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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수봉
고 김성철교수 의견 원문(다음카페)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525
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저는 윤회가 없고 한국불교는 무당불교라는 향봉스님 말씀에 많이 동조하지만 불교의 근본은 윤회이기에 답답한 마음에 글 올립니다. 저는 극락에가고싶지도않고 천계에 가고싶지도않고 아예 소멸되고싶습니다.간절히 바라면 윤회하?지않고 소멸되기도 하나요? 제가 불교에 정진할려는이유는 오직 그뿐입니다. 저보다 훌륭한 분(달라이라마나 많은 복을 지으신 분들)들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데 저에게 해탈열반은 너무나 먼 얘기같읍니다. 얼마나 많은 생을 살아야 하고 수행해야 하나 생각하면 아득해지고 불교공부에 대한 열정도 사그라질려고 합니다. 바보같은 질문인지 몰라도 어디에 물을지 몰라 질문드립니다.부처님은 생사를 초월하고 해탈열반하셨는데 더이상어디에도 없는거 아닌가요? 아니면 어디에나 있는 영원불멸한 존재인가요? 학자나 수행인이 아닌 많은분들이 불교를 복을 기윈하는 기복신앙으로써 소원을 빌지만 그런건 단순히 자기위안 아닌가요 불교가 추구하는 진정한 접근은 아니지 않은가요 기복신앙으로써 불교를 믿는사람들은 부처님을 어디에나 있는 신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런 접근이 맞는건가요?
질문이 여러 가지이기에 나누어 인용하면서 답하겠습니다.
질문1.
저는 윤회가 없고 한국불교는 무당불교라는 향봉스님 말씀에 많이 동조하지만 불교의 근본은 윤회이기에 답답한 마음에 글 올립니다.
답변1.
최근에 향봉 스님의 유튜브 대담 또는 주장(휴심정 및 불광미디어)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대담에는 지극히 비판적 답글이 달려 있고, 어떤 대담에는 찬사의 답글이 달려있기도 합니다. 향봉 스님께서 대담하시는 태도와 내용에서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끼는 분도 많이 계시는 것 같고, 이와 반대로 진정한 스님을 만났다고 감동하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 연예인의 경우도 '팬덤' 층과 '안티' 층이 갈리듯이, 향봉 스님의 대담이나 주장을 시청하신 분들의 경우도 찬반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삭발하시고 승복을 입은 모습으로 강한 주장을 하시기에 대중의 주목을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집밖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면, 누구든 당장 뛰어나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향봉 스님의 말씀 중에는 옳은 것도 있지만, 교학적으로 잘못된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윤회를 부정하는 말씀이 실린 영상 가운데 한 가지 링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q7Xs9zq5OA
스님께서는 "윤회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5분 57초 지점) 그 근거로 용수의 <중론>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인용하십니다.
제3송: 과거세유아 시사불가득 과거세중아 부작금세아(過去世有我 是事不可得 過去世中我 不作今世我)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과거세에서의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않는다.
이는 용수 스님의 <중론(中論)> 제27장 관사견품(觀邪見品)의 제3 게송입니다. 그런데 이는 윤회를 부정하는 게송이 아니라, '윤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는 게송입니다. 즉, "'나'라는 실체가 있어서 '몸 바꾸듯이 환생한다."는 외도들의 실체론적 윤회관을 부정하는 게송입니다.
(참고로, 불교에서 가르치는 윤회는 실체가 있는 영혼이 이동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지금도 들불이 번지듯이 찰나생멸(상속, 相續)하고 있는 마음의 흐름'이, 죽는 순간에 '등에서 등으로 불길이 옮겨 붙듯이', '소리를 치면 메아리가 생기듯이', '거울에 영상이 비치듯이' ... 일어난다고 합니다. [윤회에 대한 용수 스님의 비유, 《인연심론송석(因緣心論頌釋)》]
위의 게송에 이어지는 <중론> 제27장 관사견품의 제9, 10, 11, 12게송에서는 향봉 스님처럼 "전생에 내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향봉 스님께서는 위에 인용한 제3송만 읽으신 후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이들 게송을 모두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9송: 과거아부작 시사즉불연 과거세중아 이금역불연(過去我不作 是事則不然 過去世中我 異今亦不然)
과거의 나는 있지 않았다는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과거세에서의 내가 지금과 다르다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제10송: 약위유이자 이피응유금 아주과거세 이금아자생(若謂有異者 離彼應有今 我住過去世 而今我自生)
만일 다르다면 그것 없이도 응당 지금이 존재해야 한다. 내가 과거세에 머물러 있지만, 지금의 나는 스스로 생한 꼴이 된다.
제11송: 여시즉단멸 실어업과보 피작이차수 유여시등과(如是則斷滅 失於業果報 彼作而此受 有如是等過)
그렇다면 단멸되어 업과 그 과보가 소실된다. 저놈이 짓고 이놈이 받는, 그런 따위의 허물이 있다.
제12송 선무이금유 차중역유과 아즉이작법 역위시무인(先無而今有 此中亦有過 我則是作法 亦為是無因)
먼저는 없었는데 지금은 존재한다는 이 말에도 과실이 있다. 자아가 지어진 존재가 되기도 하고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위에 인용한 게송 가운데 제9송의 범어 원문과 번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9) nābhūmatītamadhvānamityetannopapadyate/ yo hi janmasu pūrveṣu tato ’nyo na bhavatyayaṃ//
‘과거세에 나[자아]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것,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전의 생애들[= 전생들]과 다른 이것[금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제9송에서 보듯이 "과거의 나는 있지 않았다는 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며, 위에 인용한 제11게송에서 보듯이 이는 '단멸론(허무주의, 유물론)' 으로 인과응보(업과 과보)의 이치도 부정하는 꼴이 됩니다.
요컨대, <중론> 관사견품에서는 "실체가 있는 영혼이 몸 바꾸듯이 윤회한다."는 이론도 옳지 않고, "전생은 없으며 지금의 나는 새롭게 생겨난 것이다."라는 이론도 옳지 않다는 점을 양도논법에 의해 가르치는 것입니다. 향봉스님께서는 이런 양도 논법 가운데, 한 가지만 취해서 용수 스님의 <중론> 관사견품에서 윤회를 부정한다고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향봉 스님처럼 누구든 윤회에 대해 의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윤회 여부에 대해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정직한 태도입니다. '윤회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확인 안 된 믿음'일 뿐이며, 부처님 당시에 인도의 종교인들로부터 비판 받고, 조롱 당하던 유물론자들(順世派, 순세파)의 생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순세파의 사상은 말하자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감각된 것만 인정하는 '짐승의 철학'이라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불전에서는 이런 생각을 단멸론(斷滅論), 또는 사견(邪見, 삿된 견해)이라고 비판합니다. 아함경이나 니까야와 같은 초기불전을 보면 도처에 윤회를 당연시 하는 부처님의 설법이 넘쳐납니다. <잡아함경>의 경문(전자아함경 번역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밑줄 친 부분 참조)
<잡아함, 사자후경>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여섯 가지 힘이 있다. 만일 여섯 가지 힘을 성취하면 여래·등정각은 과거 부처님의 가장 훌륭한 경계의 지혜를 얻고 깨끗한 법바퀴를 굴려, 대중 가운데서 사자 외침으로 외친다. 이것은 이른바 곳과 곳 아님을 참다이 아는 것이니 이것은 여래의 첫째 힘이니라. 또 과거·미래·현재에서 마음으로 즐거운 법 받음을 참다이 아나니 (위에서 널리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여래의 둘째 힘이라 한다. 또 여래는 신정 해탈 삼매의 바로 받음을 참다이 아나니 (위에서 널리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여래의 셋째 힘이라 하느니라. 또 여래는 전생의 갖가지 일을 참다이 아나니 (위에서 널리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여래의 넷째 힘이라 하느니라. 또 여래는 사람 눈에서 뛰어나는 깨끗한 하늘눈으로 모든 중생들의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는 것을 보나니 (위에서 널리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여래의 다섯째 힘이라 하느니라. 다시 여래는 번뇌가 이미 다하고 번뇌가 없어 마음이 해탈하고 지혜가 해탈하였나니 (위에서 널리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래서 대중 가운데서 사자 외침으로 외친다. 이것을 여래의 여섯째 힘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잡아함, 명종경>
그 때에 세존께서는 프라세나짓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어디서 오기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피로한 것 같은가."
프라세나짓왕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나라 장자 마하나마는 목숨을 마쳤는데 아들이 없는 재물이기 때문에 모두 왕가에 넣고, 조사하고 처리하느라고 피로해진 채, 먼지를 뒤집어 쓰고 그 집에서 오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물으셨다.
"그 마하나마 장자는 큰 부자로서 재물이 많은가."
"세존이시여, 그는 큰 부자로서 재물이 매우 많아, 백천 거억의 돈과 보물이 있는데 하물며 다른 보물이겠나이까. 세존이시여, 그 마하나마는 세상에 있을 때에 추한 옷을 입고 나쁜 음식을 먹었나이다. (1232경에서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 마하나마는 전생에 타가라시키라는 벽지불을 만나 한 끼 밥을 주었다. 그러나 깨끗이 믿는 마음이 아니었고 공경히 주지 않았으며 제 손으로 주지 않고 준 뒤에는 후회하면서 말하기를 '이 밥을 여러 내 종들에게 주거나 허물 없이 가지고 쓸 것을, 공연히 사문에게 주었다'고 하였소. 그 보시의 복으로 말미암아 일곱 번 33천에 났고, 일곱 번 이 사위국의 가장 훌륭한 종족으로 태어나, 큰 부가 된 것이오. 그러나 그 벽지불에게 보시할 때에 깨끗이 믿는 마음이 아니었고 제 손으로 주지 않았으며, 공경히 주지 않고 주고는 후회하였기 때문에, 나는 곳에서 부자가 되더라도, 일부러 추한 옷과 추한 음식과 추하고 낡은 침구와 집과 수레를 쓰고, 처음부터 훌륭하고 묘한 빛깔·소리·냄새·맛·닿임을 얻지 못하면서, 그로써 스스로 몸을 편히 하는 것이오.
다시 대왕이여, 그 마하나마 장자는 그 이모의 형을 죽이고 그 재물을 앗았소. 그 죄로 말미암아 백천년을 지나면서 지옥에 떨어졌고, 그 남은 죄의 갚음으로 사위국에 일곱 번 몸을 받아 났지마는, 아들이 없는 재물이라 하여 왕가에 몰수를 당한 것이오. 대왕이여, 마하나마 장자는 지금 여기서 목숨을 마쳤지마는, 전생의 보시의 갚음이 다하고, 그 몸의 간탐으로써 재물에 방일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기서 목숨을 마친 뒤에는 지옥에 떨어져 지독한 고통을 받을 것이오."
프라세나짓왕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하나마 장자는 목숨을 마치고는 지옥에 들어가 고통을 받겠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렇소. 대왕이여, 이미 지옥에 들어갔소."
그리고 향봉 스님께서는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에 의하면 영혼이란 게 없기에 윤회도 없다고 주장하시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영혼이 없기에, 즉 무아(無我)이기에 윤회가 가능하다."는 것이 불교의 윤회설입니다. 이에 대해서 본 게시판에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는데, 제 답변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99
또, 같은 영상 속의 ' 향봉스님 말씀' 가운데 잘못된 것, 한 가지 더 지적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향봉 스님은 네 가지 아함경 가운데 <장아함>은 '이야기가 긴 것', <중아함>은 '이야기가 중간짜리인 것', 이것 저것 섞여 있으면 <잡아함>, 후대에 증삭한 것은 <증일아함>이라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씀하셨는데, 이 가운데 <잡아함>과 <증일아함>에 대한 설명은 옳지 않습니다. 정확한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 한역 <잡아함경>(雜阿含經, Saṃyukta Āgama, 빠알리경 Saṃyutta Nikāya에 해당) -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음식(食), 사성제, 계(界) 등 주제의 공통점(Saṃ)에 따라서 묶어 놓은(Yukta) 경전 모음집. Sam은 '함께'라는 뜻이고, 'Yukta'는 '묶인 것'이란 뜻입니다. 즉 '주제가 같은 것들을 함께 묶어 놓은 경전 모음집'이 <잡아함>입니다.
* 한역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Ekottara Agama, 빠알리경 Aṅguttara Nikāya에 해당) – 법의 수를 하나씩(一, Eka) 늘리면서(增, Uttara) 그 개수에 해당하는 법을 설한 경전 모음집. 즉 ‘염불, 염법, 염승’과 같이 하나(1)의 법으로 이루어진 가르침에서 시작하여 ‘지관(止觀)’이나 ‘명색(名色)’과 같이 두 개(2)의 법으로 이루어진 가르침, ‘고수(苦受), 락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나 ‘욕계, 색계, 무색계’와 같이 세 개의 법으로 이루어진 가르침 ... 등으로 '법수의 증가에 맞추어 정리한 경전 모음집'.
그리고 향봉 스님께서 '분노 가득한 모습'으로 손가락질을 하시면서, 우리 불교계의 큰 스님들을 비방하는 영상도 있고, 젊은 시절 성철 스님께서 잡수시는 반찬을 보고서 '똥물'을 뿌렸다는 무용담도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더군요.
부처님 당시에 데바닷따 역시 '청정 승가'를 주장하였는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은 5가지 조항을 어기셨다고 비방하면서 부처님께 위해를 가했습니다.
① 목숨이 다하도록 삼림주자로 살아야 한다. 누구라도 마을에 간다면 죄가 된다.
② 목숨이 다하도록 항상 걸식(乞食) 한다. 누구라도 초청에 응한다면 죄가 된다.
③ 목숨이 다하도록 항상 분소의(糞掃衣)를 입는다. 누구라도 신자가 준 가사를 입으면 죄가 된다.
④ 목숨이 다하도록 항상 나무 밑에서 생활한다. 누구라도 촌락에 들어 간다면 죄가 된다.
⑤ 목숨이 다하도록 항상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는다. 누구 라도 생선과 고기를 먹으면 죄가 된다
겉보기에는, 위의 5가지 조항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데바닷따가 참으로 고결한 청정 수행자 같아 보입니다. 물론, 불교 수행자에게 계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불교 수행자가 계율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탐진치(탐욕, 분노, 종교적 어리석음)의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번뇌의 제거가 지계의 목적이고, 지계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데바닷따는 위와 같은 5가지 계율을 부처님께서 어기셨다고 비방하면서, '분노의 번뇌'를 발하였습니다. 즉,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것입니다. 데바닷따는 언덕에서 돌을 굴리거나 술취한 코끼리를 석가모니 부처님께 보내어 부처님을 해치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스님이나 법사, 이웃 종교의 지도자를 평가할 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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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저는 극락에 가고 싶지도 않고 천계에 가고 싶지도 않고 아예 소멸되고 싶습니다.간절히 바라면 윤회?하지 않고 소멸되기도 하나요? 제가 불교에 정진할려는이유는 오직 그뿐입니다. 저보다 훌륭한 분(달라이라마나 많은 복을 지으신 분들)들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데 저에게 해탈열반은 너무나 먼 얘기같읍니다. 얼마나 많은 생을 살아야 하고 수행해야 하나 생각하면 아득해지고 불교공부에 대한 열정도 사그라질려고 합니다.
답변2.
이에 대해서는 올해 2월 19일에 본 게시판에 '미증유'님께서 올리신 질문 "소멸이 가능할까요?"에 대한 2월 20일자 답변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아래의 링크로 들어가서 이에 대한 답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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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부처님은 생사를 초월하고 해탈열반하셨는데 더이상어디에도 없는거 아닌가요? 아니면 어디에나 있는 영원불멸한 존재인가요?
답변3.
부처님이나 아라한과 같이 깨달은 분들이 돌아가신 다음에 어디엔가 계신지, 아니면 완전히 사라지는지에 대한 물음은, 부처님께서 답변을 하지 않으신 난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유튜브 채널인 '조현TV휴심정' 대담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아래에 영상 링크 소개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luMbLi6izU&list=PLTUH6N_BeP5DFjXevvXSk3RW6NSIWnMBh&index=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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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4.
학자나 수행인이 아닌 많은 분들이 불교를 복을 기윈하는 기복신앙으로써 소원을 빌지만 그런 건 단순히 자기 위안 아닌가요 불교가 추구하는 진정한 접근은 아니지 않은가요 기복신앙으로써 불교를 믿는사람들은 부처님을 어디에나 있는 신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런 접근이 맞는건가요?
답변4.
석가모니불의 경우는 열반하셨지만, 대승불전에서는 서방극락정토를 관장하시는 '아미타불'이나 동방유리광세계의 '약사여래'와 같은 분들은 열반하지 않고 상주하시면서, 기도에 감응하신다고 합니다. 또 <화엄경>의 부처님이신 '비로자나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그 자체이십니다. 대위광태자가 보살행을 닦아서 성불하면서 그 분의 몸이 변화여 이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분의 털구멍 속에 삽니다. 살아도 그 분의 품이고, 죽어도 그 분의 품입니다. 물론 이 모두 대승불교의 신화적인 가르침입니다.
또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고통 받는 사람 누구든 관세음보살을 찾으면 도움을 주고, 구제해준다고 가르칩니다. 본 카페의 '불교원전자료' 게시판에 '관세음보살 보문품' 전문을 업로드 해 놓았는데,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다운로드 하여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UAEl/22
따라서 대승불교의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 관세음보살과 같은 존격들은 열반에 든 분들이 아니기에 기도에 감응하는 분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즉, 이런 존격들은, "어디에"서 기도를 해도, 그 기도에 감응하시는 "신적인 존재"이기에 '기복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대승불교적인 '믿음'과 '신앙'의 차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복신앙'이 나쁜 게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도 본 게시판에서 답변을 한 적이 있는데(2020년 4월 21일), 아래에 링크 소개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28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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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수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