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고택(윤증고택) : 조선 중기 양반가옥
주소 :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성길 50
일자 : 2019. 9. 18
참가 : 차상학(해설). 김기흥. 민홍석. 이용우
논산 명재고택은 명재 윤증 선생 생전(1709년)에 지어진 곳으로, 조선 중기 전형적인 호서지방의 양반가옥을 보여준다. 안채를 중심으로 광채와 사랑채의 기능적 배치는 논산 명재고택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 옛 선조들의 건축적 지혜다. 특히 수납공간의 광채를 안채와 비겨서 배치함으로써 비, 바람, 햇빛 등 자연현상에 대비한 것은 주생활 공간의 세련된 지혜다. 이와 함께 남쪽 바깥공간에는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연못의 기법을 볼 수 있다.
명재 윤증은 1629년(인조 7년)부터 1714년(숙종 40년) 사이에 살다간 조선시대의 학자로 호는 명재이며, 본관은 파평인이다. 명재 윤증은 유계, 김집, 송시열 등 고명한 학자들에게 수학하였으나 아버지 노서 윤선거처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공부했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그리고는 산촌에 묻혀 학문과 덕을 쌓는 것에 전념해 당시 덕망이 높았고, 모든 선비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백의 정승"이라 블리웠다.
1682년(숙종8년)에 호조 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자 1709년(숙종 35년)에 임금이 "내 평생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경의 생각은 잠시도 잊지 않았거늘 경은 어찌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하며 우의정에 임명하고 사관을 보내 임명장을 전했지만, 14번의 상소를 올리고 끝내 사양했다.
1714년(숙종 40년) 병이 위독해지자 자손 및 제자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내가 죽은 후에 선비의 예절로써 장사 지내고 명정에는 내 관직을 쓰지 말고 작은 선비라 쓰라"고 엄히 당부했다.
첫댓글 명재선생님은
유가이면서
도가의 풍모가
있으신듯.
그래서 사랑채에
도원인가(桃園人家)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