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의 사람 (시편 146:1-5)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지금 우리에겐 희망이 필요한 때입니다. 소망의 사람이 필요하고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미래를 향한 희망은 보이지 않고 과거의 못된 망령들만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듯합니다. 근신해야 하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할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은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국민을 먹여 살릴 재계까지 진흙탕으로 끌어들여 국가 경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것 같습니다.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경기침체와 일자리 상실을 염려하는 국가 경영지도자가 없습니다. 지금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문학계와 이공계를 떠난다고 합니다. 참으로 우리 국민에게 미래와 희망을 말하는 소망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내일은 해가 뜬다. 쩨쩨하게 굴지 마라.” 세속의 노래이지만 지금의 현실에 있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가사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이 추운 겨울이라 해도 그만큼 따뜻한 마음이 더욱 필요한 때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소망의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로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련 속에 산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큰일을 앞에 두고 추진하려 할 때 보면 대체로 세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려울 것이다 하는 반응이고 또 하나는 너무 쉽게 단정하는 반응, 즉 어떤 일이 금방 이루어질 것이라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믿음으로 보는 반응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떠한 일이든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전적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며 나아가는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혜가 모든 지도자들에게, 나아가 우리 민족 전체에 필요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더욱더 필요합니다.
막연히 ‘되겠지, 잘 되겠지, 풀리겠지, 죽지야 않겠지’ 하며 기다리거나, 사람이나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이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보겠다고 힘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탁하고 간구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태복음 7:7-8)
기도하고, 노력도 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장애가 가로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서 해나간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을 다하고 거기에 +α가 있어야 하는데, 그 +α가 바로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46:3-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러분,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쳐오면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중에 제일 먼저 하는 방법이 사람을 찾고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능 속에는 누군가를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이란 아벨,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야곱을 의미합니다. 이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생애 동안 모두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물론 다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생애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실 것은 이루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주시고,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큰 민족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멀리서 그날을 보고 믿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에게 생애 동안의 꿈과 그리고 먼 훗날의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멀리서 그날이 있을 것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현재만 봅니다. 눈앞의 것만 보게 되고, 눈앞의 일로 기뻐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현실에 매이지 않고 멀리 보면서 오늘을 이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고 그러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2. 소망의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귀인이란 권세가 있는 사람, 힘이 있는 사람, 자기에게 있어서 전문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환자는 의사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재판의 문제가 걸려 있는 사람은 혹 아는 판사, 검사, 좋은 변호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행정적인 문제가 있다면 고위 공무원이나 그 분야의 전문가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살다 보면 그들의 힘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적으로 의지할 대상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그들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인생”은 일반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의지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의지하고, 형제간에, 친구간에 서로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서로 의지하는 일은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의지가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좋은 믿음 안에서 사랑하고, 우의를 지키면서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이 짧기 때문에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합니다.
서로 도와주고, 위로해 주고, 힘을 북돋아 주고, 격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최후에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썩어지지도 않고, 후회도 없으며, 아깝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제일로 훌륭한 업적입니다. 특히 사순절을 보내며 부활절을 앞둔 사랑의 계절에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득 안고 베풀어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소망을 둘 대상은 아닙니다. 왜요? 끝까지 가 봐야 합니다. 지금 당장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한가 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자연스레 물질을 의지하게 됩니다. 사람과 물질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또한 인생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사람은 강하지만 동시에 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피었다 오후에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시편 146:4에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존재이기에 사람을 의지할 것이 아닙니다.
3.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46:5절을 보면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바랄 소망의 대상은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을 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게 됩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이 과거에 형에게 행한 일이 생각나서 겁에 질렸습니다. 그런 나머지 그는 얍복 나루터에서 계교를 부립니다. 물질과 사람을 형에게 보냅니다. 즉 물질과 사람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을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하나님만 붙잡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형 에서를 향해 갈 때 감격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할 때 우리는 복을 얻게 됩니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일순간의 꿈에 불과합니다. 안개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은 축복이 됩니다. 화평합니다. 능력이 됩니다.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풀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62:5-6)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 이스라엘의 상황은 매우 나빴습니다. 정치적인 독립의 상실로 온 나라에는 로마 군인들의 소리가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짓밟고 있었습니다. 잔인한 헤롯왕은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회의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속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형식화된 종교는 사랑을 찾아볼 수 없었고, 희망을 주지도 못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늘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은 400년 동안 멈추었습니다.
희망은 절망적인 순간에 가장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의 모든 상황이 좋으면 희망을 갖지만 눈앞에 현실이 어려우면 희망을 포기하곤 합니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은 세상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십니다.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절망적인 현실이지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희망이 넘치는 꿈을 펼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희망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박인환 목사님이 섬마을에 교회를 지으면서 빚을 많이 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짓기 위해서 금반지, 결혼반지 등을 모두 바쳤음에도 건축비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도시에 나가서 모금도 하고, 모금하다가 개에게 물리기도 하였습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한쪽 눈을 팔려고 했지만 그나마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목사님은 번뜩 ‘자살’이란 말을 떠올렸습니다. “자살, 자살, 자살” 하면서 신촌 굴다리 밑을 지나가는데 창천교회 앞에서 어떤 노인이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라는 가사의 찬송가 370장을 부르면서 구두를 수선하고 있었습니다.
찬송을 하는 그 노인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 노인은 다리가 없는 불구의 몸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입속을 맴돌던 “자살”이라는 단어가 음절이 바뀌어져 들렸습니다.
자살이란 말을 거꾸로 발음해 보세요. “살자”라는 말이 됩니다.
불구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해서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현실이 어둡고 캄캄하고 앞길이 보이지 않아도 ‘절망’을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약속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희망’을 말하세요. 희망을 말하면 희망대로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삶이 따라야 합니다. 죄악 가운데 하나님을 멀리하는 삶을 살면서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허황된 꿈입니다.
그러나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고 주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는 허황된 꿈처럼 보이는 것도 진정한 희망이 되게 하십니다. 믿음의 렌즈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시기를 소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모든 것을 얹어 놓으세요. 그러면 아무리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절망적인 순간에도 ‘희망’을 말할 수 있고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련 속에서의 산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소망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빛이 임하여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여러분 위에 주님의 빛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살리라.” 이 고백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소망의 사람 (시편 146:1-5)|작성자 change the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