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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주, 구세주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구별법.
본 말씀은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대상으로 정례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고 김석준목사님의 체계적 신앙신학의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요즘 잘 알려진 이단집단으로 인한 문제로 교계적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거기에 빠진 자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교인들에게 얼마나 성경을 바로 가르치지 않았으면 그러한 자칭 구세주요 재림주라고 하는 자들에게 성도들이 속아 넘어가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六절 재림하실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모든 역사와 활동은 전부가 다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활동하신 것이다.
①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구원)을 위해 성육신으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본체로 계시다가 다른 어떤 사역문제가 아니고 오직 우리의 구속, 구원을 위해 성육신으로 오셨다.
② 이렇게 오신 그리스도는 33년간 이 구원과 구속의 역사를 마치시고는 부활 승천했다.
첫째는 오셨고 둘째는 가셨다. 오심도 우리를 위해 오셨고 가심도 우리를 위해 가셨다. 혹 착각하기 쉬운 것은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하심인 줄 아나 승천하여 가신 것도 우리를 위해 가심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좀 안 간다. 그러나 앞 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를 위하여 가심은 틀림이 없다.
③ 또 오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할 곳을 예비하시고 재림한다고 말했다(약속). 초림으로 오실 때는 성육신으로 오셨고, 성육신으로 오신 그 그리스도는 부활체로 승천했고, 부활체로 승천하신 그는 역시 부활체로 재림의 그리스도로 오신다고 말했다.
④ 또 가시고 부활체로 재림해 오실 그리스도는 마지막 가실 때에 홀로 가지 않고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재림해 오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는 말이다.
우리 기독교에서 바라는 바는 그리스도의 재림이지만 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이설도 많고 이단자들도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재림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한다. 우리 기독자들이 재림의 주님에 대해 상당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고 또한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재림의 그리스도에 대해 유혹 받기가 참으로 쉽다. 이 재림의 그리스도는 구원의 결론적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볼 때에 그리스도의 한 동작 한 동작 전부는 우리를 위한 동작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도 그리스도 자신의 단독적 사역적 활동도 되지만 기독자에 대한 교훈적 계시적인 면도 없지는 않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모든 활동에 양면성이 있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어서도 양면성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그리스도 자체적 단독적인 구원사역의 활동은 우리의 결론적인 이 구원을 위해 하시는 것만이 아니고 계시 교훈적인 면으로는 기독자의 이 구원이 세상을 위한 구원사역이거나 구원활동이 아닌 영적이며 신령적인 구원활동임을 우리에게 민첩하게 실감나게 알려주신 미래적 실물교훈이요 실험교훈이다.
그리스도의 약속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 미련한 우리 인간은 현재 목도하는 것만 시인하려고 하나 그리스도의 활동은 과거사를 현재사와 똑같이 믿어야 하고 또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현재 우리에게 있어서 미래사이지만 미래사를 현재사로 놓고 볼 때에 이는 곧 실물교훈이요 실행 혹은 실형교훈이 아닐 수 없다. 미련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명백하게 보여주고 계신다.
1. 우리를 부활시키러 오신다.
재림의 주님은 우리를 부활시키러 오신다. 만일 이 세상에 자기가 자칭 재림의 예수라 하는 자가 나타난다고 하면 그는 첫째로 우리를 부활 또는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를 부활시키지 못하면 그는 재림주가 아니다.
(1) 재림주는 부활한 그리스도로 오신다.
스스로 재림주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많은데 참 재림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는 재림주가 아니다.
성경에 가르친 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물질인 육체가 아니고 비물질성인 영체인고로 자신이 상대자에게 유형체로 나타내시고자 할 때는 유형체로 나타나지만 무형체로 나타나거나 활동하고자 할 때는 무형체로 활동하시기도 했다. 이 그리스도가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육체가 물질이 아니고 비물질성인 영체이었기 때문에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물질은 섭취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그 형체는 일정한 고정체가 아니고 언제든지 물질인 인간들에게 변화체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재림하실 그리스도가 장차 재림해서도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은 아니다. 재림하실 그리스도는 분명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은 틀림이 없다.
현재 자칭 재림주라고 하는 자들은 분명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적 능력이나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떤 자가 나타나서 기이한 활동을 한다 할지라도 재림주라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재림주는 우리를 부활시키러 오신다. 초림의 방편으로 오지 않는다. 재림주라고 하면 그 자의 생일과 누구의 집 자손인가를 보라. 성경을 보는 자는 속을 수 없다. 재림주는 부활한 그리스도로 오신다는 것이다. 이단자들을 교권정치로 막지 못한다. 오직 진리로서 막을 수 있다.
(2)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오신다.
초림 때의 그리스도는 구속을 가지고 오셨다. 구속만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그는 도성인신하지 않고는 우리 인간을 대형도 대행도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죄의 대가 지불도 못하며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룰 수도 없고 중보도 불가능하다. 이 구속사역을 완성 혹은 완사하려면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야 했기 때문에 이 방편으로 오셨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림이나 재림에 대하여 그 책임성과 목적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목적 없이 오시지는 않는다. 또 초림의 목적과 재림시의 목적은 엄연히 다르다. 초림 시에는 구속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 인간을 속량 구속했고(중생까지) 재림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활시키러 오시기 때문에 초림 때와 같은 방편으로 오실 리도 없고 오셔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와야만 했고, 오셔야만 했고 또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오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 어떤 자라도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오지 않거나 못 했으면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참 그리스도는 재림하실 때에 필연적으로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오신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이 우리를 부활시키러 오시기 때문에 부활시키러 오시는 그리스도라면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존재가 초능력이나 초자연의 권능을 가지고 와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한다 할지라도 부활의 권능 이것 하나 없으면 그는 재림의 그리스도라고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 ① 부활의 그리스도라야 하고. ②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와야 하고.
원리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무형적이며 유형성적으로 활동을 했다. 초림하시기 이전, 성육신 이전에는 무형성적 존재로 계시면서 유형성적 활동을 했다. 사람과 사건을 통해서 했다. 초림시에는 구속을 가지고 오셨다.
무형적 그리스도가 무형적으로 활동(초림 전).
유형적 그리스도가 유형적으로 활동(성육신).
무형적 그리스도가 유형적으로 활동(부활 승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기 위하여 성육신으로 시간의 제한을 받고 오셔서 대형 대행 중보 구속으로 부활 승천하시고.
재림 시에는 초림과 다르게 오신다. 우리를 부활시키려고 부활의 상태로 오시고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이시다.
(3) 만인에게 동시성으로 오신다.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에는 구속사역을 위해 오셨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야 했고, 완전한 인간으로 내림하시다 보니 시공간의 제한을 안 받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만인에게 동시에 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시기 전에 만인에게 동시성으로 혹은 가견적으로 오시겠다고 예언한 적도 없다. 오히려 은밀하게 오실 것으로 예언했다.
그러나 재림의 그리스도는 그럴 필요가 없다. 재림의 그리스도는 전 기독자들을 동시에 부활시키러 오시기 때문에 그의 가견성이 그의 현현이 동시성이요 사역성이 동시성이 되는 것이다.
재림의 그리스도의 활동성이나 사역성은 어느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차적으로 전개하지는 않는다. 그런고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모든 인생들은, 생존자들은 재림의 그리스도를 다 볼 수 있는 것이요, 또 이미 죽은 자들도 1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자들은 이 그리스도를 볼 것이니 재림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선전이나 전도가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구속역사는 끝나고 부활과 변화의 과정만 남았기 때문에 전도나 선전은 필요가 없고, 또 가견성이 혹은 가식성이 동시성인고로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이전까지는 모든 것이 은밀한 중에 있기도 하고 은폐되어 있는 것도 있고 선악에 대한 구별이나 성질적 생사의 구별도 되어 있지 않고 진가에 대한 정확한 판단도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선악의 구별과 생사의 구별과 진가의 구별이 동시에 날 것이기 때문에 전도나 선전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재림의 그리스도는 곧 빛이시니 이 빛은 물체를 밝히는 물질의 빛이 아니고 참 빛이시니 선악을 밝히고 진가를 판단하고 생사를 정확히 구별하는 빛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빛이 인류 전체에게 동시성으로 작용하게 된다.
※ 초림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셔야 했고 구속 때문에 시공간의 제한을 안 받을 수 없고 태에서 나는 고로 가견적 가식성에 동시성이 될 수 없다. 구약에 보면 은밀하게 오신다고 했다. 그러나 재림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활시키러 오시기 때문에 가견성이나 가식성 현현성 관련성 활동성이 동시성이라야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초림 때처럼 전도가 필요가 없다.
이단자 중에 재림주라고 하는 자가 만민이 알도록 왔나? 그리스도의 빛은 물질의 빛이 아니다. 성질적 성분적 생사, 사역적 도덕적 진가를 모두 다 드러낸다. 물질인 빛은 정형 정모 정색은 드러내지만 사망적 생명적 진가에 대해서는 드러내지 못한다. 점차적이 아니고 모든 만민에게 동시성이다. 과거와 현재의 나의 이력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견적 가식성 관련적 사역적인 것이 모두 드러나고 10년 전에 죽은 자나 100년 전에 죽은 자나 1000년 전에 죽은 자가 모두 동시성으로 드러난다.
(4) 우리를 부활 변화시킨다.
재림의 그리스도는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오셔서 1차적인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부활의 권능을 동시에 입혀 동시에 부활하게 된다.
이 부활이라는 용어는 특수한 용어라는 것을 이미 생각한 바가 있다. 여기 변화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쉽게 변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 육체가 생명(자연생명)이 없는 무형적 물체로 된 자가 부활하는 것은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변화라고 하는 것은 그 신체가 아직 자연생명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변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부활이라고 해서 변화된 상태보다 못하다는 말이라거나 변화가 부활보다 낫다는 말이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변화란 부활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뜻이 다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신체가 이미 죽은 자나 아직 살아 있는 자나 똑같이 동등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고 부활하는데 부활한 상태는 개개인의 성화구원이나 건설구원에 있어서 양적 차이는 있으나 본질과 본성적인 차이는 없다. 즉 부활한 자나 변화된 자나 똑같이 부활의 기본성은 동등하다.
※ 바로 가르쳤는데 다른 데로 간 것은 교육자에게 책임이 없다.(겔 3:)
부활시킬 때 살아 있는 사람을 부활(변화)시키는 것은 힘이 덜 들고 죽어 있는 사람을 부활시킨다고 해서 힘이 더 드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재생이 아니다. '부활, 변화' 글자는 달라도 결과적 성질은 똑같다. 나사로는 원상복구다.
2. 공중에 있는 마귀를 지상으로 내려쫓으심.
성경에 기록된 말은 전부가 다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깨닫기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이 말이 계시성적 기록이 아닌 직설적인 말이라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 말씀이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이 계시성을 무시하게 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계시적으로만 나가다 보면 비약적이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에 삼가 조심해야 되고 함부로 속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그 책명 자체가 계시록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다. 그 속에 기록된 명칭들이나 숫자나 사건이나 혹은 존재는 직설적이지만 액면 그대로가 아니고 전부는 계시적으로 하신 말씀이다. 에베소 교회라고 한 것은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그 에베소 교회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그 교회의 성질과 같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고, 또 말(馬)들은 실질적으로 그 말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일어날 운동, 활동성을 계시적으로 그렇게 표시한 것이요, 또 구원 얻은 14만 4천이란 수는 하나님의 상징수이니 구원 얻은 자의 정확한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계시적인 숫자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공중에 있는 마귀들은 지상으로 내려쫓긴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할지, 아니면 이것 역시 계시적으로 믿어야 할지? 물론 성경의 공중이라 지상이라 하는 것은 공간성을 구별해서 하는 말이다.
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말했다. 이 공중이라는 한계선은 어디서 어디까지를 공중이라고 하는가? 전 우주적으로 볼 때는 지구도 하나의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닌가?
원시시대에 원시적인 지식으로 볼 때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졌다고 하고 또 땅은 무한 지평선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왔던 것이다. 그리고 기록영감의 감화를 받아가지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도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기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인간에게 주기 위해서 인간에게 기록영감으로 감화하신 그 성령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런 뜻으로 기록하도록 하신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손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은 문자는 인간의 지식의 범위나 한계를 넘지 못하지만 극히 유한하고 제한된 그 용어 속에는 인간의 지식의 제한성을 훨씬 넘어서 인간들의 알 수 없는 그런 많은 이치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옛날에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기록영감의 감화를 받아 그 성경을 기록했지만 자기가 기록했다고 해서 자기가 기록한 그 성경을 다 알지를 못했을 것이다.
성경은 기록한 자의 지식의 범위 내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이치와 혹은 지식과 지혜와 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기록한 성경을 깨달으려면 다시금 각성적 영감의 감화를 받아 깨달아야만 되는 것이다.
※ 안식교회에서는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들 역시 못 지키고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 믿는 것이 안식일 지키는 것이라고?
문자로만 고집한다면 에베소 교회가 지금도 그 성경을 기록할 당시와 똑같은가?
그러나 에베소 교회의 성질을 닮은 교회는 오늘날 많이 있다. 말은 운동이요, 14만 4천은 상징수이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계시이고 어디까지가 계시가 아니냐?
① 성경은 계시이다.
② 성경을 기록자 자기가 기록을 했어도 자기가 그 뜻(계시)을 다 모른다. 인간이 기록했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 많은 뜻을 포함했다. 만일 글자 그대로라면 성경해석이 필요가 없다. 역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성경기자들도 그 성경을 다시 배워야 한다. 본문 그대로 본다고 해도 그 뜻이 안 맞는다.
공중에 있는 마귀를 지상으로 내려쫓는다는 것은 마귀는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시간적으로 직접 관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것을 무엇이라고 속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마귀의 활동이 많이 축소되고 많이 제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중에서 지상으로' 라고 했으니 이것은 벌써 공간적으로 축소성을 볼 수 있고, 또 활동성으로도 제한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이 마귀가 공중에서 지상으로 내려쫓기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비물질성인 이 마귀가 비물질성으로 무형체로 어떤 한계선을 침범치 못하도록 하게 되고 또한 어떤 성질과 존재에 대해 침범할 수 없는 제한을 받게 되는 것이냐?
‘공중이다, 지상이다’ 하는 것을 문자나 용어를 가지고 속단을 내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마귀의 존재의 필요성과 목적성을 알면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귀류가 우리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있어서는 안 될 존재 같으나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사역에 있어서 마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다.
우리 인간이 현세에서 누림 면과 존재하는 그 어떤 부분만 보면 마귀는 절대적으로 없어야 할 존재요 필요치 않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사역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만일 필요치 않다면 하나님께서 마귀의 존재를 허용을 하지 않았을 것이요, 지금이라도 영원히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실 능력이 하나님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들을 그냥 존재토록 허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대 선택의 제 1 목적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은 상대자가 단 하나의 1인이 아닌 많은 수의 사람인고로 인격성을 그대로 발휘하여 가치를 나타냄에 있어서는 차등성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격자인 인간이 다양한 차등성을 가지게 하는 데는 이런 마귀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마귀의 활동을 외적으로 보면 대립적이요 충동적이요 마찰적이지만 실은 인간이 신의 성품을 입는 데는 마귀의 대립적인 활동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말하기를 대립적 호응이라고 말한다.
이 기간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기독자의 성장이나 성화나 소유나 연관성은 끝나게 되는 것이니 그 때에는 이제 성도들과 같은 고차원적인 존재에게는 마귀가 필요가 없고 성도들이 하는 고차원적인 운동 활동 사역에는 필요가 없게 되니 자연적으로 이들의 곁에 더 머물 수 없으니 이들이 존재하지 않은 세계로 쫓길 수밖에 없다.
그런고로 성도들이 부활이나 변화해서 머물 곳이 공간적인 공중이라면 마귀들이 내어쫓기는 것도 그런 공간성일 것이다. 즉 이 마귀류는 성도들과 함께 있으면서 때로는 이 마귀류가 성령과 공존하기도 한다. 성경에 말하기를 사단이 하나님의 아들들 중에 있었고, 욥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직접 대화도 했다. 그런고로 이 마귀류들은 성도들과 함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궁극적 계시적으로 보면 성도들의 구원을 협조하는데 표면상 마찰과 대립적으로 하게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마귀의 존재의 이유를 깨달으면 된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성을, 즉 하나님의 실력을 만들기 위해 영물인 사단을 동원시킨다. 마귀류가 성도와 함께 또는 성령과 또는 하나님과 직접 대화도 한다. 외적으로 보면 마귀는 대립적 충동적 마찰적이다. 그러나 성도들을 신의 능력을 입히는데 절대로 필요한 고로 대립적 호응이다.
성도가 부활하게 되면 성장 성화 소유나 연관성은 끝나게 된다. 그런고로 이제 마귀는 성도들과 같은 고차원적인 존재에게 필요가 없고 성도들이 하는 고차원적 운동 사역 활동에도 필요가 없게 되니 내려쫓긴다. 성도들이 부활 변화되는 그곳에 마귀는 필요가 없다.
1) 지상권과 공중권을 잡은 마귀들.(절대권으로 준 것이 아님)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사역을 한 눈으로 볼 때 전부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로 일관된다. 즉 하나님의 창조성과 인간의 타락성도 하나님의 구원 순서 중에 하나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사역을 부분적으로나 한 면만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실패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여러 번 나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실패론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사역을 보면 결코 실패는 없다. 인간 보기에는 실패 같으나 실은 실패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대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목적이나 그 목적에 의한 구원사역 등은 인간창조의 뚜렷한 목적성이나 또는 인격자의 세계의 격차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목적과 인격의 세계의 격차성과 신의 지공성과 인간 개개인의 노력성과 그에 따른 격차성과 심판성을 볼 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지 못하면 악령류의 존재성에 있어서도 자존자냐 피조물이냐 하는 문제가 생겨지고 악령류의 활동성의 범위성이나 시간적 한계성을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적인 대국적인 구원과 인격의 세계의 격차성과 하나님의 지공성과 인간의 절대 자유성과 하나님의 정확한 심판성을 볼 때에 이 악령류의 필요성을 알 수 있고, 악령의 필요성을 알게 될 때에 조물주인 하나님께서 대국적인 구원목적을 위해 이것도 창조하신 것이 틀림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결코 자존자는 아니다. 성경이 증명하는 대로 보면 마귀의 구원사역에 필요성은 인간의 구원완성까지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악령류의 존재성이나 존재목적이나 필요성이나 활동의 한계성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 앎은 막연한 추리적인 앎이 아니고 성경에 밝히 보였으니 이 계시로 통하여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마귀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존재목적은 신의 대국적인 구원사역에 쓰일 목적이요, 그 활동의 한계성은 공간적 유한과 시간적으로 유한성을 가지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절대 자유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마귀의 대립적이고 마찰적인 협조가 없이는 성화구원의 격차가 심하게 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신구약 전체가 성도의 투쟁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경은 대개가 투쟁과 싸움을 보여주고 신약성경에서는 투쟁싸움과 경쟁싸움의 양면싸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고로 이 악령류는 단편 단면적으로 보면 우리의 구원에 절대 필요 없는 존재같이 보이나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활동범위를 지상권과 궁중권으로 주셨고 또 그 활동의 종류에 있어서도 절대 자유성을 주지 않고 제재를 해서 그 종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이상은 활동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또 그들의 활동 기간을 성도의 구원완성까지만 물질계에 존재하면서 일정 범위 이상은 활동할 수 없도록 하셨다.
악령은 피조물인데 직접 피조물이냐, 간접 피조물이냐? 자존자가 아니면 피조물이다. 마귀는 구원사역에 절대 필요하다. 대국적인 면에서 절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인격의 격차성과 하나님의 지공성에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격차성을 지으면 하나님의 공평성 공정성이 없어지고 심판성이 없어진다.
마귀의 활동권은 지상권과 공중권이다. 이 말이 상징적이던 실상적이던 따질 것 없다. 공중이 어느 범위까지냐? 대기권 밖인가, 대기권 안인가? 달나라인가? 가견적 물질적 정신적 정신계를 공중이라고 말한다. 마귀의 활동범위는 물질계의 신체만이 아니고 정신계에까지, 유한된 신령계와 타락한 인간의 영까지.
내어쫓기는 곳이 실질적인 지상권이라면 인간의 인공위성으로 오면 안 되나? 믿다가 죽은 성도들이 있는 곳에, 이미 부활한 존재들이 있는 곳에 마귀는 필요가 없다.(휴거하는 곳에 마귀는 필요 없으니 내어쫓긴다)
공중은 지상에서 몇 m가 공중이냐? 글자적으로는 땅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곧 공중이다. 완성된 신령계에서 내어쫓기는 것인지? 현실적 공간 혹은 정신계이던 상관이 없다. 신랑 신부 혼인 잔치하는 그 곳에서 마귀는 내어쫓긴다.
계시적으로는 공중은 구원완성계이다. 이미 성화된 성도의 개체(본질과 본성)의 그 부분 그 세계에서 내어쫓긴다. 그 세계는 마귀가 침범할 수도 없고 있을 필요도 없고 내어쫓긴다. 장소적으로 부활한 성도들이 혼인 잔치하는 그 권에서는 내어쫓김을 당한다.
세상은 세상인데 천국권 외계가 있고 천국권 내계가 있다. 마 5:19의 ‘천국에서 크다, 세상에서는 작다’ 하는 이 성경을 믿는 자 극히 드물다. 천국은 라인이 없는 라인의 세계이다. 세상에서 큰 자 많다.(권투계 야구계 축구계 정치계 예술계)
2) 지상권만 장악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면 공중권과 지상권을 무대로 하던 마귀가 공중권에서는 내어쫓기고 지상권만 장악한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적으로 볼 때에 한 면으로는 역사성으로 믿어야 하고 한 면으로는 계시적으로 믿어야 한다.
(1) 계시적으로 믿을 것
지상권만 장악한다는 말은 과거에는 공중권만 잡고 있다는 말인데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건과 내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동원된 사건과 내 성질 자체가 구원을 통과하기 이전에는 마귀가 시혹권을 가지고 시혹하다가 일단 믿음으로 통과되면 더 이상 시혹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일단 신앙으로 통과된 사건이나 사역이나 성질이나 성격에 대해 마귀는 더 이상 시혹하지 못하고 일단 거기서는 쫓겨나게 되고 이 물질계 혹은 구원 미완성계에서만 활동권을 가지고 혹은 시혹권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시혹한다는 말이다.
※ 시혹권은 역사적으로 보고 계시적으로 보고. 구원을 통과하면 덤벼들지 못한다, 빼앗지 못한다, 따라오지 못한다, 때 묻히지 못한다.
(2) 역사적으로 믿을 것.
그 때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부활구원까지 완성한 자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활동하고 있는 그 한계권 내에서도 추방을 당한다.
추방당한 마귀는 아주 추방당한 것이 아니고 부활구원을 완성한 자들이 없는 세계에서 인격자(불신자와 미중생자)와 많은 생물들과 구원에 생명적인 협조를 못한 자들은 평소에 그리스도로 더불어 결합생활을 못한 자들인데 이들과 평소에 죽어라고 싸움을 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평소에 그리스도로 더불어 생활한 자들은 다 1차 부활하여 최고의 신랑을 만나 공중에서 혼인잔치하고 한편 평소에 마귀와 친근했던 자들은 지상세계에서 죽어라고 싸움만 한다. 거의 다 죽기까지 싸움만 하게 된다.
※ 지금은 빛과 어두움, 의와 불의, 진리와 비진리, 악인과 의인이 공존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면 모두 다 갈라서게 된다.
3) 신령계는 유린하지 못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궁극적이며 대국적인 구원사역을 위해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구원목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이상에는 활동하지를 못하게 되어 있고, 또 우리 인간이 구원 완성되어 신령계로 들어간 그 세계는 마귀가 유린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신령계는 하나님의 단일의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단일성이 아닌 마귀는 가까이 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자들이 진리와 영감을 따라 생명적인 활동으로 건설된 성질의 세계는 유린하지를 못하고 또한 모든 기독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어 그리스도로 더불어 활동하는 세계는 절대로 유린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에 공중에서 내어쫓긴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마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의 세계는 사망계에서만 활동하고 아직 생명계로 확증되지 못한 미완성계는 유린할 수 있고 또 부활한 후에라도 부활하지 못한 그 세계는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으나 육체가 영체로 부활한 부활체와 신령계는 유린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것을 보면 물질계와 정신계와 신령계는 구별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물질계와 신령계에 대해 구별하기를 비물질계는 전부를 신령계라고 말하나 성경에서 말하는 이 신령계는 정신계를 포함할 수 없는 것이다. 엄연히 신령계와 정신계는 구별되어야 한다. 마귀는 물질계와 정신계를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령계는 유린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우리가 물질계와 신령계로 구별할 때에 신령계에 소속된 것을 천사와 마귀와 인간의 영이라고 말하기도 하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생명적인 신령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니 이 신령계라는 말은 물질인 신체를 가지고 있던 인간이 비물질인 신령체로 변한 것을 말한다. 이들이 사는 세계를 지칭하여 신령계라고 말하고, 그래서 이 신령계는 유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 기도하고 있는 그 순간도 신체와 마음과 생각을 계속 유린하고 있다. 신령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항상 유린이다. 예수께서 40일 금식기도할 때에 사단이 바싹 붙었다. 이 세상은 성령과 악령이 공존하고 있다. 부활하고 나면 마귀는 접근치 못한다. 도전할 필요도 없고 도전할 수도 없다.
3. 성도와 혼인잔치 하러 오실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본래 그의 구원목적인 우리 인간과 애정적 수수관계 목적으로 구원선택을 했기 때문에 당신이 선택하신 목적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재림 이전까지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기독자들의 양육 양성 단장 기간이요 그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의 애정성의 수수관계의 대상자인 기독자들은 물론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었기 때문에 기독자라는 칭호를 하게 되는데 이 기독자들은 1차적인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그리고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격을 양육 받아 성장해 나가며 신부로서의 단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양육은 물론 그리스도와 인격적 교제를 할 수 있는 인격 양육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누려야할 모든 누릴 것에 대한 성장이니 이 성장은 지능적 성장 기능적 성장이다. 그런고로 기독자들은 이 면을 무시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기독자는 이 부활을 하여 그리스도와 혼인할 것이요 그와 영원히 인격적인 교제와 대화를 할 것이니 이 면을 명심해서 재림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부지런히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혼인잔치란 말은 세상 인간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하는 표현인데 이 표현은 단독적인 쾌락성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인격자로서 애정적인 수수관계의 쾌락적인 극치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로 더불어 혼인잔치 한다는 말은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인간세상에서 혼인잔치 하는 그런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보다는 그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의식이 절대로 아니라고 단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 혼인잔치란 원래 구원선택 곧 존재선택이 아니고 사건선택이다. 사랑을 전혀 받아 보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한 자가 사랑을 알 수 없는 것이다. 혼인잔치란 쾌락적 향락적 느낌성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자로 지었다. 사랑은 神造사랑, 人造사랑이 있다. 인조사랑도 주는 재미, 받는 재미가 있다. 사상이 다른 남녀가 세계에서 제일 큰 예식장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고 받으면 기쁠까? 결혼이란 인격적 결합, 성숙적 결합인데!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일방적 시애성이나 결혼의 사랑은 주고 받는 수수관계성이다.
공중에서 혼인식은 어느 나라 식대로 하겠느냐? 알 필요가 없다. 천국식대로 한다. 만약에 결혼식 때에 신랑하고 상관이 없는 어린아이가 나타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송아지가 따른다면 값이나 나가지만!
혼인잔치의 예복 - 마 24:
말세에 관한 것 - 마 25:
‘기름준비를 했느냐’ 하는 것은 앞으로 될 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고, 혼인잔치도 성경구절 그대로가 아니고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왜 여기에 혼인잔치라는 말을 했느냐? 예수만 남성이 되고 성도는 다 여자가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되면 성경이 안 맞는다. 시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했으니 맞을 리가 없다. 왜 신부라고 하고 아들들이라고 하느냐? 체계를 잘못 세우면 인간이 교주가 되고 하나님이 되고 구세주가 되기 쉽다.
재림의 이유.
① 우리를 부활시키려고.
② 사단을 공중에서 쫓아내고.
③ 우리와 혼인잔치.
기쁨과 절정의 극치이다. 그러나 기쁨의 양이 다르다. 이 세상에서는 인조사랑으로 신조사랑을 대치하고 살았지만 그 날에 가서는 오직 신조사랑으로만 산다.
(1) 우리는 구름 속으로 올라가서 신랑을 만난다.(살전4:17, 계11:12)
구름을 타고 혹은 구름 속으로라는 말은 옛날 선지 사도들이 환상을 보았거나 혹은 음성을 듣는 가운데서 한 말이다. 살전4:에 보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유대인의 감화를 받아 현재적 기복주의 사상을 가지고 이적과 기사를 믿었고, 또한 헬라 철학의 많은 영향을 받아 내세에 대해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실존의 세계라기보다 하나의 관념의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그들에게 사도바울이 기독교 복음을 가지고 가서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과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강력하게 넣어준 것이다.
물론 그들이 처음에는 바울이 전하는 이 내세적 소망을 잘 가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러나 바울의 그 말에 크게 감화를 받은 성도들은 현실을 멀리하고 혹은 당시 헬라의 초절주의 염세주의 사상과 합쳐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급박성을 가지고 나갔던 것이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내세의 소망을 확실히 심어주기 위해 이런 말을 했고, 더 나아가 성령께서는 당시의 그 지방 성도들뿐만 아니라 후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과 승천과 신천신지를 확실하게 믿게 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본문(살전4:17)에 '구름 속으로' 라고 했고, 또 요한은 후일에 될 일을 밧모섬에서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닌 여러 시간 동안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귀로 들었다. 성경에 보면 '네 본 것과 들은 것을 기록하여' 라고 했다.
바울은 물론 요한처럼 보지는 않았으나 바울이 데살로니가서를 기록한 것은 본 것과 들은 것이 아니고 내세적 감화 감동에 의해서 기록한 것이니 이 내세적 감화 감동은 바울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 그 사회에 이미 있는 지식들을 선용을 해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 서신들은 당시에 존재치 않는 말이나 용어는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구름 속으로 올라가서' 라고 한 것이고 요한은 그것을 본 것이니 요한이 본 것 중에는 이 현존세상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성존재를 본 것이 아니고 새로운 것들을 보기는 보았으나 거기에 대한 이름을 각각 새로운 이름을 지어 부르지 못하고 이미 있는 기존적인 존재의 이름을 따서 부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환상을 본 것들은 새로운 것이지만 그 이름들은 현재의 이름들을 빌려 쓴 것이다. 그래서 구름이라고 했는데 요한이 볼 때에 구름 같은 것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본 것이다.
※ 헬라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다. 만일 불교인이 기독교를 믿었으면 천당이라 하면 극락을 생각하듯이 그들은 천국을 실존의 세계로 생각지 않는다. 헬라철학의 내세와 기독교의 천국과는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다르다. 날이 넘으면 관념의 세계로 빠진다.
바울은 현세의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국가적 다원적인 것을 원했다. 그들에게는 바울의 도가 들어가기 힘들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해야 효력적이겠느냐? 민족적 해방을 말하면 혹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복음의 성질은 아닌 것이다.(민족적 기본주의이다) 현대교회도 역시 기복주의 현세주의가 있다. 병자가 예수 믿도록 하려고 ‘예수 믿으면 병 낫는다’고 한다. 바울은 그렇게 전도하지 않았다.
'구름을 타고' 하는 것은 최고의 것을 인용하고 사용하고 누리게 한다는 것이다. 부활한 이후에 누리고 사용하는 것을 인간세상에서 최고의 것을 사용하듯이 사용케 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것으로 모든 것을 대우해 주시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로서는 최고의 기쁨이나 만족에 대해 예민성을 민감성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주님은 우리에게 관계성을 최고의 것으로 해 주시고자 하신다.
올라가는 방편도 여러 가지다. 줄잡고 올라가는 것, 묶여서 올라가는 것, 구름 타고 올라가는 것. 걸어가는 것도 여러 가지. 구루마 타고 가는 것, 택시 타고 가는 것, 비행기 타고 가는 것, 구름 타고 가는 것.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 대형 대행 중보 부활 재림 이전이나 이후나 모두는 우리를 위해 하신다.
공중에서 혼인 잔치한다는 것에서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느냐? 한 순서 한 순서 통과할 때마다 이것을 느낄 수 있느냐? 올라가는 기분, 혼인하는 기분이 어떻겠느냐? 이런 사건의 진행성의 중요성보다 그 이면의 누림성을 생각해보라!
(2) 공중에서 잔치함.(살전 4:17)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구름을 타고 올리워 가서 공중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한다고 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잔치가 많이 있다. 생일잔치는 세월의 흐름과 시간의 변동과 인간이 노쇠로 향하여 감을 상기시키는 잔치요, 환갑잔치는 인간이 노쇠해서 쓸모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허망과 허탈을 일으키는 잔치요, 혼인잔치란 인간의 새로운 시작을 말하는 잔치요 인격대 인격의 결합적 애정적 수수관계에서 최고의 행복과 쾌락과 만족의 절정을 말해 주는 잔치인데 이 잔치를 이 물질계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들이 다 추방된 세계인 공중에서 혼인잔치를 한다고 했으니 혼인잔치란 그 자체가 새로운 시작이요 인격적 결합의 수수관계요 애정적 수수관계요 또 마귀가 추방된 곳인지라 최고의 만족과 쾌락을 방해할 자가 대외적으로 없다는 말이다.
만일 이곳이 마귀가 추방된 곳이 아니라면 이 혼인잔치를 방해할 것이고, 그러면 신랑이나 신부는 이로 인하여 기쁨과 만족이 감소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깨끗이 추방된 곳이니 방해자가 없다는 뜻인데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이런 방해자가 없다는 말이다.
또 공중이란 차원적인 성격을 가졌으니 그리스도와의 혼인잔치의 쾌락과 만족은 저차원적 저질적 유치적이 아니고 고차원적인 기쁨과 희락과 만족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공중이라는 것은 공간적인 공중임을 단정적으로 부인할 필요도 없고 또 안 그렇다고 단정을 지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그대로 믿어 공간적인 공중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공간적인 공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해자가 없는 차원 높은 그 세계임을 믿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 액면적으로 들으면 동등적 보편이 되고 만다. 일반적으로 보이나 그 이면적으로는 차등성이 숨어 있다. 모든 종별 구석구석에 차등을 안 붙여도 구석구석 차등이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 보통 그것을 못 느끼고 있다. 이렇게 둔감하다. 재림하여 공중휴거 할 때 너는 어떤 상태이겠느냐? 너의 모습, 너의 옷, 너의 감정?
성경에 공중이라고 한 것이 ‘실제적 공중이다, 아니다’ 하며 우기거나 부인할 필요는 없고 왜 이 말을 썼는가를 알아야 한다.
계시성으로 보면
공중은 차원에서 고차원적이요.
구름은 기분의 느낌성이요.
혼인은 인격적 결합 애정의 수수관계요.
잔치는 쾌락성이요.
마귀 추방은 방해물 제거.
외래적 방해, 내적 방해가 없는 곳이니 얼마나 기쁘겠느냐?
(3) 모든 영물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혼인잔치 한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천국의 영물들도(천군 천사들) 주님과 함께 공중에서 우리를 맞아 줄 것이다. 그 때는 모든 부활한 형체는 주님을 만나거나 혹은 부활한 후에도 어떤 개인이던 단독적으로 독고생활은 할 수 없게 되고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영물들이 보는 가운데서 전체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양면성을 가졌다(전체 연관적 구원적 생활). 신부의 자격을 충실하게 갖추어 놓은 성도들은 독고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천천만 성도와 천군천사들이 우러러보는 것이 더욱 영광스러울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자신의 만족감과 쾌감은 더욱 자극이 되고, 또 한 면으로는 권위적 주권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신부이지만 신부의 자격을 충실히 갖추지 못한 자들은 오히려 대중적 전체적인 것보다는 독고적인 생활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때에는 독고적 생활이 아니고 대중적 전체적일 것이니 그럴 줄 알고 신부인 성도들은 신부의 자격을 충실히 갖추라고 권고하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 있을 때에도 기쁨을 느낄 줄 안다. 이 기쁨은 사건이나 존재를 통하여 느끼는 상대적인 기쁨도 있고 독고적인 기쁨도 있는데 이 독고적인 기쁨을 상대적 대중적인 기쁨으로 더욱 촉진 혹은 발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참된 신자를 중심해서 사역했기 때문에 결과적 구원에는 그 때 부활한 성도들에게 독고적인 생활을 허락지 아니 하시고 어디까지나 이런 자를 중심해서 모든 것을 하심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그리스도는 재림하실 때에 우리 성도에게 독고적으로 1대 1로 상대나 생활이 아니고 전체적인 대중적인 1대 1의 생활임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 다섯 처녀의 기름준비는 기쁨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통곡임을 말해준다. 똑같이 한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고(환경, 장소) 신랑도 같은데 문제는 기름이다. 불을 켜니 환해져 기쁨이다. 기름준비 안 한 자는 불이 안 켜질 때 그 기분은? 신랑이 와 보아야 안다. 지금 남의 속에 들어 있는 기름은 얼마나 들어 있는지 모른다. 이 비유는 택자, 불택자를 말하는 게 아니고 격차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켜보는 가운데서 혼인잔치를 한다는 것은 뽑냄(누구누구도 오니)과 부끄러움(벌거벗은 수치)을 말해주는 것으로 예비하라, 조심하라는 것이다. 나는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것인가? 남이 나를 보기도 하고 내 속이 훤히 보인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 벗고 있는 것이나 아무도 없는데 혼자 잘 꾸민 것이나, 또는 천군천사들이 보는 가운데서 꾸민 것이 그 느낌성과 쾌감성이 같은가?
보통은 환난을 무서워한다. 환난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을 중심해서 주는 것.(노아방주) 못 믿은 자는 손해다. 비가 오면 산 풀은 팔팔하고 죽은 풀은 더 썩고.
4. 세상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인자이기 때문에 심판할 권세를 가졌다. 세상을 심판할 권세를 잡은 자는 오직 우리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이 세상을 심판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
인간을 심판하려면 인간과 같은 존재라야 되는 것이고 물질계에 있으면서 대신관계를 바로 가지고 대물관계 대사관계 대아관계를 바로 가진 자라야 하는데 이 그리스도는 그 어떤 관계에서도 물질을 의지하거나 의뢰하거나 의존치 않고 살았기 때문에 잘못됨이 없는 고로 세상을 심판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물질계를 심판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는 같은 피조물인 물질이어야 하고 그 물질이면서 바른 관계성을 완성해야 하고 모든 물질계에 의존도 의뢰도 굴복도 의지도 하지 않고 물질을 바르게 진리로 다스려야 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심판할 자격이 있고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 누가 나에게 심판할 그 분을 사귀어 보라고 소개해 주었다. 처음엔 직접 만나 보지 못했으나 소개받고 보니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 이 분에 대해 정확하게 숨긴 것이 없이 써놓은 것이 성경이다. 이 분에 대해 중매하고 소개해 준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분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된 것은 성경이다.
성부 하나님은 심판할 권리가 없다. 만능의 능력자라고 해서 마구 심판하는 것은 아니다(인자됨을 인하여-요5:27). ① 죄 지을 기회가 없어서 안 짓는 것과(여기서는 못 싸운 것이고), ② 죄 지을 기회가 있어도 안 짓는 것과(여기서는 싸운 것이고) 이 두 가지가 같은가, 다른가? 못 싸운 것에는 심판할 권리가 없다. 모든 문제가 다 그렇다.
예수님의 신체가 우리의 신체와 같은가, 다른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연약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예수님도 시감성 후감성 청감성 미감성 촉감성이 있다. 사람이 겪는 사건 성분 성질 성격 모두 인간이 받을 유혹을 다 받았다. 그리고 다 이겼다. 그래서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할 권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이 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횡적인 관계다. 이겨야 심판할 권리를 가진다.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1) 진가(眞假)의 심판.
이 세상은 진가에 대해서 확실치가 못하다. 세상사람들은 진가에 대해 구별을 하기는 하나 종별이나 외모를 보고 판단을 한다. 또 이 세상에는 진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병행하고 있다. 이 진가가 외모도 같고 종별도 같고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구별을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진짜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자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혹은 진행인지 가행인지 이것마저도 구별을 못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틀림이 없는 眞인데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眞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때에는 진짜가 참 억울하다. 참 지식, 참 행동, 참 사랑, 참 인격 이 모든 것이 眞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가 오시면 진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① 정질(正質)이 드러난다.
진가에 대해 질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모양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모양을 가지고는 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② 정색(正色)의 진가가 드러난다.
그 분이 오면 그 색깔을 확실하게 구별하여 진가로 드러내어 줄 것이다.
③ 정형(正形)의 진가가 드러난다.
그 분이 오면 그 모양을 확실하게 구별하여 진가로 드러내어 줄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것의 진가여부를 심판 받게 되니 현재의 삶은 참을 붙잡고 참되게 살아야 한다.
※ 부요 행복 쾌락 사랑 주권 권위 인기의 진가를 심판한다. 인조사랑인지 신조사랑인지 심판한다. 세상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는데 천국에 가서 보니 부자가 아니더라.(부자와 거지 나사로)
2) 강약(强弱)의 심판.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인 현재는 강약을 정확히 구별을 못하고 있다. 실은 약자인데 강자행세를 하고 있고 실은 강자이면서도 약자가 되어 있기도 하다. 현존세상에는 약자가 강자노릇을 하고 있다. 예수는 실은 강자이지만 약자들에게 심판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천대를 받고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 외부에서 볼 때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이 세상은 계속 그런 역사 속에서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강자이면서 약자가 되어 멸시와 괄시를 받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다. 이 세상 사회도 그러하고 종교세계에서도 그런 일들을 너무나 많이 보고 있다.
이 강약성에 있어서 첫째로 존재적으로 강약의 심판을 받게 되고, 둘째로 성질적으로 강약의 심판을, 셋째로 주권(주장)적으로 강약의 심판을 받게 된다.
※ 공중의 마귀가 땅으로, 땅에서 무저갱으로 내어쫓긴 것처럼 이렇게 가혹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3) 선악(善惡)에 대해 심판.
인간이 존재하는 이 현실세계에는 선악에 대해 정확한 기준이 없지는 않으나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선악에 대한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실은 선악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세상에서는 참 선인 것도 많은 인간들이 악이라 하기 때문에 악으로 인정을 받게도 된다. 또 분명히 선이 아니지만 많은 인간들이 선이라고 하면 그 사회에서는 그것이 곧 선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악에 대해서 인간이 사용하는 면에서는 정확한 기준성이 없다.
예를 들면 이 나라에서는 그를 최고 악자로 사형에 처하려고 하나 또 다른 나라에서는 그를 최고의 영웅이라고 표창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존재적으로도 선악에 대해 정확한 규정이 없고 그 성격에 있어서도 선악에 대해 정확한 규정이 없고 그 성분에 있어서도 정확한 선악의 규정이 없다.
이 세상에서는 대개는 선자(善者)와 악자(惡者), 선악을 구별할 때에 한 존재에 있어서도 한 편은 선이라고 하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악이라고도 하고, 한 사건을 두고 한 사람은 善事라고 하는데 또 다른 사람은 惡事라고 한다. 과연 선자가 맞는지 악자가 맞는지? 또 한 행동에 대해 한 사람은 선행이라고 하는데 또 다른 사람은 악행이라고 하니 과연 이것은 선행이 맞는지 악행이 맞는지 정확한 기준이 없는 세상인고로 여기에 대해 심판이 있어야 한다. 또 이 세상에서는 선과 악에 대해 정의를 내림이 종별이나 형태를 보고 선악의 판단을 내리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이런 모든 것이 정확하게 심판을 받게 된다.
※ 선악에 대한 애매성: 크게 말하면 선악의 기준성이 하나뿐이 아니고 많다. 방법에 따라 사람에 따라 시간에 따라 사건에 따라 모두 다 다르다.
원칙적으로는 선악의 기준은 하나밖에 없다.
유교에서는 조상의 제사를 선으로 보고, 기독교에서는 조상의 제사를 악으로 보고. 기준이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폐백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유교에서 나온 것. 크면 이기고 떼쓰면 이기는 건가? 성경을 들고 있으면서 성경의 척도를 써먹지 않는다. '같지 않은 저울추는 사용치 말라' 그 분이 오시면 모든 게 심판이다. 바른 척도에 하나라도 안 맞으면 전부는 악이다. 그 외형 외모 형태 종별을 보고 속단을 내리고들 있다. 예수 그 분은 본질을 가지고 따진다.
조직신학에서의 심판과 체계신학에서의 심판과는 성질이 조금 다르다.
심판 +- 객관적인 심판 ― 조직신학에서.
+- 주관적인 심판 ― 체계신학에서.
지금은 악자도 평안하고 행복하다. 그 때는 극대 극으로 나타난다.
사랑의 종교
① 과거적 사랑 ― 십자가의 구속.
② 미래적 사랑 ― 천국의.
③ 현재적 사랑 ― 직접․간접.
④ 미래적 사랑 ― 상호 유기적 수수관계. 하나님의 사랑의 감염에 의해.
4) 생사(生死)의 심판.(審判)
이 생사의 심판이라는 말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심판이라는 말이 아니고 생명권 내에 있는 것과 있던 것, 생명권 외계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물질계)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부는 사망의 수평선 이하로 빠져 버렸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지으신 모든 만물을 아담에게 일임했는데 모든 만물을 위임받은 아담이 타락을 하니 그에게 소속된 모든 물질계는 동시에 타락된 인간에게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부는 생명 외계와 생명의 수평선 이하에 혹은 생명권 외에 머물게 되고 사망의 수평선 이하로 침몰된 것이다.
이러던 것을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통하여 진리와 생명으로 영감으로 활동 혹은 구원운동을 했는데 이 구원운동 생명활동을 하시는 분과 접선 혹은 결합이 되는 것은 생명계로 들어오게 된 것이요, 이 그리스도와 접선 혹은 결합되지 못한 존재나 성분은 사망계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 이 생명계와 사망계는 분명히 라인이 있으나 이 라인은 불가견적 불가식적 라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가 심판주로 오시기 전에는 생사의 구별을 정확하게 하지를 못한다.
물론 우리 인간이 생사의 구별을 하는 것이 있기도 하다. 이것은 생물들의 육체의 죽음이다. 이 생물들의 육체의 죽음은 참 죽음이 아니고, 참 사망이 아니고 생사에 대해 바른 교훈을 주는 하나의 모형계시이다. 사망이란 사망이 얼마나 처절하다는 하나의 계시이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생명체의 죽음은 그야말로 처절하다. 동물이 죽을 경우 죽으면 썩어 냄새가 나게 되고 자체적으로는 모든 것이 중단되는 처절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곧 사망이 처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시에 불과하다. 참 사망은 따로 있다.
그러나 현존세상에서는 그리스도가 심판하시기 전에는 생사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것이 생명인지 사망인지, 생명권 내에 있는 것인지 생명권 외의 것인지 이것을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생사에 대해 정확하게 심판을 하게 된다.
(1) 존재적으로 생사에 대해 심판하신다.
생명적인 존재와 사망적인 존재를 심판하신다. 아무리 그 존재가 활동을 맹렬히 해도 그는 곧 사망적인 존재이니 그의 결과는 사망으로 비참해질 것이요 또 어떤 존재는 현재로 보면 죽은 것 같으나 생명권 내에 있으니 그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대로 '죽었으나 산 것이요, 살아 있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심과 같이 생명권 내의 것은 청청하게 살 것이다.
(2) 성질적(性質的)으로 생사(生死)의 심판.(審判)
생명적인 성질과 사망적인 성질이 있다. 혹은 성분 성격이 있는데 이것이 생명인지 사망인지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우리가 성경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접선되어 결합된 것은 존재나 성격이나 성질은 다 생명이 되나 그렇지 못한 것은 전부가 다 사망이다. 명예도 권세도 부귀도 공명도 쾌락도 향락도 사랑도 위로도 능력도 전부는 생사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구별하지를 못한다.
생사의 심판이라는 것은 생명이 아닌 사망의 것은 그렇게 처절해 진다는 것이요 생명의 것은 그렇게 활발하게 살아난다는 말이다.
5) 소속의 심판.
이 세상은 거짓이 왕(王)노릇하고 있고 참은 무형계에서 王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심판하시기 전에는 그 소속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 소속이란 두 가지 뿐이다.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지 못한 것은 전부가 마귀에게 소속된 것이다.
이 소속은 표면을 보아서는 알지를 못한다. 얼마든지 마귀에게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종처럼 말씀도 활동도 할 수 있고, 또 실질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고 하기 때문에 외형이나 종별을 보아서는 그 소속을 가려내기가 어렵다.
이 소속이라는 말은 어떤 민족적 소속이나 국가적 소속이나 단체적 소속이나 교파나 교단의 소속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전체적으로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느냐, 마귀에게 속했느냐’ 하는 것이요, 내 개체에 있어서는 ‘육의 소속이냐, 영의 소속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소속은 외형적 소속과는 무관하다. 아무리 외형적 소속이 정통적이라 할지라도 참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지 못할 수도 있고 갈릴리나 가버나움에나 나사렛에 사는 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가 있는 것처럼 이 소속이 중요한 것이다.
이 소속은 진리와 영감으로 된 소속이니 이 소속에 대해 분명히 심판이 올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자기가 바른 소속에 있는 것 같으나 그 날에 그리스도가 심판주로 오실 때에는 바른 소속이 아닌 자는 그 소속이 밝혀지게 된다.
※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 대제사장들 중에는 나사렛 예수께(베다니, 갈릴리) 소속된 자들도 있다.
6) 파멸적(破滅的) 파괴적(破壞的) 심판 혹은 세상을 완전심판.(계 20:11)
이 세상이란 물질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물질계란 물질계는 시종점에 있어서 人間이 과학적으로 증명을 한다고 하나 그러나 人間의 과학적 지식은 하나님의 신비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능가하지도 못한다. 人間들이 과학적인 지식으로 물질계의 시작이 수십 억만 년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 물질계가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로 수십 억만 년 전부터 있는 것인가? 이 물질계가 미래적으로 수십 억만 년을 더 존재하리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고 있다.
단순하게 과학적인 일반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평가하는 자들은 이 물질계가 존재하는 원인이나 동기나 목적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한다. 다만 그들이 안다는 것은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 기존적인 존재성을 근거로 해서 이 물질계는 과거적으로 얼마나 오래됐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고 또 이것을 보아서 미래적으로 얼마나 오래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물질의 존재 원인이나 동기나 목적을 뚜렷이 교시했다. 성경의 교시에 의하면 물질의 존재는 우리 인간의 구원 때문이다. 그런고로 인간이 없는 세계에서는 그렇게 장기간 동안 물질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고 또 인간이 끝난 이후에 인간이 없는 세계에는 물질이 더 이상 존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간구원을 위해 있던 물질이니 인간의 구원사역이 다 끝나고 나면 물질은 이제 필요 없으니 완전히 심판하고 말 것이다.
이 심판은 물질은 인격자가 아닌 고로 이 물질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선행이나 악행을 해서 인간처럼 선악 간에 심판을 받아 그 물질도 천국 가고 지옥 가는 이런 심판이 아니고 이 물질계의 심판이라 함은 더 이상 물질이 필요가 없으니 완전히 파멸 당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인간 생각으로는 우리 인간이 건설해놓은 물질, 꾸며 놓은 물질, 소원하던 이 물질이 영원히 보존될 것처럼 보이나 '하늘과 땅이 간데없더라' 한 것처럼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다. 여기 땅과 하늘이라는 말은 전 물질계를 총칭해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때는 이미 하나님의 제 1 목적물로 지음 받은 성도들이 부활하여 신령체로 변했기 때문이다. 물질을 통하여 더 성장할 수는 없기 때문에 물질계는 여기서 끝나는 것을 말한다.
※ 구원이라는 말을 국문학적 사전학적으로 깨달으려고 하면 하나도 깨닫지 못한다. 그렇게만 알고 가면 전부 다 심판 받을 것이다. 심판거리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지고 예배당을 지으면 몇 가지가 건설이 되나? 눈에 보이는 건설, 이면적 자기 이력 건설 두 가지다.
보이는 것 위주는 외식이다. 가견적인 것은 전부 다 심판거리다. 없어진다는 것이 아닌 수치요 무안이다. 가견적인 것은 재료와 질은 가치 평가가 나오지만 불가견적인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영웅심으로 했어도. 사람들은 누가 크게 높이 지었느냐에 신경을 쓴다. 주객이 비뚤어지면 바꾸어지는 것이다.
예수와 바리새인들이 대립이 된 것은 목적과 위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간구하는 목적은 육적인 위주로 이스라엘 회복이다. 예수님이 이들의 육의 간구를 들어주었더라면 왕으로 모셨을 것이다. 그들의 대상은 하나님, 그러나 목적 위주 이탈이다. 이 세상은 자기 패거리 많으면 보수고 정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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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