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시
1
송원2사안서 送元二使安西(渭城曲) - 안서도호부에 사절로 가는 원씨네 둘째를 보내다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강이름위,젖을읍 위성땅에 아침 비 살짝 내려 가벼운 흙먼지를 적시니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유색신) 여관집 푸르고 프르러 버드나무 색 새롭네
勸君更進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그대 권하노니 다시 나아가 한잔 술을 들게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서쪽 나아가 양관 땅은 옛 사람도 없다네.
* 元二: 元씨 집안 둘째아들
* 安西( 안서) :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고거현(庫車縣)으로 당나라때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국경을 지켰다.
* 渭城( 위성) :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한대(漢代)에는 渭城이라 일컬었는데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의 북쪽에 있어 서역(西域)으로 여행하는 사람을 여기서 전별(餞別)했다. * 浥(읍) : 적시다, 축축해지다.
* 輕塵(경진) : 가볍게 날리는 흙 먼지나 티끌.
* 客舍(객사) : 손님이 머무는 여관(旅館). 柳色新(류색신) : 버들잎이 비에 젖어 더욱 싱싱해진 것. 예로부터 중국에는 멀리 가는 사람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전송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위성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많았다.
* 陽關(양관) : 감숙성(甘肅省) 돈황현(燉煌縣) 서남방에 있는 관소(關所)로 서역으로 가는 또 하나의 관문인 옥문관(玉門關)의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실크로드의 관문. 위성에서 양관까지는 약 1,400㎞이고, 양관에서 안서까지는 약 500㎞로 사막이 펼쳐져 있다.
* 故人(고인) :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 우인(友人).여기에서는 친구의 뜻.
워낙 유명한 이별시여서 중국에서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한다. 많은 송별시중 가장 사랑받고 있는 이시는 "送元二使安西"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나라 때부터 석별의 노래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渭城曲 또는 陽關曲이라 하기도 하며, 세인들이 예로부터 이 시를 노래 할때면 아쉬운 나머지 陽關이 들어가는 마지막 구절을 3번 불렀다하여 陽關三疊이라고도 한다
2
歸嵩山(귀숭산)높은산숭 - 숭산에 돌아가다
소림사 가는 길
淸川帶長薄,(청천대장박), 맑은 개울 길고 얉게 끼고
車馬去閑閑.(거마거한한). 수레 마는 한가히 가네
流水如有意,(류수여유의), 흐르는 물은 뜻이 있는 듯 하고
暮禽相與還.(모금상여환).더불어여 저녁 나는새는 서로 함께 오네
荒城臨古渡,(황성림고도),나루도 황폐한 성은 옛 나루에 있고
落日滿秋山.(낙일만추산). 지는 햇는 가을 산에 가득하네
迢遞嵩高下,(초체숭고하),멀초,전할체 높고 멀어라, 숭산 아래
歸來且閉關.(귀내차폐관).우선차 돌아왔으니 우선 관문을 닫네
숭산(1491.7m) 소실산 등산로
50대 후반에 들어서서 쓴 시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울어진다. 숭산嵩山은 중국 5대 명산[동악인 산동성의 태산(泰山), 서악인 섬서성의 화산(華山), 중악인 하남성의 숭산(崇山), 남악인 호남성의 형산(衡山), 북악인 산서성의 항산(恒山)]의 하나로 산세가 깊고 높은 명산이기도 하지만 이 시에서는 정신의 안식처다. 벼슬을 그만두고 숭산의 품에 안기니 마음이 더없이 편하다는 뜻이다. 마지막 행의 문을 잠근다는 것은, 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 은거 생활을 하겠다는 뜻이다. 벼슬을 할 때는 숭산이 멀기만 했는데 직접 와보니 맑은 냇물, 긴 숲, 흘러오는 물, 저녁의 새, 황폐한 성, 옛 나루, 지는 햇빛, 가을 산 같은 것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왕유의 경우 마음은 늘 귀거래를 꿈꾸었지만 낙향해 있거나 유람을 하며 유유자적한 행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공무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늘 꿈은 숭산에 들어가 사는 것이었음을 이 시가 말해주고 있다.
소림사 탑림
3
망천별업輞川別業 바퀴테망 - 망천별장에서
不到東山向一年(부도동산향일년) 나아갈향 한 해가 가도록 동산에 못 오다가
歸來纔及種春田(귀래재급종춘전) 겨우재 돌아 오니 봄밭에 씨 뿌릴때가 되었구나
雨中草色綠堪染(우중초색녹감염) 견딜감 빗속의 풀빛은 녹색 더욱 염색하고
水上桃花紅欲然(수상도화홍욕염) 바랄욕,탈연 물위 복숭아꽃은 붉은색 따르고 싶네
優婁比丘經論學(우루비구경론학) 넉넉할우,끌루 우루비구스님은 불경을 공부하고
傴僂丈人鄕里賢(구루장인향리현) 등굽은구,구부릴루 등굽은 어르신들 마을 어짐이네
披衣倒屣且相見(피의도시차상견) 걸칠피,거꾸로도,신시,또차 옷을 걸치고 신 거꾸로 서로 마주보고
相歡語笑衡門前(상환어소형문전) 기쁠환,횡목형 서로 기뻐 대화 웃어 문 앞에서 저울이네
* 比丘: 출가(出家)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남자(男子) 승려(僧侶) * 丈人: 아내의 아버지,늙은이
* 倒屣: 급(急)하게 허둥지둥하다가 신을 거꾸로 신음 * 衡門: 「두 개의 기둥에다 한 개의 횡목을 가로질러서 만든 허술한 대문(大門)」이라는 뜻으로,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이르는 말
왕유는 나이 마흔한 살 때 장안의 남쪽 교외에 있는 남전현藍田縣이라는 곳에다 별장을 하나 마련하였다. 당나라 초기의 시인인 송지문宋之問(아첨을 잘함,賜死)이 쓰던 별장이다. 이 별장을 리모델링해서 망천장輞川莊이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공무가 없을 때면 가서 시를 짓고는 했다. 경치가 좋은 이곳에다 어머니도 모셨다.
‘동산’은 친구들과 모여 시 쓰기 모임을 갖곤 했던 ‘위씨산장韋氏山莊’을 가리킨다. 공무에 쫓겨 1년이 넘도록 그곳에 못 가봤는데 망천에 별장을 마련해놓고 가보니 때마침 봄이라 마을 사람들은 밭갈이가 한창이다. 시의 제 3, 4행은 봄 풍경에 대한 묘사인데 그림 같다. 이 마을에 큰 절이 있는지 비구들은 불경을 공부하고 있고 마을 사람들은 어른을 깍듯이 공경한다. 얼마나 사람들이 정다운지 누가 찾아오면 급히 옷을 걸치고 나가는데 신을 거꾸로 신고 나가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집으로 들어오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은 집이 너무 누추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다들 가난하지만 인심이 푸근하여 서로 정답게 사는 고장임을 알 수 있다.
4
망천한거輞川閒居한가할한 - 망천에서 한가히 살며
망천10경
一從歸白社(일종귀백사) 토지신사 한번쫒은 백사로 돌아오고
不復到靑門(부복도청문) 다시는 청문에 가지 않았네
時倚簷前樹(시의첨전수) 의지할의,처마첨, 때에 처마앞 나무에 기대
遠看原上邨(원간원상촌) 언덕원,마을촌 멀리 언덕위 마을을 보네
靑菰臨水映(청고림수영) 줄풀고 푸른 줄풀 물에 와 비추고
白鳥向山飜(백조향상번) 날다번 흰새는 산을 향해 날개짓 하네
寂寞於陵子(적막오릉자) 탄식할오,어조사/언덕릉 적막하게 오릉자는
桔槹方灌園(길고방관원) 두레박틀길,두레박고,수단방,물댈관 두레박질 남새밭에 물을 주네
* 白社: 흰띠로 지붕을 이은 집 * 靑門: 도성문(都城門)을 말함. 중국 한(漢) 나라 장안의 동남방 문인 패성문(覇城門)이 청색이었으므로 청문이라 하였던 것에서 연유함. * 寂寞: 적적함,고요함 * 桔槹: 용두레. 낮은 곳의 물을 논이나 밭으로 퍼올리는데 쓰는 기구 * 남새밭’이란 사전적 의미로 보통 집 안 마당한쪽이나 집 근처에 있는 채소를 심어 캐먹는 작은 밭을 말한다.
5
별망천별업別輞川別業 - 망천별장을 떠나다
망천장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왔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가 벼슬을 하고 있었더라면 황제를 따라 피난 갔을 텐데 망천에 있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혔던 것이다. 겨우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시 쓰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이곳을 떠나게 되었으니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짧은 시 한 편으로 심정을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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依遲動車馬(의지동차마) 더딜지 느리게 움직이는 수레와 말에 의지하고
徟悵出松蘿(주창출송라) 가는모양주,원망창,쑥라 슬픔 속에 소나무와 이끼 낀 숲을 나오노라
忍別靑山去(인별청산거) 참아내는 이별은 청산을 떠나가고
其如綠水何(기여녹수하) 그것은 녹색 물처럼 어찌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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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과의 이별을 가슴 아파한다. 이후 반란군의 수하에서 참모의 역할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했던 일은 두고두고 큰 상처로 남았다. 만년에 쓴 글 가운데 「내 녹봉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약속하는 글」이라는 것도 있었다. 절을 지어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는 세금을 감면해주어야 한다는 상소문을 쓰기도 했다. 벼슬을 내놓고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여러 사람에게 말했지만 성사가 되지는 못했다. 말년에 쓴 편지나 산문을 보면 참회와 속죄의 내용이 아니면 보은과 감사의 내용이 가득했다. 죄를 지은 이 사람을 용서해준 데 대해 고마워하는 내용도 있었고 자신이 계속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이들에 대해 고마워하는 내용도 있었다. 불가에 완전히 귀의했더라면 마힐이라는 자를 다른 것으로 고쳤을 것이다. 그는 늘 마음으로는 수양하며, 혹은 참선하며 살았기 때문에 생활은 불자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젊었을 때 상처한 이후로 재혼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아서 그런지 그의 생활은 늘 소박하였다. 부모도 돌아가시고 서른두 살 이후로 딸린 식구도 없는 상태로 살아가면서 이런 도통한 듯한 내용으로 시를 썼기에 후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詩佛’이라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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