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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ization and Categorization
일반화 그리고 범주화*
Another hallmark of thinking legalistically is the practice of generalizing and categorizing. That is, because certain aspects of a matter are bad the tendency is to generalize by saying that the whole thing is bad. This is essentially the same kind of unwarranted generalizing which categorizes a whole national or racial group as contaminated because a percentage of individuals within that group or race are guilty of some wrongdoing or wrong attitude. By this generalizing, people of such nationality or race are viewed as criminally inclined, or dishonest, or lazy and unreliable, or greedy and crafty, simply because the whole is judged on the basis of the part. Prejudice is the result and it betrays shallow thinking. It takes care and judgment to estimate people as individuals, person by person. Lumping them all together in a single category is obviously easier. It is also grossly unfair and illogical. In Governing Body discussions I began to realize to what extent decisions were based on a similar kind of unwarranted generalizing and categorizing. In so many of the “policies” developed, focus was placed on organizational membership rather than on what an individual actually did or was. If some fault could be found with a part of a particular organization’s practices or standards, often the whole organization—and everyone in it—was condemned and viewed as a “taboo” area for Witnesses. 또 다른 사고의 틀은 일반화와 범주화라고 분류되는 관행이다. 즉, 어떤 문제의 몇가지 면이 나쁘기 때문에 그 경향 전체를 싸잡아 나쁘다고 일반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몇 사람의 그릇된 행위로 인해, 특정 민족 또는 인종을 본질적으로 오염된 것으로 분류해버리는 일종의 부당한 일반화인데, 그 집단이나 인종에 속하는 구성원들의 상당한 비율이 어떤 잘못이 있거나 잘못된 태도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에 전체를 같이 취급함으로써, 그러한 국적이나 인종의 사람들은 모두가 범죄적 성향이나 부정직, 게으르고 신뢰할 수 없는, 또는 탐욕스럽고 교활한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결과적으로 편견을 갖게 되고 그러한 편견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한다. 사람을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주의와 신중함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모두 하나의 범주로 묶는 것은 분명히 더 쉬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상당히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일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통치체의 논의에서 나는 유사한 종류의 부당한 일반화와 범주화에 기초한 결정이 상당히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세부화된 "방침"의 많은 부분들은 개인이 실제로 무엇을 했거나 어떤 사람이었는지보다는 조직의 직분에 초점을 두었다. 조직의 특정 관행이나 기준의 관점에서 일부의 결함이 발견되는 경우, 전체와 그 모든 사람들은 흔히 증인들이 "금기시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
This approach allows for viewing all other professed Christian religious affiliations as intrinsically bad. By finding fault with certain of the religion’s teachings, the religion in its totality can now be viewed as unclean, and any person affiliated with it is also unclean, outside God’s favor. This approach makes even membership in the Y.M.C.A. a disfellowshiping offense.41 The fact that I think there is something unchristian in a religion hardly gives me the right to judge all its members as totally unacceptable to God. This is following the principle of “guilt by association,” a principle that was used against Jesus by religious leaders. (Compare Matthew 9:11; 11:19.) Following this principle, it does not matter what kind of person the individual may be, what his personal beliefs are, how much devotion he personally shows to God’s Word, how high the standards are by which he lives. Unless he ceases affiliation with any of such religious groups—and takes up membership within Jehovah’s Witnesses—he will be destroyed by God at the time of the “great tribulation.” Paradoxically, when individuals associated with Jehovah’s Witnesses find some of their own organization’s teachings to be unscriptural or its practices to be unchristian, they are told that they should not be overly critical, should not expect perfection, should stick with the organization, “waiting on God” eventually to clear matters up. 이 접근방식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종교적 소속을 본질적으로 나쁜 것으로 보게 하도록 만든다. 그 종교의 가르침의 확실한 결점을 찾아냄으로써, 그 종교의 전체적 가르침은 이제 부정한 것으로 보게 하고, 그 종교에 소속된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총을 벗어나 부정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접근법은 심지어 Y.M.C.A.에 가입하는 것조차 제명되는 범죄의 근거로 보게 한다. 41 어떤 교단에 비그리스도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만으로 속한 모든 신자들을 하나님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상대로 사용했던 방법인 '동료에 의해 유죄가(guilt by association)' 되는 예시를 따른 것이다.(마태복음 9:11; 11:19 비교) 이 방식에 따르게 되면, 개인이 어떤 사람인지, 개인적 신념이 무엇인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개인적으로 얼마나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는지, 그의 삶의 표준이 얼마나 높은지는 중요하지 않게 보인다. 그가 어떤 종교 단체에 가입되어 그 단체와의 연대를 중단하고 여호와의 증인 조직 내에서 신분을 차지하지 않는 한, 그는 '큰 환난'의 시기에 하나님에 의해 멸망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한 개인들은, 자기 조직의 가르침 중 일부가 비성서적이라거나 그 실천이 비그리스도적이라고 생각될 때에도, 비판적이어서는 안 되며 완벽을 기대해서도 안 되며, 조직에 고착해 있어야 하며, 문제가 정리될 때까지 '하나님을 기다리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Generalizing and categorizing are particularly prominent in matters of employment, as has been seen. In many cases, the factor that determines whether a particular employment is ruled “acceptable” or not is—not what the work performed actually is—but whether it is supervised by, paid by, or performed on the property of, a religious organization or a military organization. At Romans chapter thirteen, verse 4, the apostle Paul wrote of the “superior authority” of government: 일반화 그리고 범주화는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고용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특정 고용이 "허용"으로 판정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는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종교 단체에 의해 감독되는지 또는 군사 단체의 재산에 의해 지급 또는 수행되는지의 여부다. 로마서 13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정부인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It is God’s minister to you for your good. But if you are doing what is bad, be in fear: for it is not without purpose that it bears the sword; for it is God’s minister, an avenger to express wrath upon the one practicing what is bad. 그 권위는 당신의 유익을 위한 하느님의 봉사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악한 일을 하고 있다면 두려워하십시오. 권위가 이유 없이 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권위는 하느님의 봉사자,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진노를 나타내는 복수자입니다. The “sword” of the superior authority in Paul’s day was the military, for there was no separate police force operative in his time. The purpose of the Roman army in Palestine was to maintain the Pax Romana, and in doing so it served particularly as a force for peace and order, taking action against lawbreakers. It may be noted that in Paul’s own experience it was the military that rescued him from the angry mob in the temple area. It was the military that protected him from an assassination plot and provided him safe conduct to Caesarea.42 To this day, military forces often are more active in maintenance of law and order in times of crisis than they are in warfare. In the Dominican Republic during my years of service there, many occasions arose when the danger of riots and violence got beyond police control and it was the military forces that were then brought in to serve as the prime peacekeepers. While one may rightly feel conscientious objections to the wrongs involved in military aggression and bloodshed and to participation in these, that does not justify a refusal to recognize any beneficial service performed by military forces or provide the basis for categorizing everything connected with the military as inherently, automatically and totally bad, so that any contact therewith is contaminating, making one bloodguilty. 바울의 시대에는 별도로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 없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군대가 '위에 있는 권세'의 검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주둔한 로마군의 목적은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특히 평화와 질서를 위한 세력으로서 범법자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성전 지역의 성난 폭도들로부터 그를 구해낸 것은 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를 암살 음모로부터 보호하고 가이사에게 안전한 안내를 제공했던 것은 군대였다.42 오늘날에도 군대가 전쟁보다 국내의 위기 때, 법과 질서 유지에 더 적극적인 경우가 많다. 내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봉사한 여러 해 동안 폭동과 폭력의 위험이 경찰의 통제권을 넘어섰을 때, 많은 사건이 발생했고, 당시 주요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기 위해 투입된 것은 군대였다. 어떤 사람이 군사적 침략과 유혈사태에 관련된 잘못과 이에 대한 참여를 반대한것은 양심적으로 당연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사력에 의해 수행된 어떤 일도 유익한 봉사로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본질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절대 나쁜 것으로 간주하여, 군대와 관련된 것은 오염된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유혈죄를 범하게 한다는 범주화로 몰아 세우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The same is true of politics. It is easy to convert this term into a synonym for all the unsavory aspects appearing in human rule. The divisiveness and selfish ambition typical of much political campaigning, with its slurs and smears, along with the hypocrisy, corruption, and tyranny that are all too often to be found in political systems, can be used by this equation to classify as automatically bad anything to which the term “political” can be attached. It is this same blanket condemnation and categorization that produced the organization’s policy in Malawi with its calamitous results.43 But politics basically means government and the Scriptures teach that government definitely has a beneficial aspect. 정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정치라는 용어를 인간의 통치에 나타나는 모든 불미스러운 면의 동의어로 바꾸어 나타내기는 쉽다. 많은 정치 선거 운동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분열과 이기적인 야망은, 정치 시스템에서 너무나 빈번히 발견되는 위선, 부패, 폭정이라는 등식에 의해 "정치"라는 용어가 붙을 수 있는 어떤 것이든 자동적으로 나쁜 것으로 분류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말라위에서의 대재앙의 결과를 초래한 조직의 방침을 만들어 낸 것도 이 동일한 전반적(=싸잡아서) 비난과 범주화이다.43 그러나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분명히 유익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정부와 성경이 모두 가르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According to Watch Tower policy, if a Witness were ordered by the government to serve as the secretary of some governmentarranged community administration (as took place in the Philippines with its system of barangays), he must refuse, even at the risk of fine or imprisonment, to avoid disfellowshipment.44 This is difficult to harmonize with the attitude of Daniel and his three companions during the political rule of the Babylonian and MedoPersian empires. Not only did Daniel accept appointment to a high position in the Babylonian political structure, he actually requested administrative positions for his three friends.45 This was not some display of a lack of integrity, for they proved themselves willing to face death rather than be disloyal to God. (Daniel 3:8-18) In the matter of serving in the governmental (political) structure, they showed conscientious discrimination—not blanket categorization. Christians today can also reject the bad and shun it while still recognizing whatever good there may be. I could not conscientiously share in political campaigning with its divisive, aggressive tactics. Yet that does not cause me to view anything as automatically and intrinsically evil simply because it bears the name “political.” 워치타워 방침에 따르면, 증인이 정부로부터 (바랑가이* 구조로써 필리핀에서 있었던 것처럼) 일부 정부가 마련한 지역사회 행정의 비서로 일하도록 지시 받았다면, 그는 제명을 피하기 위해서는 벌금이나 투옥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거부해야 해야 한다.44 이것은 현실과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다. 바빌로니아와 메데-바사 제국의 정치적 통치 기간 동안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의 태도와 조화되기 어렵다. 다니엘은 바빌로니아 정치구조의 높은 지위에 임명되는 것을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세 명의 친구를 위해 행정직을 요청하였다.45 이것은 하나님에게 불충성을 나타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에 직면할 의사가 있음을 세 친구가 스스로 증명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정직 근무가 조금이라도 순수성의 결여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다니엘 3:8-18). 정부의 부처에 근무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전반적 범주화가 아닌 양심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With regard to Daniel and his three companions, there is additional evidence of their ability to distinguish what was truly an issue and what was not. This is in connection with the names that were assigned to them by the Babylonians. If not in all, then at least in some cases those names included the names of Babylonian gods.46 Nebuchadnezzar himself is shown as specifically saying of the name assigned to Daniel, Belteshazzar, that this was “after the name of my god.” (Daniel 4:8, 9) Bel (corresponding to the Canaanite term Baal), was a chief Babylonian god. I seriously doubt that any of Jehovah’s Witnesses would have responded if addressed by a name assigned him by a pagan source and having any connection whatsoever with the name of a false god. Yet the accounts in the book of Daniel show that, when addressed by these names, Daniel and his three companions did not refuse to reply.47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에 관해서, 그들이 진정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과 그렇지 않았던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가 있다. 이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이 그들에게 부여한 이름들과 관련이 있다. 모두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그 이름들이 바빌로니아 신들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었다.46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에게 부여된 벨드사샬이라는 이름을 분명히 친히 부른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 4:8, 9) 벨( 가나안 용어 바알에 해당하는)은 바빌로니아 최고 신이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 중 어느 누구라도 이교도의 출처에서 그에게 부여한 이름이나 거짓된 신의 이름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이름으로 부를 때 과연 그가 대답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다니엘서에 있는 설명에 따르면,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는 이 이름으로 불리워졌을 때, 답변을 거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47 I think of this when recalling some of the extreme measures Witnesses have felt obliged to take to demonstrate “strict neutrality,” “complete separateness from the world,” primarily as a result of the organization’s highly sensitizing them by its categorizing policies. There is an inordinate concern for how things will appear, rather than what the reality is. In the modern state of Israel, Witnesses who refused military service were imprisoned. They were issued military clothing to wear. Whatever the appearance may have been, the reality was that they were prisoners due to their stand. Nonetheless, they refused to wear the garments and some even went around in their underclothes rather than put on such clothing. One Governing Body suggestion was that they might wear it turned inside out to register their objection. Yet how much more is a name viewed as an identification than is a uniform, and Daniel’s responding to the name Belteshazzar could not but come to mind. He knew that this appellative did not change what he was and, when a genuine issue arose, was willing to demonstrate what he was, though it meant facing death in a den of lions. (Daniel 6:6-23) Had he been governed by Watch Tower indoctrination and policy, he surely would have not displayed such a balanced, discerning viewpoint. 나는 증인들이 "엄격한 중립성"과 "세상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성"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던 극단적인 조치들을 상기할 때 이점을 생각한다. 그 주된 이유는 조직이 방침의 범주화에 의해 그것들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 결과였다. 현실보다는 상황이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한 지나친 우려가 있다.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병역을 거부한 증인들이 투옥되었다. 그들은 군복을 지급받았다. 겉모습이 어떻든 간에 그들의 입장으로 인해 그들은 포로라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옷을 입기를 거부했고 일부는 그런 옷을 입기보다는 속옷만을 입고 돌아다닐 정도였다. 통치체의 한 제안은 그들이 이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뒤집어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집어 입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군인 신분으로 보이는 이름이 더 많았으며, 따라서 벨드사샬이라는 이름에 대한 다니엘의 반응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호칭자가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것이며, 그러나 진정한 이슈가 발생했을 때, 비록 사자 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의미하긴 했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기꺼이 증명하려고 했다. (다니엘 6:6-23) 만일 그가 워치 타워의 세뇌와 방침에 의한 지배를 받았다면, 그는 분명히 그렇게 균형잡히고 통찰력 있는 관점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Somewhat related is the way in which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now uses abstention from celebration of various holidays (or even birthdays) as evidence of superior righteousness. I still am not a celebrator of those holidays, yet I recognize that an exaggerated importance has been attached to them, with celebration or noncelebration being viewed as determining whether one is a practicer of pure worship or is worthy of disfellowshipment. 현재 워치타워 조직이 다양한 명절(심지어 생일까지도)을 기념하지 않는 것을 탁월한 의의 증거로서의 연관성을 다소 지운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 명절을 기념하지는 않지만, 명절 또는 생일을 기념하거나 또는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순수한 숭배를 실천하는 자인지 아니면 제명을 당할만한 사람인지를 결정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등, 명절의 기념 여부에 과다한 중요성을 워치타워가 두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Much is made of the “pagan origin” of various practices and items connected with some of the holidays.48 Yet, realistically, any “pagan” significance these may once have had has long since disappeared. I remember in the 1970s giving a talk that discussed the need not to go overboard in these matters, pointing out, among other things, that the very days of the week (in English) involve the names of pagan objects of worship, the sun, the moon, and of the gods and goddesses Twi, Woden, Thor, Frei and Saturn. The same is true of many of the names of months.49 Yet today we employ those names without the slightest thought of their “pagan origin.” Actually, most persons are totally unaware of their “pagan” source. This is similarly true of the various decorations and customs connected with many holidays. 명절과 관련된 다양한 관습과 관련된 물건들은 "이교적 기원"으로부터 유래되었다.48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이러한 '이교적 발생'의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다. 내가 1970년대에 이런 문제들에 대해 극단적이 되지 말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강연을 한 것을 기억하며, 무엇보다도 한주를 구성하는 요일 자체가 이교도의 예배 대상, 태양, 달, 그리고 신과 여신 트위, 워든, 토르, 프레이, 토성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1년을 구성하는 12달의 이름들도 이점에 있어서 마찬가지다.49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이름들이 "이교적 기원"을 가지는 것과 전혀 상관없이 그 이름들을 사용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들의 "이교적" 기원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것은 명절과 연관된 다양한 장식과 풍습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While placing intense emphasis on the “pagan origin” factor,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simply glosses over this in other areas, as in the use of wedding rings. Their own publication, What Has Religion Done for Mankind? (1951), pages 276, 277, quotes Catholic cardinal Newman as saying that, along with such things as the use of temples, incense, candles, etc., “the ring in marriage” is among those things that are “of pagan origin, and sanctified by their adoption into the Church.” 50 Yet almost all of Jehovah’s Witnesses use the “ring in marriage,” something their own publication reveals as “of pagan origin.” 워치타워 조직은 "이교적 기원"을 가진 요인에 상당한 중점을 두면서도 결혼반지의 사용과 같은 다른 분야에서는 이 점을 가볍게 얼버무린다. 워치타워 자체의 출판물인 <인류를 위해 종교가 이룬 것은 무엇인가?>(1951년) 276, 277쪽은 가톨릭 추기경 뉴먼의 말을 인용하여, 사원, 향, 촛불 등의 사용과 함께 '결혼 반지'는 "이교적 기원에서 유래되었으나, 교회에 의해 채택됨으로써 신성화되었다."50 그러나 거의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 자체의 출판물이 "이교적 기원"임을 알려주는데도 불구하고 "결혼 반지"를 애용한다. I recall that when the Watch Tower Society purchased a former motion picture theatre in Queens, New York, for use as an assembly hall, the theatre had an ancient Egyptian motif throughout. Over the marquee, the front of the building had large tiles depicting various Egyptian gods and goddesses, one even carrying the crux ansata. The inside contained other items, including lotus flowers, having religious connotations in Egyptian beliefs. When the Watch Tower renovated the building all these items were left unchanged. After a few years, a friend of ours from the Dominican Republic attended a Gilead School graduation there as our guest. She was struck by the pagan symbolisms and expressed her upset feelings to me, saying that she would not have known what the meaning of these things was had she not read of them in the Watch Tower’s own publications.51 She could not harmonize the strong, negative statements made in the publications with this apparent tolerance. I felt obliged to write to President Knorr, pointing out that my concern was primarily for her (and others who might feel as she did). Knorr came down to my office and argued the matter, saying that the items were simply decorations and that, for example, he didn’t think persons looking at the lotuses would attribute a sexual connotation to them. He asked if I thought that we could not even make use of a Catholic translation because it might have a cross on its front. I told him that I myself was not hypersensitive about such things, but that I thought we had an obligation to be concerned if there is an adverse effect on others, that if we set forth a particular standard for others then people have a right to expect us to live by it ourselves. Not long afterward the tile depictions of gods and goddesses were painted over. The inside of the building remained essentially the same. More recently the Watch Tower purchased the large Bossert Hotel in Brooklyn. It has gargoyles ornamenting the outside. These, too, are viewed by the organization as inconsequential decorations, void of any serious significance. As I found true in so many cases, stringent requirements placed on Witnesses of the “rank and file” suddenly seemed capable of great relaxation when the organization’s own interests were involved. 워치타워 협회가 뉴욕 퀸즈에 있는 옛 영화관을 집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구입했을 때, 그 극장은 곳곳에 고대 이집트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건물의 정면에는 이집트의 신들과 여신들을 다양하게 묘사한 커다란 기와가 달려 있었는데, 하나는 고리 모양의 십자가까지 들고 있었다. 내부에는 연꽃 등 이집트 신앙에 종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다른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워치 타워가 건물을 개조했을 때 이 모든 물품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년 후,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온 우리의 친구 한명이 그곳의 길르앗 선교학교 졸업식에 우리의 손님으로 참석했다. 그녀는 이교도의 상징물들에 충격을 받아 나에게 속상한 감정을 표현하면서, 그녀가 워치타워의 자체 간행물에서 이것들의 의미를 읽지 않았더라면 이런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51 그녀는 출판물에서 강조된 강력하고도 부정적인 진술과 이러한 명백한 관용을 조화시킬 수 없었다. 나는 노워 협회장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고, 내 걱정은 주로 그녀(그리고 그녀가 느낀 것처럼 느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를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워는 내 사무실로 내려와 그 물건들은 단순한 장식물이며 예를 들어 연(蓮)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성적인 함축성을 그 연에게 돌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문제를 논박했다. 그는 천주교 번역본의 앞면에 십자가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천주교 번역본조차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나 자신은 그런 것에 대해 과민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경우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고,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특별한 기준을 제시한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스스로 그 기준에 의해 살기를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얼마 후 곧 신과 여신들이 그려진 타일에 페인트가 칠해져 덮였다. 건물 내부는 본래 상태 그대로였다. 더 최근에 워치 타워는 브루클린에 있는 큰 보서트 호텔을 구입했다. 그 호텔에는 겉을 장식하는 괴물 석상들이 있었다. 이것들 역시 조직에 의해 하찮은 장식들로 간주되고, 어떠한 심각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많은 경우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듯이, "일반" 증인들에 대한 엄격한 요구사항은, 조직에게는 자신의 이익이 개입되었을 때는, 갑자기 크게 완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Persons among the Witnesses have been disfellowshiped for holding birthday celebrations. The core of the Watch Tower argument seems to be based upon the principle of guilt by association— that because only Pharaoh and Herod are mentioned in Scripture as celebrating birthdays, and because these were wicked men, therefore the celebration of a birthday is necessarily wicked also.52 This is certainly a forced conclusion. If, as an illustration, the Scriptures had no reference to marriage feasts other than marriage feasts held by two pagans or non-Christians (perhaps even with some coincidental drunkenness or immorality occurring)—would that make marriage feasts something wrong, unfit for Christians? 증인들 가운데서 생일 기념 축하 행사와 관련되어서 제명된 사람들이 더러 있다. 워치타워 주장의 핵심은 연관된 것들이 죄와 관련된 것이라는 추측에 근거한 것 같다. 즉 성경에 생일축하로 파라오와 헤롯만이 언급되어 있고, 이들이 사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생일축하 역시 반드시 사악하다는 것이다.52 이것은 분명히 억지 결론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두 이교도나 비그리스도인이 여는 결혼 잔치 외에 결혼 잔치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면(혹시 우연의 일치로 술취함이나 부도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결혼 잔치가 그리스도인에게 자동적으로 잘못되고 부당하게 되는 것인가? The Watch Tower employs quotations about the absence of birthday celebrations by Jews or by professed Christians in early centuries. Is that really a substantial reason for taking a rigid stand? Did the Jews or the professed Christians in early centuries celebrate wedding anniversaries? Would the fact that they did not rule out our doing so today? Jehovah’s Witnesses in many countries regularly do celebrate wedding anniversaries. The idea advanced that birthday celebrations are intrinsically an ‘idolizing’ of the person is an unrealistic categorization. Couples who celebrate a wedding anniversary are not idolizing themselves nor idolizing their marriage. Like so many other things, it is the way in which things are done, the spirit shown, and this can vary widely.53 Nowhere in the Scriptures is there any indication of God’s disapproval of birthday celebrations per se. They are silent in that respect. It is a case of men presuming to know God’s thinking and making judgments and rulings that God himself has not made. 워치타워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 신자들이 초기 역사에 생일축하 행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인용문을 들고 있다. 그것이 정말 생일축하에 대한 경직된 입장을 취하는 실제적인 이유인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초기 세기 동안 결혼일을 기념했는가?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결혼을 기념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많은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매년 결혼일을 기념한다. 생일축하 행사가 본질적으로 사람을 '우상화'한다는 지나친 생각은 비현실적인 범주화다.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부부들은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도, 결혼을 우상화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상황을 나타내는 방식이고, 정신의 소산이므로, 매우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53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생일 축하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지 않는다. 워치타워는 그런 점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을 안다고 추정하여 하나님 자신이 내리지 않은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사례이다. In all this I am not advocating any of these celebrations. I simply believe that, viewed calmly and factually, they are matters of minor significance, never warranting the sense of superior righteousness produced by Witness abstention, and certainly never justifying the policy of disfellowshipment now in force. The mere fact of knowing that something is not condemned does not make it appealing. I myself am basically repelled by the shallowness and commercialism of many holidays. I have negative feelings about the practice of having a child “make a wish” while blowing out candles (as is done in this country) since that fosters a superstitious view, or bringing in such fictions as Santa Claus. Yet I believe that for me to attribute such grave seriousness to these matters as though of life-and-death importance and to judge others on that basis would be to go beyond what Christian teaching authorizes. 이 모든 것에서 나는 어떤 기념행사들도 지키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차분하게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러한 기념일들은 중요성의 문제에서 비교적 사소한 것일 뿐이며, 증인들이 그러한 기념을 하지 않는다고 탁월한 의로움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지금 시행되는 제명의 방침을 결코 정당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비난받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도 기본적으로 대다수 명절의 천박함과 상업주의로 인해 그 명절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흔히 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촛불을 끄면서 "소원을 빌'거나 산타클로스 같은 픽션을 들여오는 관습은 미신적인 관점을 키우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사의 갈림길처럼 중대한 심각성을 부여하여 그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In its absolutist approach and categorizing practice, a paradox is found in that Watch Tower organizational policy allows membership in labor unions. Yet the organization knows that labor unions are clearly a strong political force. It condemns participation in strikes as being a form of coercion by intimidation; it rules that anyone holding an official position in a union is “not exemplary,” hence could not be an elder or ministerial servant; it declares picketing to be unchristian—yet, strangely, says that if, on refusing picketing work, the Witness is directed to do substitute work (“alternative service”?) of cleaning the union hall or answering telephones there, this is up to his conscience.54 Why is such service in substitution for picketing not viewed in the same way that work in substitution for military service has been? And why, with all these claimed “unchristian” aspects, does membership in the union not make the Witness laborer unclean, tainted? How does the Watch Tower Society get around the evident contradiction in policy? It does this by simply telling Witnesses that they can look on union membership as a form of “job insurance”! Yet they could not look on membership in the Y.M.C.A. and use of its exercise or swimming facilities as “health insurance,” or, in the case of Malawian Witnesses, the holding of a party card as “home insurance,” or even “life insurance.” 55 절대주의적인 접근과 범주화라는 그들의 행태에서 관찰되는 워치타워 조직 방침은 노조 가입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모순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 조직은 노조가 분명히 강력한 정치세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파업 참여를 협박에 의한 강압의 한 형태라고 비난하고, 노조 내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은 "모범적이지 않다"고 규정하며, 따라서 장로나 봉사의 종이 될 수 없다. 또한 피켓팅이 비그리스도적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피켓팅 작업을 거절할 때 대신 그곳에서 노조 회관을 청소하거나 전화를 받는 일("대체 용역"?)과 같은 다른 일을 하라고 증인이 지시 받는다면 이것은 그의 양심 문제로 돌린다.54 왜 피켓팅 대신에 하는 그런 일은 군복무 대체가 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런 모든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측면이 주장되는 가운데, 조합원이라는 신분은 증인 노동자를 부정하게 하거나 부패한 것으로 보지 않는가? 워치타워 협회는 정책의 명백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 방법은 증인들에게 노조 가입을 "일자리 보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만으로 넘어가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Y.M.C.A.에 가입해 운동이나 수영 시설을 "건강보험"으로 사용하는 것이나, 말라위의 증인의 경우 "가정보험"으로, 또는 "생명보험"으로 정당카드를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55 Once again, it is a case of religious leaders dictating to the individual as to when he or she may hold mental reservations and when not. (Compare Matthew 15:3-9.) The Governing Body is willing, for legal benefits, to classify the Witness organization as “hierarchical,” though outside of the courts it would deny that as being the case. This is certainly a seeking of accommodation by a measure of compromise. Compromise is not something necessarily or inherently wrong. It implies a degree of yielding, and life demands certain compromise on the part of all of us in order to live and work with others. The wrong comes when we begin to compromise our principles. The organization accords to itself the right to present itself to the world in a form it elsewhere strongly condemns, and not view this as a compromise of principle, but denies to its members the corresponding right to decide what they can do in good conscience when faced with circumstances equally, or even more, difficult for them. The view the religious leadership chooses to take regarding a matter is imposed on all below as the view they must take. The fact that the Governing Body members in their cloistered, protected, “ivory tower” circumstances rarely have to face the difficulties, hardship or problems that the ordinary Witnesses must face, seems to have no cautionary or restraining effect on their readiness to impose their views on the individual members.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은 개개인이 언제 정신적 유보를 할 수 있는지, 언제 그렇지 않을지에 대해 종교 지도자들이 개인에게 지시하는 사례에 해당된다.(마태복음 15:3-9 비교) 통치체는 자신들의 법적 이익을 위해서는 증인 조직을 "위계적"으로 분류한다고 인정할 용의가 있지만, 법정이 아닌 곳에서는 "사실은 계급이 존재하지 않아" 라고 부인할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타협을 통한 수용의 모색이다. 타협은 반드시 또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양보를 내포하고 있으며, 삶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일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입장에서 일정한 타협을 요구한다. 문제는 우리가 원칙을 타협하기 시작할 때 잘못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조직은 다른 곳에서 강력하게 비난하는 형태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낼 권리를 스스로 동의할 때는, 이것을 원칙의 타협으로 보지 않고, 일반 증인들에게는 똑같거나, 또는 심지어 그들에게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그들이 선한 양심에 따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상응하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통치체 지도자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실행하기로 선택한 관점은 아래에 있는 모두와 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분리되어 보호받는 "절연된 도시인 베델(=상아탑)" 상황에서의 통치체 성원들이 일반 증인들이 직면해야 할 어려움, 고난 또는 문제에 직면할 필요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반 증인들에게 그들의 견해를 부과할 자세를 신중히 가지거나 조심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어 보인다. |
* 일반화의 오류는 몇 개의 사례나 경험으로 전체 또는 전체의 속성을 단정짓고 판단하는 데서 발생하는
오류이다. 불확실한 증거를 기반으로 둔 귀납적 일반화에 도달하는데 귀납적 오류의 논리적 오류를 일컫는 말이다.
범주화는 철저하게 집단주의적 사고이며 개인주의에 절대적으로 반한다.
생물학적 본성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만 이는 철저하게 집단으로 개인을 판단하는 매우 위험한 사고이기
때문에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이 있다면 (범주화가 부득이하게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러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주위에 상대적으로 흔한 다수자들과 달리 소수자들은 머릿수가 적거나 말 그대로 약자라서 개인이
아닌 집단 그 자체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약자들은 개인으로 불릴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말이 괜히 존재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전세계의 극우파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이며, SJW(Social Justice Warrior) 들도 자주 범하는 오류이기도
하다.
42 Acts 21:35-40; 23:16-35.
42 행 21:35-40; 23:16-35.
43 See Crisis of Conscience, pages 145-148.
43 <양심의 위기> 145-148쪽 참조
역자 해설: 말라위에서의 증인들에 대한 폭동은 당원증을 사지 않는데서 초래하였다. 당원증을 살지 말지의
문제를 당시의 통치체는 사는 것을 정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판결했기 때문인데 당원증을 사는 것이 곧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의 카테고리화(범주화)의 오류라는 설명입니다.
* 바랑가이
44 This issue came up in the Phillipines in 1973 when a number of Governing Body members
(myself included) attended an assembly there during a tour of the Orient.
44 이 문제는 1973년 필리핀에서 동양을 순방하는 동안 다수의 통치체(내 자신 포함)성원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불거졌다.
45 See Daniel 2:48, 49; 5:29.
45 다니엘 2:48, 49; 5:29 참고.
46 Daniel 1:6, 7. See Insight on the Scriptures under “Belteshazzar,” “Shadrach,” “Meshach” and “Abednego.”
46 다니엘 1:6, 7. 통찰 책 벨사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항목 참조
47 Daniel 3:13-18; 4:19.
47 다니엘 3:13-18; 4:19.
48 See the Watch Tower publication School and Jehovah’s Witnesses (1983), pages 18-20.
48 워치타워 출판물인 <학교와 여호와의 증인>(1983) 18-20쪽을 참조하라.
49 These include use of the names of the two-faced god Janus, Februa (a pagan feast of purification),
Mars (god of war), and Maia (a Roman goddess).
49 두 얼굴의 신 야누스, 페브루아(정화의 이교도 축제), 마르스(전쟁의 신), 마이아(로마의 여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50 Essay on the Development of Christian Doctrine, John Henry Newman (1878), pages 355, 371, 373,
Edition of 1881.
50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 관한 논문, 존 헨리 뉴먼(1878), 355, 371, 373쪽 1881년판.
51 See, for example the book What Has Religion Done for Mankind? pages 106 to 119.
51 예를 들어 < 인류를 위해 종교가 무엇을 했는가?>라는 책을 보라. 106쪽부터 119쪽까지
52 See Reasoning from the Scriptures (1985), pages 68, 69; School and Jehovah’s Witnesses, page 17, 18.
52 <성경으로부터 추리함(1985) >68, 69쪽; <학교와 여호와의 증인> 17, 18쪽을 참조하라.
53 One of my wife’s sisters has a son, an only child conceived fairly late in the marriage and born with a
heart defect. The parents were warned that he might not live beyond the age of two, but surgery performed
when he reached that age corrected the problem. As the mother said, “Some people celebrate wedding
anniversaries, but to my husband and me the day that our son was born is more precious to our memory
even than the day of our wedding.”
53 내 아내의 자매 중 한 명은 결혼에서 꽤 늦게 임신하여 심장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외동인 아들이 있다.
부모는 그가 두 살 이상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그는 그 나이에 이르러 수술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어머니 말대로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남편과 나에게 아들이 태어난 날은 결혼식 날보다
더 소중한 기억이라고 했다."
56 Matthew 23:3, NW.
56 ak 23:3, 신세계
57 See Crisis of Conscience, pages 142-171.
57 <양심의 위기> 142-171면 참조.
58 The Watchtower, January 15, 1974, page 58.
58 파수대, 1974/1/15 일호 58면
59 The Watchtower, February 15, 1988, page 4.
59 파수대 1988/2/15일호 4면
60 The Watchtower, November 1, 1990, page 24.
60 파수대, 1990/11/1일호 24면
첫댓글 요점: 워치타워 조직은 스스로 극단주의적이지 않다라고 하지만 오늘 내용의 몇가지만 보더라도 워치타워가 얼마나 극단적인 방침을 가지고 있는지 지적됩니다.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면서 말라위의 당원증은 생명보험카드로 고려할 수 없으니 목숨을 바쳐서라도 거부해야하는 입장을 보이는 반면 노조가입은 일자리보험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생일은 이교와 관련이 있으니 지키면 제명될 수 있고 결혼반지나 결혼 기념일은 이교와 관련 있어도 암말 안한다.
우상숭배는 절대 안된다고 하면서 워치타워가 구입한 건물의 흉칙한 우상 그림은 예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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