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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이칭·별칭; 자 복고(復古), 호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시호 문원(文元) | 출신지; 경북 경주 | 본관; 여흥(驪興, 현 경기도 여주)
관련 사건; 을사사화, 양재역벽서사건 | 저서(작품); 일강십목소, 진수팔규, 오잠, 구인록, 대학장구보유, 중용구경연의, 봉선잡의, 속대학혹문
대표관직; 이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
퇴계와 율곡의 선학(先學)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틀을 닦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
그의 학문적 업적을 재조명하는 논문집, "유교뮨화, 양동마을, 회재 이언적(사단법인 회재이언적기념사업회)", 발간을 계기로
이언적 선생의 종가 사랑채인 "무첨당(無忝堂, 보물 411호), 선생을 기리는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 154)", 그리고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독락당(獨樂堂, 보물 413호)"과 그가 남긴 문화재 등을 살펴 보았습니다.
△ 경주 양동마을에 있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종가 중 일부인 무첨당(無忝堂, 보물 411호),
무첨당(無添堂)은 이의윤(李宜潤, 1564~1597)의 호다. 그의 할아버지는 동방오현의 한 분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이고 아버지는 수암 이응인이다. 무첨당은 수암의 다섯 형제 중 맏아들이니 곧 회재의 장손이다. 무첨당은 모든 일에 매우 신중하였으며, 말 한 마디와 행실 한 가지라도 반드시 선조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는 선훈(先訓)을 실추시키지 않고 마음에 항상 새긴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호를 ‘무첨당’이라 지었다. 이는 詩經에 ‘너를 낳아주신 부모에게 욕됨이 없게 하여라(無添爾所生)’라는 말에서 나왔다. ‘무첨’이란 말은 그 자신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다. 명현의 후손으로서 지녀야 할 몸가짐과 언행, 그리고 가문과 사회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며, 자신의 실수가 곧 선조에게 욕이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출처; 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 p169~170, 조철제 지음, 도서출판 선>
『양동(良洞)마을』
<우리나라 대표 양반마을로 중요민속자료 제189호(1984. 12. 20. 지정)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10. 07. 31. 등재) >
주소;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94 | 전화; 070) 7098-3569 | 누리집; http://yangdong.invil.org
▲ 무첨당, 여강 이씨 대종가의 별당이다. 보통 별당은 살림채 안쪽에 있기 마련이나 무첨당은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별당이라기보다는 큰사랑채 격이다. <사진;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돌베개>
▲ 무첨당 내부,
"…… 무첨당은 본래 별당으로 지어진 것인데, 무첨당 사랑채에는 좌해금서(左海琴書), 물애서옥(勿厓書屋), 오체서실(五棣書室), 세일헌(世一軒), 청옥루(靑玉樓), 청산세거(靑山世居)와 같이 많은 편액들이 걸려 있다.
그 중 글씨 끝이 시원스러운 '左海琴書' 편액은 대원군이 죽필(竹筆)로 쓴 글씨로 유명하다. 좌해는 영남을 나타내는 의미로 영남의 대표격인 무첨당의 풍류와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하사한 편액이라고 한다. 또 '오체서실'은 5형제가 우애 있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집안의 명예와 영광의 근본을 형제간의 우애로 생각한 부모의 따듯한 가훈이면서 기원문이다. 또한, 건넌방의 방문 위에 걸려 있는 '청산세거'의 편액은 자손들이 학문을 익히는 공부방으로 학문과 함께 가족과 형제들의 우애를 교육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문귀들은 우리 조상들이 인간의 보람 된 삶에 대한 정의를 외적인 영광보다는 내면적인 정신 수양이 인간 삶의 근본임을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 <출처; 한옥의 미, 2010. 7. 15., 경인문화사>
▲ 이언적의 필적,
【이언적】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수회(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소(昭)의 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회재는 곤충 한 마리조차 함부로 해치지 않았다"》
유학자 이언적 재조명 논문집, 2010 양동 포럼 발표들 묶어내
이언적과 이황의 공통점도 정리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선학(先學)으로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닦은 유학자로 꼽히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학문적 업적을 재조명하는 논문집이 나왔다. 사단법인 회재이언적기념사업회(회장 이동건)가 최근 발간한 논문집 '유교문화, 양동마을, 회재 이언적'이다. 경주 양동마을이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것을 기념해 열렸던 '세계유산 양동마을 포럼' 당시 발표된 논문을 묶은 것이다
▲ 2013년 '세계유산 양동마을 포럼' 참석자들이 이언적 선생 종가의 일부인 무첨당(無添堂·보물 제411호)을 둘러보는 모습. /김기철 기자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회재 이언적의 삶과 학문 소묘'에서 회재 이언적과 후배인 퇴계 이황 사이의 공통점을 정리했다. 둘 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파직으로 좌절을 겪었다는 것. 한 교수는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감각이 둘 다 예민했기에 부당한 권력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지녔다"고 썼다.
일본에 대한 태도도 닮았다. 이언적은 조선에서 통상을 하던 왜관(倭館)에서 일어난 일본인들의 난동에도 "결국 같은 하늘의 아들로 다르지 않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면서 관용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퇴계 이황 역시 일본의 통교(通交) 요청에 "화친이 왕도의 포용"이라고 건의했다. 한 교수는 "회재와 퇴계는 문화적 접근, 배려를 통한 공존을 해법으로 제시했다"고 보았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는 '회재 이언적의 생태사상'에서 곤충이나 벌레 같은 미물(微物)의 생명도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일화를 통해 이언적의 무위(無爲) 사상을 소개했다.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경외감, 연약한 존재에 대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연민, 소요 자적(自適)하는 여유로움, 마음의 때를 씻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양동마을의 역사·문화적 가치에 주목한 이상해 성균관대 명예교수와 강동진 경성대 교수의 글도 논문집에 함께 실렸다. <출처; 조선일보 / 2015. 09. 18.>
▲ 『경주 양동 무첨당 (慶州 良洞 無忝堂)』, <사진; 문화재청>
종목; 보물 제 411호 | 분류; 유적건조물/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 수량; 1동 | 지정일; 1964. 11. 14.
소재지;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32-19 (양동리) | 시대; 조선 | 소유/관리자; 이지락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1491∼1553)선생 종가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세운 건물.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이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루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며, 뒤쪽과 옆면은 벽을 쳐서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자형을 띠고 있고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배치하고 있다. 이 건물의 기능은 상류주택에 속해있는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손님접대, 쉼터, 책읽기를 즐기는 따위의 여러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별당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 화원면 앞바다 목포구 등대 옆으로 주변을 전부 노을로 물들이며 해가 지고 있다. 해남 땅끝마을은 일몰과 일출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장소로 꼽힌다. /사진 해남군청 제공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이언적(李彦迪·1491~1553)은 세모에 자신의 행실 세 가지를 반성하는 세모삼성(歲暮三省)을 말했다. 일성(一省)은 연중 남에게 잘못한 일이 무엇인가를 반성하고, 이성(二省)은 가족, 친족, 마을의 일에 이기심으로 한 해 동안 소홀히 한 일이 무엇인가를 반성하며, 삼성(三省)은 자신의 양심에 꺼린 일을 하지 않았는지 반성할 것을 요구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가 하루 세 번 반성한다는 '일일삼성(一日三省)'과 별로 다르지 않다. 첫째는 남을 위해 일을 꾀하면서 진실되게 했는가, 둘째는 벗과 사귀면서 믿음성 있게 했는가, 셋째는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을 완전하게 익혔는가를 말한다.
이와 같이 한 해를 보내면서 자신의 성찰을 꾀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 ……" <출처; 월간산 〔542호〕 2014. 12.>
▲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사진; 문화재청>
종목; 사적 제 154호 |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 면적; 26,063㎡ | 지정일; 1967.03.08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옥산리) | 시대; 조선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문루,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옥산서원 → 경주 옥산서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 문화재청>
▲ 『이언적 수고본 일괄-속대학혹문 (李彦迪 手稿本 一括-續大學或問)』)』, <사진; 문화재청>
종목; 보물 제586-1호 |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사본류 | 수량; 1책 | 지정일; 1975. 05. 01.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옥산서원 | 시대; 조선
이언적 수고본 일괄-속대학혹문(李彦迪 手稿本 一括-續大學或問)은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명종 2년(1547)에서 명종 8년(1553) 사이에 직접 쓴 저술 가운데 하나이다.
회재 이언적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김안로를 등용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으며, 김안로 일파가 몰락한 뒤 다시 정치에 나섰고, 후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서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1547년 조작된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제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책을 썼으나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세우는데 선구적 인물로,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이다.
이것은 송의 주희가 지은『대학혹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항목을 추가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정조때 경연에서 강의되었고, 정조는 친필로 ‘제선정회재속대학혹문권수’라는 제목의 머리글을 써서 내려보냈다. <출처; 문화재청>
▲ 『이언적 수고본 일괄-대학장구보유 (李彦迪 手稿本 一括-大學章句補遺)』)』, <사진; 문화재청>
종목; 보물 제586-2호 |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사본류 | 수량; 1책 | 지정일; 1975. 05. 01.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300-3, 독락당 (옥산리) | 시대; 조선 | 소유/관리자; 이해철
이언적 수고본 일괄-대학장구보유(李彦迪 手稿本 一括-大學章句補遺)는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명종 2년(1547)에서 명종 8년(1553) 사이에 직접 쓴 저술 가운데 하나이다.
이언적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김안로를 등용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으며, 김안로 일파가 몰락한 뒤 다시 정치에 나섰고, 후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서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1547년 조작된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제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책을 썼으나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세우는데 선구적 인물로,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이다.
회재 이언적이 전체를 직접 썼으며, 책 끝에는 노수신의 발문이 있다. 송나라의 주희가 정한『대학장구』와는 부분적으로 다른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주자를 신성시하는 당시 유학사상에 매우 이채로운 저술이다. <출처; 문화재청>
▲ 경주 독락당이 있는 옥산서원 전경, <사진; 두산백과>
▲ 『경주 독락당 (慶州 獨樂堂)』)』, <사진; 문화재청>
종목; 보물 제 413호 |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 수량; 1동 | 지정일; 1964. 11. 14..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300-3 (옥산리) | 시대; 조선 | 소유/관리자; 이해철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 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출처; 문화재청>
《〔조용헌 살롱〕소년등과와 연예인》
'소년등과 부득호사(少年登科 不得好死)'라는 말이 있다. '소년 시절에 과거에 합격하면 좋게 죽지 못한다'는 뜻이다. 스무 살이 채 안된 나이에 출세해 버리면 뒤끝이 별로 좋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옛 사람들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벼슬을 하거나 재물을 많이 얻거나 성공하는 일을 경계했던 것 같다.
인생사라는 게 전반전이 좋으면 후반전이 좋지 않기 마련이다. 끝까지 계속 좋은 사람은 아주 드물다. 더구나 젊어서 출세하면 십중팔구 거만해진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버릇이 생긴다. 30대 중반 이전에 돈을 벌어 이 돈을 말년까지 유지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별로 보지 못하였다. 남자가 돈 있고 건강하면 주색잡기(酒色雜技)로 빠지기 쉽다. 돈은 역시 나자빠지고 엎어지는 풍상을 겪으며 40대 중반이 넘어서 벌어야만 유지가 된다.
한국 사회에서 20대에 대중의 인기를 얻고 돈도 벌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가운데 하나가 연예인이라고 생각한다. 연예인은 '소년등과' 할 수 있는 직업이다. 문제는 뒷감당이다. 20대의 나이에 뒷감당할 내공을 어떻게 쌓는단 말인가? 인기가 떨어지고 난 다음의 후반전을 과연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가 문제다. 맹자는 이를 '달즉겸선천하 궁즉독선기신(達則兼善天下 窮則獨善其身)'이라고 표현했다. 인생사는 '잘 나가는 때'인 달(達)과 '못나가는 때'인 궁(窮)으로 대별된다. 잘 나갈 때는 천하와 더불어 좋은 일도 하지만 못 나갈 때는 혼자 자기 수양하는 데 힘쓴다고 했다. 맹자가 이 말을 한 이유는 궁(窮)할 때를 대비하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궁은 찾아온다. 궁할 때는 고독(孤獨)하다. 인기 떨어지고 돈 떨어지고 권력 떨어지면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 겪어본 사람들에 의하면 그 고독을 견디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한다.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사람인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은 '독수정(獨守亭)'을 지어 놓고 그 고독을 지켰으며,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독락당(獨樂堂)'을 지어놓고 고독을 즐겼다. 20대에 자살하는 연예인들을 보며 '독수정'과 '독락당'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출처; 2007. 02. 13.>
▲ 『경주 독락당 조각자나무 (慶州 獨樂堂 조각자나무)』)』, <사진; 문화재청>
종목; 천연기념물 제115호 | 분류;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문화역사기념물/ 종교 | 수량; 1주 | 지정일; 1962. 12. 07.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00번지 | 관리자; 이해철
독락당의 조각자나무는 나이가 약 47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5m, 둘레 4.90m(62cm높이)이다. 이 나무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독락당 울타리 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주변은 감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나무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우나 밑부분과 2개의 가지만 살아있어 나무의 상태는 좋지 않은 편이다. 이 나무는 조선 중종 27년(1532) 회재 이언적이 잠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전념할 때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친구로부터 종자를 얻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오래되고 희귀한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교류관계와 독락당의 역사를 알려주는 문화적 가치도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文元公 晦齋 李彦迪 神道碑)』)』, <사진; 포항시청>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2호 |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 수량; 1기 | 지정일; 2006. 01. 02.
소재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산 81-1 | 시대; 조선
회재 이언적은 16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이다. 선조 초, 추숭 과정에서 기대승에 의해 신도비명이 찬(撰)해졌고, 선조 10년(1577)에 이산해의 글씨로 옥산서원 내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9년 뒤인 1586년에는 손엽의 글씨로 신도비가 다시 묘소 앞에 건립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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