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꽃 - 눈
권 오 채
눈(雪)은 우리들에게 환한 기쁨을 준다. 눈이 올 때의 하늘은 온통 회색이다가 밤
동안에 살포시 마당과 뜨락에 내려 미명의 새벽인 데도 문풍지에 허옇게 비쳐온
다.
우리 집 개구쟁이는 눈이 오면 좋아 들락거린다. 평소에 비 한 번 안 들던 철이는 몽
당비를 들고 뜨락에서 사립문 밖, 뒤뜰에서 장독대에, 또 부엌에서 짠지광까지 게발새
발 자욱을 내며 하얀 눈을 쓸어 힘차게 몰아 부친다.
얄개들만이 아니고 이웃집 삽사리도 눈 위를 이리 뛰고 저리로 내달으며 몸 안의 스트
레스 덩어리를 내쏟으며 마구 재롱을 떨면서 말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눈이 쌓인 나뭇
가지에 앉은 굴뚝새며 참새들도 오늘따라 오래 소리가 한결 더 즐겁다. 그 뿐만이 아니
다. 눈 오는 밤길을 오순도순 걸어가는 연인들의 옷자락의 마음과 몸짓은 마냥 나비처
럼 즐겁고 가볍게만 보인다. 따끈한 고구마와 군밤 맛이 한결 더 구수하고 여성의 따스
한 미소가 눈을 타고 남자의 어깨와 가슴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연인들의 설레는 사랑
은 눈 속에서 기쁨으로 꽃핀다.
눈은 흰색을 좋아하는 백의 천사들이 눈가루를 소쿠리에 담아 눈바람가락에 맞춰 뿌
려진다. 혼탁(混濁)하거나 마구 섞은 혼합색도 아닌 맑고 깨끗한 초가집들, 눈과 밭 등
의 만상을 온통 희고 깨끗한 흰옷으로만 갈아입힌다. 호화찬란한 것을 좋아하는 것도
죽 끓듯 하는 변덕쟁이처럼 이색 저색으로 바꾸기를 좋아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눈은 태고적부터 지금까지도 늘 흰색이다. 오색의 단풍이 산야를 너울대고 누우런 벼
이삭이 차일되어 추풍에 일렁이는 것이 가을이라면, 겨울은 온통 흰색으로 온 누리를
펼친다. 저 우리가 잘 아는 난(蘭皐) 김병연(金炳淵: 김삿갓 선생)은 산 속에서 눈이
온 날의 자연을 예민(銳)한 관찰과 심오(深奧)한 착상(着想)과 미묘(微妙)한 표현을
기(氣)가 막히게 그리고 있으니,
월백설백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매 천지가 모두 희고
산심야심객수심(山深夜深客愁心 산도 깊고 밤도 깊으매 나그네의 근심도 깊도다
라 했다. 사계절의 절경 속에서 살아온 우리 겨레들은 예부터 유달리 눈과 산을 좋아
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우리를 백의민족과 단일 민족이라는 말도 흰색의 눈을 무척 좋아
한대서 생긴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눈은 각색(色)하지 않고 차별을 모른다. 두엄장이 아무리 더럽다고 해서 덮어주는
일을 중지하는 법은 없다. 솔잎이 뾰족한 가시방석 같다고 해서 앉기를 거부하거나 슬
레이트 지붕이 평편하다고 해서 그곳에만 소복이 즐겨 내려앉는 것도 아니다. 눈은 너
무 후덕하기에 이 세상 모든 것에 골고루 다 자기의 흰옷으로 포근히 감싸준다.
눈은 풍요(豊饒)함을 준다. 주먹만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모습을 볼 때 옹색했던
내 마음도 무한히 넓어지며 푸근해진다. 앙상한 나뭇가지도 살이 쪄 그 위에 앉아 노래
부르는 멧새며 참새들도 살이 통통하다. 까칠했던 담장도 풍만하고 장독대에 엎어놓은
시루와 투가리, 뚝배기의 전신에 소래기며 장독들도 배에 살이 쪄 불룩하다. 눈 덮인 보
리밭에 토실한 보리들의 몸짱들이 내년의 풍년을 기약해 주듯 농부의 마음속엔 흐뭇한
미소가 살며시 찾아든다. 눈은 이런저런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는다. 누가 자기를 뽀
드득 밟는다 해도 아프다 아니하고 빗자루로 쓸어 부치는 대로 움직여 주지 결코 역행하
는 일이 없다.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눈을 모아 꽁꽁 뭉쳐 휙 던져 눈싸움을 해도, 햇
볕이나 불로 해서 자기 모습이 사라져가도 아무 불평이 없다 순리(順理)에 따라 순종
(順從)할 따름으로 이런 곳엔 어떤 불평도 한 오라기의 원망도 존재할 수 있을까?
눈은 정말 나의 좋은 동무요 친구이다 사랑과 낭만을 일으켜 주며 어지러웠던 마음
을 정화(淨化)시켜 주는 사절붕우(四節朋友)중의 고마운 친구이다. 그리고 내일의 꿈을
안겨다 주는 희망의 천사이다.
오늘따라 날씨가 싸늘해져 소매와 바지가랑이가 길어진 것을 찾다보니 하얀 트레이닝
한 벌이 집힌다. 올 겨울에도 풍성한 눈이 내리리라. 지금부터 설렌다. 지난해에 유리
창 너머로 내리는 눈을 그려본다. 하얀 옷으로 금수강산을 덮어 아기자기한 설경(雪景)
을 이룬다 내 맘에도 눈이 덮인다 진정 한국엔 참 진품과 명품이 어디 있느냐는 말에
자신있게 '저흰 눈이 덮인 산야 설경으로 눈을 돌려보라’하고 싶다.
2004 19집
첫댓글 눈은 이런저런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는다. 누가 자기를
뽀드득 밟는다 해도 아프다 아니하고 빗자루로 쓸어 부치는 대로 움직여 주지 결코 역행하
는 일이 없다.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눈을 모아 꽁꽁 뭉쳐 휙 던져 눈싸움을 해도, 햇
볕이나 불로 해서 자기 모습이 사라져가도 아무 불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