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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임영조, '공'에 대한 인식으로 시를 노래하다
“갈대는 배후가 없다”
백원기
충남 보령 출생의 임영조(1943-2003)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70년 《월간문학》에 「출항」이,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목수의 노래」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바람이 남긴 은어』『그림자를 지우며』『갈대는 배후가 없다』 『귀로 웃는 집』『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시인의 모자』등의 시집과 시선집 『흔들리는 보리밭』등을 남겼으며, 서라벌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임영조는 시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웃과 함께 나누는 감흥이며, 아픔이고, 열정과 정서이며, 언어의 꽃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의 시의 특징은 보편적인 소재와 친숙한 언어, 생생하고 간결한 구문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데 있다. 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자아를 성찰하고 존재의 탐색을 기조로 하는 그의 시적 태도는 데뷔작 「목수의 노래」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관절 마디마디 서걱이는 겨울을
모색의 손끝에 쥐어지는
가장 신선한 꿈의 골격을
나도 함께 자르고 있다.
언젠가 잘려나간 손마디
그 아픈 순간의 기억을 잊고
나는 다시 톱질을 한다.
일상의 고단한 동작에서도
이빨을 번뜩이며, 나의 톱은 정확해,
허약한 시대의 급소를 찌르며
당당히 전진하고 살아오는 자.
햇살은 아직 구름깃에 갇혀 있고
차고 흰 소문처럼 눈이 오는 날
나는 먼지 낀 창가에 서서
원목의 마른 내력을 켜고
갖가지의 실책을 다듬고 있다.
―「목수의 노래」부분
시인 스스로를 톱질하는 일이 본분인 목수에 비유하여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잘라내며 고통스럽게 시를 창작하는 노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목수는 고단한 자신의 일을 부지런하고도 성실하게 수행해 낸다. 숙련된 목수의 톱질은 허약한 시대의 급소를 찌를 만큼 날카롭고 정확하다. 목수의 대팻날에 잘려나가는 것은 군더더기로 덮인 나무의 투박한 외형과 과장된 기교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여 겉모습을 화려하게 치장하기를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는 시인은 기교와 요령이 판치는 현실 속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톱날을 고쳐 잡는 목수의 모습과 조응한다. 평생 새로운 시 쓰기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임영조의 진솔한 시 창작 태도가 여기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자아 찾기는 시인들의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주제이다. 이는 또한 임영조의 시 전반에 대한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자아 찾기의 과정은 ‘심우도’에서 착상을 얻어 쓴 「염소를 찾아서」라는 연작시에서 한결 잘 그려지고 있다. 고2 때 기말시험 보던 날 납부금을 내지 못하자 결국 새끼 밴 염소를 식구들 몰래 허겁지겁 헐값에 팔아버린 사실을 추억하며 새롭게 자아를 성찰한다.
삼십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내다판 걸 알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이 고달픈 生을
어디에 안녕히 부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 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염소를 찾아서 3」전문
납부금 안 냈다고 시험장에서 쫓겨난 긴박함에 식구들 몰래 가뜩이나 긴장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안타깝게도 새끼 밴 염소를 팔아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을 넘어 가는데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팔아버린 것은 시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앙금이 될 수밖에 없다. 그후 중년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니 그 때의 염소처럼 “내가 염소를 내다 판 게 아니라 / 염소가 나를 / 대처에 판 걸 알았다.” 말하자면, 염소를 판값으로 어엿하게 내가 성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염소를 판 마음의 죄 값으로 “굴레 쓴 염소”로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현실에 처해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너무 늦은 깨달음일 수 도 있겠지만,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수 있는 순간부터 생은 새롭게 시작됨을 일깨워 준다.
임영조의 자아 찾기는 「허수아비의 춤」,「백자송」,「12월」등의 시를 거쳐 「고도를 위하여」에 이르러 거의 절정에 이른 느낌을 준다. 일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열려 있는 의식을 의미하는 비움, 즉 공에 대한 인식이 잘 그려진다.
면벽 100일!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 표지 그려진 금표비(禁標碑) 꽂고
한 십 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고도를 위하여」부분
1994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시인의 시적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불씨는 시인의 사물을 관조하는 마음, 비움에서 비롯된다.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이고,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임을 깨달은 화자는 결국 자신의 등이 절벽이니 기대지 말라고 한다. 사방을 막고 세상과 통하는 문을 닫아걸고 자신을 찾으려는 절박한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리하여 시인에게 비움, 곧 탈속의 시적 코드로 ‘높은 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바다의 ‘외딴 섬’과 같은 시적 대상은 화자의 깨달음의 경지를 함축하는 이미지이다. 즉 산이나 외딴 섬은 그의 정신적 희구나 자기 존재의 근원적 성찰과 관계하고 있는 비움, 탈속의 시적 코드이다. 그래서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한 십 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고 하고,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이 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간'이라는 단어는 짠맛의 정도를 나태내거나 짠맛을 내는 재료를 뜻한다.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도 어렵지만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은 그 얼마나 어렵고 고귀한 일인가. 싱겁고 짠 것도 간계(奸計)와 간계(諫戒)의 차이도 한끝이 모자라거나 넘치는 데서 생겨난다. 임영조는 정갈한 맛의 서정성과 더불어 강한 의식을 일깨워주는 듯한 냉철하고 서늘한 해학성으로 “그 어려운 소금 맛”의 지혜를 푸성귀와 생선, 꼴뚜기와 멸치, 그리고 임박과 임향이라는 인물을 비교하면서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푸성귀는 간할수록 기죽고 / 생선은 간할수록 뻣뻣해진다 / 재앙을 만난 생의 몸부림 / 적멸의 행간은 왜 그리 먼가 // 여말에 요승이 임금 업고 까불 때 / 간 잘 맞춘 임박은 승지가 되고 / 간하던 내 선조 임향은 괘씸죄 쓰고 / 남포 앞 죽도로 귀양 가 소금이 됐 다 //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 /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 / 한 입이 내는 奸과 諫 차이 / 한 몸 속 肝과 幹 사이는 그렇게 먼가 // 꼴뚜기는 곰삭으면 무너지지만 / 멸치는 무너져도 뼈는 남는다 / 꽁치 하나 굽는데도 필요한 소금 / 과하면 짜고 모자라면 싱거 운 / 간이란 그 이름을 세워주는 毒이다 // 간이 맞아야 입맛이 도는 / 입맛이 돌아야 살 맛 나는 세상에 / 그 어려운 소금 맛을 늬들이 알어? -「간」전문
잘 절여진 배춧잎처럼 간간하면서도 생기가 남아 있고, 간이 밴 고등어처럼 연륜이 느껴지면서도 무겁지 않은 시편이다. “푸성귀는 간할수록 기죽고 / 생선은 간할수록 뻣뻣해진다”는 시행은 보편적이요 일상적인 사실을 뜻하지 않게 깨닫게 한다.
이 대비의 절묘함에는 세상 살아가는 삶의 원리가 잘 담겨 있다. 간(奸)한 임박과 간(諫)한 임향의 대비 결과 “남포 앞 죽도로 귀양 가 소금”으로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맛의 간이 되고, “꼴뚜기는 곰삭으면 무너지지만 / 멸치는 무너져도 뼈는 남는다”는 간(肝)과 간(幹)의 대비로 그 이미지는 확산된다. 이러한 ‘간’은 세상을 향하여 “꽁치 하나 굽는데도 필요한 소금 / 과하면 짜고 모자라면 싱거운 / 간이란 그 이름을 세워주는 毒”이라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참으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이요 정문일침(頂門一鍼)의 언설이다. “여전히 옳지 못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간(諫)이 아니요 간사하기만한 간(奸)하게, 등마루뼈 같이 간(幹)하게 살아가지 아니하고 자칫 녹아내리는 간(肝)처럼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 소금으로 “간이 맞아야 입맛이 도는 / 입맛이 돌아야 살맛나는 세상에 / 그 어려운 소금 맛을 늬들이 알어?”라고 외쳐대는 것이다. 이 외침이야말로 소금이 필요로 하는 오늘날에 대한 준엄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쉬운 언어와 간결한 구문, 대상과 자아의 절묘한 결합의 서정성과 함께 임영조 시의 특징은 해학적 발상이다. 가볍고 발랄하게 직조되어 있지만 마음을 울리는 서늘함이 폐부를 찌른다. 이러한 요소는 시를 읽는 묘미를 더해 줄 뿐만 아니라 엄숙한 분위기를 한결 경쾌하고 유연하게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복잡하고 번다한 삶 속에서 진실을 찾아 헤매고, 미로와도 같은 세계에서 자신의 나아갈 길을 찾아 고민하던 자아는 모든 번민과 욕망을 벗어 버리면서 비로소 ‘마애불’이 된다.
태안읍 병풍 백화산에 오르면
마애삼존 불상이 반갑게 맞아줘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진다
아담한 키에 두 손 얌전히 모은
볼우물 예쁜 보살을 가운데 두고
우람한 체구의 두 부처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떠억 버티고 서 있는
표정 참 알듯 모를 듯 삼각관계다
(중략)
연포 앞바다 노을 젖는 물소리에
두 부처 잠시 넋 놓고 깜빡 졸 때쯤
저 작고 눈웃음 착한 보살만
슬그머니 빼돌려 옆자리 태우고
부르릉! 줄행랑을 쳐버려?
삼각이 사각관계로 안정된다면
나도 행여 부처가 될까?
-「태안 마애삼존불- 그대에게 가는 길 14」부분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시편이다. 어떻게 불가에서 신성시되는 불상을 보면서 그것을 인간 사회 남녀 간의 애정 관계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그 발상이 참으로 놀랍고 흥미롭다. 태안 백화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은 서산 마애삼존불처럼 그 배치구도가 본존불이 크고 양쪽 보살상이 작은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양옆의 여래가 크고 가운데 보살이 작은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보살이 여래(부처)보다는 클 수 있는 까닭이라 한다.
그런데 이 배치구도의 특이함과 불상의 생김새가 시인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근 마을에 사는 두 동갑내기 총각(양쪽에 서 있는 우람한 두 여래)이 한 처녀(가운데 작고 예쁜 보살)를 두고 팽팽한 삼각관계를 계속하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모두 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대목에 까지 이른 화자는 “저 키 작고 눈웃음 착한 보살만/슬그머니 빼돌려 옆자리에 태우고/부르응! 줄행랑을 쳐버려?”하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욕심은 천진스런 호기심에 불과할 뿐 현실적으로는 물론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가정이 가능하여 “삼각이 사각관계로 안정된다면/ 나도 행여 부처가 될까?”하고 또 한 번 익살을 부려본다. 정말로 그가 부처가 될 수만 있다면 아마 소탈하고 장난기 많은 그런 인간적인 부처가 될 것이다. 시인의 기발한 시적 해학성이 우리의 마음을 잠시나마 부드럽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문명적 삶에 대한 원숙한 사유를 보여 주는 임영조에게 중요한 시적 키워드는 불교적 사유이다. 「느티나무 타불」, 「우담바라」, 「석류 부처」, 「법주사 타종을 보다」 등등은 제목에서부터 불교적이며 내용 또한 불교적인 깨달음이나 해탈을 담고 있다. 특히 시인이 수직적 역동성과 비움의 특성을 지닌 수령 500년 이상의 해묵은 느티나무를 통해 색(色)이 곧 공(空)이며 부처임을 간파하는 것은 인상적이다.
느티나무 타불 / 임영조
곡우 지나 입하로 가는 동구 밖
오백 년을 넘겨 산 느티나무가
아직도 풍채 참 우람하시다
새로 펴는 양산처럼 綠綠하시다
이제 막 어디로 나설 참인지
하늘로 빗어올린 푸른 머리칼
무쓰를 바른 듯 나붓나붓 윤나는
싱그러운 주책이 정정하시다
그런데 이런! 다시 보니
꺼뭇한 앙가슴이 동굴처럼 허하다
얼마나 오래 속 태우며 살았는지
정말 마음 비운 노익장이다
배알까지 빼주고 지은 절 한 칸
스스로 空이 되는 적멸궁이다
저 늙은 느티나무는 아마
어느 날 느닷없이 날벼락 맞고
문득 깨쳤으리라 몸을 비웠으리라
중심을 잡기 위해 무게를 덜고
부질없는 노욕을 버렸으리라
속 비우고 여생을 지탱하는 힘
마지막 안간힘이 곧 나무아미타불
이승에서 이름을 완성하는 것이리
이제는 저승의 명부에도 빠졌을
저 늙은 느티나무는 이 다음
죽어서도 느티나무 陀佛이 되리.
해묵은 느티나무의 우람하고 푸르른 모습에 감탄하는 화자가 가까이 가 보니 “이런!” 벼락을 맞고도 죽지 않은 나무다. 죽지 않고 잎은 피웠지만 시커먼 구멍이 흉물스럽다. 그 순간 깨달았다. ‘구멍’이 키워드인 것이다. 사실 “얼마나 오래 속 태우며” 살았던 세월인가? 이제 배알까지 모두 빼준 그 느티나무는 그 자리에 절 한 칸 짓고는 스스로 적멸궁이 되어버린다. 색(色)의 세계에서 공(空)의 세계로 들어서기, 그 쉽지 않은 깨우침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구원이다. 바로 그 순간, 느티나무는 드디어 타불(陀佛)이 되는 것이다. 느티나무는 스스로 ‘공’을 이루어 ‘몸’이나 ‘노욕’과 같은 세속적인 것을 초월한다. 비움[虛]→동굴→공→적멸궁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사유가 깊어진다. 마침내 화자는 이 느티나무가 부처였음을 깨닫는 것이다. “중심을 잡기 위해 무게를 덜고/ 부질없는 노욕을 버”린 탈속의 자세가 화자에게는 “스스로 공이 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승에서 이름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부처인 셈이다. 그리고 ‘불타’라고 하는 것을 ‘타불’이라고 뒤집은 것과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염불을 ‘느티나무타불’이라고 유사한 어감을 바꾼 것은 시적 묘미를 한결 더해 준다.
많은 사람들이 산행을 즐겨한다. 눈보라치는 삶, 헝클어진 자신의 삶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서 산에 오른다고 말하는 임영조는 산행을 통해 보다 원숙한 자아 찾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산을 오르는 일은 인생살이와도 같기 때문이다. 겨울 산은 비움을 배우는 신선한 시인의 공간으로서 인식된다.
눈 오다 그친 일요일
흰 방석 깔고 좌선하는 山
아무리 불러도 내려오지 않으니
몸소 찾아갈 수밖에 딴 도리 없다
가까이 오를수록, 山은
그곳에 없다, 다만
소요하는 隱者의 처소로 남아
오랜 침묵으로 品을 세울 뿐
(중략)
뽀드득
뽀드득 잔설을 밟고
숨 가쁘게 비탈길을 오르면
귀가 맑게 트이는 법열이여!
잡목들이 받쳐 든 푸른 하늘에
간간 水墨을 치는 구름
눈짐 진 노송이 문득
잘 마른 화두 하나 던지듯
옜다! 솔방울을 떨군다
덤불 속에 멧새들이 화들짝 놀라
재잘재잘 山經을 잃는 소리
-「겨울 山行」부분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바탕으로 하여 삶과 시에 관한 선적 직관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는 눈이 내리다가 그친 휴일 하루를 편안하게 앉아 좌선하는 산을 경험하기를 원해 보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 몸소 산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고 실토한다. 침묵으로 자신의 품위를 세우는 산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 내키는 대로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이다. 하얗게 눈을 덮어쓰고 서 있는 겨울 산, 화자는 뽀드득거리는 잔설(殘雪)이 밟히는 청아한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숨가쁘게 비탈길을 오른다. 그리고 자신의 “귀가 맑게 트이는” 법열(法悅)을 경험한다. 앙상하게 서 있는 노송의 배경으로는 한 폭의 수묵화가 그려져 있다. 화자의 시선은 눈을 덮어쓰고 있는 노송에 머문다. 그 순간, 솔방울이 떨어진다. 노송이 솔방울을 떨구는 것을 “잘 마른 화두 하나 던지”는 것으로, 멧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山經을 읽는 소리”로 묘출해내는 구절들은 자연의 비의까지 읽어 내는 시인의 빼어난 시적 상상력과 선적 직관력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노자와 장자는 비움을 강조한다. 욕망은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욕망이 마음에서 요동치는 한 고요하지 못한다.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시끄러우면 편안하지 못하다. 비움이란 제 안에 욕망을 덜어내는 일이다. 더 많이 비우고, 비움을 넘어 나누는 것은 고요해지기 위함이다. 자신의 길을 찾아 헤매던 임영조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무욕과 탈속의 경지에 접어들게 되는 면모를 보인다. 즉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순간적 깨달음을 시로 형상화하고, 독자와 더불어 깨닫게 되는 합일의 정신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늦가을 무렵 산에 올라 자연을 통해 존재의 근원적 의미를 성찰함과 동시에 마지막 삶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데서 잘 드러난다.
그 동안 참 열심히들 살았다
나무들은 마지막 패를 던지듯
벌겋게 상기된 이파리를 떨군다
한평생 머리채를 휘둘리던 풀잎도
가을볕에 색 바랜 몸을 뉘고 편하다
억척스레 살아온 저마다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하는 가벼움이다
가벼워진 자만이 업을 완성하리라
허나, 깨끗하게 늙기가 말처럼 쉬운가
아하! 무릎 칠 때는 이미 늦가을
(중략)
어서 그만 내려가자, 더 늦기 전에
가랑잎같이 따뜻하게 잘 마른
어느 老시인의 손이라도 잡아볼까나
나는 아직 선뜻 내놓을 게 없어서
죄송죄송 서둘러 하산하는데 어!
싸리나무 회초리가 어깨를 후려친다
짐스런 생각마저 털고 가라고?
산에 와 깨치는 늦가을 문답.
-「늦가을 문답」 부분
화자가 늦가을 산에 올라 자연을 통해 깨우진 것은 ‘가벼움’이다. 이 가벼움은 업을 완성하고 깨끗하게 늙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을 까다롭다. 늦가을의 나뭇잎과 풀잎처럼 자신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해야 한다. 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번민이 시인의 마음을 억누르게 된다. 억척스럽게 살아온 삶인 만큼 선뜻 반납하지 못할 현실적인 요소들이 그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미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하산하는데 싸리나무 회초리가 어깨를 후려치는 순간, 깨닫는다. 번다하고 잡스런 생각마저 털어버리고 하산하라는 싸리나무 회초리의 ‘방(棒)’은 허무함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생의 진실을 추구하려는 시인의 달관된 인생의 태도를 엿 볼 수 있다.
눈 그친 대숲 속
부리 작은 참새떼가 떠들썩
어둠 쪼는 소리로 먼동이 튼다
선잠 깬 대숲이 햇귀 받아 부신지
용쓰듯 눈짐 털고 푸르게 선다
가문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
울울창창 일제히 궐기한 형국이다
숲 온채를 빗자루로 하늘을 쓸어
지체를 세우려는 환한 몸부림
서늘하고 올곧은 안간힘이 보인다
하늘로 머리 두고 사는 자는
거저 받는 서설도 짐이 된다고
서걱서걱 어깨 터는 청죽비소리
알겠다, 늘 푸르고 곧게 서려면
한살이의 마디는 매끄럽고 분명히
생의 보푸라기는 자주 터는 것임을
마음 비운 전신의 빨대를 세상에 박고
한 우물만 젖 먹듯 빠는 것임을
눈 그친 대숲은 보여주는 것이다
삭신 온통 얼얼하고 시리게.
-「눈 그친 대숲」전문
제시된 대나무의 속성은 “곧음”에서 비롯된 성찰의 결과를 이야기 한다. 대숲에서 화자는 “한 살이의 마디는 매끄럽고 분명히 생의 보푸라기는 자주” 털어야 한다는 삶의 방식을 인식하게 되며, “마음을 비”우고 “한 우물만 빨”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늘 푸르고 곧게 서”기 위해서는 대나무처럼 “삭신 온통 얼얼하고 시린”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는 것 또한 발견해 낸다. 여기서 푸르거나 곧다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을 세우는 것이다. 즉 자신의 주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인고”와 “성취”라는 시적 의미를 발견하여 자아 성찰의 표상으로서 형상화하고 있다.
일찍이 소식(蘇軾)은 “고요한 다음에야 모든 것이 움직이고 텅 빈 다음에야 온갖 경계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시대적 상황이나 현실 상황보다는 존재를 수용하고 또 한편 대결하면서, 오직 시적 장치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자문하고 깨달음을 터득하는 구도행위가 시 쓰기라는 신념을 가진 임영조의 시적 서정은 구멍, 경계, 사이, 틈에서 존재의 외부와 서정적 자아의 내부가 만난다. 그 대표적인 시가 비움과 채움의 변주로 한결 극대화 되고 있는 「갈대는 배후가 없다」이다.
청량한 가을볕에 / 피를 말린다 / 소슬한 바람으로 / 살을 말린다 // 비천한 습지에 / 뿌 리를 박고 /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 젊은 날의 속 된 꿈을 말린다 /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 듯 /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 말 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 성 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 저 꼿꼿한 老後여! //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 배후가 없 다, 다만 /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 갈대는 갈 데도 없다 //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 피를 말 린다 / 몸을 말린다 /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는 배후가 없다」부분
시인의 감각기관에 걸리는 모든 사물과 자연은 그의 비움이 자리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갈대라는 하나의 사물 존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자기를 동화시킨다. 곧 갈대가 된 자신이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리고,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리는 절대적 생생한 빈 공간의 생명력을 지향하는 것이 그의 시를 지탱하는 힘인 것이다. 곧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버릴 수 있는 소용돌이의 시적 공간, 그의 시적 의지는 “피를 말리는” 의지로, “살을 말리는” 의지로 변증법적 소용돌이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래서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으로 이루어지는 갈대의 존재이다.
‘비움’으로써 주체적으로 세상과의 단절 또는 고립을 이루는 존재들을 형상화 한다. 즉 갈대의 속성과 양태가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비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탈속을 바꾸는 시인의 그것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리하여 투사의 공간은 일상적 자아로서의 현실에 얽매인 자아를 이탈시켜 비움의 미학, 빈 구멍의 미학을 탄생시킨다. 그 비움(空)의 시적 공간에 그의 시적 상상력이 자리한다. 따라서 비움의 존재인 갈대의 세계는 형이상학적, 생기론적 알레고리로 다듬어 낸 임영조의 시적 지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임영조의 시는 섬세하고 진솔하고 포근하다. 조용히 관조하고 골똘히 음미하고 열린 마음으로 체감하는 그의 시는 질박한 뚝배기 같지만 뚝배기의 질감처럼 질리지 않는 깊은 멋을 가지고 있다. 구수한 입담과 귀로 웃는다는 아호 이소(耳笑)를 미당 서정주에게서 얻을 정도로 마음 씀씀이 넉넉했던 그는 2003년 5월 28일, “구름도 흘러가서 오지 않고/바람도 불려가서 오지 않는 곳/미처 못 가본 세상 밖”(유작시「해동갑」)으로 너무 일찍 떠났다. 하지만 속이 빈 범종은 그 큰 속만큼이나 크게 비워내는 종소리를 삼십삼천에 두루 울려퍼지듯이, 그의 비움의 시적 향기와 메아리는 색과 공이 경계를 서로 지운 고요 속에서 한결 같이 들려오고 있다.
백원기/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