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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7 / 곤경에 빠졌다면 (창21:9-19)
지난달 우리나라에선 장마와 태풍으로 인해 많은 가구가 피해를 봤습니다. 또한 얼마 전에는 하와이에서 산불로 인해 큰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곤경에 처할 때가 있는데, 이에 대해 전도서 9:12절에는 기록되기를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고난! 이에 관해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대를 이를 아들을 얻지 못하자 부인 사라의 권고를 받아들여 세상적인 방법으로 아들 이스마엘을 얻게 되는데, 이때 아브라함의 후처로 들어와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여인이 하갈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이집트 여자였습니다. 이방 여인이었던 거지요. 따라서 아브라함이 문제 해결을 위해 행했던 방법은 당연히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런 방법이라도 쓴 덕에 아브라함은 86세에 하갈의 몸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노년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좋았겠지만, 그런 아브라함이 잊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후사를 주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이쯤에서 잠시 생각해 보지요. 그간 우린 어떻게 살아왔나요?
당장에 이게 좋겠다 싶어서. 아니면 지금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엔 없다 싶어 일단 해 보자는 심정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요즘 공익광고에 보면 급히 서두르는 사람을 향해 ‘5초만!’이라며 행하기 전에 잠깐의 여유를 가질 것을 권고하는 말이 나오던데, 우리도 뭔가 일을 시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해 5초 만이라도 묵상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주실 텐데’ 하는 생각에서 인간적인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노력하고 애는 쓸지라도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엔 어떨까를 ‘5초만’이라도 생각해 보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스마엘 출생 이후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100세 되는 해에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간 아브라함으로서는 일단 세상적인 방법으로 시도했던 일이 성공한 듯 보여 기쁘게만 살 줄 알았는데 9절을 보면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놀리는지라.’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어의 원뜻은 ‘비웃다, 희롱하다, 못살게 굴다.’ 등으로 사용되는 말인데, 문제는 이런 이스마엘의 행동을 사라가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강하게 요구합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아브라함과 하갈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사라 말대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인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렇다고는 해도 그래도 내 아들인데 내치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처음부터 이런 곤경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했는데 일단 곤경에 빠지게 되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모든 곤경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의 수많은 문제나 사건들의 이면에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다는 겁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은 자연법칙에서 절대 진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곤경이든 성공이든 인생에서는 무언가를 심었다는 원인이 있었기에 그에 따른 결과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곤경에 빠졌을 때면 세상의 그 무엇을 탓하거나 다른 누구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있게 됐는지에 대해 자신을 먼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들 하는데,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기도 없이 좋았더라고 한다면 그 뒤엔 반드시 곤경이 바짝 뒤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내 생각과 내 뜻에 따라 결정하고 실행했을 때 문제는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사라는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자기 여종을 취하라고 했을 때, 그러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런 아내에게 장단을 맞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믿음이란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내 삶의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맞추지 않으면 결과적으론 믿음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는데, 본문 11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왜? 무엇을 근심했다고 했습니까?
역시나 11절을 보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믿음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었기에 결국엔 그 아들로 인해 근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야만 했는데, 비록 세상 방법으로 얻은 자식이었지만,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의 13년 동안은 아브라함에게 기쁨과 삶의 의미를 준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아브라함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걸까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의 아브라함은 아직 ‘믿음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기 전의 아브라함이었다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자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사라에게서 낳을 약속의 씨가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것을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브라함은 초조해졌고 조급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초조함과 조급함은 믿음과는 상극이라는 것을. 초조함과 조급함은 의심을 가져온다는 것을.
그렇다면 생각해 볼 것이. 하나님은 이왕 복 주실 거. 이왕이면 빨리 주시지 않고 왜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살이 되기까지 기다리신 걸까요?
이에 대해 주경가들은 ‘인간이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하신다.’라는 해답을 제시합니다.
맞습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하신다.’를 믿는 게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의 다는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은 우리 편에서 가져야 하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편에서 기대하시는 믿음은 어떨까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쉬지 않으신다!’
이게 ‘하나님이 하신다.’ 보다 먼저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5:17절에 보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신다!”
이게 예수님의 고백이며, 이게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위해 역사하기를 쉬지 않으심을 믿는다면 우리 역시도 하나님 믿기를,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만 있다면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우리 삶에 쌓을 곳이 없도록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세요.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그런 날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런 날이 오게’ 하셨습니다.
이게 오늘을 사는 우리 믿음의 딜레마입니다. ‘응답이 없을 것 같아!’가 우리의 나약한 믿음이라면 ‘응답의 날이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고 소망하며 기도했다면 ‘하나님은 내게도 응답의 날이 있게 하실 것이다.’가 우리의 믿음이어야만 합니다.
안타깝게도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그런 날이 없을 줄’ 알았기에 세상적인 방법으로라도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결국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나 사라에게서나 하갈과 이스마엘 모두에게 심각한 상황이 닥친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세상 방법대로 심은 결과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요? 모든 곤경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게다가 곤경이 곤경인 이유는 곤경에 빠졌을 때면 스스로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곤경의 유일한 해결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자식 이스마엘을 집에서 쫓아내야 하는 곤경에 맞닥뜨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곤경이 시작된 처음으로 돌아가 보지요.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니 내 방식대로 문제를 풀 것이냐?
당시 아브라함이 믿음이 아닌 자기 생각과 방식대로 했던 결과가 오늘 본문에서 맞닥뜨린 곤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선택이 가능했던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로 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미 곤경이 닥쳤는데 ‘그때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의 내 처지가 ‘그때 안 그랬다면!’이라는 생각이 드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면 이제라도 ‘모든 곤경의 유일한 해결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라는 믿음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곤경이 닥쳤는데 곤경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칫 곤경을 벗어나 보겠다고 또 다른 인간적인 해결책을 쓰다가는 또 다른 곤경을 초래할 수도 있게 됩니다. 따라서 곤경이 닥쳤다면 곤경에서 벗어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때라도 다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라도’ 다시 하나님 앞에 선다면 ‘이제부터’ 내게도 하나님의 역사는 다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곤경이 닥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제야’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것으로 인해 근심거리로 삼지 말고 아내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시자 이번엔 아브라함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사정이 어떻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에게 첫아들이자 13년간 기쁨과 소망이 되어준 아이였습니다. 그런 아들을 쉽게 쫓아낼 수 있었다면 11절 말씀처럼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순종한다는 건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번엔 아브라함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혹여라도 오해하실까 봐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쉽고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아브라함도 이스마엘을 얻기 전에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여 순탄하게 이삭의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내 감정과 내 뜻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순종은 내 생각이나 내 의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쉽지 않은 겁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라야만 문제의 해결이 시작됩니다. 순종함으로써만 깊은 곤경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라면 지금 내가 처한 형편에서 지금 나에게 떠오르는 내 생각, 내 뜻, 내 의지를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금의 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감당할 수도 없는 엄청난 순종을 서원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순종에서부터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가 어떤 순종에서부터 시작해 볼 수 있을까요?
우선 가장 먼저 시도해 볼 수 있는 순종으로는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기도하는 순종’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해 보세요. 기도하는 순종에서 승리하면 다른 모든 순종도 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곤경에서 빠져나오는 최선의 방법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보시면 본문 15절 이후에서 쫓겨난 하갈이 광야에서 헤매다가 빵도 떨어지고 물도 떨어진 상황에서 죽어가는 아들 이스마엘을 관목 덤불 아래에 누이고 자신은 한참 떨어진 곳에 가서 목 놓아 울었다고 했습니다.
어땠을까요? 하나님이 과연 하갈의 울음소리를 들으셨을까요?
아닙니다. 17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울음소리에 응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이스마엘의 신음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이방 여인 하갈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녀인 이스마엘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시지요?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신 말씀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만 바라볼지라.’라는 복음성가를 보면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라고 하는 가사가 나옵니다.
믿으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이상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 지금 어떤 형편에 처했든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고 하니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제까지 행여라도 원치 않는 곤경을 맞닥뜨리셨다면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뿐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배제하고 내 뜻, 내 생각, 내 욕심을 위해 했던 것은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행여 그랬던 것 같다고 한다면 지금의 곤경의 때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시간이 됩니다.
두 번째. 곤경의 때야말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때 아셔야 할 것이 우리가 믿음에 있어서 또는 회개할 때나 기도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회개할 때 이런저런 죄를 지었고 이러저러한 불신으로 살았다는 죄책감이나 죄의 고백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기도하면서 이런저런 요청이나 이러저러한 소망을 나열하는 게 중요할까요?
아닙니다. 믿음에서, 회개에서, 그리고 기도에서 가장 중요하며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하고 부르는 ‘첫 마디!’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하고 부르지를 못하니 회개도 못하는 것이고 기도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어도 믿는 게 아닌 게 되고 맙니다.
이젠 해 보세요. 매사에 “하나님~!”하며 하나님을 먼저 부르고 그다음 각자의 일에서 애쓰고 수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 된 성도들의 작은 소리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도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믿음에서는 ‘역발상’이 중요하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지금 내 인생에 닥친 곤경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는 중에 의도치 않게 크고 작은 곤경에 빠질 때면 그땐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으세요.
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곤경에서 건지시며 우리의 모든 곤경과 괴롬을 찬양과 감사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위한 역사를 쉬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곤경의 때를 만나면 ‘하나님 앞에 서서’ ‘주만 바라봄’으로써 사시는 모든 날들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