로 내세운다고 펄쩍 뛴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추천한 이유를 말한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 원우를 아우르는 힘이 있고, 지역사회에서 활동을 많이 하여 기관과 주민과의 유대관계도 좋은 것을 꼽는다. 또한 발표 수업을 할 때 내용이 돋보여 능력이 인정되었고 당당함은 한 수 위였다고 한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적임자라고 한마디씩 한다. 지금까지 여자 한 적이 없었고, 더구나 골프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겠냐고 극구 사양한다. 일도 해 본 사람이 잘 한다며 내가 여자 원우들을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데리고 나들이 다녀온 것을 거론하며 누구도 그렇게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해도 먹히지 않는다. 하고 싶은 사람이 해야 활성화된다며 뜻이 있는 회원을 추천해도 막무가내다. 두 의견이 팽팽하니 투표로 결정하자고 한다. 한 가닥 희망이 보였는데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다짐만이 내 뒷심이다 .
쓰다. – 책임과 협조는 다르다. 차기회장은 회장 보조만 하면 되는데 회장은 총동문회의 모든 일을 떠안아야 한다. 그 시기가 금방 돌아온다. 미리 계획을 세우고 진행해도 착오가 생긴다. 틈이 더 벌어지지 않게 확인을 거듭한다. 총동문 골프대회를 치르려면 후원금이 있어야 말을 할 수가 없다. 내가 먼저 주머니를 연다.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원우들이 십시일반 보탠다 .
그래도 약은 먹어야 한다. - 다른 일은 얼마든지 알아서 하겠는데 후원금이 문제다. 이런 일은 회장이 나서야 한다고 압력이 들어오는데 남의 주머니 열기가 쉽지 않다. 입이 딱 달라붙는다. 전화를 걸었다가도 용건은 꺼내지 못하고 안부만 묻는다. 미루기만 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협조를 요청한다. 미리 해주어야 하는데 미안하다며 흔쾌히 수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들다고 다음 기회에 보자고도 한다.
눈을 질끔 감고 삼킨다. - 세상에 그저 생기는 것은 없다. 노력과 인내가 있어야 소득도 있다. 오죽하면 인내는 쓰다고 했을까. 계획한 일은 이루고야 마는 근성이 내게 있다. 허나 이것은 노력으로 되는 일이다. 지금은 그것에 설득력이 더해지고 상대방의 마음도 움직여야 한다. 어떤 이는 당신이 많이 내놓으면 될 텐데 이런 전화를 왜 하냐고 한다. 없던 깡다구가 생긴다. “세상을 살아 보니 남의 땅을 더 많이 밟기도 합디다. 선배님은 당신 땅만 밟고 살아갑니까?”하고 되물었다. 혼자 많이 하는 것보다 조금씩 힘을 모으는 것이 좋지 않냐고 자존심을 버리고 사정 조로 협조를 구한다. 완강하게 형편을 늘어놓던 이로부터 많이 못 해도 이해해 달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내 설득이 멈춘다.
물 두어 모금으로 쓴맛을 던다. - 짠돌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주머니를 여는데 나의 아부성 말도 한몫했다. 또 작전을 펼친다. “최oo 씨도 후원금을 하는데 선배님은 어쩌시렵니까?” 넌지시 말을 던져 놓고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기다리면“나도 자네를 봐서 20만 원 하겠네.”한다. 그러면 나를 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동문회 발전을 위해 10만 원 하라고 선심 쓰듯 말을 하면 그래도 뒤냐고 한다. 마음 보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 절반으로 줄어든 것에 호탕한 웃음을 날린다. 짠돌이도 하는데 당신은 가만있을 것이냐는 무언의 압박이 통한 셈이다.
떨떠름한 맛이 주저앉는다.- 오늘 내 임기 마지막 이사회를 했다. 부족함 탓하지 않고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웬걸, 어기찬 남자가 많아 여자가 어떻게 회장을 할지 걱정했다면서 그 누구보다 화기애애하게 잘 했다고 대선배님이 격려한다. 늘 깔끔한 옷차림으로 틈이 보이지 않던 선배면서 사회적 나이로는 후배가 가을문화탐방 때 당차게 운동회를 주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골프대회 때 후원금이 많이 들어온 이유를 알았다며 수고했다고 한다. 보기와 달리 다부지게 일하는 모습이 좋았다며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모두가 박수로 칭찬을 대신한다. 사무총장과 재무총장에게 공을 돌리니 이들은 옆에서 거들었을 뿐이라 한다.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했던가. 고생하고 잘했다는 격려가 이어지는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러고 보니 알게 모르게 격려하며 지지해준 동문에게는 고맙다는 인사를 자주 했는데, 쓴소리하거나 협조를 아낀 이한테는 마음을 닫은 것 같다. 그분한테도 좋은 약 주셔서 감사했다고 다음 주 이임하기 전에 인사하리라. 두루 경험한 지난 1년 동안 힘이 든 만큼 보람은 있다. 약을 잘 먹었나 보다.
첫댓글 원우회 회장도 하시고 여장부시네요.
몸살 약과 원우회, 대비가 특별합니다.
고맙습니다.
지난 학기에 다른 제목으로 한번 쓰긴 했는데 내 자랑하는 것 같아 망설이다 마무리 지으면서 썼습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 생각과 느낌 썼습니다.
오우! 색다른 구성에 글이 특별해지네요.
고맙습니다. 수필의 틀을 깨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