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제 기도가 있던 토요일밤은 좋았습니다.
고요함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드립니다.
떼제 노래는 거룩함이네요.
다음날 주일 설교, 요청을 받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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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떼제, 구분 지어지지 않는 존귀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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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조금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50년 전 애은성당을 개척했던 김병훈 요한 사제의 별세성찬례를 부산에서 드리고, 매장예식을 울산에서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서 천주교, 개신교 교우들의 발걸음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한 가운데 하느님을 경배하는 떼제 노래와 침묵의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또 삼삼오오 모여 개인의 소개, 말씀의 나눔을 가졌습니다. 성당이 조금은 더 젊어졌고 밝아졌고 무엇보다 성스러워졌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라 했습니다. 기도하는 공동체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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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제공동체는 저 멀리 프랑스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 그 작은 마을에 전 세계 60여개 국가에서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듭니다. 지난해 김민식 멜기세덱 부제님이 일주일동안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방학에는 수천명이나 머무른다고 합니다. 한 곳에 모여 떼제 노래로 기도하고, 각자 흩어져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먹고 자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수도생활의 경건함 속에 즐겁고 유괘한 시간을 누리는 곳. 기도하는 공동체인거죠.
떼제공동체는 로제 수사가 2차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으로부터 유대인을 숨겨주었던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서는 패전국인 독일의 군인을 숨겨주면서 진정한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어갑니다. 개신교 수사였던 로제 수사의 떼제공동체는 이후 가톨릭의 수사들과 개신교의 수도자들이 함께 참여하면서 초교파적인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고 분단된 독일의 통일을 위해서 많은 수도자들을 동독으로 보내어 구호와 평화의 선교 활동을 해왔습니다.
현재까지 그 정신이 이어져 전쟁으로 상처받는 나라의 민족들과 이민자들, 그리고 핍박받는 흑인들과 여성들과 노예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오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차별받는 성소수자들과 특별히 이슬람교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공동체인거죠.
모든 이들이 구분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평화의 공동체! 떼제공동체 기도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자 로제 수사의 꿈이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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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루가의 복음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베다니에 있는 마르타의 집에 들렀습니다.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씻을 물과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하느라 최선을 다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등 아래에 앉아 말씀을 듣는데 최선을 다한다는 내용입니다.
전통적인 성서 해석은 이렇습니다. '마르타의 실천하는 영성도 귀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믿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니 마리아가 그랬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 실천하기에 앞서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고 특별히 성서를 읽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여러분들이 평소 생각하는 그대로입니다.
21세기에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에 성공회의 톰 라이트가 있습니다. 보수적인 신앙과 개혁적인 신학을 넘나드는 톰 라이트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를 달리 바라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시중들기 위해 마르타는 부엌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마리아는 거실에 있습니다.' 그 시대에 여성인 마리아가 거실에서 손님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많은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 예수님의 발아래에 수제자인 것처럼 앉아있는 마리아는 매우 어색하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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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과 거실! 이제야 말씀이 조금 더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참제자가 되고싶은 마리아,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큰스승을 닮고싶은 마리아. 그런 그녀의 당돌하고 파격적인 행동에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려 봅니다. 부엌은 여성, 거실은 남성이라고 여기는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라고 명령하는 예수님! 당신을 직접 따라다니는 제자들만이 권위를 가질거라는 생각, 그 신앙의 오만함을 넘어서라고 명령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남성 제자들보다 여성 제자들을 더 높이 세우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곳, 어느 누구에게나 강물처럼 흐른다고. 부엌과 거실을 가르고,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위와 아래를 가르고, 나와 너를 가르고, 우리와 너희들을 가르고, 이 민족과 저 민족을 가르는 장벽을 걷어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 앞에서는 어느 누구나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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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밤 천주교와 개신교의 구분을 넘어 떼제 노래로 기도하는 청년들이 참 이쁘고 귀하게 보였습니다. 떼제공동체에서 오랜 시간 수도생활을 해온 신한열 수사님께서 애은성당에서 두 번에 걸쳐 떼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분과 함께해온 천주교 성당의 청년 교우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벽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기도모임을 갖고 싶다고 말했을 때 참 대견하면서도 부끄러웠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아니 2,000년 내내 우리 기독교는 서로를 가르고 구분하는 일에 너무나 익숙했습니다. 천주교와 정교회로 구분하고, 정통과 이단으로 구분하고, 전통적인 로마가톨릭과 개혁적인 개신교와 중도적인 영국가톨릭으로 구분해 왔습니다. 그 구분은 풍성함을 만들었지만 미움과 증오를 키워 서로를 공격하고 차별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 떼제공동체의 로제 수사는 그 구분과 차별을 넘어서고자 했습니다. 죽음 대신 생명을 살리고, 전쟁 대신 평화를 노래하며 교단의 분열과 시대의 구분과 나라의 장벽을 무너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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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는 21세기 초부터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애큐메니컬 운동을 묵묵히 해왔습니다. 특별히 2015년 개편된 대한성공회 성가에 떼제 노래가 9곡이나 수록된 것 또한 그 일환입니다. 오늘 오신 거창기도소의 황인찬 신부님께서도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 불교, 원불교를 넘나드는 종교의 일치운동을 묵묵히 해온 분입니다.
화해와 일치, 그것의 핵심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이는 모두가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 또한 평화를 외치며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과 병든 이들과 억압받는 사람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들을 구분하고 차별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앞에 하나의 존귀한 존재로 회복시켜내는 데 헌신하신 분입니다. 화해와 일치의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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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독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몸을 희생시키시어 여러분과 화해하시고, 여러분을 흠없고 탓할 데 없는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로 여러분을 회복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구분 지어지지 않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