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봉된 물 수문이 침묵 끝에 꺼내놓는 물의 편지가
하류, 마른 가슴들의 저수지를 설레게 한다
그 수심 다시 봉인하는
수면의 살얼음
「기억의 미래」(2023, 문학과지성사)
‘기억의 미래’는 이하석 시인이 최근에 펴낸 시집이다. 시인의 말에서 전반부가 삶 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후반부는 구름의 주소록, 어쩌면 다 구름의 주소록이라면서 나는 참 멀리 와서도 여전히 제자리에서 주소가 없느니, 라고 읊조리고 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일평생 시와 더불어 살아온 시인의 한마디 한마디는 이렇듯 예사롭지가 않다. 등단이 1971년이니 시력은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그가 그동안 보여준 시집들은 우리 시의 과거이자 현재이면서 미래라는 생각이 든다. 광물질의 상상력이라는 평가를 받은 그의 초기 시편은 생태적 사유가 발현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기후 위기가 전면적으로 대두된 오늘의 상황을 미리 예지했던 셈이다. 문학평론가 김문주는 책 뒤의 해설 ‘응시의 풍경과 음지의 시학’ 끝머리에서 이하석 시인이 열어 보이는 시적 풍경을 두고 한국시단에 매우 경이로운 축복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시집 어느 쪽을 열어 보아도 이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시편은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가창댐’은 한 편의 단시조로서 고요하고 아름답다. 가창댐은 시인이 사는 동네 부근이라서 자주 찾는 곳으로 알고 있다. 청도 각북 가는 길에 있는 상수원으로서 대구 시민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명승지다. 이따금 지나가다가 댐을 바라보곤 하는데 만수에 가까울 때는 경탄을 하지만, 가뭄이 들어 댐 수위가 현저하게 낮을 때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쉬이 지나치지 못한다. 댐을 따라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 주변 경관을 즐기는데 안성맞춤이다. 화자는 밀봉된 물 수문이 침묵 끝에 꺼내놓는 물의 편지가 하류, 마른 가슴들의 저수지를 설레게 한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때 저수지뿐만 아니라 메마른 사람들의 마음도 물의 편지로 말미암아 속속들이 젖어드는 느낌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겨울이 닥쳐와서 기온이 급강하하면 수면의 살얼음이 그 수심을 다시 봉인하게 될 것이다. 살얼음이 더 두터운 얼음장이 되면 물의 깊이는 더욱 단단하게 봉인되어 오랫동안 열지 못할 것이다.
왜 시인은 시를 쓰는가? 그래서 파블로 네루다는 말했다. 시가 내게로 왔다고. 찾아오는 시를 어찌 마다하겠는가? 순순히 받아들이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육화해야 마땅할 일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쓰는 한 편의 시는 자신을 진구렁에서 끌어올릴 뿐만 아니라 어떤 독자에게는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굳게 믿는 시인은 오늘도 어제처럼 뜨겁게 시를 쓴다.
중진을 넘어 원로의 자리에 오른 이하석 시인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한다.
이정환(시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