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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선악일념
철장방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황약사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자기들의 방주 구천인을 대번에 물리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모두 얼떨떨해져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거 참 맛있구나, 맛있어!"
모두들 소리나는 쪽을 돌아다보니 언제부턴가 쇠가마 곁에 낯선 사람 하나가 누워 있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은 누더기를 걸친 남루한 행색으로 몹시 지저분해 보였다. 하지만 눈은 아주 정기가 있어 보였는데 서글서글한 두 눈으로 철장방 사람들을 둘러보며 무엇인가를 아귀아귀 씹어 먹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가마솥에서 건져 낸 뱀과 독수리 고기였다.
철장방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 거지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느냐? 네가 먹는 그 고기엔 독이 있어!"
그 거지는 그들의 말엔 아랑곳없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먹어댔다.
철장방 사람들은 그가 무슨 산해진미나 맛보는 듯이 고기를 게걸스레 뜯어먹는 것을 보고 모두들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지켜 보던 한사람이 물었다.
"이 솥의 고기엔 독이 있는데 당신은 겁나지도 않소?"
거지가 웃으며 대꾸했다.
"거지 주제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되나? 남이 먹을 걸 주기만 해도 감지덕지지. 찌꺼기든 나쁜 음식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 둬야 하는 거야, "
그는 다시 펄펄 끓는 물에 손을 집어 넣어 뱀 한 토막을 건져 냈다. 그가 어찌나 맛있게 먹어대는지 철장방 사람들까지도 그 고기가 정말 먹을 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구천인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정말 대단한 양반이로군.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거지는 그저 웃는 낯으로 가마솥에서 고기를 건져 먹을 뿐이었다. 구천인은 그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아 은근히 화가 났다.
"이보시오, 그 고기를 먹으면 당신은 중독되오. 그 고기의 독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나 있소?"
거지가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엔 독초인 식심초(蝕心草)가 들어 있지. 거기에다 독사와 독수리를 넣고 끓이니 아주 맛있구만 그래, 자네도 좀 맛보지 않겠나?"
그의 말에 구천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놈이 날 떠보려는 수작이렷다?'
구천인은 아무래도 가만히 있어선 안 될 것 같아 선뜻 그의 곁에 다가앉았다.
"당신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니 이거 침이 넘어가서 견딜 수가 없군요. 어디 나도 좀 먹어 봅시다."
구천인도 가마솥에서 고기를 건져 내어 맛을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기막힌 맛이었다.
구천인은 가마솥에서 고기를 건져 내어 정신없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고기의 독이 몸에 퍼지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는 유심히 거지를 눈여겨보았다. 가만 보니 거지가 국에서 고기를 건져 내는 방법은 아주 독특했다. 그는 먼저 손을 국 속에 밀어 넣은 다음 팔뚝까지 국 속에 담그더니 고기를 건져 낼 때면 희한하게도 손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야 팔뚝이 나오는 게 아닌가? 거지의 팔뚝을 보니 온통 새까맣게 물이 들었는데 딱딱하게
굳어 보이는 게 이미 중독된 듯했다.
거지가 웃으며 말했다.
"구천인, 자넨 철장방의 방주 노릇을 헛했구만 그래. 여태껏 이렇게 맛좋은 음식도 모르고 있었다니. 그래, 직접 먹어 보니 어떤가? 천하일미가 아닌가?"
구천인은 아무 대꾸도 않고 거지와 함께 가마 속의 고기를 번갈아 건져 내어 먹기만 했다. 그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거지가 또 입을 열었다.
"가마 밑의 불이 약하군 그래. 좀더 끓이면 안 되겠나?"
구천인이 눈짓을 하자 부하들이 몰려와 가마 밑에 장작을 더 넣었다. 그러자 국이 더 세차게 설설 끓어 대기 시작했다. 거지가 손을 넣어 가마솥을 저으며 말했다.
"좀 기다렸다가 먹으면 더 맛있을 거야."
한식경 가량을 더 끓이고 나서 거지가 말했다.
"됐어. 이젠 먹자구."
두 사람은 다시 가마솥에서 고기를 건져 먹기 시작했다. 실컷 먹고 난 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배가 부르니 졸음이 오는군. 보게나 여기에 무슨 독이 있다는 건가? 아, 난 좀 자야겠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구천인이 무어라 말할 사이도 없이 벌렁 드러누웠다. 그는 자리에 눕자마자 금세 곯아떨어졌는데 코를 고는 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요란했다. 철장방 사람들은 모두 구천인의 행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방주가 아주 지독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방주가 안하무인격으로 날치는 이 거렁뱅이를 죽여 버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구천인은 망설이기만 할 뿐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한식경이나 흘렀을까. 한참 달게 잔 거지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아, 한숨 잘 잤다!"
그는 일어나 앉기가 무섭게 구천인에게 물었다.
"내가 한숨 자는 동안 자네들은 뭘 했나?"
"당신이 잠자는 걸 구경하고 있었소."
구천인의 대답에 거지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 홍칠이 어디 볼 게 있다구 잠자는 걸 구경해?"
구천인은 그가 홍칠이라는 말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천하에서 제일 큰 무리가 바로 개방이고 개방에서 지금 방주 노릇을 하고 있는 자가 바로 홍칠이 아니던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그의 사부인 소씨 거렁뱅이로부터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이라는 두 가지 신기를 전수받았는데 재주는 소씨 거렁뱅이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 그러나 구천인은 은근히 호기가 치밀어 속으로 생각했다.
'난 사부님한테서 무예를 배워 철장방의 방주가 된 이래 천하의 영웅과 겨루어 보지 못했다. 오늘 천행으로 이 홍칠공을 만났으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홍칠은 구천인을 바라보며 거만하게 물었다.
"자네가 철장방 방주 구천인인가?"
구천인은 침착한 기색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홍칠이 또 큰소리를 쳤다.
"그렇지 않아도 네 놈을 찾아 한번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 놓으려 했었다. 그런데 네 놈이 나한테 고기를 대접했으니 손을 대기가 멋쩍게 됐군 그래."
구천인이 홍칠을 노려보며 한마디 받아 주었다.
"고기를 먹은 건 네 놈이 스스로 먹은 것이지 내가 대접한 건 아니지."
그러자 홍칠이 손뼉을 치며 대꾸했다.
"그렇군! 내가 먼저 먹지 않았더라면 네 놈은 이 고길 먹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테구.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이 거지가 네 놈한테 모르는 걸 가르쳐 주기까지 한 셈이다. 독이 한 가지면 문제가 있지만 독을 섞으면 약간 좀 아프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게 되지. 이제 제대로 알겠나?"
홍칠을 바라보는 철장방 사람들의 마음속엔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홍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가 너의 신세를 진 것은 없는 셈이지?"
그 말에 구천인도 호기롭게 껄껄 웃었다.
"신세질 게 뭐가 있단 말이냐? 나하고 싸우고 싶으면 어서 손이나 쓸 일이지, 계집년처럼 무슨 잔말이 그리도 많아?"
홍칠도 큰소리로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그래, 싸우려면 손을 써야지."
그는 냉큼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의 철장방은 과거엔 괜찮았어. 네 놈의 사부가 방주 노릇을 할 땐 실로 좋은 일도 적잖게 했었지. 한데 네 놈 차례가 되니까 철장방이 쓰레기더미가 됐단 말야. 네 놈 수하엔 온통 아첨이나 하기 좋아하는 놈들뿐이고 어디 쓸 만한 놈이 있나 말야……."
홍칠의 말에 누군가가 말허리를 잘랐다.
"네 놈이 뭐길래 감히 우리 철장방 일에 참견하는 거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느냐?"
두 사람이 앞다투어 나서더니 곧장 홍칠에게 덮쳐 들었다. 철장방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장력을 믿는 터라 남과 싸울 때면 병장기 같은 것은 여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다짜고짜 손을 쓰기 시작했다.
구천인은 그들을 말리려다가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그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 보았다.
홍칠이 번개같이 몸을 움직여 나는 듯이 피하더니 두 사람을 향해 동시에 장을 날렸다. 그의 장에 한 사람은 붕 떠올랐다 떨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뼈가 부러졌다.
이를 지켜 보던 철장방 사람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고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구천인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홍칠에게 물었다.
"이게 그 강룡십팔장이란 거냐?"
그는 홍칠이 개방의 방주로서 두 가지 신기인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홍칠이 웃으며 대답했다.
"천만에! 이건 내가 만들어 낸 권법으로 '소요유(逍遙游)'라고 부른다. 장자(莊子)의 책에는 사람이 소요하고 새가 소요하고 물고기가 소요한다는 구절이 있지. 바로 거기서 따온 이름이다……."
그의 말에 구천인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홍칠이 갖고 있는 절기는 그만두고라도 이 '소요유'만 하더라도 권법이 기막히게 오묘하지 않은가.
그러나 구천인은 생각을 감추며 말했다.
"네 놈이 우리 철장방엔 사람이 없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내가 오늘 본때를 보여 주마."
홍칠이 웃으며 대꾸했다.
"좋다, 네 놈이 그걸 바란다면야 이 어른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홍칠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잽싸게 나서면서 구천인의 면상을 향해 장을 날렸다.
구천인도 얼른 장을 날려 맞받아 치면서 다른 한 장으로는 얼굴을 막았다. 첫 공격이 좌절되자 홍칠은 몸을 날려 구천인을 에워싸고 돌며 주먹과 장을 빗발치듯 내질렀다.
구천인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앞뒤로 장을 내밀며 대적했다. 두 사람은 10여 합을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홍칠이 바깥 쪽으로 물러나더니 껄껄 웃었다.
"이 어른이 이 몇 해 동안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 보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제대로 만난 것 같구나. 네 놈의 무예도 그리 만만한 것 같진 않은데 이제부터 제대로 한번 싸워 봐야겠구나."
홍칠은 품속에서 녹옥죽봉(緣玉竹棒)을 꺼내 들고는 그것으로 구천인을 가리켰다.
"이건 타구봉이라는 것인데 어디 맛을 좀 보아라."
그는 손가락 세 개로 녹옥죽봉의 허리께를 잡고 돌리기 시작했다. 구천인은 그 녹옥죽봉을 보며 속으로 은근히 놀랐다. 개방의 타구봉법은 종래로 방주에게만 전수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 주지 않는 것으로, 이 봉법에는 걸고, 가르고, 감고, 찌르고, 쑤시고, 당기고, 막고, 돌리는 여덟 가지 비법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홍칠은 현재 죽봉으로 빨리 감는 동작을 쓰고 있었는데 구천인이 아무리 훌륭한 장력을 써도 홍칠의 죽봉에 의해 여지없이 무산되곤 했다. 구천
인은 아까처럼 진퇴의 폭을 크게 하지 않고 장력도 약간 조절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방식으로 손을 쓰든 그 장력은 홍칠의 몸에 닿지 못하였다. 홍칠은 다만 녹옥죽봉으로 가벼이 감는 동작을 취할 따름이었지만 죽봉 끝이 움직이기만 하면 구천인의 그 무서운 장력은 어디로 갔는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구천인이 손을 멈추며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개방의 타봉법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구려. 이제 비로소 그걸 알게 되었소."
홍칠은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기색을 보니 불복인 모양이로구만. 끝까지 싸워 보고 싶다면 나도 마다하진 않겠다."
홍칠은 타구봉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는 다시 말했다.
"좋아, 난 자네와 장법으로 겨루겠네!"
구천인도 바로 그걸 바라고 있었다. 그가 내심 자신이 있는 것도 바로 자기의 철장법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공과 철장공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였다. 당년에 상관위가 방주의 자리를 구천인에게 넘겨줄 때 철장방의 호수들은 모두 불복했었다. 그래서 상관위는 절의 대정향로(大鼎香爐)에 손자국을 남기는 시합을 시켰었는데, 사숙과 사조들은 결국 자신들의 철장공이 구천인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구천인은
자기의 이 두 가지 재주에 대해 긍지를 느끼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 재주가 있다면 나와 장력을 겨루든가 아니면 누구의 경공이 더 나은가 비교해 봅시다."
홍칠이 넓적다리를 철썩 치며 대꾸했다.
"좋아 좋아. 자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보자구."
홍칠은 흥이 나서 어깨에 메고 있던 조롱박을 끌어내렸다.
"이 조롱박 속엔 죽엽청(竹葉靑)이 담겨 있네. 아까 이 어른이 고기를 먹을 땐 이걸 꺼내지 않았었지. 그건 자네가 가마 속의 고기를 먹은데다가 이 술까지 마시게 되면 중독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어. 그러나 시간이 좀 흘렀으니 어디 한번 마셔 볼 텐가? 그럴 용기가 있나?"
"당신이 마신다면 나도 마시겠소."
구천인이 눈을 부릅뜨며 대꾸하자 홍칠은 당장 조롱박 주둥이를 입에 대고 두어 모금 마셨다. 잠시 후 그는 조롱박을 구천인에게 넘겨주었다. 구천인도 서슴없이 조롱박의 술을 두어 모금 마셨다. 그런데 술독이 어찌나 센지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 같고 위가 타는 듯이 아파 왔다. 사실 그는 은근히 두려웠다. 이 조롱박의 술이 뱃속의 고기와 한데 섞이면 무슨 변이 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지켜 보고 있는 홍칠의 시선을 의식하며 속으로 생각
했다.
'저 놈도 개방의 방주지만 나 구천인도 일방(一需)의 방주이니 절대로 약하게 보여서는 안 돼.'
구천인은 홍칠과 함께 번갈아서 조롱박에 담긴 술을 잠깐 사이에 몽땅 마셔 버리고 말았다.
몸에 술기운이 퍼지자 구천인은 약간의 피로를 느꼈다. 그는 홍칠을 건너다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구천인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구천이도 튕긴 듯이 뛰어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됐소. 이제 장력을 겨뤄 봅시다!"
홍칠이 껄껄 웃으며 조롱박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좋아 좋아. 내가 자네에게 개방의 신기 강룡십팔장의 맛을 보여주지!"
두 사람이 맞서자 이번의 싸움은 아까보다 훨씬 무시무시했다.
홍칠이 싸우다 말고 말했다.
"자네의 그 철장은 별게 아니야. 어차피 질 텐데 굳이 싸워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구천인은 대답하지 않고 홍칠만 바라보며 틈을 노렸다. 홍칠은 두 손을 앞으로 가져가더니 들숨을 크게 쉬고는 '팍!'하는 소리와 함께 장을 내밀었다. 이 장은 항룡유회라고 하는 법수로, 홍칠이이 법수를 쓰자 구천인의 뒤에 있던 나무의 줄기가 댓바람에 뚝 부러져 나갔다. 구천인도 얼른 손을 내밀어 대응했다. 그는 먼저 오른손을 내밀어 일부러 허세를 보인 다음 다시 왼손으로 마미장(摩眉掌)을 내밀었는데 이를 본 홍칠은 속으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재주가 괜찮군! '
홍칠은 다시 힘을 모아 장을 날렸다. 이번에 쓴 법수는 쌍장을 이용한 견룡재전(見龍在田)이라는 것인데 그 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구천인은 몇 발짝이나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천인은 급히 두 손을 거둬 들여 장으로 가슴을 막았다.
홍칠은 그가 뒤로 밀려 나간 것을 보고 더는 장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 조롱박을 집어 들더니 입에 갖다 대었다. 그러나 술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속이 상한 듯 투덜댔다.
"젠장, 술이 한 모금도 없잖아!"
구천인이 숨을 돌리고 나서 우울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개방의 절기 강룡십팔장이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탄복하는 바입니다."
홍칠이 웃으며 대꾸했다.
"자넨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론 이 어른을 욕하고 있을걸? 안 그런가?"
구천인은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움찔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게 대 답했다.
"홍칠공, 저는 다만 당신의 경공이 어느 정돈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한번 잘 배워 보고 싶습니다."
홍칠이 큰소리로 웃었다.
"좋네, 좋아. 그토록 원한다면 내 얼마든지 가르쳐 주지. 그까짓 것 뭐 어렵겠나?
"좋습니다. 그럼 경공을 겨뤄 봅시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 서 있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쏜살같이 앞으로 날아갔다. 홍칠은 몸체를 좀 작게 만들어 가지고 한 번 솟구치면 몇 장 밖으로 나갔는데 내력이 구천인보다 낫다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구천인도 지지 않으려고 몸을 솟구쳤다. 마치 날아 가는 낙엽처럼 둥둥 떠가는 것이 실로 수상표 공력다웠다. 두 사람은 재빨리 먼 산의 꼭대기까지 갔다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홍칠이 구천인보다 더 빨라서 훨씬 먼저 제자리에 돌아왔다. 홍칠이 자리
에 털썩 주저앉은 후에야 구천인이 뒤미처 홍칠의 곁에 와 뛰어내렸다.
홍칠이 구천인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구천인, 자네네 철장방 사람들이 갖은 악한 짓은 다 하고 있는데 근래에는 더욱 말이 아니더군. 내가 미리 경고해 두겠는데 앞으로도 그런 일이 계속된다면 내가 자넬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구천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홍칠을 바라보았다. 홍칠의 얼굴은 전에 없이 무섭고 위엄 있어 보였다.
홍칠은 더는 말하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양손에 각각 조롱박과 녹옥죽봉을 나눠 들고는 나는 듯이 그곳을 떠났다.
철장방 사람들과 헤어져 산을 내려온 황약사는 인파가 붐비는 남송 건강부에 들어섰다. 이 건강부는 빗 도시 남경 (南京)이었는데 아주 번화한 고장이었다. 황약사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싫어했다. 그는 떠들썩한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강변에 있는 한 술집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호호탕탕 흘러가는 장강의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니 태호가 생각났다.
그가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험상궂게 생긴 장정 두 사람이 밧줄에 묶인 열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를 끌고 들어섰다. 두 사내의 몸에서는 소금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가만 보니 의복에도 소금기가 하얗게 배어 나와 있었는데 이 장강 지역에서 염장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술집에 들어서더니 밧줄을 잡아당겨 어린애를 땅바닥에 앉게 했다. 그중 한 자가 소리 높여 외쳤다.
"주인, 주인 있소?"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주인이 당황한 기색으로 달려 나왔다.
"객관(客官) 나으리, 오셨습니까? 뭐든 분부만 내리십시오."
"맛있는 음식과 술을 내오게, 돈 걱정은 말고."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인은 냉큼 주방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 있어 술과 안주가 갖춰져 나왔다.
두 사나이는 술과 요리를 보자 더는 말하지 않고 부지런히 먹어 대기 시작했다. 아이는 침을 삼키다가 상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며 애걸했다.
"절 좀 풀어놔 줘요. 저도 좀 먹고 싶어요.'"
두 사나이가 기가 막히다는 듯 서로 마주보며 징그럽게 웃어댔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뭘 좀 먹고 싶다구? 그래 먹어 봐라."
그는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어 어린애의 입에 마구 밀어 넣었다. 그러자 다른 한 자도 덩달아 안주를 집어서 그 애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두 놈이 번갈아 안주를 입에 밀어 넣자 아이는 음식을 입안 가득 담은 채 씹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아이는 급기야 입귀에 피까지 흘렸는데 두 사나이는 그것을 보고 껄껄 웃으며 무척 재미있어 했다.
이를 지켜 보고 있던 황약사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놈들에게 버릇을 가르쳐 주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이 '태백(太百)'이라는 술집이 하도 유명한 곳이라 이곳에서 싸움을 벌이면 시끄럽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치미는 분노를 꾹 참고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술만 마셨다.
아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고 한 놈이 지껄여 댔다.
"진현풍(陳玄風) 이 놈아, 네 놈 목숨도 이젠 끝장난 셈이니 오늘은 먹고 싶은 것이나 실컷 먹어라."
이어서 그는 소년의 손을 묶은 포승을 풀어 주고 그 애의 견정대혈(肩井大穴)과 다리의 환조(環跳)를 눌러 놓고는 아이에게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여기에 있는 안주를 마음대로 먹으라구."
두 사나이는 더는 그 애를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에 큰형 님께서 이 건강의 십대 부호를 찾으신 건 그들과 짜고서 소금간을 올리려는 것일 거야. 만일 그자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자들한테 구경거리 하나를 만들어 주세. 그자들한테 이 진현풍의 끝장을 보여 주잔 말일세."
"내 성질 같아서는 그 건강의 부호 놈들을 몽땅 잡아다가 한칼에 한 놈씩 죽여 버리고 그 살점을 이 놈한테 먹였으면 시원하겠네. 그러고 나서 칼도마를 장강에 던져 버리면 얼마나 멋지겠나?"
"그래 큰형님께선 안 그러실 것 같은가? 두고 보게. 만일 큰형님께서 그 십대 부호 놈들의 대답을 얻어 내게 되면 자연히 아무 말씀도 안 하실 것이지만 그 놈들이 대답하지 않는다면 필시 죽음밖엔 없을걸세."
황약사는 은밀히 주고받는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 두 놈은 좋은 놈들이 아닌 것 같군. 이 놈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뒤를 밟아 알아봐야겠다.
갑자기 한 놈이 성난 소리를 내었다.
"빨리 빨리 먹지 않고 뭐해? 시간 없어!"
소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음식을 정신없이 퍼먹었다. 음식 그릇은 잠깐 사이에 바닥이 났다.
두 사나이는 곧 진현풍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수레 한 대가 두 사람 안에 와 섰다. 황약사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밟았다. 그 수레는 건강부의 성을 빠져 나와서는 곧장 강변 쪽으로 갔다.
강변에 이르니 낡은 절이 있었는데 '니마묘(泥馬描)'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남송 개국 황제인 고종(高宗) 조구(趙枸)가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와 함께 금나라 사람들한테 붙잡혔었는데 하루는 도망하여 이 강변에 이르렀다. 강을 건널 배가 없어 망설이고 있는 참에 아주 영특하게 생긴 말 한 필이 강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도망쳐 온 강왕(康王) 조구 뒤를 금나라 군대들이 추격해 오는 것을 본 그 말은 발굽으로 땅을 구르며 조구더러 어서 올라타라고 울부짖었다. 조구는 급한 나머지 말등에 올라앉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말은
강에 들어서더니 나는 듯이 질주하여 곧장 대안으로 달려갔다. 언덕에 올라서서 말에서 내린 조구가 머리를 돌려 말을 바라보니 말은 투레질을 하며 몸에 묻은 진흙을 털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무지의 흙더미가 쌓이는 것이었다. 강왕이 강변의 절에 들어가 보니 절 안 낭하에 있던 그 니마가 그림자도 없이 사라졌다. 강왕은 임안에 와서 도움을 정하고 국호를 고쳤는데 이때로부터 남송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강왕은 즉위한 후 고종으로 칭하였는데, 고종은 이
니마가 공이 있다고 생각하여 건강성 밖에다 니마묘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이 니마묘는 아주 휘황한 건물인데 말 대가리에 사람의 몸뚱이를 가진 신(神)이 모셔져 있으며 사면의 벽에는 강왕이 니마를 타고 강을 건너는 이야기의 내용이 그려져 있다. 고종이 재위하던 시절에는 이 니마묘의 향불이 꺼질 줄을 몰랐으나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서는 그처럼 흥성하지 못했다.
그 두 사람은 진현풍을 데리고 절 앞까지 갔다. 절 문앞에는 많은 장정들이 파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 두 사람을 보더니 들어가라는 눈짓을 했다.
황약사는 그들의 시선을 끽해 잽싸게 몸을 날려 절 앞에 서 있는 큰 나무 위에 뛰어올랐다. 이어서 그는 몇 개의 담을 날아 넘어 어느새 대전(大殿)의 용마루 위에까지 올라갔다. 뜰 안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뜰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횃불 한 자루와 칼 한 자루씩을 들고 있었는데 불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매우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아홉째 형님께서 진가라는 꼬마를 끌어 오셨다!"
이 말에 절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 나왔다. 머리칼을 함부로 풀어헤친 모습의 두목이라는 자는 가만 보니 눈뜬 장님이었다.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쇠로 만든 커다란 부채였다. 여덟 명 되는 인물들이 그를 따라 천천히 전(殿)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두목을 중심으로 방금 하인들이 갖다 놓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황약사는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가 없어 가벼이 몸을 날려 뜰 한쪽에 있는 커다란 나뭇가지에 옮겨 앉았다.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그들을 모두 끌고 올라오너라!"
그러자 손에 오랏줄을 쥔 사람 하나가 편전에서 걸어 나왔다. 뒤이어 그 오랏줄에 매인 사람들이 줄레줄레 끌려 나왔는데 남녀노소가 무려 4, 50명이나 되었다. 사람들이 대정 앞까지 끌려 나오자 우두머리인 청맹과니가 한바탕 징그럽게 웃어댔다. 실컷 웃고 난 그는 마치 앞을 볼 수라도 있는 듯이 끌려온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 어느 틈엔지 끌려온 사람들 앞까지 미끄러져 왔다.
"너희들은 건강의 십대 부호들이지? 내가 너희들한테 쪽지를 보내어 소금을 사들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건강부의 소금을 몽땅 사들이라고 했는데 왜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사람들은 모두 묵묵히 말이 없었다. 그중 제일 앞줄에 묶여 있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소금을 파시는데 장강의 수리 조건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열 집에서 시장에 있는 소금을 모조리 사들인다 해도 나으리께서는 바다에서 많은 양의 소금을 쉽사리 또 날라 오실 겁니다.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그 소금을 다 사들일 수 있겠습니까? 또 해염으로 말하면 명주나 비단처럼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도 못 됩니다. 관가에서 매매하는 물건은 사사로이 저장해 두지 못한다는 걸 나으리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서 나으리라는 자는 다시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매성비(梅星飛), 또 네 놈이로구나?"
서 나으리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보아하니 건강부의 열 집 사람들 중 네 놈이 말재주가 제일 나은 모양이지? 그런가?"
젊은 사나이는 두려워하지 않고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한 말은 사실입니다. 서 나으리께서 건강의 우리 열 집을 기어이 못살게 구시려 한다면야 제 입을 틀어막으면 그만이지요."
서 나으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럼 네 놈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유(劉)씨, 곡(曲)씨, 송(宋)씨들한테 물어 보아. 이 서 나으리가 자네들에게 소금을 사게 하는 것이 자네들을 해치는 것인가고 말이야!"
그는 부채로 묶여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다가 그 부채로 한 노인의 어깨를 눌렀다. 그러자 노인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했다. 그는 또 부채로 한 어린애의 머리를 눌렀다. 그러자 어린애는 부채에 눌려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 마라. 울면 죽여 버릴 테야!"
서 나으리가 소리쳤다. 어린애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뚝 울음을 그쳤다. 서 나으리가 매성비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네 놈이 아무 재주도 없는 주제에 꽤나 오기를 부리는구나. 네 놈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한 번 보고 싶을 정도다."
그는 다가가서 손으로 매성비의 얼굴을 만져 보려 했다. 매성비는 뒤로 물러서며 그를 피했다. 서 나으리는 재빨리 부채로 매성비의 혈도를 가리켜 그가 꼼짝달싹 못하게 했다. 서 나으리는 매성비의 얼굴을 만져 보며 중얼거렸다.
"음, 괜찮게 생긴 놈이구나."
그는 다른 사람들 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듣자니 매성비의 여편네가 잘났다고들 그러던데 정말 그렇게 고운가?"
그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염방( )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어댔다. 그 중의 누군가가 매성비의 아내에 대해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진현풍을 끌고 온 아홉째였다.
"큰형님, 이 매가라는 놈한테는 훌륭한 여편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딸도 있답니다. 그 년은 아주 예쁘게 생겼는데 얼굴만 깨끗하게 생긴 게 아니라 엉덩이도 아주 깜찍하게 생겼지요. 건강부에서 제일 가는 미인이랍니다."
그 말에 염방의 여덟 우두머리들은 모두 허리가 부러질 지경으로 웃어댔다.
서 나으리란 자는 매성비의 아내를 향해 더듬더듬 손을 뻗쳤다. 그 여인은 딸을 부둥켜안은 채로 뒷걸음질쳐 숨으려 했다.
서 나으리가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로 딸을 향해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매성비의 딸은 그가 두려워서 감히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머니 품속에 머리를 틀어박았다. 잠시 후 그녀는 간신히 대답했다.
"전 매약화(梅若花)예요."
"좋은 이름이군! 좋은 이름이야!"
서 나으리는 슬슬 다가서며 매성비의 아내를 매만지려 했다. 참다못한 매성비가 욕설을 퍼부었다.
"서 나으리, 당신네 염방 사람들은 정말 형편 없구려, 할말이 있으면 나하고 할 것이지 무엇 땜에 우리 집사람은 괴롭히는 거요?"
"그런가? 내가 네 놈더러 소금을 사라고 말했는데도 네 놈이 말을 듣지 않으니 낸들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너희들 열 집은 돈이 얼마든지 있잖아? 소금값도 싼데 네 놈들이 좀 많이 사서 소금값을 올려 주면 좀 좋아? 그럼 소급을 팔아먹고 사는 우리도 좀 살만해지지 않겠냔 말야!"
워낙 한(漢)조 때부터 염철(遮鐵)에 대해서는 관세를 실시하여 사인(私人)은 해염을 매매하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도 서 나으리라는 자는 염방의 두령 노릇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소금을 관가에 팔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건강부의 열 집들에 사염(私濫)을 사라고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처럼 법을 어기면서 하는 짓을 이 열 집에서 어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서 나으리는 매성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기어이 손을 내밀어 매성비의 아내를 움켜잡았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여인의 젖가슴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남들이 모두 건강부의 미인들 중에 네 년이 으뜸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보지 못하니까 만져 보기라도 해야겠다."
그의 손길을 견디다 못한 여인은 품속에서 가위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자기 목을 겨누고 소리를 질렀다.
"여보, 미안해요. 난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요."
여인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가위로 자기 목을 푹 찔렀다. 순식간에 그녀의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딸 매약화가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불러댔다. 매성비는 울음을 삼키며 아내의 주 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보, 이게 무슨 짓이오……. 여보……!"
서 나으리는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음을 느끼고 부하들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여자가 죽었느냐?"
염방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서 나으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딸아이는 몇 살이나 되었나?"
염방 사람들 중에서 또 누군가가 대답했다.
"아마 열두어 살 되는가 봅니다."
그러자 서 나으리가 분부했다.
"저 계집앨 데려다 우리 염방의 여인으로 만들어라. 계집애가 아직 어리니까 데려다가 우선 아무 일이나 시키거라. 웬만큼 성숙해지면 우리 형제들을 시중들게 해야겠다."
그가 손을 젓자 염방 사람 둘이 나와 매약화를 포승에서 풀어 내어 한옆으로 끌고 갔다.
매성비가 몸을 일으키며 비장하게 소리쳤다.
"약화야, 똑똑히 봐 두거라. 이 놈들은 모두 악한 놈들이다. 천하에 네 부모를 제외하곤 믿을 자가 없다는 걸 명심해라. 사내들이 너에게 가까이 굴고 달콤한 말을 하면 그건 다 널 속이려는 거야. 그러니 절대로 그걸 믿어선 안 된다!"
서 나으리란 자가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야 자식을 가르치려 하다니 때가 늦었지, 말해 봐라. 소금을 살 텐가, 안 살 텐가?"
매성비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소금을 사겠느냐구? 안 사겠다. 그래 안 사면 어쩔 셈이냐?"
서 나으리란 자는 대답 대신에 당장 쇠부채를 휘둘렀다. 머리를 얻어맞은 매성비는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천천히 자기 아내의 몸 위로 쓰러졌다. 손을 뻗어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는 곧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서 나으리란 자는 갑자기 부채를 확 폈다. 부채가 펼쳐지자 큼직하게 써진 '염( )'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머지 아홉 집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그래 소금을 사겠느냐, 안 사겠느냐? 너희들도 이 매성비처럼 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아홉 집 사람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흘끔흘끔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드디어 서 나으리가 손에 들린 쇠부채를 내저으며 소리쳤다.
"불을 지펴라!"
황약사는 그제야 전 앞에 세워 놓은 세 개의 가마솥에 눈길을 주었다. 그 안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그 밑에는 장작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염방 사람들은 두령의 명령이 떨어지자 횃불로 장작에 불을 붙였다. 삽시에 세찬 불길이 타올랐다. 오래지 않아 가마솥 안의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서 나으리가 입을 열었다.
"우리 염방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소금물을 밟고 다니면서 뜨거운 햇빛 아래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지. 오늘 내가 너희들에게 그 맛을 보여 주겠다!"
그는 부채로 아홉 집 사람들을 쿡쿡 찌르면서 다시 다짐을 받았다.
"자, 저 솥에 들어가고 싶지 않거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소금을 사겠다고만 대답하면 그 고생을 면할 수 있어."
염방 사람들은 사람들을 묶었던 포승줄을 풀고 그들을 가마솥 옆까지 끌고 갔다. 이제 명령만 떨어지면 전부 가마솥 속에 집어 넣을 참이었다.
서 나으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 놈부터 소금맛을 보여 줄까?"
그의 말에 염방 사람들은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 사람들의 옷을 벗긴 다음 긴 채찍으로 등을 후려갈기며 뜨거운 소금물을 등판에 끼얹었다. 사람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무서운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서 나으리가 다시 말했다.
"이 정도로 웬 엄살들이냐? 우리 염방 사람들은 매일 등허리가 익을 지경이고 온몸에 소금기가 가실 날이 없다. 심지어 갓난애까지도 소금에 절어 있어. 그런데 네 놈들은 겨우 요 정도로 죽겠다고 야단들이냐? 어디 말해 봐, 소금을 사겠나 안 사겠나?"
이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왜 이렇게 남을 괴롭히는 건가? 당신이 소금을 팔면 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그 사람들을 괴롭힐 게 뭐 있나?"
니마묘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담장 옆에 한 공자가 서 있었는데 얼굴에는 면구를 끼고 있었다.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어느 틈에 사람들 앞에 다가와 섰다.
"넌 웬놈이냐?"
서 나으리가 물었다.
"난 천하의 거부이다. 한 해 사이에 소금을 몇 섬이나 만들어 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소금을 전부 사겠다."
황약사가 이렇게 대답하자 서 나으리란 자는 어리둥절해졌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소?"
"소금만 팔면 되지 그런 건 알아 뭐하려나? 그래, 한 해에 소금을 몇 섬이나 거두는가?"
황약사의 말에 서 나으리가 냉소하며 말했다.
"일년 동안 걷어들인 소금을 전부 사시겠다구? 내가 황제라도 만난 건가?"
그는 뚫어져라 황약사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네 놈이 날 놀리려는 모양인데 된맛을 좀 보여 줘야겠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의자에 앉아 있던 여덟 사람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 황약사에게로 덮쳐 들었다.
첫댓글 ``@-@``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합니다
ㅎㅎ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