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 선배는 1941년생으로 2003년 좀 이른 나이인 63세에 돌아가셨다. 북한 함흥 출신으로 월남하여 선린상고를 다녔다. 영화감독에 대한 꿈을 갖고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3기생인 62학번으로 입학하여 졸업 후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그리고 조감독 생활을 하던 중 너무나 힘들어 감정평가사 시험을 준비하여 시험에 합격하여 평생을 감정평가사로 살았다. 당시에는 감정평가사가 백 여 명 정도로 이 분들이 전국의 토지 평가며 건축물 평가 등을 도맡아 하니 고수입 직업이라 할 수 있다. 동부이촌동 아파트에 살며 선배인 권순재 사장의 중앙영화사 출입을 하더니 태평양미디어 프로덕션을 설립한다. 그리고 나의 영화 <철판을 수놓은 어머니>의 제작사로 금관상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다. 부상으로 나를 사이판 여행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리고 극영화 제작을 시도한다. <귀지가>라는 영화인데 여러 번 각색을 하더니 <그는 이승에서 살기를 거부했다>라는 제목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그리고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을 하고 겨울 장면 촬영을 하였다. 그런데 덜컥 간암 판정을 받는다. 촬영은 중단되고 기치료를 받고 수술을 하고 악전고투하였지만 그만 이승을 떠나셨다. 사모님은 저승에 가서라도 영화를 완성하라는 뜻으로 시나리오를 함께 묻었다. 이영민 선배님은 아침이고 점심이고 전화를 주시고 식사하자며 하루에 두 끼도 함께 하고 매일 한 번 이상은 만났다. 주로 다닌 식당은 '메기대감'이었다. 맛도 좋아 수천마리는 먹었을 것이다. 식당이 이사를 갈 무렵 선배는 별세하였다. 선배는 당시 동국대 영화학과 박사를 수료하고 졸업 대기 중이었는데 그만 별세를 한 것이었다. 나이 어린 지도교수에게 "얘" 소리는 물론이고 온갖 수모를 당한 이야기를 웃으며 즐거이 내겐 말해주곤 했다. 영안실을 찾아온 그 지도교수가 생각난다. 다소곳이 조문온 그녀가 과연 그랬을까 싶다. 이 선배는 우리 대학 동문회 거북이산악회의 회장으로 나는 말뚝 총무 관계이기도 했다. 일요일이면 북한산을 다녔는데 산행에 온갖 정성을 다하며 회원들에게 산행 독려를 하던 분이었다. 일요일은 산행 후 점심 먹고 저녁자리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담배만큼은 골초였는데로 금연하겠다고 하고는 금연초를 계속 피웠다. 결국 암을 이길 흡연자는 없다. 이두용 감독하고는 갑장으로 20여 년을 먼저 떠났다. 올해가 벌써 20주기이다. 나는 선배의 조언을 받아 대학원 진학을 하였고 내 인생에는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 주신 고마운 선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